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이 올린 최근의 글들을 몇개 읽어 보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마성 스님이나 강병균 교수의 글등에 대해서 어쭙쟎은 비난을 하는 것을 보면서 입가에 쓴웃음이 나왔다. 전체적인 글에 내용도 알맹이도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횡설수설이다. 자신의 말대로 스스로 미쳐 몰입하여 쓴 글일테니 그럴만도 하다고 생각한다. 지각이 없거나 극히 모자라는 동물들은 자신의 배설물에 대해서 특별한 생각이 없듯이 그도 아마 그럴것 같다. 특히 그는 글에서 경전의 초현실적 기록이나 삼계와 윤회 그리고 삼보의 믿음등에 대해서 장황하게 앞뒤 말도 맞지 않는 글을 길게 늘어놓고 있다. 조목 조목 비판해 보겠다.
불교란 어떤 가르침인가?
불교는 현실에서 출발한 종교이고 현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종교이다. 죽은 자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나 또는 동식물들을 위한 가르침이 아니다. 오직 조건지워져 있는 유위법의 세간사를 사는 중생들을 위한 가르침이다. 그러기에 일찌기 용수보살은 그의 저서 중론에서 "세속 일(세간사의 진리)에 의하지 않고는 최고의 진실은 설해지지 않는다. 최고의 진실에 의하지 않고는 열반은 획득되지 않는다" 라고 강조했다. 세간사의 진리란 바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상적인 세계이며 소위 말해서 유위법의 세계이며 조건지워져 있는 세상이다. 불교란 바로 이러한 중생들의 세간사의 현실에서 출발하고있으며 이곳 현실의 세간사가 바로 저쪽으로 건너기 위한 강의 기슭이며 물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진리를 설법하신 붓다나 그 가르침이나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승가나 모두다 중생들의 귀의처요 피난처가 되는 것이다. 특히 삼보중에서 법(dhamma)은 왜 중생들의 귀의처가 되는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이처럼 불교의 가르침과 성격을 단순명쾌하고 단적으로 표현해 놓은 것은 없을 것이다.
1. 현실에서 증명되는 것
2.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
3.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4. 올바르게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
5. 지혜 있는 사람이 각기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것
첫째의 조항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그것은 현재 우리들 세간사의 삶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시말해서 붓다의 가르침은 철저두철미한 현실적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붓다가 '인생은 고(苦)다' 할 때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우리들의 현실임에 틀림없다. 또한 붓다가 '세상의 모든 것은 연기법이다'라고 할 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실이 그러하다는 것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붓다의 가르침은 모두다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진실임을 지금 여기 이곳에서 볼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세번째 조항은 무엇을 말함인가? 세상의 많은 종교들은 그것을 맹신적으로 믿는 사람이 아니고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교리를 가지고 있는 종교가 많다. 조물주니 창조주니 절대적인 구원의 신이니 아담의 신화등은 그것을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의 개념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로 법장보살의 서원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염불왕생을 납득할 리가 없다. 하지만 붓다의 가르침은 그런 폐쇄적이고 제한된 진리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이해되는 내용이고 또 누구나 실천함으로써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들이다. 타종교처럼 계시에 의하지 않으면 모른다든가 또는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제외된다든가 등의 조건이 붙지를 않는다.
그러기에 와서 보라고 하는 것이다. 누구나 와서 볼 수 없는 것이라면 와서 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삼천대천 세계가 있다는 것을 현실에서 어떻게 증명할 수 있으며 그것을 믿지 않는 자에게 어떻게 납득을 시킬 것인가? 사후의 문제나 미래의 문제에 대해서 온갖 허황된 장광설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와서 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 현재에서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인가?
삼계와 윤회
욕계.색계.무색계와 구차제정이 과연 불교만의 독창적인 교리인가를 의문할 때 그것은 절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개념은 불교이전부터 있어왔던 요가의 수행과 인도의 타종교들이 내세웠던 세계관을 불교식으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특히 구차제정이라는 수행 단계는 후대의 부파불교에 와서 불교식으로 다듬어졌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그 좋은 예를 대반열반경에서 볼 수 있다.
"세존께서는 최초의 선정에 드셨다. 그리고 초선을 지나 2.3.4선 그리고 차례로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상수멸에 드셨다. 세존께서는 이번에 앞과 반대로 상수멸에서 출정하시어 비상비비상처, 무소유처, 식무변처, 공무변처, 그리고 4.3.2.초선에 차례대로 드셨다. 그리고 초선에서 2선에 드셨다. 2선을 지나 3선에 드셨다. 4선에서 세존께서는 반열반에 드셨다."
이 경전의 문구를 자세히 보면 우리들 상식으로는 세존께서는 구차제정의 마지막 단계인 상수멸정에서 반열반에 드셔야 옳다. 하지만 세존께서는 4선에서 반열반에 드신 것으로 되어 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지 않는가? 왜 상수멸이 아니고 4선일까? 또한 신통의 능력/지혜는 1-4선에 들었을 때 얻을 수 있는 능력이다. 무색정인 공무변처 이상의 단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리고 해탈과 열반은 4선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 경전도 4선까지만을 설해놓은 귀절이 곳곳에 있다. 쉽게 말해서 요가 수행자들이 불교이전에 이미 정립해 놓은 수행으로 이루어지는 정신적 단계를 세분화 놓은 것을 불교가 후대에 받아들인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삼천대천 세계란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마성스님이 블로그에 올려서 소개한 일본학자 미즈노 고겐의 글을 보면 누구나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직접 찾아서 읽어보길 권한다. 믿고 안 믿고는 각자의 선택이지만 단언하건데 지혜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글이다.
불교는 과거세 현재 미래세를 말한다. 이를 평면상에 놓고 시간적으로 보면 과거 - 현재 - 미래순이다. 하지만 불교는 이런 단세포적인 세계를 말하지 않는다.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의 공간안에 놓고보라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과거가 현재이고 현재가 곧 미래가 되어 버린다. 또한 죽음이 삶이 되고 삶이 죽음이 되어 버린다. 삶과 죽음을 별도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게 된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양쪽에 방이 있고 중간에 문이 있다고 하자. 오른쪽 방에 있는 사람이 왼쪽방으로 갈때는 문을 열고 간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왼쪽 방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 반대로도 생각할 수 있다. 즉 죽음이면 곧 삶이고 삶이면 곧 죽음이라는 것이다.
초기불교는 "존재란 심찰나적으로 생멸을 거듭하며 하나의 흐름처럼 흘러가는 존재"라고 한다. 또한 대승불교처럼 중유천을 인정하지 않고 찰나적으로 재생연결이 된다고 말한다. 좀더 설명하자면 1년전의 나와 지금의 나와 1년후의 나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찰나적으로 생멸을 거듭하며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죽으면 곧바로 삶으로 태어난다. 태어나면 곧바로 죽음으로 연결이 된다. 삶과 죽음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들 현세의 삶이라는 시간도 시작도 알 수 없는 윤회의 시간속에서 보면 찰나에 불과한 것이다. 그 찰나의 삶도 생멸을 거듭하는 것이다. 그렇게 윤회는 거듭되는 것이고 윤회의 세계에서 보면 과보를 받으며 생멸을 거듭하며 흘러가는 하나의 흐름에 불과한 것이다. 삼계를 세게를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니다. 유위법의 세계에서 존재로써 윤회를 거듭하는 것이다.
따라서 삼계를 부정한다고 하여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삼계와 윤회는 전혀 상관이 없다. 오히려 삼계를 믿고 주장하는 작자들이 윤회의 교리를 왜곡하고 허황된 잘못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윤회란 우리들 현실이다. 중생들의 윤회의 모습을 설명한 12연기는 삼천대천 세계의 비존재들의 모습이 아니다. 바로 우리들 현실의 중생들의 모습인 것이다.
빠띠삼비다막가(patisambhidamagga. 무애해도. 無碍解道)
이 경은 빠알리어 니까야 5부 Khuddkka-Nikaya 의 열 여섯 경전중에서 열두 번째에 배속되어 있는 경전이다. 이 경전은 아쇼카 대왕시절(BC236)에 결집되어 적어도 BC100경에는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 경전은 남방상좌부의 독자의 것으로 수행의 지침서 역활을 하고 있다. 특히 이 경전은 AD5세기에 붓다고사가 저술한 청정도론의 소의경전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빠띠삼비다막가의 내용을 빈번하게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형식은 논장식으로 되어 있어서 경장과 논장의 가교역활을 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이 빠띠삼비다막가에 보면 초월적인 신통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관심있는 분은 블로그에 올려져 있는 글을 보면 좋겠다). 해와 달을 쓰다듬는다든가 하늘에서 가부좌를 한다든가 산과 벽을 통과해서 간다든가 물위를 걷는다든가 등등에 대해서 어떻게 하여 그런 신통이 가능한지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빠띠삼비다막가에서는 '분석적 통찰에 관한 논의" 와 '법의 바퀴에 관한 논의'라는 대목에서 초전법륜경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초전법륜에 나오는 하늘의 신들이 소리쳤다느니 지옥의 세계까지 빛이 비쳤다느니 삼천대천세계가 흔들렸다느니에 대한 설명은 일체 없다.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러한 초월적인 경전 문구들이 붓다의 가르침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믿는 것인지 안 믿는 것인지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진흙속의연꽃의 글을 보면 경전의 초월적 묘사에 대해서 횡설수설한다. 지겹도록 장황하게 늘어논 글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믿는다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다는 것도 아니다. 안 믿는다고 경전이 훼손되는 것도 아니라는둥 엉뚱한 소리를 하면서 '종교경전을 무조건 다 믿는 것은 광신이라고? 학자와 스님의 글을 보면' 이라고 소제목을 달아놓고 있다. 더욱 가관은 삼보에 대한 믿음 운운까지 하고 있다.
여기서 다시 묻는다. 경전에 나오는 '구름의 신이 딸을 낳았으니 ... 임신을 7년간이나 했다느니 ... 대지가 진동했다느니 ... 이 말을 사실적으로 믿는가 안 믿는가?
삼보를 올바르게 믿는 작자라면 분명코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붓다는 중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나?
붓다는 고구정녕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고와 고의 소멸을 가르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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