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사이비 재가 불자가 불교를 망친다 - 세월호 사건에 덧붙여서

실론섬 2014. 10. 4. 22:06

불교는 업을 말하고 윤회를 말한다. 그것을 관통하는 것은 연기이다. 연기란 조건발생적이라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원인을 소멸하면 결과도 소멸하고, 이런 원인에서 저런 원인으로 바꿀 수 있다면 결과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업의 논리가 숙명론이나 운명론 또는 비관론이 아닌 것은 바로 조건발생적이라는 것에 있다. 그래서 붓다는 네 부류의 인간들로 살아가는 모습을 말씀하셨다. 즉 어둠에서 어둠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빛에서 어둠으로, 빛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중생들의 모습을 잘 알아듣도록 설법하고 계신다. 그리고 업은 철저하게 개인이 짓고 개인이 받는다. 제 삼자나 타인에게 내 업을 돌리거나 다른 사람이 업을 받도록 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래서 자업자득이라고 한다. 


윤회란 현재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겁 수십억겁의 과거생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고 다시 수십 수백억겁의 미래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윤회는 현재의 삶이 전부라든가 죽으면 끝이라는 단멸론이나 회의론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리고 중생들에게 늘 기회를 주고 있다. 어둠에서 빛으로, 빛에서 빛으로 갈 수 있도록 문이 활짝 열어놓고 있다. 


세상을 살다보면 갖가지 죽음과 마주하게 된다. 물론 우리들 죽음도 어떤 모습일지는 누구도 모른다. 막상 닥쳐봐야 아는 것이고 미쳐 준비되지 못한 죽음을 맞이할 때는 울부짖고 몸부림친다. 그래서 정말로 불교를 배우고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죽음에 대한 공부를 빠트려서는 안된다. 즉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현재라는 시간의 삶이란 억겁 수십억겁 수백억 겁의 윤회를 거듭해 왔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유전하고 윤회할 존재들에게는 80년 평생이란 찰나의 시간보다 짧은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업보에 따라서 다른 삶을 받고 또 죽는다. 윤회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죽음과 삶이 찰나적으로 일어나고 소멸해가는 것이다.


불자들이라면 윤회를 믿고 업보를 믿는다고 천명하고 툭하면 이걸 자랑스럽게 내세운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전혀 불자라고 볼 수 없는 행동을 서슴치 않고 한다. 어떤 사건이 내게 닥치면 자신의 업보라고 생각하고 돌이켜 살펴보기는 커녕 남의 탓 하기가 바쁘다. 자신은 하나도 잘못이 없는데 모두다 남의 탓이라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을 되돌아 보자. 업보의 입장에서 보면 그건 단 한마디로 말 할 수 있다. 즉 자업자득인 것이다. 다른 건 없다. 그런데도 타종교인도 아닌 업보를 믿고 윤회를 믿는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들이 모두다 남의 탓만 하고 마치 세월호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업보를 받을 일을 짖지도 않았는데 다른 사람이 그렇게 죽도록 만들었다는 일방적인 헛소리들을 하면서 그 어느 누구도 업보니 윤회니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평소에 그토록 잘난체 하든 사람들 어느 누구도 입을 닫아 버린다. 남의 비난과 눈치가 두려워서인지 아니면 업보나 윤회를 믿지 않는 것 중 하나일 것이다.


남의 비난이 두려워서 붓다의 가르침을 말하지 못하다면 이것은 불자도 아니다. 그토록 평소에 인터넷 공간에서 글 올리고 떠들던 그 용기는 어디로 사라지고 병신쪼다처럼 뒤에 숨어서 붓다의 얼굴에 똥물을 쳐 바르고 있으니 이건 불자가 절대로 아니다. 몰라서 말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불자가 아니다. 알고 짓는 죄보다 모르게 짓는 죄가 더 큰 것이 불교이다. 


초기불교를 신봉하는 남방권은 사건사고에 대해서 한국불자들처럼 저열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남의 탓을 하고 정권을 공격하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로 상대방을 비난하지 않는다. 모두다 스스로 지은 업보 탓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통곡을 하면서 몸부림 치지도 않는다. 윤회를 올바르게 믿기 때문이다. 


남방불교가 그나마 2000년 이상을 오늘처럼 청정하게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신행의 일치 때문이다. 머리속에 든 것하고 내 행동하고 가능하면 같게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불교 잘안다고 떠들어대도 머리속에 든 것 하고 내 행동하고 불일치하는 것이 많다면 악업만 늘려 갈 뿐이다. 진정한 불자라면 업보와 윤회를 똑바로 보고 그들의 희생을 안타까워 해야 한다. 정부의 시스템이나 유관단체들의 잘못이나 선장이나 항해사들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런데도 모두다 남의 탓만 하고 있다. 남의 일로 자신의 악업만 쌓아가는 어리석은 바보들일 뿐이다.


그토록 초기불교 신봉자라는 어느 블로거의 글을 보면서 그리고 불교개혁을 외치는 어느 불교 카페의 욕설로 뒤덮힌 글들을 보면서 재삼 한국불교가 망해가는 이유를 뼈저리게 느꼈다. 망하는 데에는 모두다 이유가 있다. 원인없는 결과는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개만도 못한 죽음이 널려 있다. 황당한 죽음도 많다. 병들어 고생고생하면서 가족들에게 평생 갚을 수 없는 빚만 남기고 가기도 하고, 참다 참다 못하여 동반자살도 한다. 하지만 세월호 희생자들은 그나마 많은 선업을 쌓고 다음생으로 갔다. 부모님들에게 넉넉한 보상금과 그리고 국가개조를 할 기회와 우리들 모두가 스스로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남기고 갔다. 결코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으니 이것 또한 업보의 결과이다.


월호 사건과 같은 시기에 발생한 말레이시자 항공의 두 차례에 걸친 사고로 가족을 잃은 네들란드 사람들이나 중국사람들과 죽은 자식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부모들을 봤을 때 참으로 착착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다. 그와 같은 부모 같지 않은 부모들에게 그 많은 돈을 남겨주고 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업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더우기 불자라고 스스로 천명하는 작자들이 업과 윤회를 내팽개친 모습들을 보면서 그들이 과연 불자일까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으면서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을 새삼 느꼈다.


엉터리 불자가 엉터리 불교 만드는 것이다. 이들이 붓다 이름을 팔고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 

승려들 탓 할 이유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