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초기불교(근본불교)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실론섬 2014. 10. 22. 16:02

초기불교(원시불교,근본불교)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그리고 빠알리어 경전이 한글로 완역이 되어서 이제는 누구나 붓다의 원음을 공부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또한 인터넷의 발달로 많은 초기불교 정보를 획득하기도 어렵지 않습니다.


초기불교라고 하면 한국불자들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1) 남방불교 즉 소승불교이다. 지금은 남방불교권의 불교를 지칭하여 소승불교라고 하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남방불교는 어떤 불교인가와 그 전승내용은 [초기불교이야기 방]에 가시면 '빠알리어(pali)경전의 체계적 전승과정'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초기 불교에 대한 간단한 개념을 정립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2) 위빠싸나, 사띠 수행

많은 불자들은 초기불교하면 위빠싸나 혹은 사띠 수행을 떠 올릴 것 같습니다. 이는 한국불교의 간화선 수행을 비판적인 입장에서 보고 그에 대응하는 수행법으로써 위빠사나와 사띠 수행이 소개된 측면이 강하게 어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3) 빠알리어 경전의 번역과 논서로써 청정도론

최근에 각묵스님과 전재성 박사님의 노력으로 4부 빠알리어 경전이 완역되었고 5부 니까야에 속하는 일부 경전이 번역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장도 전 박사님이 번역을 해서 출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과연 초기불교가 제대로 한국에 전파되었는가?

제 개인적인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경전이나 수행은 전해졌으나 불교의 참모습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껍데기만 전해진 것이지 알맹이는 제대로 전파가 안된 것입니다. 


초기불교를 한다는 분들의 대부분이 미얀마에서 배워 온 미얀마식의 수행인 위싸싸나 혹은 사띠 수행을 한다면서 선원등에 나가고 있습니다. 출가승들로도 부족하여 일부 재가자들은 미얀마에서 배워 온 사띠 수행을 전파하면서 사띠 수행처를 오픈하는 것도 현실입니다.


한편으로는 빠알리어 경전의 논서(주석서)인 청정도론을 등에 걸머지고 머리카락으로 바위에 홈을 낼듯 날밤을 세워 교리논쟁을 하고 툭하면 청정도론 이야기를 꺼내어 마치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냥 행세하는게 현실입니다. 초기경전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전문적인 학자나 승가대학의 교수가 아니라면 굳이 들먹일 필요도 없는 온갖 잡다한 것들을 가져와서 초기불교의 교리를 너무너무 어렵게 만들고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웬간한 수준의 불자라면 굳이 청정도론같은 논서를 꺼집어 낼 필요가 없습니다. 경전만 읽어도 충분합니다. 


왜 이렇게 껍데기만 오게 되었는가?

일단은 전파된 시기가 아직은 길지 않아서 일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한국과 남방권은 사람 언어 풍습 문화 사회등이 너무 다릅니다. 그리고 유교문화권이 아닙니다. 짧은 시간안에 2000년 이상을 붓다의 원음을 보존하고 그러한 불교를 실생활화 하여 살아온 풍습이나 문화를 불교경전이나 수행법과 함께 가져오기는 힘들 것입니다. 가져오더라도 한국문화에 접목하는데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간화선 수행에 반발하여 위빠싸나와 사띠 수행을 널리 알리고는 있지만 이는 미얀마식의 수행법에 한정되는 것입니다. 물론 미얀마의 수행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많이 앞서 나가고 붓다시대의 수행을 제대로 복원한 것이라고 인정하더라도 이는 굉장히 좁고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수행법만 가져왔을 뿐이지 교리나 불교문화 그리고 일반인들의 생활속에 스며들어 있는 실생활 불교는 전혀 가져오질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껍데기만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실제로 수행이라는 측면에서도 많은 왜곡과 잘못을 노출하고 있습니다.


초기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인도를 알아야 한다

불교는 인도땅에서 태어나고 발전한 종교 입니다. 따라서 인도의 철학과 사상 그리고 불교의 발전사를 간략하게나마 사전에 알아 두어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휘발유도 없는데 차량에 엔진 시동걸려고 하거나 또는 우물가에서 슝눙 찾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붓다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고 그분은 불교를 창시하신 교조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시의 다양한 사상가들과 치열한 논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인도사회의 민중들에게 불교를 전파시켰습니다. 신화이거나 상상이거나 고귀하거나 고상하거나 현실을 떠난 어떠한 곳에도 불교는 없습니다. 불교는 우리들의 세간사에서 출발한 현실적인 종교입니다. 자신의 죄를 구원해 줄 절대자나 나를 천국으로 이끌어줄 신이 존재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내가 세간사를 살면서 의도적으로 행한 업에 따라 윤회를 한다고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초기불교는 붓다라는 인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한끼 탁발을 걱정하고, 제자들이 굶주릴까봐서 그것을 걱정하고, 피곤하고 몸도 아프고 병을 얻어 80세에 돌아가신 붓다를 공부하는 것이 초기불교입니다. 신화나 전설을 공부하는게 아닙니다.  


불교는 교리와 수행이 전부가 아니다.

여러분들은 교리 논쟁이나 번쇄한 철학적 지식을 쌓기 위해서 초기불교 믿습니까? 아니면 수행법을 알아서 수행할려고 초기불교 믿습니까? 그것도 이것도 아니라면 왜 초기불교를 믿는지요? 한번쯤 자신을 되돌아 보아 왜 초기불교를 믿는지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짧은 인생속에서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길입니다.


만약에 붓다께서 교리나 수행법만을 가르켜 주는게 불교라고 생각했다면 그분은 1250여명의 아라한들이나 10대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놓고 자신은 산좋고 물맑은 곳에서 여생을 편안하게 보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자신이 일일이 나서서 무지한 중생들에게 이러쿵 저러쿵 입이 아프도록 가르킬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붓다의 45년동안이라는 긴긴 시간을 우리들 범부들의 세계인 세간사에서 한끼 탁발을 하면서 보냈습니다. 왜 그는 그랬을까? 

중생들이라는게 아무리 가르쳐줘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게 되고, 법회에서는 마음가다듬다가도 돌아서면 나쁜짓하고 유혹에 빠지는게 세간사 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누군가 나서서 시범을 보여주고 모범을 보여줘야 우르를 따라가게 됩니다.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끝가지 따라가기도 합니다.


붓다의 45년 생애는 중생들을 위한 스승으로써의 존재감으로 넘쳐났기 때문입니다. 즉 중생의 스승이셨기 때문에 세간에서 살았습니다. 1250여명만을 위한 스승이거나 가르침을 펼친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경전을 전승하는 책임을 수행승들이 맡아오다보니 경전의 많은 부분이 수행법이나 출세간적인 이야기들로 메꾸어져 있고 중간중간 재가자들에게 유리한 이야기들을 의도적으로 빼 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출가승 위주의 불교나 승가에 대한 절대적인 귀의를 강조하기 위해서도 수행승이 최고라는 그러한 의도의 글들이 경전에 많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붓다의 45년을 생각해 본다면 중생들을 위한 가르침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초기불교는 실생활 불교이다

초기불교는 우리 중생들을 위한 가르침입니다. 출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재가자로써 뛰어난 지혜를 가져서 출세간의 경지를 획득하지도 못하는 즉 하루 하루 살면서 오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범부들이 행복하고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지혜를 일어주신 가르침입니다.


용수보살은 그의 중용에서 "세간의 진리(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일들) 없이는 최고의 진실은 설해지지 않으며, 최고의 진실 없이는 열반은 획득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즉 세간을 떠난 어떤 곳에서 붓다의 가르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불교 = 수행이다" 라는 말에 일정부분 동의 합니다. 그럼 그렇게 말하는 불교의 수행이란 무엇인가? 출가해서 산속에서 닦아야 그게 불교의 수행인가? 라고 묻는다면 저는 절대로 아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우리들도 엄청 수행합니다. 재가자들의 수행이란 열심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을 때 "짐승만도 못한놈, 잘 죽었다.., 사기꾼, 도둑놈...'같은 소리 듣지 않는다면 수십년 출가하여 산속에서 수행한 분들보다 도력이 더 높았으면 높았지 낫지는 않을 것입니다. 살면서 인내하고 고행하고 인욕한 그 수행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여러분들 스스로 조용히 돌이켜 보시면 수긍이 될 것 입니다.


불교한다는 분들이 툭하면 세치 혀끝으로 희론이나 교리논쟁을 즐겨하고 툭하면 수행운운하는데 그건 스스로 열등감의 표출일 뿐입니다. 불교는 수행도 교리도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이고 붓다께서 일러주실려고 한 진리입니다.


초기불자는 경전을 바꿀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

경전만 대승경전에서 초기경전으로 바꾼다고 초기불자가 절대로 아닙니다. 마음도 바꾸어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초기불교이야기 방에 글이 올려져 있어서 더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모두들 올바른 초기불자가 되기를 합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