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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 상윳따 - 제19장 독사 품(SN35:238-SN35:248. Āsīvisa-vagga)

실론섬 2014. 6. 20. 14:00

제19장 독사 품
Āsīvisa-vagga (SN 35.238-248)

 

āsīvisopamasuttam (SN 35.238-독사 경)
238.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화려한 색깔을 가지고 있고 맹독을 가진 네 종류의 독사가 있다. 그때 살기를 바라고 죽기를 바라지 않으며 행복을 바라고 괴로움을 혐오하는 사람이 올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보시오. 화려한 색깔을 가지고 있고 맹독을 가진 네 종류의 독사가 있습니다. 그대는 때때로 이 뱀들을 손에 감아서 들어 올려야 하고 때때로 목욕을 시켜야 하고 때때로 먹을 것을 주어야 하고 때때로 보금자리로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화려한 색깔을 가지고 있고 맹독을 가진 이 네 마리 독사 가운데 어떤 한 마리가 화가 나면 그대를 물어서 죽거나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그 사람은 화려한 색깔을 가지고 있고 맹독을 가진 네 종류의 독사가 두려워서 이리저리 도망칠 것이다. 이런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시오. 다섯 명의 살인을 일삼는 살인자들이 ‘우리가 이놈을 보기만 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목숨을 빼앗아버리리라.’라고 하면서 그대의 등 뒤를 쫓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대가 하고 싶은대로 하십시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그 사람은 화려한 색깔을 가지고 있고 맹독을 가진 네 종류의 독사가 두렵고 다섯 명의 살인을 일삼는 살인자들이 두려워서 이리저리 도망칠 것이다. 이런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시오. 그대와 친숙한 여섯 번째의 살인자가 칼을 빼들고 ‘내가 이놈을 보기만 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목을 잘라버릴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대의 등 뒤를 쫓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그 사람은 화려한 색깔을 가지고 있고 맹독을 가진 네 종류의 독사가 두렵고 다섯 명의 살인을 일삼는 살인자들이 두렵고 자신과 친숙한 여섯 번째의 살인자가 칼을 빼들고 오는 것이 두려워서 이리저리 도망칠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빈 마을을 볼 것이다. 어떤 집에 들어가도 텅 비어 있고 황량하고 공허하였고 어떤 그릇을 집어 보아도 텅 비어 있고 황량하고 공허하였다. 이런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시오. 지금 곧 마을을 약탈하는 도둑떼들이 이 빈 마을로 쳐들어 올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가 하고싶은 대로 하십시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그 사람은 화려한 색깔을 가지고 있고 맹독을 가진 네 종류의 독사가 두렵고 다섯 명의 살인을 일삼는 살인자들이 두렵고 자신과 친숙한 여섯 번째의 살인자가 칼을 빼들고 오는 것이 두렵고 마을을 약탈하는 도둑떼들이 두려워서 이리저리 도망칠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이 언덕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지만 저 언덕은 안전하고 아무 두려움이 없는 그런 큰 호수를 볼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안전하게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네줄 배나 다리가 없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그 사람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여기 큰 호수가 있는데 이 언덕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두려움이 있지만 저 언덕은 안전하고 아무 두려움이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안전하게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네줄 배나 다리가 없다. 그러니 나는 풀과 잔가지와 큰 가지와 풀잎을 함께 모아서 뗏목을 엮은 뒤 그 뗏목에 의지하여 손과 발로 저으면서 노력하여 안전하게 저 언덕으로 건너가야겠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자 그 사람은 풀과 잔가지와 큰 가지와 풀잎을 함께 모아서 뗏목을 엮은 뒤 그 뗏목에 의지하여 손과 발로 노력하여 안전하게 저 언덕으로 건너갔다. 참된 바라문은 이것을 건너 저 언덕에 도달하여 땅 위에 서 있다.

비구들이여, 이 비유는 뜻을 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 내가 만든 것이다. 그 뜻은 이와 같다.
비구들이여, 화려한 색갈을 가지고 있고 맹독을 가진 네 종류의 독사는 네 가지 근본물질을 두고 한 말이니 그것은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이다.
비구들이여, 다섯 명의 살인을 일삼는 살인자들은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을 두고 한 말이다. 그것은 물질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 느낌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 지각(인식)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 형성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 의식(식별)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무더기.다발)이다.
비구들이여, 자신과 친숙한 칼을 빼든 여섯 번째 살인자란 즐거워함과 탐욕을 두고 한 말이다.
비구들이여, 빈 마을이란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를 두고 한 말이다. 
비구들이여 만일 지혜롭고 슬기롭고 현명한 자가 눈을 숙고해보면 그것은 텅 비어 있고 황량하고 공허하게 드러날 것이다. 만일 지혜롭고 슬기롭고 현명한 자가 귀를 숙고해보면 그것은 텅 비어 있고 황량하고 공허하게 드러날 것이다. 만일 지혜롭고 슬기롭고 현명한 자가 코를 숙고해보면 그것은 텅 비어 있고 황량하고 공허하게 드러날 것이다. 만일 지혜롭고 슬기롭고 현명한 자가 혀를 숙고해보면 그것은 텅 비어 있고 황량하고 공허하게 드러날 것이다. 만일 지혜롭고 슬기롭고 현명한 자가 몸을 숙고해보면 그것은 텅 비어 있고 황량하고 공허하게 드러날 것이다. 만일 지혜롭고 슬기롭고 현명한 자가 마음을 숙고해보면 그것은 텅 비어 있고 황량하고 공허하게 드러날 것이다.
비구들이여, 마을을 약탈하는 도둑떼들이란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를 두고 한 말이다. 
비구들이여, 눈은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형색들의 공격을 받는다. 귀는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들의 공격을 받는다. 코는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냄새들의 공격을 받는다. 혀는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맛들의 공격을 받는다. 몸은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감촉들의 공격을 받는다. 마음은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법들의 공격을 받는다.
비구들이여, 큰 호수란 네 가지 폭류(거친 흐름)를 두고 한 말이니 그것은 감각적 쾌락에 의한 폭류, 존재에 의한 폭류, 견해에 의한 폭류, 무명에 의한 폭류이다. 
비구들이여,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두려움이 있는 이 언덕이란 자기 존재가 있음[有身]을 두고 한 말이다.
비구들이여, 안전하고 아무 두려움이 없는 저 언덕이란 열반을 두고 한 말이다.
비구들이여, 뗏목이란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을 두고 한 말이니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삼매이다. 
비구들이여, 손과 발로 노력한다는 것은 불굴의 정진을 두고 한 말이다.
비구들이여, 물을 건너 저 언덕에 도달하여 맨 땅에 서 있는 바라문이라는 것은 아라한을 두고 한 말이다.”

rathopamasuttaṃ (SN 35.239-마차 비유 경)
239. “비구들이여, 세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지금∙여기에서 행복과 만족으로 많이 머물고, 번뇌들의 소멸을 위한 통찰이 시작된다. 어떤 세 가지인가? 감각기능들에서 문을 보호하고, 음식에 대한 적당량을 알고,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감각기능들에서 문을 보호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눈으로 형색을 보면서 그 표상을 붙잡지 않으며, 뒤따르는 (세세한) 부분상도 붙잡지 않는다. 만약 그가 눈의 근이 보호되지 않은 채 머무르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탐욕과 번민) 삿되고 선하지 않은 형색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눈의 근을 제어하기 위해서 닦으며, 길들이기 위해서 닦으며,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닦는다. ···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 코로 냄새를 맡으면서 ··· 혀로 맛을 보면서 ··· 몸으로 감촉을 느끼면서 ··· 마음으로 법을 지각함에 그 표상을 붙잡지 않으며, 또 뒤따르는 부분상도 붙잡지 않는다. 만약 그가 마음의 근이 보호되지 않은 채 머무르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의 근을 제어하기 위해서 닦으며, 길들이기 위해서 닦으며,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닦는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땅이 평평한 사거리 대로에 건강하고 혈통 좋은 말이 끄는 마차가 있다. 그 마차의 말에 마구가 채워졌고 채찍이 잘 준비되어 있다. 그러면 말 조련사는 그것에 올라타 왼손으로 고삐를 잡고 오른 손으로는 채찍을 쥐고서 어디든 그가 원하는 곳으로 가기도 하고 되돌아오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비구는 여섯 가지 감각기능을 보호하기 위해서 닦고, 제어하기 위해서 닦고, 길들이기 위해서 닦고,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닦는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감각기능들에서 문을 보호한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음식에 대한 적당량을 아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공양받은 음식에 대해 바른 생각으로 관찰한다. '맛을 즐기기 위함도 아니고, 배부르게 먹기 위함도 아니고, 몸을 살찌우기 위함도 아니고, 보기 좋게 가꾸고자함도 아니니, 다만 건강을 해치지 않고, 이 몸을 유지하여 청정범행을 돕기 위함이다. 바른 관찰로써 배고픔의 오래된 느낌만 제거하고 배부름의 새로운 느낌은 일으키지 않는다. 이와 같은 모든 문제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져 계속 평온하게 머물며 닦고 익히기 위해 이 공양을 받는다.' 라고 바른 생각으로 관찰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상처를 낫게 하기 위해서 연고를 바르고, 짐을 옮기기 위해서 수레바퀴에 기름을 바르는 것과 같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음식에 대한 적당량을 안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낮 동안에는 경행하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밤의 초경(初更)에는 경행하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한밤중에는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면서 [正念正知] 일어날 시간을 마음을 기울인 후 발에 발을 포개고,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으로 향하게 하여 사자처럼 눕는다. 밤의 말경(末更)에는 일어나서 경행하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와 같이 깨어 있음에 전념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지금∙여기에서 행복과 만족으로 많이 머물고, 번뇌들의 소멸을 위한 통찰이 시작된다.”

 

kummopamasuttaṃ (SN 35.240-거북 비유 경)

240. “비구들이여, 옛날에 거북이가 저녁 무렵에 강둑을 따라서 먹을거리를 찾고 있었다. 그때 자칼도 더녁 무렵에 강둑을 따라서 먹을거리를 찾고 있었다. 비구들이여, 거북이는 자칼이 멀리서 먹을거리를 찾아서 오는 것을 보았다. 보고서는 목을 포함한 다섯 부분을 자신의 등껍질에 감추고 미동도 않고 침묵하며 엎드려 있었다. 비구들이여, 자칼도 거북이가 멀리서 먹을 거리를 찾아서  오는 것을 보았다. 보고서는 거북이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거북이 곁에서 ‘언제든 이 거북이는 목을 포함한 다섯 부분 가운데 어느 하나를 내놓을 것이다. 그때 그것을 붙잡아 끌어내어 먹어버릴 것이다.’라며 거북이 앞에 서 있었다. 거북이가 목을 포함한 다섯 부분 가운데 어떤 것도 내놓지 않았을 때, 기회를 얻지 못한 자칼은 거북이에게 낙심하고 거기서 떠나갔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마라 빠삐만가 ‘나는 이 비구들의 눈을 통해서 접근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 귀를 통해서 ··· 코를 통해서 ··· 혀를 통해서 ··· 몸을 통해서 ··· 나는 이 비구들의 마음을 통해서 접근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라며 그대들 앞에 항상 서 있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감각기능의 문을 보호하며 머물러야 한다. 눈으로 형색을 보면서 그 표상을 붙잡지 않으며 또 뒤따르는 (세세한) 부분상을 붙잡지 않아야 한다. 눈의 근이 보호되지 않은 채 머무르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삿되고 선하지 않은 형색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눈의 근을 제어하기 위해서 닦아야 하며, 길들이기 위해서 닦아야 하며,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닦으며 머물러야 한다.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 코로 냄새를 맡으면서 ···혀로 맛을 보면서 ··· 몸으로 감촉을 느끼면서 ··· 마음으로 법을 인식하면서 그 표상을 붙잡지 않으며 또 뒤따르는 부분상을 붙잡지 않아야 한다. 마음의 근이 보호되지 않은 채 머무르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마음의 근을 제어하기 위해서 닦아야 하며, 길들이기 위해서 닦아야 하며,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닦으며 머물러야 한다.

그대들이 감각기능들에서 문을 보호하며 머물 때, 기회를 얻지 못한 마라 빠삐만은 그대들 때문에 낙심해서 떠나갈 것이다.”

 

'거북이가 자신의 등껍질에 사지를 집어넣듯
비구는 마음에 일어난 사유를 안으로 거둬들여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남을 해코지 않으며
완전한 평화를 얻어 아무도 비난하지 않아야 한다.'

 

paṭhamadārukkhandhopamasuttaṃ (SN 35.241-나뭇더미 비유 경1)
241. 한 때에 세존께서는 꼬삼비에서 강가 강의 언덕에 머물고 계셨다. 그곳에서 세존께서는 큰 나뭇더미가 강가 강물의 흐름을 따라 떠내려가는 것을 보셨다. 세존께서는 그것을 보신 뒤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강가 강의 흐름에 떠내려 가는 저 큰 나뭇더미를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만약 저 나뭇더미가 이 언덕에 닿지 않고, 저 언덕에 닿지 않고, 중간에서 가라앉지도 않을 것이고, 바위에 걸리지도 않을 것이고, 사람에게 붙잡히지 않을 것이고, 비인간에게 붙잡히지 않을 것이고, 소용돌이에 휩쓸리지도 않을 것이고, 안에서 썩지도 않는다면, 비구들이여, 이렇게 저 나뭇더미는 바다로 흐르고 바로 향하고 바다로 들어갈 것이다.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강가 강의 흐름은 바다로 흐르고 바다로 향하고 바다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만약 그대들도 이 언덕에 닿지 않고, 저 언덕에 닿지 않고, 중간에서 가라앉지 않을 것이고, 바위에 걸리지 않을 것이고, 사람에게 붙잡히지 않을 것이고, 비인간에게 붙잡히지 않을 것이고,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고, 안에서 썩지 않는다면, 비구들이여, 이렇게 그대들은 열반으로 흐르고 열반으로 향하고 열반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바른 견해는 열반으로 흐르고 열반으로 향하고 열반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어떤 비구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이 언덕이고, 무엇이 저 언덕이고, 무엇이 가운데 가라앉음이고, 무엇이 바위에 걸림이고, 무엇이 사람에게 붙잡히지 않는 것이고, 무엇이 비인간에게 붙잡히지 않는 것이고, 무엇이 소용돌이에 휩쓸림이고, 무엇이 안에서 썩는 것입니까?"라고.

비구여, 이 언덕이라는 것은, 비구여,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육내입처.六內入處)를 말하고, 저 언덕이라는 것은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육외입처.六外入處)를 말하고, 중간에서 가라앉음이라는 것은, 비구여, 소망과 탐욕을 말하고, 바위에 걸림이라는 것은, 비구여, 나는 있다는 자만을 말한다. 


그러면, 비구여, 사람에게 붙잡힘은 무엇인가? 여기, 비구여, 재가자들과 교제하며 머문다. 함께 기쁘하고, 함께 슬픔을 나눈다. 행복한 곳에서 행복해하고, 괴로운 곳에서 괴로워한다. 해야 하는 역할이 생길 때 그것들을 행한다(실천한다). 이것이, 비구여, 사람에게 붙잡힘이라고 불린다.

 

그러면, 비구여, 어떤 것이 비인간들에게 붙잡히는 것인가? 여기, 비구여, 어떤 자는 다른 천신의 무리를 갈구하여 청정범행을 닦는다. ‘이러한 계나 서원이나 고행이나 청정범행으로 나는 높은 단계의 천신이나 낮은 단계의 천신이 되리라.’라고. 비구여, 이를 일러 비인간에게 붙잡혔다고 한다.
비구여, 소용돌이에 휩쓸린다는 것은 다섯 가지의 감각적 쾌락을 두고 한 말이다.
비구여, 그러면 어떤 것이 중간에서 썩는 것인가? 비구여, 여기 어떤 자는 계를 지키지 않고, 나쁜 성품을 지니고, 불결하고,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고, 몰래 행동하고, 사문이 아니면서 사문이라 주장하고, 청정범행을 닦지 않으면서 청정범행을 닦는다고 주장하고, 썩은 업에 의해 안이 썩었고, 여섯 감각의 문을 통해 탐욕 등 오염원들이 흐르고, 탐욕등으로 가득찼고, 청정하지 않다. 비구여, 이를 일러 중간에서 썩는 것이라 한다.

 

그때 소치는 사람 난다가 세존의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그는 세존의 말씀을 듣고난 후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 언덕에 닿지 않고, 저 언덕에 닿지 않고, 중간에서 가라앉지 않을 것이고, 바위에 걸리지 않을 것이고, 사람에게 붙잡히지 않을 것이고, 비인간에게 붙잡히지 않을 것이고,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고, 안에서 썩지 않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에서 출가하고자 합니다. 저는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난다여, 그렇다면 그대는 저 소들을 주인들에게 돌려주어라.”
“세존이시여, 소들은 자신의 송아지에 대한 애정 때문에 알아서 갈 것입니다.”
“난다여, 그대는 저 소들을 주인들에게 돌려주어라.”
그러자 소치는 사람 난다는 주인들에게 소들을 돌려준 뒤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소들을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제 저는 세존의 곁에서 출가하고자 합니다. 저는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소치는 사람 난다는 세존의 곁에서 출가하였고 구족계를 받았다. 구족계를 받고 홀로 외딴 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문 난다 존자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목적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알았다. 
난다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dārukkhandhopamasuttaṃ (SN 35.242-나뭇더미 비유 경2)  
242. 한 때에 세존께서는 낌빌라의 강가 강의 언덕에 머물고 계셨다. 그곳에서 세존께서는 큰 나뭇더미가 강가 강물의 흐름을 따라 떠내려가는 것을 보셨다. 세존께서는 그것을 보신 뒤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강가 강의 흐름에 떠내려 가는 저 큰 나뭇더미를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만약 저 나뭇더미가 이 언덕에 닿지 않고, 저 언덕에 닿지 않고, 중간에서 가라앉지도 않을 것이고, 바위에 걸리지도 않을 것이고, 사람에게 붙잡히지 않을 것이고, 비인간에게 붙잡히지 않을 것이고, 소용돌이에 휩쓸리지도 않을 것이고, 안에서 썩지도 않는다면, 비구들이여, 이렇게 저 나뭇더미는 바다로 흐르고 바로 향하고 바다로 들어갈 것이다.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강가 강의 흐름은 바다로 흐르고 바다로 향하고 바다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만약 그대들도 이 언덕에 닿지 않고, 저 언덕에 닿지 않고, 중간에서 가라앉지 않을 것이고, 바위에 걸리지 않을 것이고, 사람에게 붙잡히지 않을 것이고, 비인간에게 붙잡히지 않을 것이고,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고, 안에서 썩지 않는다면, 비구들이여, 이렇게 그대들은 열반으로 흐르고 열반으로 향하고 열반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바른 견해는 열반으로 흐르고 열반으로 향하고 열반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낌빌라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이 언덕이고, 무엇이 저 언덕이고, 무엇이 가운데 가라앉음이고, 무엇이 바위에 걸림이고, 무엇이 사람에게 붙잡히지 않는 것이고, 무엇이 비인간에게 붙잡히지 않는 것이고, 무엇이 소용돌이에 휩쓸림이고, 무엇이 안에서 썩는 것입니까?"라고.
낌빌라여, 이 언덕이라는 것은, 비구여,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육내입처.六內入處)를 말하고, 저 언덕이라는 것은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육외입처.六外入處)를 말하고, 중간에서 가라앉음이라는 것은, 비구여, 소망과 탐욕을 말하고, 바위에 걸림이라는 것은, 비구여, 나는 있다는 자만을 말한다.

그러면, 낌빌라여, 사람에게 붙잡힘은 무엇인가? 여기, 낌빌라여, 재가자들과 교제하며 머문다. 함께 기쁘하고, 함께 슬픔을 나눈다. 행복한 곳에서 행복해하고, 괴로운 곳에서 괴로워한다. 해야 하는 역할이 생길 때 그것들을 행한다(실천한다). 이것이, 낌빌라여, 사람에게 붙잡힘이라고 불린다.
그러면, 낌빌라여, 어떤 것이 비인간들에게 붙잡히는 것인가? 여기, 낌빌라여, 어떤 자는 다른 천신의 무리를 갈구하여 청정범행을 닦는다. ‘이러한 계나 서원이나 고행이나 청정범행으로 나는 높은 단계의 천신이나 낮은 단계의 천신이 되리라.’라고. 비구여, 이를 일러 비인간에게 붙잡혔다고 한다.
낌빌라여, 소용돌이에 휩쓸린다는 것은 다섯 가지의 감각적 쾌락을 두고 한 말이다.
낌빌라여, 그러면 어떤 것이 중간에서 썩는 것인가? 낌빌라여, 여기 어떤 자는 계를 지키지 않고, 나쁜 성품을 지니고, 불결하고,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고, 몰래 행동하고, 사문이 아니면서 사문이라 주장하고, 청정범행을 닦지 않으면서 청정범행을 닦는다고 주장하고, 썩은 업에 의해 안이 썩었고, 여섯 감각의 문을 통해 탐욕 등 오염원들이 흐르고, 탐욕등으로 가득찼고, 청정하지 않다. 낌빌라여, 이를 일러 중간에서 썩는 것이라 한다.

 

avassutapariyāyasuttaṃ (SN 35.243-오염원들이 흐름에 대한 법문 경)
243.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삭까의 까삘라왓투에 있는 니그로다 숲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까삘라왓투에 사는 사꺄들이 새 공회당을 지은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어떤 다른 사람도 아직 사용하지 않았다. 까삘라왓투에 사는 사꺄들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까삘라왓투에 사는 사꺄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 까삘라왓투에 사는 사꺄들이 새 공회당을 지은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어떤 다른 사람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세존이시여, 부디 세존께서 그것을 처음으로 사용해 주십시오. 세존께서 처음으로 사용하시고 난 후에 저희 까삘라왓투에  사는 사꺄들이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까삘라왓투에 사는 사꺄들에게 오랜 세월 이익이 되고 행복이 될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침묵으로 허락하셨다.

 

그러자 까삘라왓투에 사는 사꺄들은 세존께서 허락하신 것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공경의 의미로 오른쪽으로 돈 뒤에 공회당으로 갔다. 가서는 공회당을 덮개로 완전하게 덮고 세존의 자리를 준비하고 물 항아리를 마련하고 기름 등불을 매단 뒤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섰다. 한 쪽에 선 까삘라왓투에 사는 사꺄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공회당을 덮개로 완전하게 덮었고 세존의 자리를 준비하고 물 항아리를 마련하고 기름 등불을 매달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적당한 시간을 생각하여 주십시요."라고.
세존께서는 옷차림을 바르게 하시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시고 비구 대중들과 더불어 공회당으로 가셨다. 가셔서는 발을 씻으시고 공회당으로 들어가셔서 동쪽을 향하여 중간 기둥 곁에 앉으셨다. 비구들도 역시 발을 씻고 공회당에 들어가서 동쪽을 향하여 서쪽 벽 근처에 세존을 앞에 모시고 앉았다. 까삘라왓투에 사는 사꺄들도 역시 발을 씻고 공회당에 들어가서 서쪽을 보고 세존을 앞에 모시고 동쪽 벽 근처에 앉았다. 세존께서는 까삘라왓투에 사는 사꺄들에게 밤늦게 오래도록 법을 설하시고 격려하시고 분발하게 하시고 기쁘게 하신 뒤 그들을 돌아가게 하셨다.
“고따마들이여, 밤이 깊었다. 이제 그대들이 갈 시간이 되었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까삘라왓투에 사는 사꺄들은 세존께 대답을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경의를 표한 뒤에 공경의 의미로 오른쪽돈 뒤에 돌아갔다.  


세존께서는 까삘라왓투에 사는 사꺄들이 나간 뒤 오래지 않아서, 마하목갈라나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목갈라나여, 비구들은 해태와 혼침이 없구나. 목갈라나여, 그대가 이런 비구들에게 법문을 설하도록 하라. 나는 등이 아프구나. 그래서 좀 쉬어야겠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마하목갈라나 존자는 세존께 대답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서 자리를 만든 뒤에 발에 발을 포개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시면서[正念正知] 일어날 시간에 마음을 기울이신 뒤,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으로 향한채 사자처럼 누우셨다.

거기서 마하목갈라나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도반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대답했다. 그러자 비구들도 대답했다. “도반이여.”라고. 마하목갈라나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그대들에게 오염원들이 흐름에 대한 법문과 오염원들이 흐르지 않음에 대한 법문을 설할 것입니다. 듣고 잘 사고하십시오. 나는 말하겠습니다."라고.
“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비구들은 마하목갈라나 존자에게 대답했다. 마하목갈라나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어떻게 오염원들이 흐릅니까?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는 눈으로 형색을 보고서 사랑스러운 형색에는 마음을 기울이고, 사랑스럽지 않는 형색은 혐오합니다.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확립하지 못하고 제한된 마음으로 머뭅니다. 그는 일어난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남김없이 소멸되어버리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합니다. ··· 귀로 소리를 듣고서 ···코로 냄새를 맡고서 ··· 혀로 맛을 맛보고서 ···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서 ··· 마음으로 법(마음현상)을 인식하고서 사랑스러운 법에는 마음을 기울이고, 사랑스럽지 않는 법은 혐오합니다.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확립하지 못하고 제한된 마음으로 머뭅니다. 그는 일어난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남김없이 소멸되어버리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에서 오염원들이 흐르고, 귀에서 인식되는 소리들에서 오염원들이 흐르고,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에 대해서 오염원들이 흐르고, 혀로 인식되는 맛들에서 오염원들이 흐르고,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에서 오염원들이 흐르고, 마음으로 인식되는 법들에서 오염원들이 흐르는 비구라고 불립니다. 이렇게 머무는 비구에게, 도반들이여, 만약 마라가 눈을 통해서 그에게 접근하면 마라는 그에게 들어갈 기회를 얻고 사로잡아 버릴 대상을 얻습니다. ··· 귀를 통해서 ··· 코를 통해서 ··· 혀를 통해서 ··· 몸을 통해서 ··· 마음을 통해서 그에게 접근하면 마라는 그에게 들어갈 기회를 얻고 사로잡아 버릴 대상을 얻습니다.

 

예를 들면, 도반들이여, 갈대나 죽은지 삼사 년 된 마른 나무로 지은 오두막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동쪽에서 그곳으로 불타는 횃불을 가지고 온다면, 불은 들어갈 기회를 얻고 태워 버릴 대상을 얻을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서쪽에서도 ··· 북쪽에서도 ··· 남쪽에서도 ··· 높은 쪽에서도 ··· 낮은 쪽에서도 ··· 만약 어떤 사람이 어떤 쪽에서라도 불타는 횃불을 가지고 온다면, 불은 들어갈 기회를 얻고 태워 버릴 대상을 얻을 것입니다. 이처럼, 도반들이여, 이렇게 머무는 비구에게 만약 마라가 눈을 통해서 그에게 접근하면 마라는 그에게 들어갈 기회를 얻고 사로잡아 버릴 대상을 얻습니다. ··· 귀를 통해서 ··· 코를 통해서 ··· 혀를 통해서 ··· 몸을 통해서 ··· 마음을 통해서 그에게 접근하면 마라는 그에게 들어갈 기회를 얻고 사로잡아 버릴 대상을 얻습니다. 이렇게 머무는 비구를, 도반들이여, 형색들은 비구를 제압했지만, 비구는 형색들을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소리들은 비구를 제합했지만, 비구는 소리들을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냄새들은 비구를 제압했지만, 비구는 소리들을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맛들은 비구를 제압했지만, 비구는 맛들을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감촉들은 비구를 제압했지만, 비구는 감촉들을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법들은 비구를 제압했지만, 비구는 법들을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형색들에 의해 지배되고, 소리들에 의해 지배되고, 냄새들에 의해 지배되고, 맛들에 의해 지배되고, 감촉들에 의해 지배되고, 법들에 의해 지배된 비구는 지배된 자이고, 지배하는 자가 아니고, 오염원이고 미래에 태어나고 늙고 죽어야 하는 존재로 다시 이끌고 두렵고 과보가 괴로움인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그를 제압했다고 불립니다. 도반들이여, 이렇게이 오염원들이 흐릅니다.  

 

도반들이여, 어떻게 오염원들이 흐르지 않습니까?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는 눈으로 형색을 보고서 사랑스러운 형색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사랑스럽지 않는 형색에 혐오하지 않습니다.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확립하고 무량한(제한되지 않은) 마음으로 머뭅니다. 그는 이미 일어난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남김없이 소멸되어 버리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귀로 소리를 듣고서 ···코로 냄새를 맡고서 ··· 혀로 맛을 맛보고서 ···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서 ··· 마음으로 법을 인식하고서 사랑스러운 법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사랑스럽지 않는 법에 혐오하지 않습니다.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확립하고 무량한 마음으로 머뭅니다. 그는 이미 일어난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남김없이 소멸되어 버리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에서 오염원들이 흐르지 않고,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에서 오염원이 흐르지 않고,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에서 오염원들이 흐르지 않고, 혀로 인식되는 맛들에서 오염원들이 흐르지 않고,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에서 오염원들이 흐르지 않고, 마음으로 인식되는 법들에서 오염원들이 흐르지 않는 비구라고 불립니다. 이렇게 머무는 비구에게, 도반들이여, 만약 마라가 눈을 통해서 그에게 접근하더라도 마라는 그에게 들어갈 기회를 얻지 못하고, 사로잡아 버릴 대상을 얻지 못합니다. ··· 귀를 통해서 ··· 코를 통해서 ··· 혀를 통해서 ··· 몸을 통해서 ··· 만약 마라가 마음을 통해서 그에게 접근하더라도 마라는 그에게 들어갈 기회를 얻지 못하고, 그를 사로잡아 버릴 대상을 얻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도반들이여, 뾰족지붕 건물이나 진흙을 두껍게 바르고 회반죽으로 잘 발라져 지은 강당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동쪽에서 그곳으로 불타는횃불을 가지고 온다 해도 불은 들어갈 기회를 얻지 못하고, 태워버릴 대상을 얻지 못합니다. ··· 서쪽에서도 ··· 북쪽에서도 ··· 남쪽에서도 ··· 낮은 쪽에서도 ··· 높은 쪽에서도 ··· 만약 어떤 쪽에서라도 그곳으로 불타는 횃불을 가지고 온다 해도 불은 들어갈 기회를 얻지 못하고, 태워버릴 대상을 얻지 못합니다.  이처럼, 도반들이여, 이렇게 머무는 비구에게 만약 마라가 눈을 통해서 그에게 접근하더라도 마라는 그에게 들어갈 기회를 얻지 못하고 사로잡아 버릴 대상을 얻지 못합니다. ··· 귀를 통해서 ··· 코를 통해서 ··· 혀를 통해서 ··· 몸을 통해서 ··· 마음을 통해서 그에게 접근하더라도 마라는 그에게 들어갈 기회를 얻지 못하고 사로잡아 버릴 대상을 얻지 못합니다. 이렇게 머무는 비구가, 도반들이여, 비구는 형색들을 제압했지만, 형색들은 비구를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비구는 소리들을 제압했지만, 소리들은 비구를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비구는 냄새들을 제압했지만, 맛들은 비구를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비구는 감촉들을 제압했지만, 감촉들은 비구를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비구는 법들을 제압했지만, 법들은 비구를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비구는 형색들을 지배하고, 소리들을 지배하고, 냄새들 지배하고, 맛들을 지배하고, 감촉들 지배하고, 법들 지배하는 비구는 지배하는 자이고, 지배되는 자가 아니고, 오염원이고, 미래에 태어나고 늙고 죽어야 하는 존재로 다시 이끌고 두렵고 과보가 괴로움인 그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을 제압했다고 불립니다. 도반들이여, 이렇게 오염원들이 흐르지 않습니다.”

 
마하목갈라나가 이렇게 비구들에게 설법을 마치자 세존께서는 일어나셔서 마하목갈라나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목갈라나여. 목갈라나여. 그대가 비구들에게 오염원들이 흐름에 대한 법문과 오염원들이 흐르지 않음에 대해 말한 것은 훌륭하다.”라고.  
마하목갈라나 존자는 이렇게 말했고, 스승께서는 동의하셨다. 그 비구들은 즐거워하면서 목갈라나 존자의 말씀을 기뻐했다. 

 

dukkhadhammasuttaṃ (SN 35.244-괴로움의 법 경)
244. “비구들이여, 비구가 모든 괴로움의 법들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면 그는 거기서 자신의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본다. 그가 자신의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보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냄, 감각적 쾌락에 대한 바램,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증은 더 이상 잠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는 행동하고 머무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머묾으로 해서 간탐과 고뇌와 악한 불선법들이 더 이상 그에게 잠재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모든 괴로움의 법들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아는가? 
‘이것이 물질이고,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고,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느낌이고 ··· 이것이 인식이고··· 이것이 형성이고 ··· 이것이 의식이고, 이것이 의식의 일어남이고, 이것이 의식의  사라짐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모든 괴로움의 법들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보는가?

이런 방법으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보는 자에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냄, 감각적 쾌락에 대한 바램,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증은 더 이상 잠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한 길이 넘는 연기가 나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숯불로 가득 한 숯불 구덩이가 있다. 거기에 살기를 바라고 죽기를 바라지 않으며 행복을 바라고 괴로움을 싫어하는 사람이 올 것이다. 그를 힘센 두 명이 각각 다른 팔들을 잡고서 그 숯불 구덩이로 끌고 갈 것이다. 그는 이리저리 몸을 마구 비틀며 몸부림 칠 것이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그 사람이 ‘나는 이 숯불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죽거나 죽을 만큼의 괴로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라고 알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숯불 구덩이의 비유로써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본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냄, 감각적 쾌락에 대한 바램,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증은 더 이상 잠재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행동하고 머무는 방법을 깨달으면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머묾으로 해서 간탐과 고뇌와 악한 불선법들이 더 이상 그에게 잠재하지 않는가?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많은 가시가 있는 숲에 들어갈 것이다. 그의 앞에도 가시가 있고, 뒤에도 가시가 있고, 왼쪽에도 가시가 있고, 오른쪽에도 가시가 있고, 아래에도쪽 가시가 있고, 위쪽에도 가시가 있다. 그는 ‘가시가 나를 찌르지 않았으면’이라고 오직 마음챙겨서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오직 마음챙겨서 뒤로 물러날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세상에서 즐겁고 사랑스러운 것, 성스러운 율(성자의 율)에서 이것은 가시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안 뒤에 단속함과 단속하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단속하지 못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눈으로 형색을 보고서 사랑스러운 형색에는 마음을 기울이고 사랑스럽지 않는 형색은 혐오한다.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확립하지 않고 제한된 마음으로 머문다. 그는 이미 일어난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남김없이 소멸되어 버리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한다. ··· 귀로 소리를 듣고서 ··· 코로 냄새를 맡고 ··· 혀로 맛을 맛보고서 ···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서 ··· 마음으로 법을 인식하고서 사랑스러운 법에는 마음을 기울이고 사랑스럽지 않는 법은 혐오한다.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확립하지 않고 제한된 마음으로 머문다. 그는 이미 일어난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남김없이 소멸되어버리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단속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단속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눈으로 형색을 보고서 사랑스러운 형색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사랑스럽지 않는 형색에 혐오하지 않는다.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확립하고 무량한 마음으로 머문다. 그는 이미 일어난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남김없이 소멸되어버리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 귀로 소리를 듣고서 ··· 코로 냄새를 맡고서 ··· 혀로 맛을 맛보고서 ···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서 ··· 마음으로 법을 인식하고서 사랑스러운 법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사랑스럽지 않는 법에 혐오하지 않는다.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확립하고 무량한 마음으로 머문다. 그는 이미 일어난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남김없이 소멸되어버리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단속한다.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행하고 이렇게 머무는 그 비구가 때때로 드물게 마음챙김을 놓아 버리고 악하고 선하지 않은 기억과 사유에 묶일 것이다. 비구들이여, 마음챙김이 느리게 일어난다. 그래도 그는 즉시에 그것을 버리고 제거하고 끊고 존재하지 않게 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낮 동안 뜨거워진 철판 위에 두세 방울의 물을 떨어뜨릴 것이다. 비구들이여, 물방울들이 떨어지는 것은 느리다. 그러나 그것은 빠르게 증발해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행하고 머무는 그 비구가 때때로  드물게 마음챙김을 놓아 버리고, 악하고 선하지 않은 기억과 사유에 묶일 것이다. 비구들이여, 마음챙김이 느리게 일어난다. 그래도 그는 즉시에 그것을 버리고 제거하고 끊고 존재하지 않게 한다. 그러면 그는 행동하고 머무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머묾으로 해서 간탐과 고뇌와 악한 불선법들이 더 이상 그에게 잠재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행하고 이렇게 머무는 그 비구에게 왕들이나 왕의 대신들이나 친구들이나 동료들이나 친지들이나 혈육들이 재물로써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가도록 초청하여 말할 것이다. ‘오십시오, 존자여, 왜 이 가사가 그대를 속박하도록 내버려둡니까? 왜 머리를 깎고 발우를 들고 돌아다닙니까? 오십시오!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와서 재물을 즐기고 공덕을 지으시오!’라고.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렇게 행하고 이렇게 머무는 그 비구가 청정범행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강가 강은 동쪽으로 흐르고 동쪽으로 향하고 동쪽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우리는 이 강가 강을 서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향하고 서쪽으로 들어가게 할 것이다.’라면서 괭이와 바구니를 가지고 올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강가 강을 서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향하고 서쪽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 원인은 무엇인가?

"세존이시여. 동쪽으로 흐르고 동쪽으로 향하고 동쪽으로 들어가는 강가 강을 서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향하고 서쪽으로 들어가게 하기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 많은 무리의 사람들은 지치고 피곤해 할 뿐입니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행하고 이렇게 머무는 그 비구에게 왕들이나 왕의 대신들이나 친구들이나 동료들이나 친지들이나 혈육들이 재물로써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가도록 초청하여 말할 것이다. ‘오십시오, 존자여, 왜 이 가사가 그대를 속박하도록 내버려둡니까? 왜 머리를 깎고 발우를 들고 돌아다닙니까? 오십시오!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와서 재물을 즐기고 공덕을 지으시오!’라고.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렇게 행하고 이렇게 머무는 그 비구가 청정범행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kiṃsukopamasuttaṃ (SN 35.245-낑수까 나무 비유 경)
245. 그 무렵 어떤 비구가 다른 비구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그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이여, 얼마만큼 비구에게 봄[見]의 아주 청정함이 있습니까?” 
“도반이여, 비구가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 때, 그만큼 비구에게 비구의 봄의 아주 청정함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봄(見,dassana)'을 얻는 것은 예류자가 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앙굿따라 니까야 멀리 떠남 경(A3.92)에는 "비구들이여, 봄이 생김과 더불어 성스러운 제자는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다는 견해(유신견)와, 의심과, 잘못된 관행과 계율에 대한 집착(계금취)의 세 가지 족쇄들을 제거한다."라고 나타나고 있다. 이 세 가지 족쇄를 제거한 자가 바로 예류자이다. 이처럼 봄을 얻었기 때문에 경에서는 법의 눈(dhamma-cakkhu)을 얻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여기서 '봄(見, dassana)'이란 첫 번째 도(pathama-magga 예류도)를 두고 한 말이다. 첫 번째 도는 오염원을 제거하는 역활을 성취하여 첫 번째로 열반을 보기 때문에 봄이라 부르는 것이다."(SA.iii.55)  
주석서는 나아가서 여기서는 네 가지 도 모두가 봄이라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예류도의 순간에도 봄이 청정하게 되고 과의 순간에서도 청정하게 되며 일래도, 불환도, 아라한도와 각각의 과의 순간에도 청정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히고 있다.(Ibid) 즉 본 경에서는 봄을 처음 얻는 것이 아니라 봄이 아주 청저하게 됨(suvisuddha)을 두고 대화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비구가 다른 비구들에게 봄이 아주 청정하게 됨에 대해서 물은 것은 아라한이 되는 방법에 대해서 질문 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주석서에 의하면 이 비구들은 모두 아라한이 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질문에 대한 그 비구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그 비구는 또 다른 비구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그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이여, 얼마만큼 비구에게 봄의 아주 청정함이 있습니까?”
“도반이여, 비구가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오취온.五取蘊)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 때, 그만큼 비구에게 봄의 아주 청정함이 있습니다.”

 

그러자 질문에 대한 그 비구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그 비구는 또 다른 비구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그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이여, 얼마만큼 비구에게 봄의 아주 청정함이 있습니까?”
“도반이여, 비구가 네 가지 근본물질(사대.四大)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 때, 그만큼 비구에게 봄의 아주 청정함이 있습니다."

 

그러자 질문에 대한 그 비구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그 비구는 또 다른 비구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그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이여, 얼마만큼 비구에게 봄의 아주 청정함이 있습니까?”
“도반이여, 비구가 ‘일어나는 법은 그 무엇이건 모두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일어남의 법은 무엇이든 모두 소멸의 법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 때, 그만큼 비구에게 봄의 아주 청정함이 있습니다.”

 

그러자 질문에 대한 그 비구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그 비구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기 저는 어떤 비구에게 다가갔습니다. 가서는 그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반이여, 얼마만큼 비구에게 봄[見]의 아주 청정함이 있습니까?’라고. 세존이시여, 이렇게 말하자 그 비구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도반이여, 비구가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 때, 그만큼 비구에게 봄의 아주 청정함이 있습니다.'라고. 그러나 세존이시여, 질문에 대한 그 비구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저는 다른 비구에게 다가갔습니다. 가서는 그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반이여, 얼마만큼 비구에게 봄의 아주 청정함이 있습니까?’라고. 세존이시여, 이렇게 말하자 그 비구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도반이여, 비구가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의 ··· 네 가지 근본물질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 때, ··· ‘일어나는 법은 그 무엇이건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그러나 세존이시여, 질문에 대한 그 비구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저는 세존께 왔습니다. 세존이시여, 얼마만큼 비구에게 봄의 아주 청정함이 있습니까?” 


“예를 들면, 비구여, 이전에 낑수까 나무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가 낑수까 나무를 본 적이 있는 어떤 사람에게 갈 것이다. 가서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시오, 낑수까 나무는 무엇과 같습니까(어떻게 생겼습니까)?’라고.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시오, 낑수까 나무는 검습니다. 예를 들면, 불탄 그루터기입니다.’라고. 때때로, 비구여, 그때 낑수까 나무는 그 사람이 본 것처럼 그렇게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그 사람은 낑수까 나무를 본 적이 있는 또 다른 사람에게 갈 것이다. 가서는 그 사람에게 갈 것이다. 가서는 그 사람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시오, 낑수까 나무는 무엇과 같습니까?’라고.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시오, 낑수까 나무는 붉습니다. 예를 들면, 얇게 썬 고깃살입니다.’라고. 때때로, 비구여, 그때 낑수까 나무는 그 사람이 본 것처럼 그렇게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그 사람은 낑수까 나무를 본 적이 있는 또 다른 사람에게 갈 것이다. 가서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시오, 낑수까 나무는 무엇과 같습니까?’라고.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시오, 낑수까 나무는 껍질이 길게 늘어뜨려지고 꼬투리가 터진 모습입니다. 예를 들면, 아카시아 시리사 나무입니다.’라고. 때때로, 비구여, 그때 낑수까 나무는 그 사람이 본 것처럼 그렇게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그 사람은 낑수까 나무을 본 적이 있는 또 다른 사람에게 갈 것이다. 가서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시오, 낑수까 나무는 무엇과 같습니까?’라고.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시오, 낑쑤까 나무는 많은 잎사귀를 가졌고, 큰 그늘을 드리웁니다. 예를 들면, 니그로다 나무입니다.’라고. 때때로, 비구여, 그때 낑수까 나무는 그 사람이 본 것처럼 그렇게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비구여, 그들 확신을 가진 참된 사람들은 그들의 아주 청정한 봄에 따라서 설명을 한 것이다.

 

*주석서는 마치 네 명의 다른 사람들이 그들이 본 대로 낑수까 나무를 설명하였듯이 이 네 명의 비구들도 그들의 봄을 청정하게 하여 아라한이 된 뒤에 그들이 증득한 도에 따라서 봄을 청정하게 하는 열반을 다르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SA.iii.57-59)  

"주석서에 의하면 낑수까 나뭇잎이 드리우면 새까맣게 탄 나무 등걸과 같고, 꽃이 피면 고깃덩어리와 같고, 열매가 열리면 껍질이 길게 늘어뜨려지고 꼬투리가 터지게 되고, 잎들로 뒤덮이면 만은 그늘을 준다고 한다.(SA.iii.58)  


예를 들면, 비구여, 왕의 국경에 있는 도시는 깊은 해자와 튼튼한 성벽과 망루를 가지고 있고 여섯 개의 문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현명하고 슬기로운 훈련된 문지기가 있어, 모르는 자들은 제지하고 아는 자들만 들어가게 한다. 그때 동쪽으로부터 두 명의 재빠른 전령이 달려와서 그 문지기에게 말할 것이다. ‘여보시오, 지금 이 성의 성주는 어디에 계시오?’라고. 그러면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존자시여, 그분은 중앙광장에 앉아 있습니다.’라고. 그러면 그 재빠른 전령은 성주에게 있는 그대로 보고를 한 뒤 들어온 길을 따라서 동쪽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그때 서쪽으로부터 두 명의 재빠른 전령이 ··· 북쪽으로부터 두 명의 재빠른 전령이 ··· 남쪽으로부터 두 명의 재빠른 전령이 달려와서 그 문지기에게 말할 것이다. ‘여보시오, 지금 이 성의 성주는 어디에 계시오?’라고. 그러면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존자시여, 그분은 중앙광장에 앉아 있습니다.’라고. 그러면 그 재빠른 전령은 성주에게 있는 그대로 보고를 한 뒤 들어온 길을 따라서 남쪽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비구여, 이것은 가르침의 목적을 위해 내가 만든 비유이다. 여기에는 이런 뜻이 있다.  
비구여,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것이고, 부모에게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성장한 것이며,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해체되고 분해되기 마련인 몸에게 '도시'이라고 비유했다.
비구여, 이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육내입처.六內入處)에게 '여섯 개의 문'이라고 비유했다.
비구여, 이 마음챙김에게 '문지기'라고 비유했다.
비구여, 이 사마타와 위빠사나에게 '두 명의 재빠른 전령'이라고 비유했다.
비구여, 이 의식에게 '성주'라고 비유했다.
비구여, 이 네 가지 근본물질 즉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에게 '중앙 광장'이라고 비유했다.
비구여, 이 열반에게 '있는 그대로의 말'이라고 비유했다.
비구여, 이 여덟 가지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삼매르 '들어온 길을 따라서'라고 비유했다.”

 

vīṇopamasuttaṃ (SN 35.246-류트 비유 경)
246.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에 대해서 마음으로 탐욕이나 바램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이나 혐오가 일어나는 비구나 비구니는 이렇게 마음을 굳게 다잡아야 한다. ‘이 길은 두려움이 함께하고, 공포가 함께하고, 위험하고, 장애가 되고, 빗나간 길이고, 나쁜 경로이고, 강도가 출몰하는 길이다. 고결하지 않은 사람이 실천하는 길이고, 고결한 사람은 실천하지 않는 길이다. 그러므로 그대에게 이 길은 실천할만한 길이 아니다.’라고 이렇게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에 대해서 마음을 굳게 다잡아야 한다. ···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에 대해서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에 대해서 ··· 혀로 인식되는 맛들에 대해서 ···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에 대해서 ··· 마음으로 인식되는 법들에 대해서 마음으로 탐욕이나 바램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이나 혐오가 일어나는 비구나 비구니는 그때 다음과 같이 마음은 물러나야 한다. ‘이 길은 두려움이 함께하고, 공포가 함께하고, 위험하고, 장애가 되고, 빗나간 길이고, 나쁜 경로이고, 강도가 출몰하는 길이다. 고결하지 않은 사람이 실천하는 길이고, 고결한 사람은 실천하지 않는 길이다. 그러므로 그대에게 이 길은 실천할만한 길이 아니다.’라고 이렇게 마음으로 인식되는 법들에 대해서 마음을 굳게 다잡아야 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곡식이 다 익었는데 밭을 지키는 사람이 게으름에 빠져 있다. 그러면 곡식을 좋아하는 황소가 그 밭에 들어가서 원하는 대로 마음껏 먹을 것이고 주의하지 않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배우지 못한 범부는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들을 단속하지 않고,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에 대해 원하는 만큼 취할 것이고 주의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곡식이 다 익었는데 밭을 지키는 사람이 게으르지 않는다. 만약 곡식을 좋아하는 황소가 그 밭에 들어가면 밭을 지키는 사람은 황소의 고삐를 굳게 잡을 것이다. 고삐를 굳게 잡은 뒤 두 뿔 사이에 조임틀을 조아 맬 것이다. 두 뿔 사이에 조임틀을 조아 맨 뒤에는 몽둥이로 세차게 때릴 것이다. 몽둥이로 세차게 때린 뒤에는 황소를 쫓아버릴 것이다. 비구들이여, 두 번째도 ··· 비구들이여, 세번째도 곡식이 다 익었는데 밭을 지키는 사람이 게으르지 않다. 만약 곡식을 좋아하는 황소가 그 밭에 들어가면 밭을 지키는 사람은 황소의 고삐를 굳게 잡을 것이다. 고삐를 굳게 잡은 뒤 두 뿔 사이에 조임틀을 조아 맬 것이다. 두 뿔 사이에 조임틀을 조아 맨 뒤에는 몽둥이로 세차게 때릴 것이다. 몽둥이로 세차게 때린 뒤에는 황소를 쫓아버릴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곡식을 좋아하는 황소는 마을로 갈 때나 숲으로 갈 때나 오래 서 있을 때나 오래 앉아 있을 때나, 이전에 몽둥이로 세차게 맞은 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다시는 그 밭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들에 대해서 마음을 올곧게 길들이고 잘 길들일 때 마음은 안으로 가라앉고 안정되고 집중되고 삼매에 들어진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이전에 류트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왕이나 왕의 대신이 있다. 그는 류트 소리를 듣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시오, 이렇게 탐(貪)하기 마련이고, 이렇게 원하기 마련이고, 이렇게 집착을 야기하기 마련이고, 이렇게 열중하기 마련이고 이렇게 묶이기 마련인 이 소리는 누구의 것이오?’라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존자이시여, 이것은 류트라는 것인데, 이것에게 이렇게 탐(貪)하기 마련이고, 이렇게 원하기 마련이고, 이렇게 집착을 유발하기 마련이고, 이렇게 열중하기 마련이고 이렇게 묶이기 마련인 이 소리가 있습니다.’라고.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봐라, 그대들은 가서 그 류트를 나에게 가져오라.’라고. 그에게  류트를 가져올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왕이시여, 이것이 이렇게 탐(貪)하기 마련이고, 이렇게 원하기 마련이고, 이렇게 집착을 유발하기 마련이고, 이렇게 열중하기 마련이고 이렇게 묶이기 마련인 소리를 가진 그 류트입니다.’라고.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봐라. 나에게 그 류트는 필요없다. 나에게 그 소리를 가져와라.’라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존자이시여, 이 류트는 여러 가지의 많은 요소들로 만들어졌습니다. 다양한 요소들이 합쳐서 소리를 냅니다. 즉 홈통이 있고, 가죽이 있고, 이어 붙인 것이 있고, 비어있는 부분이 있고, 줄이 있고, 채가 있고, 여기에 연주하는 사람의 노력이 있어야 소리를 냅니다. 존자이시여, 이 류트는 여러 가지의 많은 요소들로 만들어졌습니다. 다양한 요소들이 합쳐서 소리를 냅니다.’라고.
그는 그 류트를 열 개 또는 백 개로 쪼갤 것이다. 열 개로 또는 백 개로 쪼갠 뒤에 조각조각 낼 것이다. 조각조각 낸 뒤에 불로 태울 것이다. 불로 태운 뒤에 고운 재로 만들 것이다. 고운 재로 만든 뒤에 강한 바람에 날리거나 강의 거센 흐름에 흘려보낼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봐라. 참으로 이 류트나 류트라고 불리우는 것은 무엇이든 참으로 볼품없고 저열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에 도가 지나치게 주의하지 않고 빠지고 방황한다.’라고. 

이와 같이,비구들이여, 비구는 물질의 영역에 있는 한 물질을 관찰하고, 느낌의 영역에 있는 한 느낌을 관찰하고, 인식의 영역에 있는 한 영역을 관찰하고, 형성의 영역에 있는 한 형성을 관찰하고, 의식의 영역에 있는 한 의식을 관찰한다. 그렇게 관찰하는 그에게 ‘나’라거나 ‘나의 것’이라거나 ‘나는 있다.’라고 생각이 그에게 사라지게 된다


chappāṇakopamasuttaṃ (SN 35.247-여섯 동물 비유 경)

247.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몸에 상처가 있고 쇠약한 사람이 갈대숲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꾸사 풀의 가시가 발을 찌를 것이고, 갈댓잎이 사지를 깊숙이 벨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그 사람은 더욱 심하게 육체적 고통(괴로움)과 정신적 고통(고뇌)을 겪을 것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여기 마을이나 숲에 간 어떤 비구는 이런 비난하는 말을 듣는다. ‘이 존자는 이렇게 행동하는 자이고, 이런 품행을 가진 자이고, 마을 사람들을 찌르는 가시와 같은 청정하지 못한 자이다.’라고. 그러면 자신이 가시인 줄 안 뒤에 단속과 단속하지 못함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마을 사람들을 [찌르는] 가시와 같은 청정하지 못한 자'는 asuci-gama-kantaka를 풀어서 옮긴 것이다. 주석서에서 "깨끗하지 못하다는 뜻(asuddh-attha)에서 '청정하지 못한(asuci)' 것이다. 마을에 사는 사람(gama-vasi)들을 해친다는 뜻에서 가시(kantaka)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을 [찌르는] 가시라 한다."(SA.iii.69)  
복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을 해친다는 뜻에서라는 것은 대접을 받을 만하지 않으면서도 마을 사람들의 대접을 수용하는 것을 통해서 성가시게 한다는 뜻에서라는 말이다.(SAT.iii.62)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단속하지 못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눈으로 형색을 보고 사랑스러운 형색에는 마음을 기울이고, 사랑스럽지 않는 형색은 혐오한다. 그는 마음 챙김을 확립하지 못하고 제한된 마음으로 머문다. 그는 이미 일어난 삿된 불선법들이 남김없이 소멸되어버리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한다. ··· 귀로 소리를 듣고 ··· 코로 냄새를 맡고 ··· 혀로 맛을 맛보고 ···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 마음으로 법을 인식하고 사랑스러운 법에는 마음을 기울이고, 사랑스럽지 않는 법은 혐오한다. 그는 마음 챙김을 확립하지 못하고 제한된 마음으로 머문다. 그는 이미 일어난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남김없이 소멸되어버리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여러 대상과 여러 영역을 가진 여섯 생명을 튼튼한 밧줄로 묶을 것이다. 뱀을 잡아 튼튼한 밧줄로 묶을 것이고, 악어를 잡아 튼튼한 밧줄로 묶을 것이고, 새를 잡아 튼튼한 밧줄로 묶을 것이고, 개를 잡아 튼튼한 밧줄로 묶을 것이고, 자칼을 잡아 튼튼한 밧줄로 묶을 것이고, 원숭이를 잡아 튼튼한 밧줄로 묶을 것이다. 이 튼튼하게 묶은 밧줄들을 모두 가운데로 모아 매듭으로 묶은 뒤에 풀어줄 것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여러 대상과 여러 영역을 가진(각각 다른 삶의 분야와 각각 다른 먹이의 영역을 가진) 그 여섯 생명은(동물들은) 모두 자기 자신의 영역과 대상으로(먹이의 영역과 삶의 분야로) 가려고 할 것이다. 뱀은 '나는 개미집으로 들어갈 것이다.'라고 잡아끌 것이고, 악어는 '나는 물로 들어갈 것이다.'라고 잡아끌 것이고, 새는 '나는 허공으로 날아갈 것이다.'라고 잡아끌 것이고, 개는 '나는 마을로 들어갈 것이다.'라고 잡아끌 것이고, 자칼은 '나는 공동묘지로 갈 것이다.'라고 잡아끌 것이고, 원숭이는 '나는 숲으로 갈 것이다.'라고 잡아끌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 여섯 동물들이 지치고 피곤해질 때, 그 가운데서 더 힘이 센 생명에게 그들은 따를 것이고 그가 끄는대로 끌려갈 것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몸에 속한 마음챙김을 닦고 많이 행하지 않은 비구에게 눈은 그를 마음에 드는 형색들로 끌고 갈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형색들에 대해서는 혐오하게 할 것이다. ··· 귀는 ··· 코는 ··· 혀는 ··· 몸은 ··· 마음은 그를 마음에 드는 법들로 끌고 갈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법들에 대해서는 혐오하게 할 것이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그는 단속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단속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눈으로 형색을 보고 사랑스러운 형색에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사랑스럽지 않는 형색에도 혐오하지 않는다. 그는 마음 챙김을 확립하고 무량한(제한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그는 이미 일어난 삿된 불선법 남김없이 소멸되어버리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 귀로 소리를 듣고 ··· 코로 냄새를 맡고 ··· 혀로 맛을 보고 ···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 마음으로 법을 인식하고 사랑스러운 법에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사랑스럽지 않는 법도 혐오하지 않는다. 그는 마음 챙김을 확립하고 무량한 마음으로 머문다. 그는 이미 일어난 삿된 불선법들이 남김없이 소멸되어버리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여러 대상과 여러 영역을 가진 여섯 생명을 튼튼한 밧줄로 묶을 것이다. 뱀을 잡아 튼튼한 밧줄로 묶을 것이고, 악어를 잡아 튼튼한 밧줄로 묶을 것이고, 새를 잡아 튼튼한 밧줄로 묶을 것이고, 개를 잡아 튼튼한 밧줄로 묶을 것이고, 자칼을 잡아 튼튼한 밧줄로 묶을 것이고, 원숭이를 잡아 튼튼한 밧줄로 묶을 것이다. 튼튼한 밧줄로 묶은 뒤 모두 튼튼한 말뚝이나 기둥에 묶을 것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여러 대상과 여러 영역을 가진 그 여섯 생명은 모두 자기 자신의 영역과 대상으로 가려고 할 것이다 뱀은 '나는 개미집으로 들어갈 것이다.'라고 잡아끌 것이고, 악어는 '나는 물로 들어갈 것이다.'라고 잡아끌 것이고, 새는 '나는 허공으로 날아갈 것이다.'라고 잡아끌 것이고, 개는 '나는 마을로 들어갈 것이다.'라고 잡아끌 것이고, 자칼은 '나는 공동묘지로 갈 것이다.'라고 잡아끌 것이고, 원숭이는 '나는 숲으로 갈 것이다.'라고 잡아끌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다가 이들 여섯 동물들이 지치고 피곤해지면, 그 말뚝이나 기둥 가까이에 서고, 가까이에 앉고, 가까이에 눕게 될 것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몸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고 많이 행한 비구에게 눈은 그를 마음에 드는 형색들로 끌고 가지 못할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형색들에 대해서 혐오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 귀는 ··· 코는 ··· 혀는··· 몸은 ··· 마음은 그를 마음에 드는 법들로 끌고 가지 못할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법들에 대해서는 혐오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그는 단속한다.

 

비구들이여, '튼튼한 말뚝이나 기둥'이라는 이 말은 몸에 대한 마음 챙김을 두고 한 말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렇게 닦아야 한다. 
‘우리는 몸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고 많이 행하고, 정통하고, 철저히 실천하고, 따라 이루고, 축적하고, 노력을 잘 다질 것이다.’라고.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렇게 닦아야 한다.”

 

yavakalāpisuttaṃ (SN 35.248-보릿단 경)
248.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사거리에 보릿단이 놓여 있을 것이다. 그때 여섯 사람이 도리깨를 손에 들고 와서 그 보릿단을 여섯 개의 도리깨로 때릴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하면 그 보릿단은 여섯 개의 도리깨로 잘 타작이 될 것이다. 그때 다시 일곱 번째 사람이 도리깨를 손에 들고 올 것이다. 그는 일곱 번째 도리깨로 보릿단을 때릴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하여 그 보릿단은 그 일곱 번째 도리깨로 때려져서 더욱 잘 타작이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배우지 못한 범부는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형색들에 의해 눈에서 타격 당한다.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들에 의해 귀에서 타격 당한다.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냄새들에 의해 코에서 타격당한다.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맛들에 의해 혀에서 타격당한다.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감촉들에 의해서 몸에서 타격당한다.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법들에 의해 마음에서 타격당한다. 비구들이여, 만일 그 배우지 못한 범부가 미래에 다시 태어남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면 그 쓸모없는 범부는 더욱 해침을 당한다. 마치 일곱 번째 도리깨로 타격 당하는 그 보릿단과 같다.

 

비구들이여, 옛날에 신과 아수라들 간에 전쟁이 있었다. 그때 아수라의 왕 웨빠찟띠는 아수라들을 불러서 말했다.
‘존자들이여, 만일 신과 아수라들 간에 전쟁이 발발하여 아수라들이 이기고 신들이 패하면 신들의 왕 삭까의 사지와 목을 밧줄로 묶어서 내 곁에 데려오시오. 나는 아수라들의 도시에 있겠소.’
비구들이여, 신들의 왕 삭까도 삼십삼천의 신들을 불러서 말했다.
‘존자들이여, 만일 신과 아수라들 간에 전쟁이 발발하여 신들이 이기고 아수라들이 패하면 아수라의 왕 웨빠찟띠의 사지와 목을 밧줄로 묶어서 내 곁에 데려오시오. 나는 수담마 의회에 있겠소.’
비구들이여, 그 전쟁에서 신들이 이기고 아수라들이 패했다. 비구들이여, 그러자 삼십삼천의 신들은 아수라의 왕 웨빠찟띠의 사지와 목을 밧줄로 묶어서 수담마 의회에 있는 신들의 왕 삭까의 곁으로 데리고 갔다. 비구들이여, 거기서 아수라의 왕 웨빠찟띠는 사지와 목이 밧줄로 묶여 있었다. 
그런데 아수라의 왕 웨빠찟띠에게 ‘신들은 법답고 아수라들은 법답지 못하다. 그러니 나는 지금 신들의 도시로 간다.’라는 생각이 들자 그의 사지와 목에 묶여 있던 밧줄이 풀어지고 다섯 가닦의 감각적 쾌락들을 갖추고 완비하여 즐기게 되었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아수라의 왕 웨빠찟띠에게 ‘아수라들은 법답고 신들은 법답지 못하다. 그러니 나는 지금 아수라들의 도시로 갈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자 자신의 사지와 목이 밧줄로 묶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천상의 다섯 가닥의 감각적 쾌락들이 없어져버렸다. 비구들이여, 아수라의 왕 웨빠찟띠의 속박은 이처럼 미묘하다. 그러나 마라의 속박은 이보다도 더 미묘하다. 비구들이여, 분별하는(사량하는) 자는 마라에게 묶인 자이고 분별하지 않는 자는 마라 빠삐만으로부터 풀려난 자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있다.’라는 것은 분별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다.’라는 것은 분별하는 것이다. ‘나는 있을 것이다.’라는 것은 분별하는 것이다. ‘나는 있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분별하는 것이다. ‘나는 물질을 가지게 될 것이다.’라는 것은 분별하는 것이다. ‘나는 물질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분별하는 것이다. ‘나는 인식(상.想)을 가질 것이다.’라는 것은 분별하는 것이다. ‘나는 인식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분별하는 것이다. ‘나는 인식을 가지지도 않고 인식을 가지지 않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분별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분별하는 것은 병이고 분별하는 것은 종기고 분별하는 것은 쇠살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 
‘우리는 분별하지 않는 마음으로 머무를 것이다.’라고 그대들은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있다.’라는 것은 동요다. ‘나는 이것이다.’라는 것은 동요다. '나는 있을 것이다'라는 것은 동요다. '나는 있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동요다. '나는 물질을 가지게 될 것이다'라는 것은 동요다. '나는 물질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동요다. '나는 인식을 가질 것이다'라는 것은 동요다. '나는 인식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동요다. ‘나는 인식을 가지지도 않고 인식을 가지지 않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동요다. 비구들이여, 이런 동요는 병이고 동요는 종기고 동요는 쇠살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
‘우리는 동요하지 않는 마음으로 머무를 것이다.’라고 그대들은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있다.’라는 것은 혼란이다. ‘나는 이것이다.’라는 것은 혼란이다. '나는 있을 것이다'라는 것은 혼란이다. '나는 있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혼란이다. '나는 물질을 가지게 될 것이다'라는 것은 혼란이다. '나는 물질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혼란이다. '나는 물질을 가지지도 않고 물질을 가지지 않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혼란이다. '나는 인식을 가질 것이다'라는 것은 혼란이다. '나는 인식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혼란이다. ‘나는 인식을 가지지도 않고 인식을 가지지 않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혼란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혼란은 병이고 혼란은 종기고 혼란은 쇠살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 
‘우리는 혼란이 없는 마음으로 머무를 것이다.’라고 그대들은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있다.’라는 것은 집착이다. ‘나는 이것이다.’라는 것은 망상(妄想)이다. '나는 있을 것이다'라는 것은 망상이다. '나는 있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망상다. '나는 물질을 가지게 될 것이다'라는 것은 망상이다. '나는 물질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망상이다. '나는 물질을 가지지도 않고 물질을 가지지 않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망상이다. '나는 인식을 가질 것이다'라는 것은 망상이다. '나는 인식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집착이다. ‘나는 인식을 가지지도 않고 인식을 가지지 않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망상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망상은 병이고 집착은 종기고 집착은 쇠살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
‘우리는 집착없는 마음으로 머무를 것이다.’라고 그대들은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있다.’라는 것은 자만에 빠진 것이다. ‘나는 이것이다.’라는 것은 자만에 빠진 것이다. '나는 있을 것이다'라는 것은 자만에 빠진 것이다. '나는 있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자만에 빠진 것이다. '나는 물질을 가지게 될 것이다'라는 것은 자만에 빠진 것이다. '나는 물질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자만에 빠진 것이다. '나는 물질을 가지지도 않고 물질을 가지지 않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자만에 빠진 것이다. '나는 인식을 가질 것이다'라는 것은 자만에 빠진 것이다. '나는 인식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자만에 빠진 것이다. ‘나는 인식을 가지지도 않고 인식을 가지지 않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자만에 빠진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자만에 빠진 것은 병이고 자만에 빠진 것은 종기고 자만에 빠진 것은 쇠살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 
‘우리는 자만을 제거한 마음으로 머무를 것이다.’라고 그대들은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

제19장 독사 품이 끝났다. 

육처 상윳따(S35)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