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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상윳따 - 느낌 상윳따(Vedanā-saṁyutta) - 제1장 게송과 함께 품(SN36:1-SN36:10. Sagātha-vagga)

실론섬 2014. 6. 20. 14:30

                

제36주제(S36) 느낌 상윳따
Vedanā-saṁyutta

 

제1장 게송과 함께 품

Sagātha-vagga (SN 36.1-10)

 

samādhisuttaṃ (SN 36.1-삼매 경)

249. “비구들이여, 이런 세 가지 느낌이 있다. 어떤 셋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세 가지 느낌이 있다.”


'마음챙김을 확립하고 분명히 알고 삼매를 닦는 세존의 제자는

느낌들과 느낌들의 일어남 그리고 이들이 소멸하는 곳과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안다.

느낌들의 소멸로부터 비구는 갈망이 없고 완전히 꺼진다.'

 

sukhasuttaṃ (SN 36.2-행복(즐거움) 경)

250. “비구들이여, 이런 세 가지 느낌이 있다. 어떤 셋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세 가지 느낌이 있다.”


'만약 안과 밖에 어떤 것이 있다 해도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이든 그것은 느껴진 것이다.


‘거짓된 것이고 파괴되도록 정해진 그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안 뒤에

그것들이 닿고 또 닿았다가 사라져 가는 현상을 지켜봄으로써 거기서 탐욕이 사라진다.'

 

pahānasuttaṃ (SN 36.3-버림 경)

251. “비구들이여, 이런 세 가지 느낌이 있다. 어떤 셋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비구들이여,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욕의 잠재성향은 버려져야 하고, 괴로운 느낌에 대한 성냄(분노.적의)의 잠재성향은 버려져야 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명의 잠재성향은 버려져야 한다.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욕의 잠재성향이 버려지고, 괴로운 느낌에 대한 성냄의 잠재성향이 버려지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명의 잠재성향이 버려질 때, 비구들이여, 이것이 ‘비구는 잠재성향이 없고, 바른 견해를 가졌고,  갈애를 잘랐고, 족쇄를 풀었고, 자만을 바르게 관통하여 괴로움을 끝내었다.’라고 불린다.”

 

'즐거움을 느끼면서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에게

그는 탐욕의 잠재성향이 있고(탐욕에 마음이 기울어져), 견해의 벗어남이 없다.

 

괴로움을 느끼면서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에게

그는 성냄의 잠재성향이 있고, 견해의 벗어남이 없다.

 

광대한 지혜를 가진 자에 의해 선언된 평화로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그는 그것을 기뻐하고(그것에 매달리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비구가 열렬함을 지니고 분명히 알아차리는 닦음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

그 현명한 자는 모든 느낌들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린다.

 

지금·여기에서 번뇌가 없고, 올바르고, 높은 앎을 성취한 그는

느낌들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기 때문에 몸이 무너질 때엔 법의 길에 확고해지며

어떤 헤아림으로도 그를 가늠할 길이 없게된다.'

 

pātālasuttaṃ (SN 36.4-깊은 구렁텅이 경)
252. “비구들이여, ‘큰 바다에는 깊은 구렁텅이가 있다.’라는 말을 하는 배우지 못한 범부가 있다.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 배우지 못한 범부가 있지 않은 것,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큰 바다에는 깊은 구렁텅이가 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깊은 구렁텅이’이라는 것은 몸에 속한 그 괴로운 느낌들을 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몸에 속한 그 괴로운 느낌에 닿아 있는(겪는) 배우지 못한 범부는 슬퍼하고 힘들어하고 비탄에 빠지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고 당황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깊은 구렁텅이를 감내하지 못했다. 깊이를 느끼지 못했다(발 디딜 곳을 찾지 못했다).'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몸에 속한 그 괴로운 느낌에 닿아 있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슬퍼하지 않고, 힘들어하지 않고, 비탄에 빠지지 않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지 않고 당황하지 않는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깊은 구렁텅이를 감내했다. 깊이를 느꼈다(발 디딜 곳을 찾았다).'라고 불린다.”  

 

'목숨을 앗아갈 것 같은 몸에서 일어나는 괴로운 느낌들을 감내하지 못하는 사람,

그것들에 의해 닿아진 그는 두려움에 떤다.

 

나약하고 강하지 못한 자는 울부짖고 큰 소리로 통곡한다. 

그는 깊은 구렁텅이를 감내하지 못한다. 또한, 깊이를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나 목숨을 앗아갈 것 같은 몸에서 일어나는 괴로운 느낌들을 감내하는 사람,

그것들에 의해 닿아진 그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참으로 깊은 구렁텅이를 감내한다. 또한, 깊이를 경험한다(안전한 발판을 확보한다).'

 

daṭṭhabbasuttaṃ (SN 36.5-보아야 함 경) 

253. “비구들이여, 이런 세 가지 느낌이 있다. 어떤 셋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비구들이여, 즐거운 느낌들을 괴로움으로 보아야 한다. 괴로운 느낌은 화살로 보아야 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비구가 즐거운 느낌들을 괴로움으로 보고, 괴로운 느낌들을 화살로 보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무상한 것으로 볼 때, 비구들이여, 이것이 '비구는 바른 견해를 가졌고, 갈애를 잘라버렸고, 족쇄를 풀어버렸고, 자만을 바르게 관통하여 괴로움을 끝내었다.'라고 불린다.”

 

'즐거움을 괴로움으로 보고, 괴로움을 화살로 보고, 

평화로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무상으로 보는 자,   

참으로 바른 견해를 가진 그 비구는 느낌을 철저히 알아차린다.
  

지금·여기에서 번뇌가 없고, 올바르고, 높은 앎을 성취한 그는   

느낌을 있는 철저히 알기 때문에 몸이 무너질 때 법의 길에 확고하다. 

어떤 헤아림으로도 그를 가늠할 길이 없다.'

 

sallasuttaṃ (SN 36.6-화살 경)

254.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도 즐거운 느낌을 느끼고, 괴로운 느낌을 느끼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 비구들이여,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도 즐거운 느낌을 느끼고, 괴로운 느낌을 느끼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 비구들이여, 거기서 배우지 못한 범부에 비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에게 어떤 차이, 어떤 특별함, 어떤 다른 점이 있는가?”
“세존이시여, 저희들의 법은 세존을 뿌리로 하는 것이고, 세존에 의해 이끌어지는 것이며, 세존을의지처로 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의 그 듯을 잘 설명해 주십시오. 저희들은 세존을 가르침을 듣고 잘 간직하겠습니다."

 

"비구들이여, 괴로운 느낌에 닿아 있는 배우지 못한 범부는 슬퍼하고 힘들어하고 비탄에 빠지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고 당황한다. 그는 두 가지  느낌을 경험한다. 즉 육체적 느낌과 정신적 느낌이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화살을 맞고 연이어 두 번째 화살에 또다시 맞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그 사람은 두 개의 화살에 의한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괴로운 느낌에 닿아 있는 배우지 못한 범부는 슬퍼하고, 힘들어하고, 비탄에 빠지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고 당황한다. 그는 육체적 느낌(몸에 속한 것)과 정신적 느낌(마음에 속한 것)의 두 가지 느낌을 경험한다.

 

괴로운 느낌에 닿아 있는 그는 적의(성냄.분노)를 품는다. 그처럼 괴로운 느낌에 적의를 품는 그에게 괴로운 느낌에 대한 적의의 잠재성향이 잠재한다. 괴로운 느낌에 닿아 있는 그는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을 즐긴다. 무엇이 그 원인인가?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과 다른 곳에서 괴로운 느낌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철저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을 즐기는 그에게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욕의 잠재성향이 잠재한다. 그는 그러한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잘못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지 못한다.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지 못하는 그에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한다. 만약 그가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게 되어도 묶인 채로 그것을 느낀다. 만약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게 되어도 묶인 채로 그것을 경험한다. 만약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게 되어도 묶인 채로 그것을 경험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배우지 못한 범부는 태어남과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에 묶여 있는 자이고, 괴로움에 묶여 있는 자'라고 불린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괴로운 느낌에 닿아 있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슬퍼하지 않고, 힘들어하지 않고, 비탄에 빠지지 않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지 않고, 당황하지 않는다. 그는 육체적 느낌의 한 가지 느낌을 경험한다. 정신적 느낌은 아니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화살을 맞는 것과 같다. 그는 두 번째 화살을 연이어 맞지 않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괴로운 느낌에 닿아 있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슬퍼하지 않고, 힘들어하지 않고, 비탄에 빠지지 않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지 않고, 당황하지 않는다. 그는 육체적인 느낌의 한 가지 느낌을 경험한다. 정신적 느낌은 아니다. 

 

괴로운 느낌에 닿아 있는 그는 적의를 품지 않는다. 그처럼 괴로운 느낌에 적의를 품지 않는 그에게 괴로운 느낌에 대한 적의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는다. 괴로운 느낌에 닿아 있는 그는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을 즐기지 않는다(경험하려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무엇이 그 원인인가? 비구들이여,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과 다른 곳에서 괴로운 느낌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철저히 알기 때문이다.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을 즐기지 않는 그에게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욕의 잠재적 성향이 잠재하지 않는다. 그는 그러한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그러한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는 그에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는다(자리 잡지 않는다). 만약 그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게 되어도 묶이지 않고 그것을 경험한다. 만약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게 되어도 묶이지 않고 그것을 경험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게 되어도 묶이지 않고 그것을 경험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태어남과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에 묶이지 않은 자이고, 괴로움에 묶여 있있지 않는 자'라고 불린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배우지 못한 범부에 비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의 차이이고, 특별함이고, 다름 점이다.”

 

'지혜 있는 이, 많이 배운 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지 않는다.

현자와 범부 간에 능숙함의 차이가 이렇듯 크다.

법을 터득한 이, 많이 배운 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올바로 보는 이,  

만족스러운 법에 마음 흔들리지 않고,

만족스럽지 않은 것에 적의를 품지 않는다.
순(順 ), 역(逆)이 모두 흩어지고 꺼져서

존재하지 않는다. 

때 없고 슬픔 없는 길을 알아

존재의 초월을 바르게 통찰하여 안다.'

 

paṭhamagelaññasuttaṃ (SN 36.7-병실 경1)

255. 한 때에 세존께서는 웨살리에서 큰 숲의 뾰족지붕 건물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저녁에 홀로 머묾에서 일어난 세존께서는 병실로 가셨다. 가서는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세존은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마음 챙기고 분명히 알아차리는 비구는 때를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이 그대들에게 주는 나의 간곡한 당부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마음 챙기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가며(이어 보면서)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비구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느낌에 대해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비구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마음에 대해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비구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법에 대해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비구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마음 챙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분명히 알아차리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아갈 때도 물러날 때도 분명히 알면서[正知] 행한다. 앞을 볼 때도 돌아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구불릴 때도 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가사∙발우∙의복을 지닐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걸을 때도 설 때도 앉을 때도 잠들 때도 잠에서 깰 때도 말할 때도 침묵할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비구들이여, 마음 챙기고 분명히 알아차리는 비구는 때를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이 그대들에게 주는 나의 간곡한 당부이다.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마음 챙기고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무는 비구에게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그는 이렇게 철저히 알아차린다.

‘나에게 이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다. 이것은 연(緣)하여 일어난 것이며, 연(緣)하지 않고 일어난 것이 아니다. 무엇을 연(緣)했는가? 이 몸을 연(緣)했다. 그런데 이 몸은 무상하고, 유위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이렇듯 무상하고 유위이며 연기된 몸을 연하여 일어난 즐거운 느낌이 어떻게 항상할 수 있겠는가?’라고.
그는 몸과 즐거운 느낌에서 무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사라짐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탐욕의 떠남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소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버림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몸과 즐거운 느낌에서 무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사라짐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탐욕의 떠남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소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버림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 그에게 몸과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욕의 잠재성향이 사라진다.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마음 챙기고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무는 그 비구에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그는 이렇게 철저히 알아차린다.
‘나에게 이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다. 이것은 연(緣)하여 일어난 것이며, 연(緣)하지 않고 일어난 것이 아니다. 무엇을 연(緣)했는가? 이 몸을 연(緣)했다. 그런데 이 몸은 무상하고, 유위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이렇듯 무상하고 유위이며 연기된 몸을 연하여 일어난 괴로운 느낌이 어떻게 항상할 수 있겠는가?’라고.  
그는 몸과 괴로운 느낌에서 무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사라짐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탐욕의 떠남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소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버림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몸과 괴로운 느낌에서 무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사라짐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탐욕의 떠남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소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버림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 그에게 몸과 괴로운 느낌에 대한 적의의 잠재성향이 사라진다.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마음 챙기고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무는 비구에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면 그는 이렇게 철저히 알아차린다.
‘나에게 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났다. 이것은 연(緣)하여 일어난 것이며, 연(緣)하지 않고 일어난 것이 아니다. 무엇을 연(緣)했는가? 이 몸을 연(緣)했다. 그런데 이 몸은 무상하고, 유위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이렇듯 무상하고 유위이며 연기된 몸을 연하여 일어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어떻게 항상할 수 있겠는가?’라고.       
그는 몸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서 무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사라짐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탐욕의 떠남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소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버림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몸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서 무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사라짐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탐욕의 떠남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소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버림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 그에게 몸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명의 잠재성향이 사라진다.  

 

그가 만약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면, 그것은 무상하다고 철저히 알아차리고, 묶일 것이 아니라고 철저히 알아차리고,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고 철저히 알아차린다. 만약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면, 그것은 무상하다고 철저히 알아차리고, 묶일 것이 아니라고 철저히 알아차리고,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고 철저히 알아차린다. 만약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면, 그것은 무상하다고 철저히 알아차리고, 묶일 것이 아니라고 철저히 알아차리고,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고 철저히 알아차린다. 그가 만약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면 풀려난 자로서 그것을 경험한다. 만약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면 풀려난 자로서 그것을 경험한다. 만약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면 풀려난 자로서 그것을 경험한다.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경험하는 그는 '나는 지금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경험한다.’라고 철저히 알아차린다. 목숨이 끝나는 느낌을 경험하는 그는 ‘나는 지금 목숨이 끝나는 느낌을 경험한다.’라고 철저히 알아차린다. 그는 ‘몸이 무너진 뒤 목숨이 끝나면, 즐거워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모든 느낌들도 바로 여기서 차가워질 것이다.’라고 철저히 알아차린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기름을 연하고 심지를 연하여 기름등불이 탈 것이다. 기름과 심지가 다하면 그것에게 불꽃이 타오르게 하는 것이 없으면 꺼질 것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경험하는 그는 '나는 지금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경험한다.’라고 철저히 알아차린다. 목숨이 끝나는 느낌을 경험하는 그는 ‘나는 지금 목숨이 끝나는 느낌을 경험한다.’라고 철저히 알아차린다. 그는 ‘몸이 무너진 뒤 목숨이 끝나면, 즐거워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모든 느낌들도 바로 여기서 차가워질 것이다.’라고 철저히 알아차린다."

 

dutiyagelaññasuttaṃ (SN 36.8-병실 경2)

256. 한 때에 세존께서는 웨살리에서 큰 숲의 뾰족지붕 건물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저녁에 홀로 머묾에서 일어난 세존께서는 병실로 가셨다. 가서는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세존은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마음 챙기고 분명히 알아차리는 비구는 때를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이 그대들에게 주는 나의 간곡한 당부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마음 챙기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가며(이어 보면서)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비구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느낌에 대해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비구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마음에 대해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비구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법에 대해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비구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마음 챙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분명히 알아차리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아갈 때도 물러날 때도 분명히 알면서[正知] 행한다. 앞을 볼 때도 돌아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구불릴 때도 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가사∙발우∙의복을 지닐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걸을 때도 설 때도 앉을 때도 잠들 때도 잠에서 깰 때도 말할 때도 침묵할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비구들이여, 마음 챙기고 분명히 알아차리는 비구는 때를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이 그대들에게 주는 나의 간곡한 당부이다.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마음 챙기고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무는 비구에게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그는 이렇게 철저히 알아차린다.
‘나에게 이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다. 이것은 연(緣)하여 일어난 것이며, 연(緣)하지 않고 일어난 것이 아니다. 무엇을 연(緣)했는가? 이 감각접촉을 연(緣)했다. 그런데 이 감각접촉은 무상하고, 유위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이렇듯 무상하고 유위이며 연기된 감각접촉을 연하여 일어난 즐거운 느낌이 어떻게 항상할 수 있겠는가?’라고. 
그는 감각접촉과 즐거운 느낌에서 무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사라짐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탐욕의 떠남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소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버림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감각접촉과 즐거운 느낌에서 무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사라짐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탐욕의 떠남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소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버림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 그에게 감각접촉과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욕의 잠재성향이 사라진다.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마음 챙기고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무는 그 비구에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그는 이렇게 철저히 알아차린다.
‘나에게 이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다. 이것은 연(緣)하여 일어난 것이며, 연(緣)하지 않고 일어난 것이 아니다. 무엇을 연(緣)했는가? 이 감각접촉을 연(緣)했다. 그런데 이 감각접촉은 무상하고, 유위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이렇듯 무상하고 유위이며 연기된 감각접촉을 연하여 일어난 괴로운 느낌이 어떻게 항상할 수 있겠는가?’라고.  
그는 감각접촉과 괴로운 느낌에서 무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사라짐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탐욕의 떠남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소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버림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감각접촉과 괴로운 느낌에서 무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사라짐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탐욕의 떠남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소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버림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 그에게 감각접촉과 괴로운 느낌에 대한 적의의 잠재성향이 사라진다.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마음 챙기고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무는 비구에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면 그는 이렇게 철저히 알아차린다.
‘나에게 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났다. 이것은 연(緣)하여 일어난 것이며, 연(緣)하지 않고 일어난 것이 아니다. 무엇을 연(緣)했는가? 이 감각접촉을 연(緣)했다. 그런데 이 감각접촉은 무상하고, 유위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이렇듯 무상하고 유위이며 연기된 감각접촉을 연하여 일어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어떻게 항상할 수 있겠는가?’라고.       
그는 감각접촉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서 무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사라짐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탐욕의 떠남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소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버림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감각접촉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서 무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사라짐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탐욕의 떠남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소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버림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 그에게 감각접촉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명의 잠재성향이 사라진다.   

그가 만약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면, 그것은 무상하다고 철저히 알아차리고, 묶일 것이 아니라고 철저히 알아차리고,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고 철저히 알아차린다. 만약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면, 그것은 무상하다고 철저히 알아차리고, 묶일 것이 아니라고 철저히 알아차리고,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고 철저히 알아차린다. 만약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면, 그것은 무상하다고 철저히 알아차리고, 묶일 것이 아니라고 철저히 알아차리고,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고 철저히 알아차린다. 그가 만약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면 풀려난 자로서 그것을 경험한다. 만약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면 풀려난 자로서 그것을 경험한다. 만약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면 풀려난 자로서 그것을 경험한다.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경험하는 그는 '나는 지금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경험한다.’라고 철저히 알아차린다. 목숨이 끝나는 느낌을 경험하는 그는 ‘나는 지금 목숨이 끝나는 느낌을 경험한다.’라고 철저히 알아차린다. 그는 ‘몸이 무너진 뒤 목숨이 끝나면, 즐거워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모든 느낌들도 바로 여기서 차가워질 것이다.’라고 철저히 알아차린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기름을 연하고 심지를 연하여 기름등불이 탈 것이다. 기름과 심지가 다하면 그것에게 불꽃이 타오르게 하는 것이 없으면 꺼질 것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경험하는 그는 '나는 지금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경험한다.’라고 철저히 알아차린다. 목숨이 끝나는 느낌을 경험하는 그는 ‘나는 지금 목숨이 끝나는 느낌을 경험한다.’라고 철저히 알아차린다. 그는 ‘몸이 무너진 뒤 목숨이 끝나면, 즐거워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모든 느낌들도 바로 여기서 차가워질 것이다.’라고 철저히 알아차린다."

 

aniccasuttaṃ (SN 36.9-무상(無常) 경)

257. “비구들이여, 세 가지 이런 느낌들은 무상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된 것이고, 다해 없어지는 법이며, 사라짐의 법이며, 탐냄을 떠난 법이며, 소멸하는 법이다. 어떤 셋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세 가지 느낌은 무상하고, 유위이고, 연기된 것이고, 다해 없어지는 법이며, 사라짐의 법이며, 탐냄을 떠난 법이며, 소멸하는 법이다.”

 

phassamūlakasuttaṃ (SN 36.10-감각접촉(觸)을 뿌리로 함 경)
258. “비구들이여, 이런 세 가지 느낌이 있다. 어떤 셋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비구들이여, 즐거움이 느껴질 감각접촉을 연하여 즐거운 느낌이 일어난다. 그 즐거움이 느껴질 감각접촉의 소멸로부터 그것에서 일어난 느낌 즉 즐거움이 느껴질 감각접촉을 연하여 일어난 즐거운 느낌이 소멸하고 가라앉는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이 느껴질 감각접촉을 연하여 괴로운 느낌이 일어난다. 그 괴로움이 느껴질 감각접촉의 소멸로부터 그것에서 일어난 느낌 즉 괴로움이 느껴질 감각접촉을 연하여 일어난 괴로운 느낌이 소멸하고 가라앉는다. 비구들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이 느껴질 감각접촉을 연하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이 느껴질 감각접촉의 소멸로부터 그것에서 일어난 느낌 즉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이 느껴질 감각접촉을 연하여 일어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소멸하고 가라앉는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두 개의 나무토막을 맞대어 마찰하면 열이 생기고 불이 붙는다. 이 두 개의 나무토막을 따로 떼어서 놓아두면 거기서 일어난 열도 식고 가라앉는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이 세 가지 느낌들은 감각접촉에서 일어나고, 감각접촉을 뿌리로 하고, 감각접촉이 인연이고, 감각접촉이 조건이다. 적합한 감각접촉을 연하여 그것에서 일어난 느낌들이 일어난다. 적합한 감각접촉의 소멸로부터 그것에서 일어난 느낌들이 소멸한다." 

 

 


제1장 게송과 함께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