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호잔님의 블로그에서 글을 옮겨와서...

실론섬 2015. 2. 25. 14:49

경장에서는 유정체의 죽음이 식과 생명력과 체온으로 설명된다.

여기서 말하는 식은 죽음식(쭈띠 찟따)이고, 생명력은 물질의 명근(지위띤드리야)이며, 체온은 화대(떼조 다뚜)다.

물질의 명근은 매 아찰라마다 생성되는 업에서 생긴 깔라빠에 포함된 루빠담마다.

이때, 아찰라는 마음이 일어나고 머물고 무너지는 순간이며, 이 세 순간을 합쳐서 하나의 마음찰라라고 하며, 아찰라와 마음찰라는 마음과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업은 과거의 업의 마음(꾸살라 마음과 아꾸살라 마음)에 있었던 의도(쩨따나)다.

 

위와 같은 아비담마에 대한 지식이 바르게 파악되면, 유정체의 죽음과 멸진정과 무여열반이 식과 생명력과 체온에 따라 바르게 설명될 수 있다.

그럼, 일반적인 죽음과 멸진정과 무여열반을 경장에서 설해진 식과 생명력과 체온에 따라 어떤 상태인지 알아보자.

 

일반적인 중생의 죽음은 죽음식이 일어나고 이어서 업에 따라 재생연결식으로 다른 유정체로 연기되어 윤회가 계속되는 상태다.

죽음식이 일어난 몸은 더 이상 유정체의 몸이 아니라, 무정체의 몸, 즉 시체다.

시체에서는 업과 마음과 영양소에서 생긴 물질이 일어나지 못하고, 화대에서 생긴 물질만 계속 연기되는 상태다.

시체에서는 업에 의한 깔라빠가 발생되지 않으므로 업에 의한 깔라빠에만 포함된 명근(생명력)이 당연히 생기지 않는다.

또한, 업과 마음과 영양소에 의한 깔라빠들이 생기지 않으므로 이 깔라빠들에 포함된 화대만큼 감소되므로 체온이 현저히 떨어진다.

 

멸진정(상수멸)은 죽음식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로, 업에 따른 마음은 연기되지 않지만 업에 따른 물질은 연기되는 상태다.

멸진정에 든 몸은 죽음식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이므로 시체가 아니라 유정체의 몸이다.

멸진정에 든 몸은 업과 영양소와 화대에서 생긴 물질만 연기되는 상태다.

멸진정에 든 몸에서는 마음이 연기되지 않으므로 마음에 의한 깔라빠의 물질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업에 의한 깔라빠에 포함된 명근에 의한 생명현상이 계속되어 유정체로 유지되므로 영양소에 의한 깔라빠가 연기를 계속한다.

멸진정에서는 업에 의한 감성물질과 성물질과 토대물질과 생명물질을 포함하는 깔라빠가 연기되어 마음이 일어날 물질조건은 충족되어 있지만, 오식과 의식은 연기될 수 없는 상태다.

또한, 마음에 의한 깔라빠가 생기지 않으므로 이 깔라빠에 포함된 화대만큼 감소되므로 정상적인 유정체보다 체온이 떨어진다.

멸진정을 이해하면, 마음이 연기되지 않는 상태에서도 과거 업에 의한 물질적 과보가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여열반은 죽음식이 일어난 상태로, 업에 따른 재생연결식이 더 이상 연기되지 않으므로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상태이며, 업과 마음과 영양소에 따른 깔라빠 단위의 물질이 연기되지 않는 상태다.

무여열반에 든 몸은 더 이상 유정체의 몸이 아니라, 무정체의 몸, 즉 시체다.

무여열반으로 남아있는 시체는 중생들의 일반적인 죽음에 따른 시체와 동일한 상태다.

그러나, 무여열반은 중생들의 일반적인 죽음과는 전혀 다른 아상카라 담마 상태며, 유정체로 남아 있는 멸진정과도 다른 상태다.

무여열반에서는 업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라한 성자들의 무여열반은 중생들의 일반적인 죽음과 다르고, 아라한 성자들의 유여열반과 다르며, 선정에 능숙한 아나함 및 아라한 성자들이 들 수 있는 멸진정과도 다른 상태다.

아라한 성자들의 유여열반은 더 이상 업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과거의 업행에 의한 업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업행에 의한 업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그에 따른 과보를 계속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보를 받는 것은 물질의 발생원인만으로 쉽게 말하면, 과거 업행에 의한 9가지 깔라빠의 물질(명근이 포함된 깔라빠의 물질)이 계속 생멸하는 것이다.

 

남아 있는 시체 또는 더 이상 연기되지 않는 마음을 생각하며 무여열반을 단멸이라고 하는 자는, 열반을 영원한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처음부터 개념적으로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견邪見에 빠진 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들은 연기하는 상카라 담마 상태(세상)와 연기하지 않는 아상카라 담마 상태(열반)를 처음부터 존재와 비존재의 관점에서 보고 있는 자다.

사견에 빠진 상태에서는 해탈 열반이 불가능하다.

정견으로 수행할 때에만, 즉 수다원에 이른 상태에서 수행할 때에만 해탈 열반에 이를 수 있다.

팔정도에서 정견이 빠진 도(길)에 따른 수행은 어떠한 경우에도 해탈 열반에 이를 수 없다.

가장 기본적인 바른 견해가 업에 대한 바른 견해다.

우리는 현재에도 계속 업행을 하고 있고 물질적 과보 및 정신적 과보로 과거의 업행에 따른 과보를 받고 있다.

[출처] 죽음과 멸진정과 무여열반|작성자 호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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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이란 나마 담마(정신)에 한정하여, 생멸하는 어떤 상카라 담마가 그 뿌리(잠재성향)까지 뽑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유여열반은 유정체에서 생멸하는 아꾸살라 담마(불선법)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것이고,

무여열반은 유정체에서 생멸하는 모든 상카라 담마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열반은 나마 담마(정신)도 아니고 루빠 담마(물질)도 아니므로, 열반이 나마 담마(정신)에 속한다는 구별은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나마 담마와 루빠 담마는 생멸하는(일어나고 사라지는) 상카라 담마이기 때문이다.

 

수다원에게는 사견과 의심이라는 아꾸살라 담마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지만, 나머지 상카라 담마는 생멸을 계속한다.

아나함에게는 감각적 욕망과 성냄까지 아꾸살라 담마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지만, 나머지 상카라 담마는 생멸을 계속한다.

아라한에게는 모든 아꾸살라 담마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지만, 나머지 상카라 담마는 생멸을 계속한다.

 

열반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아꾸살라 담마가 그 뿌리(잠재성향)까지 뽑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것을 경험한다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수다원은 사견과 의심이라는 아꾸살라 담마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음을 경험한다.

아나함은 감각적 욕망과 성냄까지 아꾸살라 담마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음을 경험한다.

아라한은 모든 아꾸살라 담마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음을 경험한다.

 

수다원이 경험하는 열반은 사다함이 경험하는 열반과는 다르다.

사다함이 경험하는 열반은 아나함이 경험하는 열반과는 다르다.

아나함이 경험하는 열반은 아라한이 경험하는 열반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수다원의 깨달음과 사다함의 깨달음과 아나함의 깨달음과 아라한의 깨달음은 모두 다르다.

아라한의 깨달음을 특별히 해탈 또는 유여열반이라고 한다.


아라한은 무여열반(모든 나마 담마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상태)을 경험할 수 없다.

아라한이 무여열반에 든다는 것은 이미 아라한(상카라 담마 상태)이 아니며, 무여열반은 경험가능한(인식가능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여열반에 든 아라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단지 한 유정체(아라한)가 무여열반에 들어, 단지 그 유정체를 이루며 생멸하고 형성되고 조건지어지고 있던 나마 담마(정신)가 더 이상 생멸하지 않고 형성되지 않고 조건지어지지 않게 되는 무여열반이 있게 될 뿐이다.

 

깨달음은 어떤 유정체에서, 어떤 아꾸살라 담마가 그 뿌리(잠재성향)까지 뿌리뽑힌 상태를 경험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따라서, 열반을 경험한다는 것은 곧 어떤 상태의 깨달음을 의미한다.

가르침에서는 깨달음을 네 단계로 구분하여 그 상태에 이른 유정체를 범부 중생과는 다른 수다원 성자, 사다함 성자, 아나함 성자 및 아라한 성자라고 한다.

 

범부 중생과 성자는 깨달음에 따라 일어나는 마음 면에서 서로 전혀 다른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수다원만 하더라도 범부 중생에 비해,

사견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탐욕을 뿌리로 하는 8개의 불선한 마음 중에서 4개가 전혀 일어나지 않고, 이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성냄을 뿌리로 하는 마음이 반으로 줄어들며, 의심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어리석음을 뿌리로 하는 2개의 불선한 마음 중에서 1개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수다원 성자가 되면, 불선한 마음 12개 중의 6개가 전혀 일어나지 않으므로 반으로 줄어들고, 일어나는 불선한 마음의 강도가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이러한 상태를 붓다께서는 숲속의 나뭇잎 중에서 손에 집어올린 얼마간의 나뭇잎이나, 대양의 바닷물 중에서 떠올린 얼마간의 물로, 범부 중생에게 일어날 번뇌에 비해 수다원에게 남아있는 번뇌를 비유하셨다.

 

한편, 담마는 실체가 아니라 성품이므로 욕망(로바)이라는 담마는 ‘욕계에 대한 욕망(감각적 욕망)’과 ‘색계에 대한 욕망’과 ‘무색계에 대한 욕망’으로 나눌 수 있다.

이에 따라 각 단계에서 뿌리 뽑히는 족쇄를 세분한다.

 

색계 또는 무색계에 대한 욕망을, 존재 또는 비존재에 대한 욕망으로 해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수다원에 이르면, 이미 존재와 비존재에 따른 사고방식을 넘어선 담마적 사고방식으로, 담마의 연기를 깨닫게 되어 사견(또는 유신견)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견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존재에 대한 욕망과 비존재에 대한 욕망이 있을 수는 없다.

단지 어떤 담마로 형성되는 욕계에 대한 욕망과, 어떤 담마로 형성되는 색계에 대한 욕망과. 어떤 담마로 형성되는 무색계에 대한 욕망이 있을 뿐이다.

[출처] 열반에 대한 새로운 이해|작성자 호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