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전도선언이 열반론이라고 ???

실론섬 2014. 12. 8. 15:32

오랫만에 진흙속의연꽃의 블로그에 있는 몇개의 글들을 읽어 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엉망진창으로 글을 늘어놓는 행태는 변한게 없는 것 같다. 그는 제목을 '부처님의 전도선언은 행복론이 아니라 열반론'이라고 해놓고 내용은 잡다한 것들을 모두다 동원하여 엿가락처럼 글을 늘어 놓아서 도대체 제목과 글이 맞지를 않고 앞뒤 문맥도 엉망이다. 그 내용을 하나하나 반박한다. 


붓다의 깨달음과 사슴동산까지의 여정

오늘날 시간으로 보면 5월 보름에 붓다께서는 정각을 이루셨다. 그리고 7주간을 네란자라 강가에서 홀로 법열을 즐기시면서 보낸다. 그런후 마지막 7주째에 설법을 하실 것을 결심하시고 네란자라 강을 떠나 사슴동산으로 향하신다. 그렇다면 붓다가야의 네란자라 강을 떠난 싯점이 6월 마지막 주가 되는 셈이다. 붓다가야에서 첫 설법지인 바라나시의 사슴동산까지는 약 200km 가 넘는 거리이다. 붓다께서 사슴동산에서 첫 설법을 하신 것이 7월 보름날이다. 즉 200km를 가시는데 보름이 걸린셈이다. 하루에 약 13km 를 이동하신 것이다. 전도하시고자 하는 마음에 발걸음을 빨리 움직이신 것이다.


7월 보름날 첫 설법을 하신 후에 1개월 정도를 다섯 비구와 보내시는 동안에 우기가 시작되어 총 4개월을 그곳에서 머물게 된다. 즉 사슴동산에서는 7월 보름부터 11월보름까지 4개월을 머무신 것이다. 이 기간동안에 다섯 비구와 야사와 그의 제자들의 출가로 붓다를 포함하여 총 61명의 출가승들의 모임이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이 4개월안에 60여명의 수행승들은 모두다 아라한의 경지를 획득한 것이다. 


그런데 연꽃은 붓다께서 바라나시에서 1년정도 머물렀다고 헛소리를 하고 있다. 주장자로 면박을 내려쳐 머리를 7조각으로 낼 일이다. 자기 멋대로 동물이 오물 뿌리듯 말을 내 뱉고 있다.


붓다의 전도선언은

우기가 끝난 11월 보름날에 붓다께서는 제자들이 전도를 위하여 떠날 것을 허락하시고 전도선언을 하시게 된다. 전도선언은 수행승들이 전도를 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 그리고 방법등이 명시되어 있다. 붓다의 전도선언에 대한 구구한 해석들이 많지만 저의 개인적은 생각은 다음과 같다.


전도의 이유 : 본래부터 눈에 먼지가 거의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올바른 가르침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방황하고 있다. 그들은 올바른 가르침을 들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전도결심때 여러 연꽃의 모양에 중생들을 비유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전도의 목적 : 올바른 가르침을 모르고 듣지 못하여 괴로움에 허덕이는 많은 사람들(중생들)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함이다. (이 부분은 밑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전도의 방법 :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훌륭한 뜻과 내용을 갖추고 단어와 문장들이 올바르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한다. 스스로 원만하고 청정한 삶을 보여주고 실현하여 본보이기를 보이며 앞장서라. 


이에 대해서 앙굿따라니까야에는 "비구들이여, 두 가지 법이 있다. 그것은 정법을 어지럽히고 사라지게 한다. 무엇이 둘인가? 단어와 문장들이 잘못 구성된 것과 뜻이 잘못 전달된 것이다. 비구들이여, 단어와 문장들이 잘못 구성될 때 뜻도 바르게 전달되지 않는다." 라고 붓다께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눈이 있는 불자분들은 단박에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것이다. 붓다께서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하고, 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자기 멋대로 사견을 갖다 붙이는 것이나 깜냥으로 자기만이 아는 범위내에서 경전을 함부로 해석하거나 붓다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경전에는 "십만대지가 흔들렸다느니 또는 대지가 크게 진동했다"라는 표현들이 있다. 이 말을 곧이 곳대로 믿으면 붓다의 설법시 지진으로 수많은 가옥들이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과연 지진이 났을까? 그런데 경전에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은 그만큼 주요한 사건이나 설법의 무게를 설명하는 비유법이라고 해야지 그렇지 않고 경전에 나와 있으니 무조건 믿으라고 한다면 이건 뜻도 문장도 단어도 구성도 잘못된 것이고 당연히 정법을 어지럽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붓다께서 왜 설법을 하기로 결심을 하셨을까? 중생들에게 열반을 가르쳐 줄려고 ..?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붓다의 전도선언은 "중생들을 위한 대자비심의 발로"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닌 것이다.

중생들을 위한 행복과 이익과 안락을 위한 연민의 마음에서 우러난 대자비심이 붓다를 설법하게끔 한 것이다.


전도의 목적 : 불교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이 무엇인지는 여러번에 걸쳐서 글을 올렸다. 일반적으로 볼 때 행복이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감각적 욕망(쾌락)에서 오는 행복이다. 원하는 것을 얻고 갖고 싶은 것을 갖고 욕망과 탐욕이 채워졌을 때 오는 포만감이다. 하지만 불교는 이것을 행복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이며 지옥의 지름길이라고 가르친다. 감각적 쾌락의 충족은 끝이 없어서 채울수록 더욱더 갈망을 하게 되고 더 큰 갈애를 가져온다. 불교는 이것을 행복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지 않는다. 감각적 쾌락의 추구나 탐욕스러움이나 저질적인 삶의 형태로 말할 뿐이다.


불교의 행복은 나 자신의 것을 들어내는(포기하는) 것에서 오는 마음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행복이라고 말한다. 내 것을 들어내고 포기하는 것은 곧 자비요 보시이다. 자비나 보시는 내 것을 내어 주는 행위이다. 나를 비워감으로써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가난한 이웃이 있을 때 쌀 한가마니라도 갖다 줄 때 그들은 무척 고마워한다. 쌀 한가마니를 주는 것을 내것을 포기하고 내가 가진 것에서 들어내어 줌으로써 나의 가진 것을 비우는 행위이다. 보시를 하고 집에 돌아와 가만히 눈을 감으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줬다는 기쁨으로 내 마음이 가볍게 안락해 진다.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감각적 쾌락이나 탐욕의 충족과는 전혀 반대의 행위이다. 그러한 행위에서 오는 기쁨과 경안한 마음을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복은 번뇌를 가라앉히고 나를 높은 향기로운 삶으로 인도한다. 이것이 불교의 행복이다.


연꽃은 그의 글에서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도 행복이고...'불교는 행복의 종교이'다'라고 한정해 버린다면 타종교의 가르침과 다를바 없을 것이다. 아니 종교가 없는 사람도 행복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오로지 행복론만을 말한다면 불교를 믿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불교밖에서도 언제든지 행복한 생활을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망발을 하고 있다. 세상이 어지럽고 폭력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은 감각적 쾌락과 탐욕의 충족때문일 것이다. 또한 타종교에서도 불교못지 않게 버리고 비움으로써 얻는 행복을 가르치고 있다. 이 작자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다. 이 작자의 말대로라면 보시도 헌공도 공덕도 사회기부도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 아니라면 자신의 열반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붓다의 행복론을 심히 왜곡하는 외도일 뿐이다.


붓다의 차제설법/단계적 설법/점진적 설법

붓다의 설법을 점진적 설법이라고 한다. 즉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듯 단계적으로 설법을 하여 최종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는 방법이다. 또한 모든 수행은 단계적으로 향상한다고 할 뿐 절대로 단계를 뛰어넘어 한순간 목적지에 도달한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붓다의 설법은 늘 보시 오계 출가의 공덕등등의 기초부터 시작하여 사성제 연기등으로 옮아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선불교에서 말하는 "턱~~ 한순간에 확철대오한다"는 것과 180도 다르다. 선불교적인 수행법은 이런 면에서 절대로 불교적인 수행이 아니다. 


연꽃이 말하는 불교는 열반론이다라는 말은 곧 선불교의 "한순간 한소식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없다. 그가 입에 담는 차제설법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불교에서는 열반을 얻기 위하여 출가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열반은 인과의 법칙에 의거한 결과물인 것이기 때문이다. 열반을 이루기 위한 원인이 없는데 열반을 획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루종일 화두나 선정삼매에 몰입한다고 하여 열반은 절대로 획득되지 않는다는게 불교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불교를 이야기할 때 "불교는 열반론이다"이다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보시도 없고 헌공도 없고 수행도 없고 공덕도 없다는 도덕부정론자의 주장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것이다. 불교는 일반 사회와 달리 목적이나 결과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 목적지에 도달하는 과정을 중요시한다. 과정이 올바르면 반드시 어떠한 경우에도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것이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그래서 行을 중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산정상에 오를려면 지도책과 안내판을 잘 살펴 한발자욱씩 걷다보며 반드시 정상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정상이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할 일을 다 마치고 청정한 삶이 완성되면 열반은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그러기에 누군가 알려줘서 아는게 아니라 스스로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긴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해탈/열반임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선불교처럼 깨달아 보겠다고 몇년간씩 은둔하는 것은 절대로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불교는 엄중하게 말하고 있다. 또한 열반은 내가 행한 공덕이나 수행의 결과물이거나 전생의 수많은 공덕이 쌓여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은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분들의 전생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붓다가 정각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전생의 보살행에 의한 공덕이 쌓인 결과물인 것이다. 그런점에서 불교는 행복론이요 또한 공덕론이며 자비론이다. 


경전의 초월적 이야기

경전에는 초자연적인 이야기나 하늘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불교도 귀신의 세계를 인정하고 있다. 다만 그들 귀신 또한 우리와 조금도 다름없는 무아의 존재이며 삶과 죽음을 방황하며 유전하며 흘러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경전의 초월적인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해와 달을 쓰다듬는다, 대지가 진동했다, 하늘사람과의 대화등, 7년간 임신을 했다, 오백명의 코끼리위에 여자를 한명씩 태웠다, 오백비구니 7백비구니, 오백의 암소와 염소를 제사 지내기 위해서 묶었다...." 등등의 많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가르침의 의미와 뜻을 좀더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올바른 문장의 구성인가 아니면 실제로 그런 일이 있는가?라고 의심해 볼 수 있다. 물론 사실인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전의 이야기라고 100% 사실대로 믿는다면 이건 우매한 중생일 뿐이다. 즉 경전의 뜻과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세상에서도 500명이니 700명이니 한꺼번에 움직이지 못한다. 그 옛날 이분들을 위한 식사나 화장실은 어떻게 했을까?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암소 500마리 염소 500마리면 그것을 도살하는데에만도 몇일이 걸릴 것이고 도살한 다음에는 그 뒷처리는 어떻게 할까? 7년간 임신을 어떻게 한단말인가? 해와 달을 어떻게 쓰다듬을까? 대지가 그렇게 진동한다면 그 주변에 무너진 가옥과 가옥에 깔린 중생들은 과연 몇명이나 되었을까? 


달을 가르키면 손가락을 보질 말고 달을 봐야한다. 물속의 자신을 보고 진짜라고 생각하고 뛰어들어 물먹고 죽는 꼴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초월적인 이야기가 진짜냐 가짜냐라는 논쟁이나 말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진짜 논쟁은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떻게 연결이 되며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손가락이 논쟁의 촛점이 아니라 달이 논쟁의 촛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연꽃은 줄기차게 이 문제를 거론한다. 왜냐하면 그정도의 수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달을 논할 수준이 아니라 손가락만을 논할 정도의 수준이라는 의미이다.


공부는 공부다워야 한다

일반적으로 영어나 중국어를 배울려면 본토에 가는게 제일 좋다. 언어는 말만 할줄 안다고 모든게 끝나는게 아니다. 겉으로 들어난 세치 혀 보다는 언어속에 녹아있는 고유한 문화 사회등을 제대로 아는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야 원만하고 올바르게 완성된다. 아무리 외국어를 잘해도 술 자리나 파티등에서 오고가는 농담이나 은어적 표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완성된 언어의 공부라고 할 수 없다. 경전공부도 마찬가지이다. 경전을 이해할려면 일단 인도의 사상과 그당시 사회상 중생들의 삶을 잘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붓다는 인도인들에게 설법을 했기 때문이다. 그분이 설법대상은 한국인들이 아니었다. 한국인들이 대상이었다면 삼천대천세계의 이야기보다는 성황당이나 재래식 화장실의 달걀귀신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경전에 흔히 나오는 탁발이라는 것을 한번 살펴보자. 밥 시간때 일곱집을 차례로 도는 탁발이라는 문화는 한국에 없다. 나체 수행자도 없다. 수많은 외도사상가들도 없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무수한 이야기가 나온다. 오른쪽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인사법도 없다. 우리 불자들 중에서 어느분이 과연 남방식으로 절을 하고 있을까? 아무도 없다. 다시 말해서 실천행으로 체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저 상상만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어로 번역된 빠알리경전은 빠알리어를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오자탈자 잘못 번역된 부분도 꽤 있다. 한글 깨쳤다고 그냥 눈으로 읽을 뿐이다. 어설프게 아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도나 태국이나 스리랑카로 유학을 오는 것이다. 뜻과 의미와 문장을 올바르게 구성하고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서울 가본 사람과 안 가본 사람이 논쟁할 때 안 가본 사람이나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다. 이런것들이 계속하여 허용되고 마치 붓다의 가르침인냥 허울을 뒤집어 쓴다면결국 불교를 망치는 지름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