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해탈과 열반의 차이 - 지혜를 얻기 위한 토론

실론섬 2014. 10. 15. 19:44

저는 개인적으로 불자들에게 해탈과 열반에 대해서 질문을 하곤 합니다. 그것은 제가 해탈과 열반의 개념을 100%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들의 혜안을 구하고자 함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명쾌한 답을 들어 본 적은 없습니다. 다행히도 최근에 정준영교수님의 '초기불교에서의 해탈'에 관하여 상세한 글을 발표했습니다. 많은 분들은 그 글을 통하여 어느정도 해탈과 열반의 개념을 정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해탈과 열반은 같은가 다른가? 아니면 어귀는 다르고 뜻은 같은가? 아니면 어귀도 다르고 뜻도 다른가? 라고 했을 때 과연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많은 분들이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으리라 생각 합니다.


많은 분들이 해탈과 열반을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거나 또는 혼용을 하는듯 합니다.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본다면 해탈과 열반은 개념도 다르고 그 사용범위도 한정되어 있지않나 생각합니다.


해탈과 열반의 사전적 개념


●해탈(解脫, vimutti, vimokkha) : 어떤 속박이나 족쇄에서 풀려나고 벗어나는 것, 해방되는 것

 心解脫(cetovimutti), 慧解脫(paññāvimutti), 그리고 兩分解脫(ubhatobhāgavimutti)

② 범망경에 나오는 8가지 해탈의 종류

③ 찟따 상윳따(S41:7)에 설명되는 무량한 마음의 해탈, 무소유 마음의 해탈, 공한 마음의 해탈, 표상없는 마음의 해탈

④ 빠띠삼비다막가(무애도론)에 설명되는 해탈의 종류


●열반(涅槃. nibbana, nirbana) : (촛불)등이 꺼진 상태. 불이 꺼진 상태. 즉 탐진치 삼독심의 소멸된 상태


해탈이

해탈과 열반이라는 단어는 불교이전에 이미 요가수행이나 우파니샤드 철학 계통에서 사용되었으며 붓다께서는 이를 불교의 궁극적 수행 경지를 표현하는 단어로 채택했습니다. 위에서도 보듯이 해탈은 여러가지 모양새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선 살펴봐야 할 것은 붓다께서는 출가이후 두 명의 요가 수행자를 찾아 갑니다. 그 내용은 맛지마니꺄야 26 Ariyapariyesana suttam(고귀한 구함의 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 알라라 깔라마라는 수행승을 찾아가서 '무소유처'의 경지에 이르지만 붓다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에 머무는 한 떠남, 사라짐, 소멸, 적정, 지혜,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끌지 못한다'고 생각하시고 두 번째로 웃다까 라마뿟따를 찾아가 '비상비비상처'의 경지를 획득하지만 마찬가지 결론에 도달하여 마침내 네란자라 강에서 6년간의 고행에 들어 갑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무소유처이든 비상비비상처이든 그것이 해탈의 한 종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해탈의 경지에서조차 열반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하여 고행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특정한 해탈만으로는 열반에 이르지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준영 교수님의 자신의 글에서 

"심해탈은 일반적으로 ‘마음의 풀려남’, 혜해탈은 ‘지혜를 통한 풀려남’ 그리고 양분해탈은 ‘양쪽 길의 풀려남’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 해탈 안에서 혜해탈과 양분해탈은 불교수행의 최종목표인 열반

을 의미하지만, 대부분의 심해탈은 열반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직 혜해탈과 함께 성취되었을 경우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심해탈(akuppā cetovimutti, 不動心解脫)을 얻은 경우에만 열반을 나타낸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붓다께서 말씀하신 8가지 해탈을 생각해 보면 '공무변처에 머무는 것도 해탈이고,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상수멸에 머무는 것이 해탈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무변처정이나 식무변처정등은 각 단계마다 초월하고 극복하고 족쇄에서 풀려나는 경지가 별도로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무변처정을 넘어서야 식무변처정이 오고, 식무변처정을 넘어서야 무소유처정이 획득이 됩니다. 그런데도 각 단계를 모두다 해탈이라고 함은 다시말해서 어떤 단계에서 필요한 족쇄에서 해방되는 것 그 자체를 '해탈'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탈의 설명은 무애해도에 보면 더욱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무애해도'에서는 여러 종류의 해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어떤 특정한 족쇄에서 풀려났을 경우를 수십가지로 분류하여 모두다 해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단어의 의미 그대로 특정한 족쇄에서 풀려나고 벗어난 것을 해탈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준영교수님의 말씀처럼 해탈 = 열반이라는 개념을 100% 사용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전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경전의 내용을 보면 "...해탈했다. ... 두번다시 태어나지 않음을 최상의 지혜로 알았다"라고 해탈 = 열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해탈 = 열반" 이라고 기록한 즉 당사자가 해탈한 내용이 전부다 "오취온(오온)의 무상 무아 고, 탐진치 삼독심 제거등"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 해탈이나 열반이 아니라 해탈 = 열반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데에는 반드시 해탈(벗어남)의 디테일한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해탈 = 열반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은 벗어남(해탈)의 경우에는 "... 예류도/과를 성취했다" 라든가 "경이롭습니다. 고따마시여, 마치 길잃은 자에게 길을 일러주시고... 죽을때 까지 삼보에 귀의하겠습니다."라는 경의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열반이란 

탐진치 삼독이 제거되어 미래에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경지입니다. 그러한 세계가 어떤 것인지는 사실 부파불교와 대승불교 시대에 들어 오면서 다양하게 열반의 세계를 세분화 했습니다. 검색을 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부파불교 시대부터는 유여의열반과 무여의열반, 그리고 유가학파에 의한 열반의 세분화등으로 다양하게 그 세계를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여기서는 저는 더 첨가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열반의 세계를 붓다께서는 '우다나'에서 한번 언급하여 설명을 했습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교리방에 있는 '열반세계의 존재유무'를 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해탈과 열반은 다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해탈과 열반은 다릅니다. 그리고 해탈 = 열반이라는 등식이 동시에 성립하기 위해서는 정준영교수님의 말씀처럼 혜해탈 양분해탈등의 경지를 획득해야 하고, 경전의 묘사처럼 오온에 대한 탐진치 제거 만이 올바르게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모든 수행은 점차적 순서대로 깨달음과 경지를 획득합니다. 구름타고 한 순간 정상에 도달하는 건너뛰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경전은 언제나 "해탈하여 열반한다" "해탈한 후 열반한다"라고 해탈이 있고 그 다음에 열반이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열반후에 해탈이 있다거나 해탈없는 열반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해탈은 어떤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건너가기 위한 족쇄에서 벗어남이다. 그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즉 예류과에서 일래과로 가기 위해서는 부수어야 하는 족쇄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류과에서의 해탈일 것입니다. 아라한도에서 아라한과에 도달하기 위해서 부수어야 하는 족쇄는 하나씩 풀어질 때 마다 그것이 해탈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류도에서 예류과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벗어나야 하는 족쇄가 유신견이나 계금취등인데 유신견을 벗어났다면 유신견에서 해탈한 것이고, 계금취를 벗어났다면 계금취에서 해탈했다는 것입니다. 즉 각 단계에서 풀려나는 과정이 모두다 해탈인 것입니다. 모두다 풀어진다면 마침내 아라한과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해탈과 열반을 혼용하거나 해탈 = 열반과 같다는 식의 등식은 일반적으로 성립하기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