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진흙속의연꽃의 무지함을 지적하며

실론섬 2014. 10. 8. 21:19

최근에 진흙속의연꽃의 '태양이 어두운 허공을 비추듯' 보리수 이야기라는 글을 보았다. 마치 동물이 아무렇게나 배설물을 쏟아낸 듯한 긴 장문의 글에 앞뒤 내용도 맞지 않고 도대체 무엇을 주장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을 둘째치고라도 일단 잘못된 정보를 진짜인냥 알고 있을지 모를 불자들을 위해 그의 잘못을 지적해 본다.


우리가 불상 앞에서 예경 드리는 이유는 

잘 알듯이 불교는 복을 주거나 잘잘못을 가려 상벌을 내리는 절대 신이나 조물주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자들이 불상 앞에서 예경 올리는 것은 '그분의 위대함을 생각하고 그분의 삶을 닮고자 함'이다. 타종교의 절대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위니야(율장)에서만 볼 수 있다고?

오늘 모임에서 어떤 분이 하신 말씀이 갑자기 생각이 난다. "배움을 매를 맞아가면서 배우는 것과 책으로만 배우는 것이 있다. 당연히 매를 맞아 가면서 배우는게 올바른 것이다" 이 말은 연꽃의 글에서 100% 맞아 떨어진다. 책으로만 초기불교를 하면서도 마치 그 자신이 실제 초기불교 국가에서 초기불교를 접하거나 또는 그곳에서 공부를한냥 망발을 늘 한다. 그러니 글을 보면 전체가 엉터리이다. 불교가 연꽃의불교이지 결코 붓다의 불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연꽃의불교는 외도설 일뿐이다.


대승불교는 경전의 나열순서를 경장-율장-논장 순이지만 초기불교는 율장-경장-논장 순으로 나열한다. 당연히 경전 결집시에도 율장부터 시작해서 경장과 논장순으로 이어진다. 율장은 흔히들 계율에만 관련된 경전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 경장과 겹치는 부분이 많이 있다. 따라서 율장과 경장 속에 상호 중복되는 가르침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붓다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해 놓은 경전이다. 이것은 위니야에도 있지만 우다나(자설경.udana)라는 경전의 8품중에서 첫 번째 품에도 등장한다. 우다나는 5부 빠알리어 경전중 5부 꿋다카니까야(khuddaka nikaya) 의 15개 경전중에 3번째 경전이다. 이 경전의 첫번째 품(品)은 깨달음을 얻은 날의 초저녁 한밤중 그리고 새벽등으로 세 부분으로 나뉘어 붓다께서 정각에 이르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연꽃은 이 깨달음의 과정을 설명한 것이 위니야(율장)에만 있다고 헛소리를 하고 있다. 많은 수행승이나 학자들은 붓다의 보리수 아래서의 깨달음을 설명할 때 우다나 경을 인용하지 위나야를 인용하지 않는다. 연꽃은 위니야는 경전이고 우다나(자설경)은 경전이 아닌줄 알고 있는 것 같다.


연기가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 발생적 연기로 되어 있다고?

우선먼저 상호의존 즉 의존이라는 국어사전을 한번 살펴보자. "의존[依存]: 다른  기대어 생활하거나 존재함. 예문으로는 '부모의 경제력에 의존한다. 또는 나라 경제는 수출에 의존한다등등'의 말을 사용한다. 나아가 '상호의존이란 각각의 분업 단위가 서로 맺는 관계는 더욱 밀접해짐을 뜻하는 말이다'. 의존의 반대말은 독립이다. 무슨말이냐 하면 의존이란 뜻은 A 와 B 가 독립적인 개체로써 상호 연결관계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즉 A 가 없어도 B 는 존재할 수 있고 B 가 없어도 A 는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존재로써 상호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연기는 조건발생적이다. 흔히말해서 조건지워짐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원인 없이 결과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자의 홀로 독립하여 있을 수가 없다. 즉 조건이 있을 때 일어나고 조건이 변경되면 소멸하는 것이다. 사리뿟따가 친구에게 말한 갈대단에서 '두 개의 갈대단이 상호 의지하여 서 있을 수 있지만 어느 하나를 없애면 다른 갈대단도 쓰러진다'는 것은 조건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모든 것은 어떤 조건이 모여 잠시 그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 그 조건이 바뀌면 그 모양새도 바뀐다는 것이다. 


따라서 12연기를 이해할 때는 그것을 한 줄로 늘어 놓아서는 안된다. 하나의 원으로 생각하여야 하는 것이다. 각자가 독립하거나 의존하고 있는게 아니라 조건에 따라 그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어느 하나의 조건이 되면 일어나고 소멸되면 도미노처럼 소멸되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그래서 A를 연(緣)하여 B 가 일어나고 B 가 소멸하면 A 도 소멸한다고 한다. 또는 좀더 어려운 말로 攀緣(반연) 이라는 말도 사용한다. 반연이란  대경(對境)을 의지한다는 뜻이다. 마음이 제 혼자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마치 칡덩굴이 나무나 풀줄기가 없으면 감고 올라가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또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야 일어나는 것처럼 마음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대경(對境)을 의지하고 일어나니, 이런 경우에 칡덩굴은 나무나 풀을, 노인은 지팡이를, 마음은 대경을 반연 한다고 한다. 덧붙이자면 인연이라는 말을 한다. 이것은 인과 연이 합친 말이다. 말이 길어져서 설명을 모두다 못 드리겠지만 예를 들어서 우유가 버터가 될 때에는 우유가 버터가 될 어떤 조건이 주어주지 않으면 버터가 안된다. 이건 우유와 버터가 별개로 상호 의존하여 모양새가 바뀌거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 발생인 것이다.


12연기를 흔히들 순관과 역관으로 설명한다. 다음 게송은 일어남(순관)과 소멸함(역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난다.(조건발생)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함으로 저것이 소멸한다.(조건소멸)


불교에는 한 가지 주제를 놓고 여러가지 단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서 열반을 이야기할 때는 절대적 적정, 평화, 갈애가 소멸된 상태, 불사의 문을 열었다등등의 표현을 한다. 그럼 열반과 불사의 문을 열었다는 자구(字句)만 다르고 뜻은 같은가 아니면 뜻과 자구 둘다 다른가? 당연히 자구만 틀리고 뜻은 같다. 다시 말해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와  '이것이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같은 의미이다. 당연히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와 이것이 소멸함으로 저것이 소멸한다'는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연꽃은 다음과 같이 자구도 틀리고 의미도 틀리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걸 전혀 다른 의미로 이해한다면 아마도 지적능력의 문제일 것이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상호의존적 연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조건발생적 연기)


다시말해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와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는 것은 다시한번 강조하여 설명한 것이니 같은 말이다. 그런데 이 작자는 이걸 두개로 나누어서 저것이 있는 것과 저것이 생겨나는 것을 각각 별개의 문구로 착각을 하면서 망발을 하고 있다. 연꽃만의 불교이고 그러니 외도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퍼뜩 생각하면 상호의존과 조건발생이 같은 말인 것 같거나 햇갈릴 수도 있겠으나 연기를 설명할 때는 의존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조건따라 일어나고 조건따라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즉 상호조건적이지 상호의존적이지 않다. 무슨말인지 지혜있는 분들은 잘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으리라 믿는다.


경의 해설을 자기 멋대로 

이 작자의 특징은 경전 문구를 멋대로 해석해 놓고 나중에 경전 문구나 경전에 실려 있는 주해를 옮겨온다. 앞의 자신의 주장과 전혀 맞지를 않는다. 그런데도 그걸 모른다. 왜? 무지하고 무명에 휩쌓여 있고 '소설책 읽듯이 경전을 책으로만 읽고 매를 맞으며 실참수행을 안해봤기 때문이다. 이 작자가 글 말에 한 말이 가관이다. 앞에서 실컷 의존이니 조건발생이니 떠들어 놓고 한다는 말이 주해의 말을 빌려와서 "12연기의 연결고리는 조건 지어진 것이다" 라고 하고 있다. 이 작자의 말대로라면 12연기는 의존적이고 조건적인 것이다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아마도 무슨 말인지도 모른채 자기 흥에 겨워서 동물이 배설물 쏟아 내듯 쓰레기 같은 글들을 쓰기 때문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다. 뭐가 틀리고 옳은지를 판단할 줄 모르니 자기가 아는 범위내에서 멋대로 입만 벙긋대며 떠들어 대는 것이다. 정말 제대로 알고 있다면 단 한줄의 글도 제대로 쓰지 못할 것이다. 더우기 인도나 초기불교 국가등에서 실제 불교를 접하거나 공부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절대로 글을 함부로 쓰면 안된다. 그런데 이 작자는 마치 자신이 남방권 국가에서 살고 있거나 직접 체험한 것처럼 글을 쓰고 있다. 완전히 사기꾼에다가 거짓말쟁이 인것이다.


진흙속의 연꽃에게 써비스 팁을 줌

원래 남방불교권은 경전 나열 순서가 율장-경장-논장이라고 여러 글에서 밝혀 놓았다. 그걸 이제사 연꽃은 은근쓸쩍 애용하고 있다. 그나마 제대로 알았으니 다행이다.


그리고 한가지 덧붙여 써비스 팁을 주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작자는 현재 우리가 대하고 있는 알파펫의 빠알리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전혀 모른다. 그게 원래 빠알리어 문자로 알고 있고 때로는 스리랑카에서 문자화 했을 때 그때의 문자라고 착각하고 있다. 


흔히들 현재 우리들이 보고 있는 빠알리어 경전을 PTS(PALI TEXT SOCIETY)라고 한다. 이 말은 1864년에 영국인 리즈 데이비스를 중심을 설립한 '영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발간한 빠알리 경전이라는 의미이다. 원래 빠알리 경전은 문자가 없이 구두로 전승되어 오다가 1세기경에 스리랑카에서 섬에 살던 불교도인 싱할라족의 문자로 음사를 한다. 음사란 소리나는대로 옮긴다는 의미이다. 한문경전에도 수많은 음사어가 있다. 대표적으로 반야(般若)는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냐(प्रज्ञा prajñā) 또는 팔리어 빤냐(paññā)를 소리나는대로 한자로 음사한 것이다. 좀더 설명하자면 '사랑 합니다'를 영어 알파펫으로 음사하면 'SARANG HAPMIDA'라고 표기하는 식이다.


구두로 전승되던 빠알리어 경전은 스리랑카에서 싱할라족의 언어문자로 위와 같은 식으로 음사를 했던 것이다. 그것을 영국 식민지 시절 파견 공무원이었던 리즈 데이비드라는 분을 중심으로 하여 당시 스리랑카에 보존되어 있던 음사화된 빠알리 경전및 기타 싱할라족 문자로 씌여딘 여러 불교서적들을 세계인들에게 친숙한 로마자 알파펫과 특수문자를 이용하여 번역및 편집을 했던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대하는 빠알리어 문자이다. 이건 순전히 새로 만든 것이다. 여러분들이 베트남어를 보시면 알파펫 문자로 되어 있음을 알 것이다. 그건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어떤 프랑스 신부가 프랑스어 문자를 이용하여 베트남어 문자로 발명을 한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1) 빠알리어 삼장에 대한 자세한 구성표는 '빠알리어경전'이라는 곳에 올려져 있다.

2) 빨리 경전(성전)협회에 대한 글은 '초기불교(근본불교)이야기'에 올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