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란 도덕적 인과율이다.
윤회란 한마디로 "도덕적 인과율"이다. 다시말해서 내가 의도적으로 몸,말,마음으로 행한 선하고 악한 행위에 대한 도덕적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의도를 갖고 행한 행위에는 선한 행동과 악한 행위의 두 가지 밖에 없다. 십선행이냐 십악행이냐 하는 도덕적 판가름 밖에는 없다. 이러한 의도적 행위가 업을 잉태하고 그 잉태된 업의 결과가 윤회로 나타난다.
우리가 윤회를 증명하고 결과를 두 눈으로 똑똑이 보는 것은 바로 중생들의 태어나고 죽는 삶이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고 부자로 머리좋고 잘생기고 좋은 집안에 태어난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불구이거나 나약하고 빈곤한 집안에 태어난다. 왜 모든 중생들의 태어나는 모습이 다른지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과거 행한 업의 결과"라는 것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죽는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상윳따 니까야 '꼬살라 사람들과의 대화'에는 다음과 같은 붓다의 가르침이 나온다.
1) 몸이나 말이나 마음으로 행한 것
이것이야말로 진짜 자기 것이니
떠나갈 때는 이것을 가져 간다
자기를 떠나지 않는 그림자처럼
이것은 자신을 쫓아 간다
그러므로 내생을 위한 저축으로
착한 일을 해야 한다
살아있는 존재들이 다른 세계에 태어날 때
그들이 의지한 것은 공덕이다
2) 세상에는 다음과 같은 네 부류의 중생들이 있다.
어둠에서 어둠으로 나아가는 사람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사람
빛에서 어둠으로 나아가는 사람
빛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사람
인과(因果)를 무시하면 불교가 아니다
인과란 모든 행위에 대해서 반드시 결과가 있다는 것이다. 좋은 행위에는 선한 결과가, 악한 행위에는 악한 결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도덕적 인과의 결과는 윤회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붓다께서 말씀하신 불교의 처음과 끝이다.
그런데 부파불교 대승불교 중국의 선불교등을 거치면서 이러한 인과를 중시하는 불교가 조금씩 변형이 되었고 마침내 도교와 짬뽐이 되어 태어난 사생아인 선불교에서 와서는 깨달음이란 허망한 관념에 사로잡혀 인과율이라는 것이 사실상 소멸되고 산속에서 화두하나 잡고 깨치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불교가 변질이 되어 버렸다.
화두를 잡고 산 속에서 골똘이 생각하며 보내는 것이 인과적으로 보았을 때 선한 행위일까 아니면 악한 행위일까?
중생들 삶 속에서 열심히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고 그들과 동고동락을 하는 것이 선한 행위일까 악한 행위일까?
화두 잡고 산속에 있는 것과 중생들 삶속에서 자비 베풀면서 보내는 행위 중 어느 것이 더 선한 행위일까?
당연히 자비스러운 삶을 사는 것이 선한 행위이고 선한 인과를 잉태한다. 산 속에서 두문불출하고 화두잡고 사는 승려의 삶이 선한 행위가 절대로 아니다. 따라서 선한 과보가 잉태될리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재가자들의 공양을 받으면서 엉뚱한 생각에만 집착하고 있으니 이것은 악한 업을 잉태한다고 볼 수 있다.
깨달음은 한 줄 경귀면 충분하다.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몰라서 평생을 수행한다고 산속에 묻혀서 재가자들의 삶과 괴리된채 여생을 보낸다면 1+1 =2 라는 것도 모르는 머리이니 애초부터 포기하는게 낫다. 왜 깨달아서 부처가 못되는가? 답은 단 하나이다. 선한 행위가 없는데 선한 행위의 최고의 선물인 깨달음이 올리가 없는 것이다. 아무런 도덕적 행위도 없는데 어떻게 결과물이 있겠는가? 산속에 홀로 머무는게 선한 행위는 절대로 아니다. 선한 행위란 상대방에게 의도적 마음을 갖고 자비를 베풀 때 비로소 잉태하는 결과물이다.
초기불교의 수행
초기불교를 수행을 보라. 사정근 오력 사념처 사정근 팔정도등 이 모든 것이 선한 행위를 하라고 한다. 일어난 악한 마음을 소멸하기 위해 노력하고, 일어난 선한 마음을 증장시키고, 일어나지 않는 악한 마음을 일어나지 않게 하고, 일어나지 않은 선한 마음을 일어나게 힘껏 노력하라는 것이 모든 가르침속에 한결같이 포함되어 있다.
내가 선한 행위를 할려면 의도와 열의를 갖고 대상을 찾아서 열심히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선한 결과를 가져 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악한 결과를 잉태한다. 내 마음이 악으로 가득차 있는데 말과 행동이 선하게 나타날 수 없다. 내 마음이 선으로 가득차 있는데 말과 행동이 악하게 나타날 수 없다. 그렇다면 화두들고 있는 마음은 악한 것일까 선한 것일까?
남방권의 사찰은 거의다가 도심속에 있다. 수행자들은 도심속에서 중생들의 삶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결혼식 생일날 탄생일 장례식 개업일 회사오픈일 이사하는 날등등 모든 일에 수행승들이 앞장서서 도와주고 위로해주고 의지처가 된다. 그렇게 수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불교의 인과이다. 화두들고 산속에서 백년을 지내는 것보다 어느 재가자집의 장례식장에 가서 염불 한번 해주는 것이 백천만배 더 선한 인과를 탄생시킨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렇게 선한 행위를 하고 선한 과보를 쌓는 것이 바로 불교의 수행이다.
아라한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붓다는 수많은 전생기간 동안 보살로서의 자비를 쌓아 마침내 깨달은 이가 되었다. 또한 경전은 많은 아라한 탄생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 아라한들이 어느 날 땅속에서 하늘에서 홀연히 솟아 나거나
떨어진게 아니라 과거 전생에 많은 선한 인과의 공덕이 뒷받침이 되어 현생에서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초기불교는 붓다나 제자들이나 모두다 아라한이라고 한다. 오직 다른 것이 있다면 붓다는 맨먼저 길을 발견한 사람이고 제자들은 그 길을 따라가서 같은 경지에 오른것의 차이일 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붓다의 전생이 그토록 자비와 봉사의 삶이었는데 그 뒤에 탄생한 아라한들의 전생이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공덕도 인과의 선한 행위도 없이 무조건 화두 깨치면 부처가 된다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한국불교에서 깨쳤다는 고승들의 언행의 불일치를 눈여겨 보면 그분들의 깨달았다는 경지가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 눈 밝은 불자들은 금방 알 수 있다.
불교수행은 팔정도이다. 모든 여덟가지 덕목이 중생들의 세간사 삶속에서 출발을 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산속에서 홀로 화두들고 있는 것은 불교의 수행이 아니다. 그건 그냥 명상이다. 수행이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명상과 수행은 엄연히 다르다. 실천행으로 선한 과보를 쌓는 것이 수행이요, 명상은 마음을 추스리는 것이다. 그것도 짧은 시간안에 마음 추스리고 다시 세간사로 돌아와서 열심히 과보를 쌓아야 하는 것이다. 평생 마음 추스리면 그것은 악한 과보를 잉태할 뿐이다.
정말로 깨닫고 싶다면 현생에서 선한 과보부터 쌓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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