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연꽃님의 글을 읽은 독후감 - 연꽃은 과연 승가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실론섬 2015. 4. 6. 19:48

“우리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

부끄러움과 창피함

“양심과 수치심이 없는 자들에 정복당한 한국불교는 ‘천박한 자들’의 것”

2015-04-05 (일) 09:22 진흙속의연꽃 |


법과 제도만 있으면 사회질서가 유지될 수 있을까?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논란, 종교계의 범계행위를 보면 아무리 법과 제도를 잘 만들어 놓았다고 하더라도 의식이 따라주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흔히 제도개혁과 의식개혁을 말한다. 제도개혁은 되었지만 의식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낮에 한 말 다르고 밤에 하는 행동이 다르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잘 만들어진 제도가 있음에도 낯부끄러운 일이 발생하는 것은 의식이 따라 주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것이다.

 

부끄럼과 창피함은 순수한 우리말이다. 이에 대한 빠알리어가 히리(hiri)와 옷땁빠(ottappa)이다. 이에 대한 또 다른 한자어는 양심과 수치심이다. 한자어로는  ‘참(慚)’과 ‘괴(愧)’라 한다.  

 

부끄러움=양심=히리(hiri)=慚(참)

창피함=수치심=옷땁빠(ottappa)=愧(괴)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그 말이 그 말 같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악행’을 저지르는 것과 관계가 있다. 

 

지금 악행을 저질렀는데 이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면 부끄러운 것이다. 그런 부끄러움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히리(hiri) 한자어로는 ‘참(慚)’이라 하고 또 양심이라 한다. 이렇게 내적으로 스스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을 부끄러움이라 한다.

 

창피함이란 무엇일까? 지금 악행을 저질렀다면 누군가로부터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언제 발각될지 두려워할지 모른다. 이렇게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여 두려워하는 것이 창피함이라 한다. 그래서 창피함에 대한 빠알리어는 옷땁빠(ottappa)이고 한자어로는 ‘괴(愧)’라 하고 또 수치심이라 한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선한 마음이다. 반면에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것은 불선한 마음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양심(hiri)과 수치심(ottāpa)은 25가지 선한 마음으로 분류 되어 있다. 그런데 부끄러움과 창피함이라는 말은 초기경전 도처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남을 화내게 하고, 이기적이고,

악의적이고, 인색하고, 거짓을 일삼고,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십시오.” (stn133) 

 

경에서 부끄러움과 창피함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그래서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십시오.”라 하였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지금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는 자가 있는데, 그가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하여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리고 계속 악행을 해서 지탄을 받아도 그러건 말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마디로 ‘후안무치’이고 얼굴에 철판을 깐 자들이라 볼 수 있다.

 

부끄러움(양심)과 창피함(수치심)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도 같은 것이다. 만일 양심과 수치심이 없는 사회라면 어떻게 될까? 도저히 있어서는 안될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건이 비일지비재하게 발생할 것이다.

 

친딸을 성폭행하였다는 뉴스가 간간히 있는데 이처럼 근친상간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비만 오면 물고기들이 떼죽음 당하였다는 뉴스를 본다. 비가 올 때 몰래 오폐수를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 역시 양심과 수치심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양심이 실종 되고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사회가 된다면 그런 사회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도박을 일삼고 더구나 매관매직까지 하는 스님들이 있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창피함을 모르기 때문에 천박한 행위를 서슴없이 한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뭇삶들은 세계에 따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 믿음이 없는 자는 믿음이 없는 자와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와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창피함을 모르는 자는 창피함을 모르는 자와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배움이 없는 자는 배움이 없는 자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 게으른 자는 게으른 자와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새김이 없는 자는 새김이 없는 자와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지혜롭지 못한 자는 지혜롭지 못한 자와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s14.17)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끼리 어울리고, 창피함을 모르는 자는 창피함을 모르는 자와 관계를 맺는다. 이렇게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철면피들이 모였을 때 ‘개판’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한국불교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자들에게 정복당해 있다. 그래서 아무리 잘못을 해도 처벌하지 않는다. 도박을 해도, 술판을 벌여도, 은처를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거짓과 위선과 모순을 고발하면 오히려 보복을 당한다. 이렇게 양심 없고 수치심이 없는 자들에 정복당한 한국불교는 ‘천박한 자들’의 것이다. 그래서 언제 또다시 국민들의 지탄을 받을 지 알 수 없다.

 

만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회라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장’이 될 것이다. 그런 사회는 다름아닌 짐승의 세상이다. 약자는 잡아 먹히고 강자는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세상이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은 우리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이다. 그리고 양심과 수치심은 인간사회를 수호 하는 두 가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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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연꽃의 글을 읽으면 마치 연꽃은 붓다보다 더 청정하고 위대하고 훌륭한 스승으로써 한국불교계를 질타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자신은 불교도로써 하늘을 우러러 티끌만큼도 양심과 수치심에 꺼릴 것이 없다는 글이다. 과연 재가자로써 저런 비난의 글을 한두번도 아니고 수십번은 더 쓸 정도로 연꽃 자신은 불교도로써 완벽할까? 누워서 침 뱉는 것은 아닐까? 0묻은 0가 0 묻은 0를 비난하는 그런 어리석은 자는 아닐까?


세상의 어느나라 불교계도 100% 청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없다. 남방권 불교도 내막을 들여다 보면 실망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스리랑카 불교계도 한꺼풀만 벗겨보면 비난받을 소지도 많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연꽃처럼 비난하는 글을 쓰거나 말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라한에 이르지 못한 중생들(사부대중)은 아직은 청정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있고 그리고 끊임없이 서로 용기를 북돋아 주며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사부대중으로 구성된다. 수행승은 중생들의 스승으로써 불법을 수지하고 또한 자기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하고, 재가자들은 불교 승단을 외호하며 수행승들이 참다운 수행을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줘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저 자신도 한국불교및 대승불교를 비난하는 쪽에 서 있는 사람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되돌아 생각해 본다. 나는 과연 참된 재가자인가? 나는 과연 재가자의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하고 있는가? 나는 오계라도 제대로 지키는가? 승가를 비난할 만큼 내 자신은 자격을 갖추고 있는걸까?


과거의 글에서도 여러번 강조를 했지만 불교를 망치는 주범은 승려들이라기 보다는 재가자쪽이다. 엉터리 재가자가 엉터리 불교를 만들고 엉터리 수행승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승려들보다 재가자의 책임이 더 크다. 이것은 닭이 먼저냐 달갈이 먼저냐의 문제가 아니다. 재가자들이 청정하면 승가도 자연스럽게 청정해 진다. 청정한 재가자들이 모인 장소에는 청정하지 못한 수행승이 발을 붙일 자리가 없다. 잘못된 길을 가는 수행자가 있다면 재가자들이 얼마든지 나서서 잘못을 지적하고 올바른 길로 가도록 요구할 수 있다. 계율중에서 많은 부분들이 재가자들의 요청에 의해서 제정되었고, 코삼비 비구사건이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1) 나는 재가자의 충족요건을 갖추고 있는가? (아래 16가지 조건)

2) 나는 수행승들이 참다운 수행을 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외호하고 있는가?

3) 나는 수행승들이 잘못된 길로 빠지도록 그들을 유혹하고 있지는 않는가?

4) 나는 계율을 철저히 알아 수행승들에게 요구해서는 안되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5) 나는 나의 가족들을 전부다 불자로 만들었는가?

6) 나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없이 자비와 보시를 베풀고 있는가?

7) 나는 오계를 지키고 있는가?

8) 일요일이면 엄마는 절로, 아빠는 골프나 낚시터로, 남자 아이는 교회로, 여자 아이는 성당으로 가지 않나요?

9) 밥상머리에서나 또는 아이들이 불교교리 질문하면 과연 몇분이나 제대로 답을 하는지요? 대승불교의 부처님과 역사적으로 실존하셨던 고따마 붓다를 아이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는 불자들이 몇분이나 되나요? 

10) 기타등등


불교에서 말하는 재가신자(우바이. 우바새)란 어떤 사람들이며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참다운 재가 신자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담은 경전이 있다. 빠알리어 니까야에는 [앙굿따라니까야 A.25, 마하나마경]이며 같은 내용으로 [잡하함경 929. 일체사경(一切事經)]이 있다.

 

간단하게 내용을 알아보자. 하마나마라는 재가신자가 붓다를 찾아와 재가불자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묻는 질문에 대답을 하신 것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사람을 가리켜 재가신자라 합니까?"

"집에서 청정하게 살면서 '목숨을 마칠 때 까지 삼보에 귀의하는 우바새(우바이)가 되겠습니다. 이를 증명하여 주십시오' 라고 다짐한 사람들을 말한다."

"세존이여, 어떤 것을 모든 우바이(우바새)가 원만하게 조건을 갖춘 것이라고 합니까?"

"마하나마여, 다음과 같은 열여섯 가지 조건을 원만하게 갖추어야 참다운 우바이(우바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하고  (2) 그것을 다른 사람도 가지도록 한다.

(3) 스스로도 깨끗한 계를 가지고(도덕적 삶의 확립) (4) 다른 사람에게도 깨끗한 계를 가지도록 한다.

(5) 스스로도 보시를 행하고 (6)다른 사람도 보시를 행하게 한다.

(7) 스스로도 절에 자주 나아가 불교를 배우고 모든 사문을 뵙고 (8) 다른 사람도 절에 자주 가서 법을 배우고 사문을 뵙게 한다.

(9) 스스로도 열심히 법을 듣고 (10) 다른 사람도 열심히 법을 듣게 한다.

(11)스스로도 항상 바른 법만을 받아 지니고 (12) 다른 사람도 항상 바른 법만을 받아 지니게 한다.

(13) 스스로도 이치를 관찰하고 (14) 다른 사람도 관찰하게 한다. (자신이 받아 지닌 법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그 뜻을 깊이 관찰해야 한다)

(15) 스스로도 법을 따르고 법을 향해 실천행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고 (16) 다른 사람도 법을 따르고 법을 향해 실천행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한다.


또한 경전은 자신은 이롭게 하지만 남을 이롭게 하지 않는 것도 진정한 불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1) 어떤 우바새(優婆塞)는 스스로의 도덕적인 삶(戒)은 확립되었지만, 남을 위해 바른 도덕적 삶(正戒)이 되도록 하지 않는다.

(2) 스스로는 깨끗한 도덕적인 삶(淨戒)이 확립되었지만, 남도 구족(具足)하게 하지는 않는다. 

(3) 스스로는 보시(布施)를 행하지만, 남이 보시하도록 하지는 않는다.

(4) 스스로는 (절에 나가) 불교를 접하고 나아가 여러 스님들을 뵈옵지만, 남을 권하여 불교에 접하게 하거나 스님들을 뵈옵게 하지는 않는다.

(5) 스스로는 열심히 법을 듣지만, 남을 권해 바른 법을 즐겨 듣게 하지는 않는다.

(6) 스스로는 법을 들어 가지면서도, 남이 바른 법을 받아 가지도록 하지는 않는다.

(7) 스스로는 매우 깊고 묘한 이치를 관찰하지만, 남이 깊은 뜻을 관찰하도록 하지는 않는다.

(8) 스스로는 깊은 법을 알아 법에 따르고 향하지만, 남을 권하여 법을 따르고 향하게 하지는 않는다.

 

승가나 수행승을 비난하기에 앞서 과연 한국의 불자들은 얼마나 재가자로써 조건을 갖추고 신행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