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띠삼비다막가(Patisambhidamagga)

빤냐박가(Pannavaggo) - 8. 마음새김의 확립에 관한 논의(satipatthanakatha)

실론섬 2014. 9. 12. 20:46

8. 마음새김의 확립에 관한 논의(satipatthanakatha)

 

1.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네 가지 마음챙김(마음확립. 마음새김)의 확립이 있다. 넷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한 비구가 있어,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atapi)과 알아차림(sampajano)과 마음새김(satima)을 지닌 비구는,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식별할 수 있다. 느낌에 대해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새김을 지닌 비구는,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식별할 수 있다. 마음에 대해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새김을 지닌 비구는,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식별할 수 있다. 법에 대해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새김을 지닌 비구는,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식별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다.

주)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사념처. cattaro satipatthana)'이란 구체적으로 몸(身). 느낌(受). 마음(心). 법 등에 대해 '마음챙김을 확고히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들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은 '들숨과 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입출념식)'의 수행법과 엮이어 설명되곤 하며, 초기불교 이래로 불교의 실천법에 있어 중심축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satipatthana'란 'sati'와 'patthana'의 합성어이다. 이들 각각의 의미를 분석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sati'란 '알아차림'등으로 번역되는 말로서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 번째 의미는 기억이나 회상이고 두 번째 의미는 '알아차림' 등이다. '기억'이란 말이 이미 경험하고 개념적으로 고정된 사실에 대한 마음의 작용이라면, 두 번째 '알아차림' 혹은 '정신차림'은 현재적인 사물을 통한 마음집중의 상태를 나타낸다. 그런데 본 텍스트에서 이들 두 가지 의미 중에서 대체적으로 두 번째 의미를 취한다. 한편'patthana'란 다시 'pa'와 'thana'의 합성어인데 'pa'는 '앞으로'의 의미를 지닌 접두어이고 'thana'란 '장소''지점'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pattana'라는 말은 '앞으로 나아가는 곳' 혹은 '이끌어 내는 곳'으로 번역될 수 있겠다. 따라서 합성어로서 'satipatthana'라는 말의 일차적인 의미르르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하면 '마음챙김의 시작점'이 된다. 즉 한역어의 사념처(四念處)에서 '처(處)'에 해당하는 원어의 정확한 의미는 '시작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patthana'는 'sati'와 결합하여 합성어로 쓰일 때에는 '확립(setting up)'의 의미를 나타내는 경우가 더 많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확고한 마음챙김' 혹은 '마음챙김의 확립' 으로 변역할 수 있다.이러한 '마음챙김의 확립'이라는 말에 대해 PsA(p.298)에서는 'pathana'란 확고히 선다는 것이며, 확립한다는 것이며, 대상을 향해 튀어 오르고 돌진하여 나아간다는 뜻이다. sati 란 곧 pathana 이며 satipathana 이다. ... 의지하는 바(대상)의 힘에 의해 더욱 더 그러한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는 것이 마음챙김의 확립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본 문장에서 '식별할 수 있다'의 원어로 제시된 'vinneyya'는 '식별하다''의식하다'라고 하는 기본적 의미를 지닌다. 한편 본 문장의 원형적 전거라고 할 수 있는 Mahasatipatthana-Suttanta등에는 이 대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idha bhikkhu kaye kayanupassi viharati atapi sampajano satima vineyya loke abhijjhadomanassam..'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본 텍스트에서 'vinneyya(식별하다)'로 나온 부분이 Mahasatipatthana Suttanta 등에는 'vineyya'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vineyya는 '제거하다. 벗어나다. 포기하다'라고 하는 의미를 지녀 vinneyya 와는 전혀 다른 말이다. 따라서 이 문장에 대한 번역도 "여기에 한 비구가 있어,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비구는,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날 수 있다...'이 되거나, "

여기에 한 비구가 있어,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비구는, 세간에 관련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가 되어 본 텍스트 내용과 완전히 달라진다. 이 부분은 차후 좀더 세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2-1. [몸에 대해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인가? 여기에 어떠한 이가 있어, 흙(地)으로 이루어진 몸을 항상하는 것이 아닌 무상으로 따라가며 본다. 즐거움이 아닌 괴로움으로 따라가며 본다. 내가 아닌 무아로 따라가며 본다. 싫어하여 떠나 즐거워하지 않는다. 탐냄을 떠나 탐내지 않는다. 소멸하여 일으키지 않는다. 버리어 취하지 않는다. 무상으로 따라가며 보아 항상됨에 대한지각을 끊는다. 괴로움으로 따라가며 보아 즐거움의 지각을 끊는다. 무아로 따라가며 보아 나라는 지각을 끊는다. 싫어하여 떠나 즐거워함을 끊는다. 탐냄을 떠나 탐냄을 끊는다. 소멸하여 일어남을 끊는다. 버리어 취착을 끊는다. 이러한 일곱의 모습에 의해 몸을 따라가며 본다. 몸이란 마음챙김을 확립하는 것이되, 마음챙김 자체는 아니다. 마음챙김이란 확립이며, 이것이 곧 마음챙김이다. 그러한 마음챙김과 그러한 지혜에 의해 그러한 몸을 따라가며 본다. 그러므로 말한다. [몸에 대해 몸을 따라가며 보는 것은 마음챙김의 확립(念處)에 의한 닦음이다]고.

 

2-2. '닦음'이라 할 때 닦음에 넷이 있다. 거기에서 생겨난 제법의 어긋나지 않음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 근의 한 맛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 그것으로부터 생겨난 정진의 촉진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 익힘(習.습)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이다.

 

여기에 어떠한 이가 있어, 물로 이루어진 몸, 불로 이루어진 몸, 바람으로 이루어진 몸, 머리카락으로 이루어진 몸, 털로 이루어진 몸, 피부로 이루어진 몸, 살갗으로 이루어진 몸, 살로 이루어진 몸, 피로 이루어진 몸, 힘줄로 이루어진 몸, 뼈로 이루어진 몸, 골수로 이루어진 몸을 항상하는 것이 아닌 무상으로 따라가며 본다. 즐거움이 아닌 괴로움으로 따라가며 본다. 내가 아닌 무아로 따라가며 본다. 싫어하여 떠나 즐거워하지 않는다. 탐냄을 떠나 탐내지 않는다. 소멸하여 일으키지 않는다. 버리어 취하지 않는다. 무상으로 따라가며 보아 항상됨에 대한 지각을 끊는다. 괴로움으로 따라가며 보아 즐거움의 지각을 끊는다. 무아로 따라가며 보아 나라는 지각을 끊는다. 싫어하여 떠나 즐거워함을 끊는다. 탐냄을 떠나 탐냄을 끊는다. 소멸하여 일어남을 끊는다. 버리어 취착을 끊는다. 이러한 일곱의 모습에 의해 몸을 따라가며 본다. 몸이란 마음챙김을 확립하는 것이되, 마음챙김 자체는 아니다. 마음챙김이란 확립이며, 이것이 곧 마음챙김이다. 그러한 마음챙김과 그러한 지혜에 의해 그러한 몸을 따라가며 본다. 그러므로 말한다. [몸에 대해 몸을 따라가며 보는 것은 마음챙김의 확립(念處)에 의한 닦음이다]고. '닦음'에 넷이 있다. 거기에서 생겨난 제법의 어긋나지 않음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 근의 한 맛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 그것으로부터 생겨난 정진의 촉진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 익힘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이 있다. 이와 같이 몸에 대해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3. [느낌(受)에 대해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인가? 여기에  어떠한 이가 있어, 즐거운 느낌을 항상하는 것이 아닌 무상으로 따라가며 본다. 즐거움이 아닌 괴로움으로 따라가며 본다. 내가 아닌 무아로 따라가며 본다. 싫어하여 떠나 즐거워하지 않는다. 탐냄을 떠나 탐내지 않는다. 소멸하여 일으키지 않는다. 버리어 취하지 않는다. 무상으로 따라가며 보아 항상됨에 대한지각을 끊는다. 괴로움으로 따라가며 보아 즐거움의 지각을 끊는다. 무아로 따라가며 보아 나라는 지각을 끊는다. 싫어하여 떠나 즐거워함을 끊는다. 탐냄을 떠나 탐냄을 끊는다. 소멸하여 일어남을 끊는다. 버리어 취착을 끊는다. 이러한 일곱의 모습에 의해 느낌을 따라가며 본다. 느낌이란 마음챙김을 확립하는 것이되, 마음챙김은 아니다. 마음챙김이란 확립이며 이것이 곧 마음챙김이다. 그러한 마음챙김과 그러한 지혜에 의한 그러한 느낌을 따라가며 본다. 그러므로 말한다. [느낌에 대해 느낌'을 따라가며 보는 것은 마음챙김의 확립(念處)에 의한 닦음이다]고. 

 

'닦음'이라고 할 때 닦음에 넷이 있다. 거기에서 생겨난 제법의 어긋나지 않음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 근의 한 맛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 그것으로부터 생겨난 정진의 촉진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 익힘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이 있다. 여기에 어떤 이가 있어, 괴로운 느낌을, 즐거운 느낌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눈에 의한 닿음으로부터 생겨난 느낌을, 귀에 의한 닿음으로부터 생겨난 느낌을, 코에 의한 닿음으로부터 생겨난 느낌을 항상하는 것이 아닌 무상으로 따라가며 본다. 즐거움이 아닌 괴로움으로 따라가며 본다. 내가 아닌 무아로 따라가며 본다. 싫어하여 떠나 즐거워하지 않는다. 탐냄을 떠나 탐내지 않는다. 소멸하여 일으키지 않는다. 버리어 취하지 않는다. 무상으로 따라가며 보아 항상됨에 대한지각을 끊는다. 괴로움으로 따라가며 보아 즐거움의 지각을 끊는다. 무아로 따라가며 보아 나라는 지각을 끊는다. 싫어하여 떠나 즐거워함을 끊는다. 탐냄을 떠나 탐냄을 끊는다. 소멸하여 일어남을 끊는다. 버리어 취착을 끊는다. 이러한 일곱의 모습에 의해 느낌을 따라가며 본다. 느낌이란 마음챙김을 확립하는 것이다. 마음챙김 그 자체는 아니다. 마음챙김이란 확립이며 이것이 곧 마음챙김이다. 그러한 마음챙김과 그러한 지혜에 의해 그러한 느낌을 따라가며 본다. 그러므로 말한다. [느낌에 대해 느낌을 따라가며 보는 것은 마음챙김의 확립에 의한 닦음이다]고. '닦음'에 넷이 있다. 거기에서 생겨난 제법의 어긋나지 않음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 근의 한 맛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 그것으로부터 생겨난 정진의 촉진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 익힘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이 있다. 이와 같이 느낌에 대해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4-1. [마음에 대해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본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인가? 여기에 어떤 이가 있어, 탐냄을 지닌 마음을 항상하는 것이 아닌 무상으로 따라가며 본다. 즐거움이 아닌 괴로움으로 따라가며 본다. 내가 아닌 무아로 따라가며 본다. 싫어하여 떠나 즐거워하지 않는다. 탐냄을 떠나 탐내지 않는다. 소멸하여 일으키지 않는다. 버리어 취하지 않는다. 무상으로 따라가며 보아 항상됨에 대한지각을 끊는다. 괴로움으로 따라가며 보아 즐거움의 지각을 끊는다. 무아로 따라가며 보아 나라는 지각을 끊는다. 싫어하여 떠나 즐거워함을 끊는다. 탐냄을 떠나 탐냄을 끊는다. 소멸하여 일어남을 끊는다. 버리어 취하지 않는다. 무상으로 따라가며 보아 항상됨의 지각을 끊는다. 괴로움으로 따라가며 보아 즐거움의 지각을 끊는다. 무아로 따라가며 보아 나라는 지각을 끊는다. 싫어하여 떠나 즐거워함을 끊는다. 탐냄을 떠나 탐냄을 끊는다. 소멸하여 일어남을 끊는다. 버리어 취착을 끊는다. 이러한 일곱 가지 모습에 의해 마음을 따라가며 본다. 마음이란 마음챙김을 확립하는 것이되, 마음챙김은 아니다. 마음챙김이란 확립이며 이것이 곧 마음챙김이다. 그러한 마음챙김과 그러한 지혜에 의한 그러한 마음을 따라가며 본다. 그러므로 말한다. [마음에 대해 마음'을 따라가며 보는 것은 마음챙김의 확립(念處)에 의한 닦음이다]고. '닦음'에 넷이 있다. 거기에서 생겨난 제법의 어긋나지 않음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 근의 한 맛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 그것으로부터 생겨난 정진의 촉진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 익힘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이 있다. 이와 같이 마음에 대해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4-2. 여기에 어떠한 이가 있어, 탐냄을 떠난 마음을, 성냄을 지닌 마음을, 성냄을 떠난 마음을, 어리석음을 지닌 마음을, 어리석음을 떠난 마음을, 집중된 마음을, 산란한 마음을, 광대한 마음을, 광대하지 않은 마음을, 위가 있는 마음을, 위 없는 마음을, 정을 얻은 마음을, 정을 얻지 못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을,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눈에 의한 식별, 귀에 의한 식별, 코에 의한 식별, 혀에 의한 식별, 몸에 의한 식별, 마음에 의한 식별을 항상하는 것이 아닌 무상으로 따라가며 본다. 즐거움이 아닌 괴로움으로 따라가며 본다. 내가 아닌 무아로 따라가며 본다. 싫어하여 떠나 즐거워하지 않는다. 탐냄을 떠나 탐내지 않는다. 소멸하여 일으키지 않는다. 버리어 취하지 않는다.  무상으로 따라가며 보아 항상됨에 대한 지각을 끊는다. 괴로움으로 따라가며 보아 즐거움의 지각을 끊는다. 무아로 따라가며 보아 나라는 지각을 끊는다. 싫어하여 떠나 즐거워함을 끊는다. 탐냄을 떠나 탐냄을 끊는다. 소멸하여 일어남을 끊는다. 버리어 취착을 끊는다. 이러한 일곱 모습에 의해 마음을 따라가며 본다. 마음이란 마음챙김을 확립하는 것이되, 마음챙김 자체는 아니다. 마음챙김이란 확립이며이것 곧 마음챙김이다. 그러한 마음챙김과 그러한 지혜에 의해 그러한 마음을 따라가며 본다. 그러므로 말한다. [마음에 대해 마음을 따라가며 보는 것은 마음챙김의 확립에 의한 닦음이다]고. 닦음이라 할 때, 닦음에 닦음'에 넷이 있다. 거기에서 생겨난 제법의 어긋나지 않음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 근의 한 맛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 그것으로부터 생겨난 정진의 촉진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 익힘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이 있다. 이와 같이 마음에 대해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5. [법에 대해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인가? 여기에 어떠한 이가 있어, 몸을 남겨 두고, 느낌을 남겨 두고, 마음을 남겨 두고, 거기에서 제외된 법에 대해 항상하는 것이 아닌 무상으로 따라가며 본다. 즐거움이 아닌 괴로움으로 따라가며 본다. 내가 아닌 무아로 따라가며 본다. 싫어하여 떠나 즐거워하지 않는다. 탐냄을 떠나 탐내지 않는다. 소멸하여 일으키지 않는다. 버리어 취하지 않는다. 무상으로 따라가며 보아 항상됨에 대한 지각을 끊는다. 괴로움으로 따라가며 보아 즐거움의 지각을 끊는다, 무아로 따라가며 보아 나라는 지각을 끊는다. 싫어하 떠나 즐거워함을 끊는다. 탐냄을 떠나 탐냄을 끊는다. 소멸하여 일어남을 끊는다. 버리어 취착을 끊는다. 이러한 일곱의 모습에 의해 법을 따라겨 본다. 법이란 마음챙기을 확립하는 것이되, 마음챙김 자체는 아니다. 마음챙김이란 확립이며 이것이 곧 마음챙김이다. 그러한 마음챙김과 그러한 지혜에 의해 그러한 법을 따라가며 본다. 그러므로 말한다. [법에 대해 법을 따라가며 보는 것은 마음챙김의 확립에 의한 닦음이다]고. 닦음이라 할 때, 닦음에 닦음'에 넷이 있다. 거기에서 생겨난 제법의 어긋나지 않음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 근의 한 맛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 그것으로부터 생겨난 정진의 촉진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 익힘이라는 도리에 의한 닦음이 있다. 이와 같이 법에 대해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