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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상윳따 - 제2장 한적한 곳에 감 품(SN36:11-SN36:20.Rahogata-vagga)

실론섬 2014. 6. 20. 20:47

제2장 한적한 곳에 감 품
Rahogata-vagga (SN 36.11-20)

rahogatasuttaṃ (SN 36.11-한적한 곳에 감 경)
259. 그 무렵 어떤 비구가 세존떼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그 비구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한적한 곳에 가서 홀로 머무는 중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세존께서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다. 또한 세존께서는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움에 속한다(괴로움의 영역에 있다).'라고 설하셨다.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움에 속한다.’라고 세존께서 설하신 이 말씀은 무엇에 관한 것일까?라고.”

 

“훌륭하고 훌륭하다, 비구여. 비구여, 나는 이 세 가지 느낌을 설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이 세 가지 느낌을 나는 설했다. 또한, 비구여,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움에 속한다.’라고 행(형성력)들의 무상함에 관해서 나는 설했다. 비구여,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움에 속한다.'라고 행들의 부서지는 성질(부서지기 마련인 법) ··· 사라지는 성질(사라지기 마련인 법) ··· 탐욕의 떠남의 성질(탐욕이 떠나기 마련인 법) ··· 소멸하는 성질(소멸하기 마련인 법) ··· 변하는 성질(변하기 마련인 법)에 관해서 나는 설했다.

 

*행(sankhara)이란 경전의 여러곳에서는 12연기의 지분에 속한 개념으로서 '형성력', 혹은 5온의 구성요소에 속한 개념으로서 '형성작용(형성)'이라 번역하고 있다. 이 용어는 산스끄리뜨어 samvkr와 기원이 동일하며, '이루는(sam)'. 작용(vkr)'이라고하는 어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어원적 의미로 볼 때 한역의 '잠재력(潛在力)'이라는 번역이 적당할 것이다. 즉 외형적으로 드러난 현상을 유발하는 '내적인 힘' 혹은 '원동력'을 의미하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sankhara 의 의미는 그러한 내적인 힘이 밖으로 드러난 경우에도 적용된다. 그것은 '일어남'. '이어짐'. '드러난 모습'등의 유위(有爲)의 현상세계를 특정지우는 개념들이다. 초기불교에서 sankhara 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언어적인 것(vaci), 육체적인 것(kaya), 정신적인 것(citta)등에 의한 구분이 그러하다. 이들 모두는 그러한 '내적인 힘'으로써 잠재력 혹은 업의 이미를 담지함과 동시에 그것이 밖으로 드러난 현상을 가르키기도 한다.

 

그리고 비구여, 행들의 점진적인 소멸도 나는 설했다.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 말이 소멸한다. 제2선을 증득한 자에게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가 소멸한다. 제3선을 증득한 자에게 희열(기쁨)이 소멸한다. 제4선을 증득한 자에게 들숨·날숨이 소멸한다. 공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 물질의 인식(色想.색상)이 소멸한다. 식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 공무변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무소유처를 증득한 자에게 식무변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한 자에게 무소유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상수멸을 증득한 자에게 지각(상.想)과 느낌(수.受)이 소멸한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한다. 

 

또한, 비구여, 행들의 점진적인 가라앉음도 나는 설했다.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 말이 가라앉는다. 제2선을 증득한 자에게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는다제3선을 증득한 자에게 기쁨이 가라앉는다제4선을 증득한 자에게 들숨·날숨이 가라앉는다. 공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 물질의 인식이 가라앉는다. 식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 공무변처의 인식이 가라앉는다. 무소유처를 증득한 자에게 식무변처의 인식이 가라앉는다.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한 자에게 무소유처의 인식이 가라앉는다. 상수멸을 증득한 자에게 인식과 느낌이 가라앉는다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이 가라앉고, 성냄이 가라앉고, 어리석음이 가라앉는다.

 

비구여, 이런 여섯 가지 고요함이 있다. 초선(初禪)을 증득한 자에게 말이 고요해진다. 제이선(第二禪)을 증득한 자에게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고요해진다. 제삼선(第三禪)을 증득한 자에게 희열이 고요해진다. 제사선(第四禪)을 구족한 자에게 들숨·날숨이 고요해진다. 상수멸(想受滅)을 증득한 자에게 인식과 느낌이 고요해진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 탐욕이 고요해지고, 성냄이 고요해지고, 어리석음이 고요해진다."

 

paṭhamāakāsasuttaṃ (SN 36.12-허공 경1)

260.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허공에는 다양한 바람이 분다. 동쪽에서도 바람이 불고, 서쪽에서도 바람이 불고, 북쪽에서도 바람이 불고, 남쪽에서도 바람이 분다. 먼지가 있는 바람도 불고, 먼지가 없는 바람도 불고, 차가운 바람도 불고, 뜨거운 바람도 불고, 약한 바람도 불고, 강한 바람도 분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이 몸에도 다양한 느낌들이 일어난다. 즐거운 느낌도 일어나고, 괴로운 느낌도 일어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일어난다."

 

'허공에는 다양한 여러 가지 바람들이 분다.

동쪽에서도 서쪽에서도 그리고 북쪽에서도 남쪽에서도

 

먼지가 있는 바람과 먼지가 없는 바람 그리고 차가운 바람과 뜨거운 바람

약한 바람과 강한 바람 등 여러 가지 바람이 분다.

 

그와 같이 이 몸에는 느낌들이 일어난다.

즐거움과 괴로움 그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난다.

 

열의를 가지고 분명히 살피어 노력하는 비구가 정진하면

그 현명한 자는 모든 느낌들을 철저히 알아차린다.

 

금·여기에서 번뇌가 없고, 올바르고, 높은 앎을 성취한 그는
느낌들을 철저히 알아 차리기 때문에 몸이 무너질 때 법에 확고히 머물며

헤아림으로는 미치지 못한다.'

 

dutiyāakāsasuttaṃ (SN 36.13-허공 경2)

261.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허공에는 다양한 바람이 분다. 동쪽에서도 바람이 불고, 서쪽에서도 바람이 불고, 북쪽에서도 바람이 불고, 남쪽에서도 바람이 분다. 먼지가 있는 바람도 불고, 먼지가 없는 바람도 불고, 차가운 바람도 불고, 뜨거운 바람도 불고, 약한 바람도 불고, 강한 바람도 분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이 몸에도 다양한 느낌들이 일어난다. 즐거운 느낌도 일어나고, 괴로운 느낌도 일어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일어난다."  

 

agārasuttaṃ (SN 36.14-객사(客舍 경)
262.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손님을 위한 객사가 있다. 거기에는 동쪽에서 온 사람들이 머물기도 하고, 서쪽에서 온 사람들이 머물기도 하고, 북쪽에서 온 사람들이 머물기도 하고, 남쪽에서 온 사람들이 머물기도 한다. 끄샤뜨리야들이 와서 머물기도 하고, 바라문들이 와서 머물기도 하고, 와이샤들이 와서 머물기도 하고, 수드라들이 와서 머물기도 한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이 몸에는 여러 종류의 느낌들이 일어난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기도 하고,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기도 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기도 한다. 세속적인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기도 하고, 세속적인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기도 하고, 세속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기도 한다. 비세속적인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기도 하고, 비세속적인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기도 하고, 비세속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기도 한다.”

 

paṭhamāanandasuttaṃ (SN 36.15-아난다 경1)
263. 그 무렵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느낌이고, 무엇이 느낌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느낌의 소멸이고, 무엇이 느낌의 소멸에 이르는 길입니까? 무엇이 느낌의 맛이고, 무엇이 위험이고, 무엇이 벗어남입니까?”

 

아난다여, 이런 세 가지 느낌이 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아난다여, 이것이 느낌이라고 불린다. 감각접촉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한다. 여덟 가지 성스러운 바른 길이 느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삼매이다.

 

느낌을 연(緣)하여 일어나는 즐거움(락.(樂)과 희열(희.喜), 이것이 느낌의 맛이다. 느낌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인 법, 이것이 느낌의 위험이다. 느낌에 대한 욕탐을 길들임과 욕탐의 버림, 이것이 느낌의 벗어남이다.

 

그리고, 아난다여, 행들의 점진적인 소멸도 나는 설했다.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 말이 소멸한다. ··· 상수멸을지각증득한 자에게 인식과 느낌이 소멸한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한다.

 

또한, 아난다여, 행들의 점진적인 가라앉음도 나는 설했다.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 말이 가라앉는다. ··· 상수멸(想受滅)을 증득한 자에게 인식과 느낌이 가라앉는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이 가라앉고, 성냄이 가라앉고, 어리석음이 가라앉는다.

 

또한, 아난다여, 행들의 점진적인 고요함도 나는 설했다.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 말이 고요해진다. ··· 상수멸을 증득한 자에게 인식과 느낌이 고요해진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이 고요해지고, 성냄이 고요해지고, 어리석음이 고요해진다.”

 

dutiyāanandasuttaṃ (SN 36.16-아난다 경2)
264. 그 무렵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무엇이 느낌이고, 무엇이 느낌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느낌의 소멸이고, 무엇이 느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인가? 무엇이 느낌의 맛이고, 무엇이 위험이고, 무엇이 벗어남인가?”

 

세존이시여, 저에게 법은 세존을 뿌리로 하는 것이고 세존에 의해 이끌어지는 것이며 세존을 의지처로 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의 그 뜻을 잘 설명해 주십시요. 저희들은 세존의 가르침을 듣고 잘 간직하겠습니다.”

“아난다여, 그렇다면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말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이런 세 가지 느낌이 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아난다여, 이것이 느낌이라고 불린다.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느낌이 일어나고 ···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이 고요해지고, 성냄이 고요해지고, 어리석음이 고요해진다.”

 

paṭhamasambahulasuttaṃ (SN 36.17-많은 비구 경1)
265. 그 무렵 많은 비구들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그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느낌이고, 무엇이 느낌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느낌의 소멸이고, 무엇이 느낌의 소멸에 이르는 길입니까? 무엇이 느낌의 맛이고, 무엇이 위험이고, 무엇이 벗어남입니까?”

 

"비구들이여, 이런 세 가지 느낌이 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느낌이라고 불린다. 감각접촉의 일어남으로부터 느낌의 일어남이 있고, 감각접촉의 소멸로부터 느낌의 소멸이 있다. 오직 이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바른 길이 느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니,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삼매이다.

 

느낌을 연하여 일어나는 즐거움과 희열, 이것이 느낌의 맛이다. 느낌은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 이것이 느낌의 위험이다. 느낌에 대한 욕탐의 길들임과 욕탐의 버림, 이것이 느낌의 벗어남이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행들의 점진적인 소멸도 나는 설했다.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 말이 소멸한다. ···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한다.

 

또한, 비구들이여, 행들의 점진적인 가라앉음도 나는 설했다.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말이 가라앉는다. ···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이 가라앉고, 성냄이 가라앉고, 어리석음이 가라앉는다.  

 

또한, 비구들이여, 이런 여섯 가지 고요함이 있다.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 말이 고요해진다. ···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이 고요해지고, 성냄이 고요해지고, 어리석음이 고요해진다.”

 

dutiyasambahulasuttaṃ (SN 36.18-많은 비구 경2)
266. 그 무렵 많은 비구들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그 비구들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느낌이고, 무엇이 느낌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느낌의 소멸이고, 무엇이 느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인가? 무엇이 느낌의 맛이고, 무엇이 위험이고, 무엇이 벗어남인가?” 

세존이시여, 저희에게 법은 세존을 뿌리로 하는 것이고 세존의 의해 이끌어 지는 것이며 세존을 의지처로 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의 그 뜻을 잘 설명해 주십시요. 저희들은 세존의 가르침을 듣고 잘 간직하겠습니다.”

“비구들이여, 이런 세 가지 느낌이 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비구들이여, 이것이 느낌이라고 불린다. ··· 감각접촉의 일어남으로부터 ···. 

 

pañcakaṅgasuttaṃ (SN 36.19-빤짜깡가 경)
267. 그 무렵 빤짜깡가 목수가 우다이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우다이 존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몇 가지 느낌을 말씀하셨습니까?”

“목수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말씀하셨습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목수여, 세존께서는 이런 세 가지 느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개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세존께서는 두 가지 느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존자시여, 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평온(평화)의 영역에 있는 수승한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도 우다이 존자는 빤짜깡가 목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목수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말씀하셨습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목수여, 세존께서는 이런 세 가지 느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개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세존께서는 두 가지 느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존자시여, 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평온(평화)의 영역에 있는 수승한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도 우다이 존자는 반짜깡가 목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목수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말씀하셨습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목수여, 세존께서는 이런 세 가지 느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개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세존께서는 두 가지 느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존자시여, 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평온(평화)의 영역에 있는 수승한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다이 존자는 얼굴을 마주한 빤짜깡가 목수를 설득할 수 없었고, 빤짜깡가 목수도 얼굴을 마주한 우다이 존자를 설득할 수 없었다. 아난다 존자가 우다이 존자와 빤짜깡가 목수 사이에 있었던 이 대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자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우다이 존자와 빤짜깡가 목수 사이에 있었던 대화의 상세한 내용을 세존께 말씀드렸다. 세존께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빤짜깡가 목수가 우다이에게 동의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다. 또한, 우다이가 빤짜깡가 목수에게 동의하지 않은 것도 이유가 있다. 나는 방편에 따라 느낌들을 두 가지로 말했고, 방편에 따라 느낌들을 세 가지로 말했고, 방편에 따라 다섯 가지로 말했고, 방편에 따라 여섯 가지로 말했고, 방편에 따라 열여덟 가지로 말했고, 방편에 따라 서른 여섯 가지로 말했고, 방편에 따라 백여덟 가지로 말했다. 아난다여, 이렇게 나는 방편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법을 설했다. 참으로 아난다여, 이렇게 내가 방편에 따라 설한 법에 대해 잘 말해지고 잘 설해진 것이라고 서로 간에 동의하지 않고 수긍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논쟁이 생기고 갈등이 생기고 분쟁하게 되고 입의 칼로 서로를 찌르면서 머물 것이 예상된다. 아난다여, 이렇게 내가 방편에 설한 법에 대해 잘 말해지고 잘 설해진 것이라고 서로 간에 동의하고 수긍하고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화합하고 즐거워하고 다투지 않고 우유와 물이 섞인 것 같고 서로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면서 머물 것이 예상된다.

 

아난다여, 이런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불러 일으키고 환락을 야기하기 마련인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 ···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 ··· 혀로 인식되는 맛들 ···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불러 일으키고 환락을 야기하기 마련인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 있다. 아난다여, 이런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이 있다. 아난다여, 이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을 연(緣)하여 일어나는 즐거움과 기쁨, 이것이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욕락.慾樂)이라고 불린다. 아난다여,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과 기쁨이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인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희열.喜]과 즐거움[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과 기쁨이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인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과 기쁨이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인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성자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제3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과 기쁨이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인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과 기쁨이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인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물질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초월하고 장애의 인식을 초월하고 갖가지 인식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과 기쁨이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인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의식’라고 하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과 기쁨이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인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원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과 기쁨이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인식(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과 기쁨이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인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지각과 느낌의 소멸인 상수멸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다.

 

그런데 아난다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사문 고따마는 인식과 느낌의 소멸(상수멸.想受滅)을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즐거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라고.

아난다여, 이렇게 말하는 외도 유행승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줘야 한다.

‘도반들이여, 세존께서는 즐거운 느낌만을 즐거움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도반들이여, 여래께서는 즐거움이면 그것은 언제 어디서 얻어지건 간에 즐거움이라고 천명하십니다.'라고."

 

*'소멸(nirodha)'은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이기 때문에 즐거움이 된다.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과 여덟 가지 증득을 통해서 생긴 즐거움은 느껴진 즐거움이지만 소멸은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느껴진 즐거움이든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이든 괴로움이 없는 상태라 불리는 즐거움이라는 뜻에서 전적으로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SA.iii.80)  

*느껴진 즐거움이든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이든 간에 그것이 괴로움이 없는 상태이면 여래께서는 그것을 모두 즐거움(행복)에 포함시켜서 말씀하셨다는 뜻이다. 본경에서 세존께서는 상수멸을 으뜸으로 삼으셔서 아라한됨을 정점으로 하여 제도되어야 할 사람에게 법을 설하셨다.(SA.iii.80)   

 

bhikkhusuttaṃ (SN 36.20-비구 경)

268. “비구들이여, 나는 방편에 따라 느낌들을 두 가지로 말했고, 방편에 따라 느낌들을 세 가지로 말했고, 방편에 따라 다섯 가지로 말했고, 방편에 따라 여섯 가지로 말했고, 방편에 따라 열여덟 가지로 말했고, 방편에 따라 서른 여섯 가지로 말했고, 방편에 따라 백여덟 가지로 말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나는 방편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법을 설했다. 참으로 아난다여, 이렇게 내가 방편에 따라 설한 법에 대해 잘 말해지고 잘 설해진 것이라고 서로 간에 동의하지 않고 수긍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논쟁이 생기고 갈등이 생기고 분쟁하게 되고 입의 칼로 서로를 찌르면서 머물 것이 예상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내가 방편에 설한 법에 대해 잘 말해지고 잘 설해진 것이라고 서로 간에 동의하고 수긍하고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화합하고 즐거워하고 다투지 않고 우유와 물이 섞인 것 같고 서로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면서 머물 것이 예상된다.

 

비구들이여, 이런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이 있다. ··· 그런데 비구들이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사문 고따마는 인식과 느낌의 소멸(상수멸.想受滅)을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즐거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는 외도 유행승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줘야 한다. ‘도반들이여, 세존께서는 즐거운 느낌만을 즐거움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도반들이여, 여래께서는 즐거움이면 그것은 언제 어디서 얻어지건 간에 즐거움이라고 천명하십니다.'라고."

 

  

제2장 한적한 곳에 감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