빠띠삼비다막가(Patisambhidamagga)

빤냐박가(Pannavaggo) - 3. 명료한 앎에 관한 논의

실론섬 2014. 9. 12. 12:34

3. 명료한 앎에 관한 논의 (abhisamayakatha)

 

1. '명료한 앎(現觀.현관)'이라 할 때 어떻게 명료하게 아는가? 

마음으로 명료하게 안다. 

만약에 마음으로 명료하게 안다면 그렇다면 무지한 자가 명료하게 아는가? 

무지한 자는 명료하게 알지 못한다. 지혜로써 명료하게 안다. 

만약 지혜로서 명료하게 안다면 그렇다면 무심한 상태로 명료하게 아는가? 

무심으로 명료하게 알지 못한다. 마음(心)과 지혜로써 명료하게 안다. 

만약 마음과 지헤로써 명료하게 안다면 그렇다면 감각적 쾌락의 영역에 속한 마음과 지혜로써 명료하게 아는가? 

감각적 쾌락의 영역에 속한 마음과 지혜로써 명료하게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물질적 현상의 영역에 속한 마음과 지혜로써 명료하게 아는가? 

물질적 현상의 영역에 속한 마음과 지혜로써 명료하게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물질적 현상을 지니지 않은 마음과 지혜로써 명료하게 아는가? 

물질적 현상을 지니지 않은 마음과 지혜로써 명료하게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스스로 지은 업에 의한 마음과 지혜로써 명료하게 아는가? 

스스로 지은 업에 의한 마음과 지혜로써 명료하게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리에 따르는 마음과 지혜로써 명료하게 아는가? 

진리에 따르는 마음과 지혜로써 명료하게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과거에 대한 마음과 지혜로써 명료하게 아는가? 

과거에 대한 마음과 지혜로써 명료하게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미래에 대한 마음과 지혜로써 명료하게 아는가? 

미래에 대한 마음과 지혜로써 명료하게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세간에 속한 마음과 지혜로써 명료하게 아는가? 

현재의 세간에 속한 마음과 지혜로써 명료하게 알지 못한다. 출세간에 들어선 순간 현재의 마음과 지혜로써 명료하게 안다.

 

2. [출세간에 나아가는(道) 순간 현재의 마음과 지혜로써 명료하게 안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인가?

출세간에 나아가는 순간 발생한 탁월한 마음(增上心 증상심)은 지혜의 원인이며 조건이다. 그것에 연결된 마음은 소멸을 영역으로 한다. 견해에 있어서 탁월함의 지혜는 마음의 원인이며 조건이다. 그것에 연결된 지혜는 소멸을 영역으로 한다. 이와 같이 출세간에 나아가는 순간 현재의 마음과 지혜로써 명료하게 안다.

 

3-1. 왜 이것만으로 명료하게 아는가? 

실로 아니다. 출세간에 나아가는 순간 바른 견해는 봄(見)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바른 사유는 마음쏟음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바른 말은 받아들임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바른 행위는 일어남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바른 삶은 청정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바른 정진은 정근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바른 마음지킴(챙김.새김)은 확립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바른 삼매는 산란하지 않음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마음지킴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염각지.念覺支)는 확립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택법각지.擇法覺支)는 고찰(簡擇.간택)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정진각지.精進覺支)는 정근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기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희각지.喜覺支)는 두루함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경안각지.輕安覺支)는 평안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정각지.定覺支)는 산란하지 않음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사각지.捨覺支)는 돌이켜 관찰함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믿음의 힘은 미음없음에 대해 동요하지 않음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정진의 힘은 게으름에 대해 동요하지 않음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마음챙김의 힘은 부주의에 대해 동요하지 않음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삼매의 힘은 들뜸에 대해 동요하지 않음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혜의 힘은 무명에 대해 동요하지 않음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믿음의 근은 확신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정진의 근은 정근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마음지킴의 근은 확립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삼매의 근은 산란하지 않음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혜의 근은 봄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탁월함의 의미에서 근에 의한 명료한 앎이며, 동요하지 않음의 의미에서 힘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나감의 의미에서 깨달음의 요소에 의한 명료한 앎이며, 원인의 의미에서 길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확립의 의미에서 마음지킴의 확립에 의한 명료한 앎이며, 노력의 의미에서 바른 노력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3-2. 성취(신통)의 의미에서 신통의 요소에 의한 명료한 앎이며, 여실함의 의미에서 진리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산란하지 않음의 의미에서 사마타에 의한 명료한 앎이며, 따라가며 보는 법의 의미에서 위빠싸나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한 맛의 의미에서 사마타와 위빠싸나에 의한 명료한 앎이며, 어긋나지 않음의 의미에서 작을 이룸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지킴의 의미에서 계의 청정은 명료한 앎이며, 산란하지 않음의 의미에서 마음의 청정은 명료한 앎이며, 봄의 의미에서 견해의 청정은 명료한 앎이다. 벗어남의 의미에서 해탈은 명료한 앎이며, 단절의 의미에서 다해 없어짐에 관한 지혜는 명료한 앎이다. 그침의 의미에서 일어남을 여읜 지혜는 명료한 앎이다. 바램은 근본의 의미에서 명료한 앎이며, 마음냄은 일어남의 의미에서 명료한 앎이다. 닿음은 모음의 의미에서 명료한 앎이며, 느낌은 결합의 의미에서 명료한 앎이다. 삼매는 직접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명료한 앎이며, 마음지킴은 탁월함의 의미에서 명료한 앎이다. 혜는 그것의 위라는 의미에서 명료한 앎이며, 해탈은 견고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명료한 앎이다. 죽지 않음에 도달한 열반은 끝의 의미에서 명료한 앎이다.    

 

4. 왜 이것만이 명료한 앎인가? 

아니다. 흐름에 나아가는(예류도) 순간 바른 견해는 봄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흐름에 들어선 순간 ... 한번 돌아옴에 나아가는 순간 ... 한번 돌아옴에 들어선 순간 ··· 돌아오지 않음에 나아가는 순간 ··· 돌아오지 않음에 들어선 순간 ··· 아라한에 나아가는 순간 ··· 바른 견해는 봄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죽지 않음에 도달한 열반은 끝의 의미에서 명료한 앎이다. 

왜 이것만이 명료한 앎인가? 

아니다. 흐름에 들어선(예류과)순간 바른 견해 는 봄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 내지 ··· 그침의 의미에서 일어남을 여읜 지혜는 명료한 앎이다. 바램은 근본의 의미에서 명료한 앎이다 ··· 내지 ··· 죽지 않음에 도달한 열반은 끝의 의미에서 명료한 앎이다. 
왜 이것만이 명료한 앎인가?

아니다. 한번 돌아옴에 나아가는(일래도)순간 ··· 내지 ··· 한번 돌아옴에 들어선(일래과)순간, 돌아오지 않음에 나아가는(불환도)순간, 돌아오지 않음에 들어선(불환과)순간, 아라한에 나아가는(아라한도)순간, 아라한에 들어선(아라한과) 순간 바른 견해는 봄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바른 사유는 마음쏟음에 의한 명료한 앎이다 ··· 내지 ··· 그침의 의미에서 일어남을 여읜 지혜는 명료한 앎이다. 바램은 근본의 의미에서 명료한 앎이다...내지...죽지 않음에 도달한 열반은 끝의 의미에서 명료한 앎이다.이와 같이 과거의 번뇌를 끊고 미래의 번뇌를 끊고 현재의 번뇌를 끊는다.   


5. '과거의 번뇌를 끊는다'할 때, 만약 과거의 번뇌를 끊는다면 그렇다면 제거된 것을 제거하고, 멸한 것을 멸하고, 사라진 것을 사라지게 하고, 소멸한 것을 소멸케 하는 것이다. 과거가 있지 않은데 그것을 끊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과거의 번뇌를 끊을 수 없다.
'미래의 번뇌를 끊는다'할 때, 만약 미래의 번뇌를 끊는다면 그렇다면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을 끊고, 아직 생성되지 않은 것을 끊고, 발생하지 않은 것을 끊고, 드러나지 않은 것을 끊고, 미래가 아직 있지 않은데 그것을 끊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미래의 번뇌를 끊을 수 없다.
'현재의 번뇌를 끊는다'고 할 때, 만약 현재의 번뇌를 끊는다면 그렇다면 탐욕을 지닌 자는 탐냄을 끊고, 성난 마음을 지닌 자는 성냄을 끊고, 어리석음을 지닌 자는 어리석음을 끊고, 매인자는 교만을 끊고, 끄달리는 자는 삿된 견해를 끊고, 산란한 자는 그러한 잠재적 성향을 끊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검고 흰 여러 법이 함께 생겨나고 길의 닦음이 오염된다는 것은 과거의 번뇌를 끊지 못하며, 미래의 번뇌를 끊지 못하며, 현재의 번뇌를 끊지 못한다는 것이다. 


6-1. 과거의 번뇌를 끊지 못하며, 미래의 번뇌를 끊지 못하며, 현재의 번뇌를 끊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나아감(道)에 의한 닦음도 없고, 성취(과)에 대한 겪음을 통한 앎도 없고, 번뇌의 끊음도 없고, 법에 대한 명료한 앎도 없지 않은가?

아니다. 나아감의 닦음도 있고, 성취에 대한 겪음을 통한 앎도 있고, 번뇌의 끊음도 있고, 법에 대한 명료한 앎도 있다. 어떻게 해서인가? 비유하자면 이와 같다. 열매가 생기지 않은 어린 나무가 있어 어떠한 사람이 그 뿌리를 절단하면 그 나무의 생기지 않은 열매는 생기 않은 채 그대로 생겨나지 않으며, 생성되지 않은채 생성되지 않으며 발생하지 않은채 발생하지 않으며 드러나지 않은채 드러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일어남(生)이 원인이 되고, 일어남이 조건이 되어 모든 번뇌가 발생하지만, 일어남의 잘못됨을 보고 나면 일어나지 않음으로 마음이 약진한다.  


6-2. 일어나지 않음으로의 마음의 약진으로 인해, 일어남을 조건으로 발생할 여러 번뇌가 생겨나지 않은 채 그대로 생겨나지 않으며, 생성되지 않은 채 생성되지 않으며, 발생하지 않은채 발생하지 않으며, 드러나지 않은 채 드러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원인이 소멸함으로 괴로움이 멸한다. 이어짐은 원인이며 드러난 모습은 원인이다. 지속하는 힘이 원인이 되고 지속하는 힘이 조건이 되어 여러 번뇌가 발생하지만, 지속하는 힘의 잘모됨을 보고 나면 지속하는 힘의 여읨으로 마음이 약진한다. 지속하는 힘의 여읨으로 마음이 약진함으로 인해 지속하는 힘을 조건하여 발생할 여러 번뇌는 생겨나지 않은채 그래도 생겨나지 않으며, 생성되지 않은채 생성되지 않으며, 발생하지 않은채 발생하지 않으며, 드러나지 않은 채 드러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원인이 소멸함으로 괴로움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나아감에 의한 닦음이 있고, 성취에 대한 겪음을 통한 앎이 있고, 번뇌의 끊음이 있고, 법에 대한 겪음을 통한 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