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몸과 마음은 상호의존적일까? ..라는 연꽃의 글을 비판함

실론섬 2015. 2. 24. 15:39

오랫만에 연꽃님의 블로그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희안한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제목이 "몸과 마음은 상호의존적일까? 죽음의 삼요소와 상수멸정"이라고 제목을 올려놓고 자기 수준에 맞게끔 글을 썼다. 그 글의 잘못된 것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죽음(시체)란 무엇인가?

여러번 글을 올렸지만 몸과 마음의 상호 관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몸만 있고 마음이 없으면 시체

2) 마음만 있고 몸이 없으면 귀신

3) 몸과 마음이 있으면 오온(살아있는 존재)


따라서 오온에게 있어서 마음이란 몸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상호의존적인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지난번에 글에서도 인용을 하였지만 다시한번 되새겨 보자. 한역 잡아함 음근경에서는 아래와 같이 잘 설명하고 있다.


"무엇을 인연한 것을 색온이라고 하고, 무엇에 인연한 것을 수상행식온이라고 하는가? ... 사대를 인(因)으로 하고 사대를 연(緣)으로 한 것을 색온이라고 한다...촉(觸)을 인으로 하고 촉을 연으로 한 것을 수상행온이라고 한다... 명색을 인으로 하고 명색을 연으로 한 것을 식온이라고 한다..."


이 말은 오온의 색수상행식 각각의 온이 모두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의 인연화합으로 생(生)하는 것이기에 오온에 있어서는 전체로서도 그 각각의 온이 요소로서도 궁극적 실재/고정 독립된 존재는 없다는 것이고 이것은 곧 무아론의 근간이기도 하다. 


재생연결식에 보면 정자와 난자가 만나고 다시 바왕가소따(식)라는 식이 뒤따라 결합하면 비로소 생명이 있는 존재가 잉태되는 것이다. 만약에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였으나 식이 뒤따라 결합하지 않으면 사산아를 출산할 뿐이다. 


연꽃의 횡설수설

1) 몸에서 의식만 떠나서는 죽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상수멸정에 들어간자의 경우 의식이 소멸한 상태이지만 죽었다고 볼 수 없다. 식물인간의 경우 의식은 없지만 생명력과 체열이 있으므로 죽은 것이 아니다. 생명력과 체열, 그리고 의식이 모두 소멸하여야 죽었다고 할 수 있다.

(반론: 상수멸정에서 의식이 없다는 말은 곧 느낌이 없다는 말이다. 말 그대로 상수(受.느낌)멸 즉 느낌이 소멸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때 느낌이란 곧 갈애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갈애가 소멸한 상태가 상수멸이고 그러기에 아라한인 것이다. 밑에서 좀더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식물인간도 뇌의 활동을 한다. 또렷하지 않을뿐 희미하나마 의식이 있다는 말이다.)


2) 몸과 마음이 있어야 산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생명력은 체열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삼요소 중에서 생명과 체열은 상호의존적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하나가 파괴되면 나머지도 함께 파괴된다. 그러나 삼요소 중에 의식은 이와 다르다. 죽음의 삼요소에는 의식이 있다. 그런데 경에서 생명과 체열이 파괴된다고 하여 의식까지 파괴된다는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의식은 생명력과 체열과 상호의존적 관계가 아님을 알 수 있다.(반론: 음근경에서도 보았지만 의식과 몸은 상호의존적이다. 다른 경전의 설명도 보아야 할텐데... 그리고 몸과 마음이 있어야 산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라고 하였음에도 뒤에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


상수멸정이란

그가 열변을 토하고 있는 단멸론과 상수멸의 비교도 무지의 극치이지만 연꽃의 글을 한번 보자.

1) 선정이 깊어져서 상수멸에 이르면 마치 죽은 듯이 보인다. 그러나 죽음의 삼요소 중에 생명력과 체열은 남아 있다... 그러나 상수멸 상태에서는 몸과 마음을 상호의존적 존재로 보지 않기 때문에 의식이 파괴되어도 몸이 파괴되지 않는다. 그래서 생명력과 체열은 남아 있는 것이다... 


2) "벗이여, 이러한 생명력의 형성과 느낌의 상태는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벗이여, 생명력의 형성과 느낌의 상태가 동일한 것이라면, 수행승이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 들었을 때에 그 상태에서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벗이여, 생명력의 형성과 느낌의 상태가 다른 것이므로, 수행승이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 들었을 때에 그 상태에서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M43)


참으로 올바른 경전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연꽃은 그런데 연꽃은 이것을 자기 수준대로 해석하여 경전의 가르침을 완전히 망쳐 놓았다. 왜냐하면 여기서 지각과 느낌의 소멸이란 갈애의 소멸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마음이라는 그 자체의 소멸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수멸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작자는 마음을 깨끗이 하여 갈애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곧 마음을 없애 버리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없다는 것과 마음을 깨끗이 하여 지각과 느낌을 소멸시키는 것은 180도 다른 이야기이다. 마음이 없다면 죽은 것인데 어떻게 상수멸에서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아라한이 마음이 없다는 말인가? 그럼 전부다 몸만 있는 귀신..??


그의 글을 보면

3) "그런데 경에 따르면 "생명력의 형성과 느낌의 상태가 동일한 것이라면"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상호의존적 연기라면'이라는 뜻이다. 마치 생명력과 체열이 상호의존적인 것과 같다. 생명력이 소멸하면 체열 또한 소멸하기 마련이므로, 만일 생명력과 느낌이 상호의존적이라면 상수멸상태에서 느낌이 소멸하면 생명력도 소멸할 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삼요소 중에서 생명력과 체열은 상호의존적이지만 생명력과 의식 또는 체열과 의식은 상호의존적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4) 이렇게 본다면 단멸론자들이 단순무식하게 몸과 마음이 상호의존하여 '한쪽이 파괴되면 다른 쪽도 파괴되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식의 이야기는 경전적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모순이다. 그리고 스스로 무식을 폭로하는 엉터리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반론: 단멸론자들은 죽으면 이 세상에서 끝이고 다음 생으로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몸과 마음이 상호의존하여 한 쪽이 파괴되면 다른 쪽도 파괴되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주장이 아니다.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죽으면 ALL end 라는 말과 죽어도 윤회한다는 말은 천양지 차이가 나는 말이다)


상수멸에서 느낌이란

위에서 일부 언급을 하였지만 상수멸정의 상태란 곧 아라한의 상태이다. 그런데 이 경지를 지각이나 느낌이 없는 상태라고도 말한다. 이때 느낌이라는 말은 곧 갈애를 일으키는 수(受)가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이 꺼진 상태처럼 마음이 고요하다는 의미이지 마음이 無 하다는 뜻이 아니다.


여러번 강조하지만 12연기에서는 촉 - 수 - 애(갈애) - 취(좋다 싫다 분별하여 취하는 것).. 순이다. 그리고 경전에서는 몸의 느낌과 마음의 느낌 두 가지를 설명하고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들 중생이나 아라한도 마음은 모두다 가지고 있고 여자를 보면 저것이 여자라고 분간하고 꽃을 보면 꽃이라고 분간한다. 똥인지 된장인지를 분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중생과 다른게 있다. 그게 바로 몸의 느낌에서 마음의 느낌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대상을 보고(몸의 느낌) 갈애를(마음의 느낌)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부연하자면 우리들은 여자들을 보면(몸의 느낌) 곧바로 갈애를 일으킨다. 꽃을 보거나 보석을 봐도 갖고 싶다거나 좋지 않다거나 하는 갈애와 취착을 일으킨다. 하지만 아라한은 대상에 대해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다. 불이 꺼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붓다나 아란한도 몸이 아프면 아픈줄 안다.화장실에 가고싶은 느낌이 나면 화장실에 간다. 그런 느낌이 없으면 화장실에 갈 수가 없다. 다만 몸의 느낌에서 끝을 낼 뿐 마음의 느낌(갈애.취착)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수멸에서는 당연히 마음이 있다. 수(受.느낌)가 없다는 것이고 이때 수란 곧 갈애를 말하는 것이다. 갈애를 일으키는 마음이 소멸한 상태(불이 꺼진 상태)인 고요한 마음의 경지가 곧 상수멸정인 것이다. 


따라서 연꽃의 글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 수가 있다. 무엇이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하면서 글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상태가 되는가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관념의 불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올바르게 수행도 안하고 올바르고 배우지도 못한채 오직 자신이 아는 범위내에서 생각(관념)만으로 불교를 하는 외도이기 때문이다. 관념의 불교를 하게 되면 자신도 망치고 주변 사람들도 망치고 불교도 망치게 주범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