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sambuddhassa
(모든 번뇌를 떠나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신 거룩한 부처님께 예경 올립니다)
오계
1. paanaatipaataa veramanii sikkhaapadam samaadiyaami
2. adinnaadaanaa veramanii sikkhaapadam samaadiyaami
3. kaamesu micchaacaaraa veramanii sikkhaapadam samaadiyaami
4. musaavaadaa veramanii sikkhaapadam samaadiyaami
5. suraa meraya majjapa,aadatthaana veramanii sikkhaapadam samaadiyaami
imaani panccasiilaani samaadiyaami
수행은 계-정-혜 순서이다
어느 분이 댓글에 불교는 "계-정-혜"의 순서라고 했습니다. 즉 "정-혜-계"니 또는 혜-계-정"이니 뒤죽박죽으로 순서가 바뀌지 않습니다. "계-정-혜"의 순서는 절대로 바뀌는 것도 아니고 바뀔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불교는 점진적.순서적.단계적 가르침이며 깨달음입니다. 산 밑에서 구름타고 느닷없이 정상에 오른다고 절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사다리의 계단을 뛰어넘는 것처럼 깨달음의 순서를 멋대로 바꾸고 훌쩍 뛰어넘어 그 다음 단계가 오지 않습니다. 즉 예류과에서 일래과를 뛰어넘어 불환과를 획득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없습니다.
좀더 예를 들어 본다면, 구구셈도 모르면서 산수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적분.미적분 공식도 모르면서 천년을 수학문제 끌어안고 있어봤자 문제 풀어지지 않습니다. 고생고생하여 정답이라고 써봤자 횡설수설이며 그렇지 않으면 빵점짜리 백지시험지 제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선불교의 영향탓에 한국에서는 계-정-혜의 순서를 밟지 않고 바로 한순간 턱~~ 깨달음을 얻거나 성불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계(戒)의 청정함이 없이도 정(定)이 완성되고 정의 완성없이도 궁극적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황당무계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합니다. 이는 인수분해 공식 모르고도 인수분해 문제를 완벽히 풀 수 있다는 망발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 수행의 문제점
많은 수행승들이나 학자들의 한국불교의 간화선 수행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 애정어린 걱정을 합니다만 그분들의 글은 나름대로 예의를 지키느라 적나라하질 못합니다. 저는 재가자 입장에서 한번 속살을 헤집어 보겠습니다.
한국의 간화선 수행의 고승들의 경지가 초기불교 사쌍팔배 (네 부류의 성자들과 10가지 부수어야 하는 족쇄)에 비추어 보면 어느 수준일까? 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습니다. 여러번 대답을 해 드린 것 같습니다. 한국의 선승들은 '간화선이 최고다느니 이게 옳다느니 저게 옳다느니 ..' 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특히 그분들 언행 중에서 '수행법 중에서 간화선이 최고다 이게 옳다 저게 옳다' 이런 말을 하게 되면 이미 번뇌에 걸린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유신견.의심.계금취를 부수는 예류과도 획득하지 못한 것입니다.
많은 불자들은 고승이라는 분들의 언행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던 적이 여러번 있을 것입니다. 종정 스님들의 해제나 신년법어들이 이미 죽은 케케묵은 중국문자들을 끌고 와서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를 소리를 한다든가, 혹은 알려진 선승들의 '옳다느니 그르다니, 이게 최고다, 저게 나쁘다'느니 하는 번뇌에 걸린 소리들을 들은 적이 한두번이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불교 수행에서 간화선이 최고라면 그럼 마음챙김의 확립인 사념처 수행을 설한 붓다는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립니다. 경전에서는 마음챙김의 확립인 사념처 수행은 '오직 하나의 길이며,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고 했습니다.
수행이란 봄(見)의 힘을 기르는 것이다.
불교는 지혜를 중시합니다. 지혜란 봄(見)의 힘입니다. 즉 사물을 보는 지혜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볼 때 '고정된 것이고 변하지 않는다'라고 보는 것과 '변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다'라고 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건 각자의 봄의 지혜에 따라 달라집니다. 오온이 무상하다고 꿰뚫어 통찰하는 것은 지혜의 힘 즉 봄의 힘입니다. 이것을 기르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삼매수행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매수행은 지혜의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삼매(선정.명상)와 지혜가 동시에 자라야 합니다. 지관(止觀) 입니다.
초기불교는 꿰뚫어 통찰한다고 합니다. 가슴 절절이 체득하라든지 체험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꿰뚫어 통찰하는 것은 봄(見)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물을 놓고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하는 것입니다. 자아로 볼 것인가 무아로 볼 것인가 입니다. 이건 체득이나 체험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정견을 가지고 꿰뚫어 통찰하여 본다면 무상을 봅니다. 무상을 보게 되면 해탈이고 열반입니다. 이걸 체득할려고 하거나 체험할려고 한다면 수박 겉만보고 수박을 논할려는거나 다름없습니다. 우리 몸이 오온의 화합물인데 이걸 무아로 볼 것인가 또는 자아로 볼 것인가를 놓고 아무리 체험하고 체득할려고 해도 안됩니다. 그건 꿰뚫어 통찰하는 지혜로 똑바로 무아라는 진리를 보는 것입니다. 볼 줄 모르면 맹인입니다.
붓다는 네라자라강의 보리수 아래서 '연기'라는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정등각자가 되었습니다. 연기라는 진리는 붓다가 발명한게 아니고 발견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붓다가 탄생하든 안하든 늘 있는 진리입니다. 무명으로 흙속에 뭍혀 있는 보물을 발견하지 못한 것을 붓다께서 발견하신 것입니다. 이건 봄의 문제이지 체득이니 체험의 문제가 아닙니다. 보물 발견을 체득하고 체험합니까? 그건 봐서 움켜쥐어 내것으로 만드는 실현의 문제입니다.
제가 요즈음 올리고 있는 빠띠삼비다막가(무애해도)에 가셔서 보시면 꿰뚫어 통찰하는 지혜가 어떤 것인지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계를 지키는게 쉬운가?
맨 처음에 오계를 올려 놓았습니다. 수행승이든 재가자이든 살면서 오계를 지키는게 쉽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그게 말처럼 쉬운 계율입니까? 여간해서는 지키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 250개의 율은 제외하고라도 오계조차도 지키지 못하는데 그 다음의 정(定)과 혜(慧)가 제대로 따라 오겠습니까? 계가 청정하지 않은데 정이 완성되고 혜가 완성이 됩니까?
오계가 청정하지 못하더라도 정신적 수행의 단계는 얼마든지 올라 갈 수 있습니다. 도교의 도사들이나 타종교의 사람들도 엄청 명상합니다. 하지만 지혜가 따르지 않기 때문에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단계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고승들의 언행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것은 바로 정신적 단계만큼 지혜가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불자들 중에서 제법 불교를 안다고 하는 분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수행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행이야기는 결국에는 대부분 세치 혀의 희론이나 번쇄한 철학적 논쟁으로 끌고 갑니다. 왜냐하면 오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정(定)과 혜(慧)를 논하는 무지와 어리석음 때문 입니다. 구구셈도 못하면서 산수책 들고 있고, 공식도 모르면서 인수분해 풀려는 허망함 때문입니다.
경전은 해탈과 열반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것만큼이나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 놓았습니다. 계의 청정은 언급할 필요도 없이 상윳따니까야의 '꼬살라 사람들과의 대화'중에서 1/10 이라도 지키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지요?
왜 초기불교를 하는가?
초기불교는 수행을 위한 수행전문 불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들 중생들의 세간사 이야기입니다. 행복하고 안락하고 편안하게 사는 방법과 지혜를 품고 있습니다. 고상하고 품격높은 수행을 하고 싶으면 도교나 선불교쪽으로 가면 됩니다.
한국은 워낙에 선불교의 영향으로 알게 모르게 '한 순간의 깨달음이 불교'라는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 오계라도 제대로 지키면서 살면 다행일 것입니다. 한국불교가 처해있는 현실을 냉정하게 되돌아 보면 많은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기불교에서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지혜를 배우기 보다는 수행이니 도사니 아라한이니 찾고 싶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게 아닌가 싶습니다. 불교에서 내 삶을 바꾸는 지혜를 찾지 못한다면 시간 낭비하는 것 보다는 얼른 타 종교로 개종하시는게 개인적으로는 더 좋을 것 입니다. 타종교도 불교에서 말하는 선한행동 보시 자비등을 얼마든지 행하고 있습니다. 윤회는 종교를 무얼 믿느냐에 의해서 결정되는게 아니라 내가 행한 행위에 의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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