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법열반이 무엇인지 모르면 입을 다물면 된다.
현법열반론에 대해서는 두어번 그 개념과 의미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현법열반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지금 여기 이곳에서 열반을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현세에서 사람의 몸을 받았을 때 열심히 정진하여 열반을 획득하라는 의미이고 그리고 열반은 죽어서 얻거나 내세에서 얻거나 태어나기도 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렇게 미루거나 예약을 한채 방일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건 세살짜리 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교리이다.
그런데 범망경에 보면 현법열반론자를 외도로 붓다께서는 비난하고 있다. 이유는 단 하나이다. 자아가 열반을 획득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아를 말하는 불교에서 자아가 열반을 획득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외도라는 것이다. 따라서 같은 현법열반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자아를 앞세운 외도들의 현법열반론과 무상 고 무아 연기등을 봄으로써 획득하는 불교의 현법열반론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이것은 두 살짜리 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진흙속의연꽃은 계속하여 불교의 현법열반론과 행복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두고 마치 외도의 현법열반론이나 감각적 쾌락에 몰두하는 범부들과 같다는 식으로 비판을 하고 있다. 알고도 그러는 것인지 진짜로 몰라서 그러는 것인지는 몰라도 알고도 그런다면 거짓말쟁이고 위선자이니 지옥행이요, 모르고 그런다면 우둔함의 소치이니 이것 또한 악처에 태어날 일이다.
그는 더 나아가 "현법열반론은 사선정에도 해당된다는 것이다"라고 해괘한 망발을 서슴치 않고 있다. 논서에 보면 해탈의 종류를 수십가지로 구분하여 놓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불교는 8가지 해탈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초선 - 비상비비상처까지의 경지를 해탈이라고 말한다. 구차제정의 각 단계의 획득을 열반이라고 하지 않고 해탈이라고 한다. 해탈과 열반은 다르다. 예전에도 수없이 이 작자에게 질문을 했었다. 해탈과 열반이 어떻게 다른가 또는 같다면 어떻게 다른가? 라고. 왜냐하면 그의 과거글 속에는 '불교는 해탈이 궁극적 목표이고 해탈이 전부다'라고 엄청 떠들어놨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질문을 서너번 하고 난 이후에는 슬그머니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열반이다'라고 말을 바꾸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도 '현법열반이 사선정' 즉 선정의 단계에서 획득되는 경지가 '열반' 이라고 귀신 싸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고 있다. 한마디로 해탈과 열반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출세간적 정견과 세간적 정견이라고...
진흙속의연꽃의 글에 보면 '출세간적 정견(가르침)이란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등 부처님의 근본교리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세간적 정견(가르침)이란 업자성정견 즉 업이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를 말한다'라고 망발을 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우선 출세간적 정견이니 세간적 정견이니 하면서 정견을 두 가지로 나누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팔정도에서 말하는 올바른 정견을 한번 살펴보자(필요하다면 '스승님들의 가르침'에 가면 팔정도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게 올려져 있으니 참조바람)
팔정도의 첫번째 요소인 '올바른 견해(正見)'는 사물을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올바른 견해'는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올바른 견해'는 오온에 대한 집착에 통찰력을 적용해서 오온의 참된 속성을 이해하는 것 즉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 반성이며 자기 관찰이다. 또한 '올바른 견해'란 그것은 모든 인지할 수 있는 존재의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이해하는 것이다. 맛지마 니카야(Majjhima-nikaya)에 있는 9번째 경인 [삼마딧티 숫타(Sammaditthi-sutta)]를 살펴보면 '올바른 견해'를 얻는 방법을 설명하는 데는 16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줄일 수 있다.
1) 도덕적인 인과의 방법에 의한 설명
2) 사성제에 의한 설명
3) 음식에 의한 설명
4) 연기에 의한 설명
그 어디에도 세간적 정견이니 출세간의 정견이니 하는 말은 없다. 우리가 올바른 정견을 가지고 그대로 정진하여 나아가는 방향타로 삼는 것에 불과한다. 올바른 정견이 없는 진흙속의연꽃의 진면목이 제대로 드러난 대목이다.
천사의 경과 지옥에 대한 황당한 사견(蛇뱀사 見)
진흙속의연꽃은 맛지마 니까야의 천사경을 장황하게 인용하면서 '지옥은 실재한다'느니 '지금 불교철학하자는 건가" 등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있다. 그러면서 황당하게도 마지막으로 한다는 말이 '부처님이 지옥 이야기를 한 이유는' 라는 말을 하면서 '중생들에게 겁주기 위한 것일까?' 라고 스스로 반문하면서 경의 마지막 게송을 달아 놓았다. 쉽게말해서 어처구니가 없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하기사 그 자신은 무엇을 오판하고 실수했는지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토록 입을 잘 벌려대던 작자가 겁주기 위한 것일까? 해놓고 게송을 달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한심한 작태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게송에 대해서 구구절절 입을 벌려서 자신이 아는대로 떠벌리지 않았을까? 지옥이 없고 없고를 떠나서 일단 붓다의 가르침의 참 뜻을 살펴보자.
불교의 현실의 종교이고 현실을 토대로 한 가르침이다. 우리들 중생이 살아가는 현실이란 어떠한 세계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탐진치 삼독심과 번뇌등으로 뒤범벅인 깊은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이 우리들 탐진치 삼독심에서 나온 마음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마음의 정화와 안정 평온 없이는 그러한 현실에서 벗어날 일이 없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붓다는 설법의 곳곳에서 '나란 무엇인가? 나는 왜 괴로워해야 하는가?' 라고 묻는 것이다. 그리고 붓다는 세간사를 살아가는 중생들의 현실을 네 가지 고(苦)로 정형화 시켰다. 즉 생사병노(生死病老)가 그것이다. 모든 중생들은 무조건 이러한 고통을 걸머쥐고 살아가게 된다.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소위말하는 현실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네 가지 고통위에 세워진 세상이다.
하지만 중생들은 이러한 본질적 현실이라는 세계에 대하여 외면하려 든다. 모든 중생들은 이러한 네 가지 괴로움을 알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알수록 더더욱 외면하려 든다.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기에 차라리 잊어버리고 사는게 더 마음이 편한 것이다. 우리들 어느 누가 과연 생노병사를 매일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아마도 미쳐버리거나 우울증에 걸려 자살할 확율이 더 높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잊고 싶고 잊고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막상 눈 앞에 닥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괴로움의 현실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몸부림치고 울부짖게 된다.
경전은 이러한 냉혹한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라고 훈계하고 있는 것이다. 노인이나 병자나 죽은 사람 자체가 천사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보여 주고 있는 점에서 문자 그대로 천사인 것이다. 그러한 천사가 늘 우리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실하게 받아 들이지 않기에 범부들의 비극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냉혹한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여 이 근본적인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는 바로 이러한 근본적인 현실의 해결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르키는 종교이기도 하다.
이것이 경전의 참된 가르침이다. 그런데도 이 작자는 오히려 이 경전이 지옥의 실상을 말했으니 붓다께서 말했으니 그러한 지옥은 있다느니 자신이 아는 범위내에서 입만 나불대고 있다. 상식이 있는 불자라면 왜 굳이 지옥을 설명하면서 다른 악행을 범하는 수많은 예들도 있을텐데 생노병사를 끌어 와서 설명을 했을까? 하고 한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다. 다시말해서 경전은 지옥이 있다 없다는 것의 증명으로서가 가치가 있는게 아니라 생노병사라는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 진정된 의미의 가르침이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경전에 실려있는 내용을 설화(設話)라고 하지 실화(實話)라고 말하지 않는다. 본생담의 많은 이야기도 설화라고 하지 실화하고 하지 않는다. 불교 설화집이라고 별도의 책들도 있다.
마성스님과 강병균교수를 비난한 글을 보면서
불교는 지혜를 말한다. 그런 지혜란 관찰하고 꿰뚫어 통찰하여 보는 것을 말한다. 수박의 겉모습만 보고 줄이 있는 푸른과일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무지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왜냐하면 겉만 보고 속을 보질 못한 처지에서 수박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불교의 지혜란 명료한 앎(現觀.현관)을 말하는 것이다. 무지한 자는 명료하게 알지 못한다. 지혜로서 명료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지혜에는 많은 종류가 있고 각종 논서들은 지혜를 설명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러 지혜의 종류중에서 ,언어, 문자 표현등 말하는 의의를 잘 꿰뚫어 명료하게 아는 지혜'라는 것이 있다. 누군가 '아'라고 이야기 했는데 '어'라고 알아 듣는다든지 그렇게 이해한다면 이건 보통 곤란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사를 보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일들은 보통 자기멋대로, 자기생각대로, 자기가 아는 범위내에서, 자기만의 지적 한계안에서 상대방의 말을 듣고 해석하는데 기인하는게 보통이다. 그러기에 진실이 왜곡되고 전혀 다른 말로 번해 버리기도 한다.
붓다는 이런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엄중히 훈계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두 가지 법이 있다. 그것은 정법을 어지럽히고 사라지게 한다. 무엇이 둘인가? 단어와 문장들이 잘못 구성된 것과 뜻이 잘못 전달된 것이다." 라고.
진흙속의연꽃은 그의 글에서 말하길, 마성스님이나 강병균 교수는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는 회의론자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윤회와 내세를 부정한 글은 없다고 한다. 횡성수설인 것이다. 그는 강병균 교수의 글 중에서 '내세는 죽음 다음에 올 일이고 더디고 기약없는 일이다'라는 것을 내세에 대한 부정이나 윤회의 부정 또는 허무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이 작자야말로 외도이고 허무주의이고 숙명론자일 뿐이다. 왜냐하면 불교는 현재 여기 이곳에서의 실천행을 강조한다.열반은 현법열반을 이루는 것이지 죽고 난 다음에 다음생에서 열심히 정진하여 이루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현세가 곧 내생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나의 모습이 미래의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라고 즉 내세를 말하지 않는다. 현실이 옳고 그름에 따라서 우리에게 다가 올 내세를 이야기할 뿐이다. 그러한 내세를 반조하여 현재를 열심히 살라고 훈계하고자 함이다.
이 작자는 말하길 '불교의 믿음은 철저하게 합리와 이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라고 마치 그 자신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듯 강변한다. 이렇게 철저하게 합리와 이성에 바탕을 둔 믿음 하에서 그는 말하길 경전의 글자 한자도 그대로 믿어야 하고 구름신이 딸을 낳았으니 해와달을 쓰다듬었으니 하는 말도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강변해 놓고나서, 다른 글에서는 경전의 그러한 초월적 이야기는 '그려느니' 하고 중립적 입장이 된다고 전혀 엉뚱한 말을 한다. 이 작자의 합리와 이성은 아마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인것 같다.
그러면서도 그 자신은 왜 경전의 글자를 한자도 틀리지 않게 그대로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합리적 이성적 설명은 단 한번도 한적이 없다. 그냥 붓다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맹랑한 소리만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고 있다. 이런 이율배반적 자기모순적 인간상도 처음인듯 하다. 맹신이 왜 마음에 자리잡는가? 그건 지혜없는 믿음을 연(緣)으로 한다. 이 작자의 붓다의 말씀이니 그대로 믿는다는 앵무새의 반복과 타종교인들이 절대신을 믿는 맹목과 다른점은 하나도 없다. 불교는 이런 맹물같은 맹신을 가장 위험한 사고방식이라고 하여 경계하고 또 경계한다.
불교의 진리는 현실에서 증명되고 와서 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구름의 신이 딸을 낳았다는 것을 현실에서 어떻게 합리적 이성적으로 증명할 것이며 어떻게 그런 것을 와서 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순수한 불자들은 경전을 읽으면서 초월적 비현실적 이야기에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이게 뭐지? 이런 이야기가 진짜인가? 라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제대로 지혜가 있는 불자는 '에이...왜 경전에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넣어 놓았지..?' 라고 생각할 것이다. 마성스님과 강병균교수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올바른 지혜를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경전에는 왜 초월적 비현실적 이야기들이 있는가?
이 부분은 마성스님께서 여러 글에서 설명을 하여 놓았다.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인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신들의 이름은 거의다가 당시 인도사회에서 전해오던 신들이다. 불교가 창조한 신은 없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왜 불교경전에 초월적 이야기들이 있는가? 에 대한 단서를 충분하게 제공하고 있다. 붓다는 인도 땅에서 태어났고 수행했고 깨달음을 얻었고 인도인들에게 설법을 했다. 설법의 대상자들도 모두다 인도인들이었다. 당연히 인도의 사회적 여건과 문화와 설화 신화 미신등등을 설법에 섞어서 알아듣기 쉽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붓다께서 한국땅에서 태어났고 한국인들을 상대로 설법했다면 성황당 이야기나 달갈귀신 이야기나 하얀 소복을 입은 귀신이야기나 공포의 공동묘지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설법에 녹아 들어갔을 것이다. 이것을 인도인들이 반대로 읽고 듣는다면 그러한 이야기들을 사실대로 믿어야 하는가? 이게 합리와 이성에 바탕을 둔 믿음인가?
경전의 문학적 표현이란
또한 경전은 결집당시부터 문학적 표현을 중시했다. 문학적이라고 하여 마치 소설이나 수필을 쓰는 것으로 착각하는 진흙속의연꽃도 있지만 실제 문학적 표현이란 글을 다듬고 내용을 잘 정리하여 누가 읽어도 알기 쉽게 이해되도록 한다는 뜻이다. 당연히 비유법과 아름다운 형용사 그리고 의인화 수법등이 동원되는 것이다. 경전에는 '일만세계가 흔들렸다느니 하늘에 천둥이 쳤다느니 대지가 흔들렸다느니 하는 표현'들이 있다. 이건 그 당시의 상황이 그만큼 중요했다든가 아니면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다시말해서 마음이 꽁딱거렸다느니 사자후를 토했다느니 아주 중요한 교리를 말했다느니 하는 말보다는 훨씬 수려하고 유려한 문장이 되고 읽고 듣는 사람들에게 깊이 뇌리에 박히게 된다. 또한 '하늘에 해가 떴다'라는 표현보다는 '하늘에 해가 "찬란하게" 빛을 발하며 떴다'라는 형용사를 갖다붙여서 문장을 만드는게 훨씬 유려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이걸 경전의 문학적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다.
경전은 정리하고 편집하여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정리하고 편집하고 문장을 만들고 단어를 구성하는 것이 문학이 아니고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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