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연꽃의 글을 읽고 - 누가 진짜로 국맛을 모르는 국자일까?

실론섬 2015. 4. 13. 23:38

양 날개로 더 높이 더 멀리

[‘진흙속의연꽃’의 불교이야기] 12. 교학과 수행

“교학으로 통찰지 얻고…수행을 통해 열반 증득”

2015-04-13 (월) 14:28

진흙속의연꽃 |


세간에서 하는 말 중에 ‘손에 쥐어 주어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어리석은 자에게 ‘이것이 진리다’라고 말해 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알아듣기는커녕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 그래서일까 노자 도덕경에 따르면 일반사람들에게 도(道)를 이야기 해 주면 대부분 크게 웃어버린다고 하였다.

 

국과 국자와 관련된 게송 

법구경에 국과 국자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국자는 국을 푸는 도구이지만 국 맛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Yāvajīvam-pi ce bālo  

paṇḍitaṃ payirupāsati  

Nasodhammaṃ vijānāti,  

dabbī sūparasaṃ yathā.  

 

Muhuttam-api ce viññu  

paṇḍitaṃ payirupāsati  

Khippaṃ dhammaṃ vijānāti,  

 jivhā sūparasaṃ yathā.   

 

어리석은 자는 평생을 

현명한 님을 섬겨도

국자가 맛을 모르듯,

진리를 알지 못한다.

 

양식 있는 자는 잠깐만

현명한 이를 섬겨도

혀가 국 맛을 알 듯,

진리를 재빨리 인식한다. (Dhp64-65, 전재성님역)

  

국자는 국 맛을 모른다는데 

64번 게송에서 국자가 국 맛을 모른다고 하였다. 이 말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어떻게 설명하였을까?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dabbī sūparasaṃ yathā : DhpA,II,31에 따르면, 국자는 다양하게 요리된 음식이 마지막으로 부패하는 순간까지도 요리된 것의 맛을 이와 같이 ‘이것은 짜다. 이것은 짜지 않다. 이것은 쓰다. 이것은 쓰지 않다. 이것은 아리다. 이것은 아리지 않다. 이것은 맵다. 이것은 맵지 않다. 이것은 시다. 이것은 시지 않다. 이것은 떫다. 이것은 떫지 않다.’라고 구분하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자는 현자와 평생을 같이 지내도 가르침을 식별하지 못한다. (법구경 714번 각주, 전재성님) 

 

가르침을 식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국자의 비유를 들었다. 이때 여러 맛이 나온다. 짠맛, 쓴맛, 아린맛, 매운맛, 신맛, 떫은맛 이렇게 여섯 가지 맛이다. 이런 맛을 국자가 알 리 없다. 

 

어리석은 자는 진리를 모른다 

국자는 국을 푸는데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다. 그러나 국자는 짠맛 등 갖가지 맛을 식별할 수 없다. 어리석은 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국자가 맛을 모르듯, 진리를 알지 못한다.”라 하였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DhpA.II.31에 따르면, 정말 어리석은 자는 현명한 자를 찾아가 그와 평생을 지내더라도 가르침의 실천(paṭipatti)과 가르침의 꿰뚫음(paṭivedha)을 알지 못한다. 그는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 부처님의 말씀은 이러하고, 교법(pariyatti)은 이러하고, 이것이 올바른 행위이고 이것이 잘못된 행위이고, 이것이 실천할 가치가 있는 것이고, 이것이 실천할 가치가 없는 것이고, 이것이 성찰되어야 하는 것이고 이것이 깨달아져야 하는 것이다.’라고 알지 못한다.(법구경 715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에 따르면 가르침의 실천(paṭipatti), 가르침의 꿰뚫음(paṭivedha), 교법(pariyatti) 이렇게 세 가지를 소개 하고 있다. 이것이 불교공부를 하는 목적일 것이다. 마치 새가 양 날개로 날듯이 교학과 수행을 하여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빠띠빳띠, 빠띠웨다, 빠리얏띠 

빠띠빳띠, 빠띠웨다, 빠리얏띠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PCED194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1) paṭipatti

: practice, or 'pursuance' of the teaching, as distinguished from the mere theoretical knowledge of its wording (pariyatti , q.v.).。

 

2) paṭivedha

: 'penetration', signifies the realization of the truth of the Dhamma, as distinguished from the mere acquisition of its wording (pariyatti ), or the practice (paṭipatti) of it, in other words, realization as distinguished from theory and practice. Cf.

 

3) pariyatti

: 'learning the doctrine', the 'wording of the doctrine'. In the 'progress of the disciple' (q.v.), 3 stages may be distinguished: theory, practice, realization, i.e. (1) learning the wording of the doctrine (pariyatti ), (2) practising it (paṭipatti), (3) penetrating it (paṭivedha) and realising its goal. (App.).。 

 

paṭipatti 는 수행(practice)이라 하고, paṭivedha는 통찰(penetration), pariyatti는 교학(learning the doctrine)이라 하였다. 교학만 해서도 안 되고, 수행만 해서도 안 되고 교학과 수행을 함께 해야 함을 말한다. 그래야 진리를 꿰뚫어 볼 수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교학과 수행은 양 날개와 같다. 양 날개가 갖추어져야 비상할 수 있듯이 한쪽에만 치우쳐 있다면 진리를 맛 볼 수 없음을 말한다. 

   

수행이 더 중요할까 교학이 더 중요할까? 주요한 논쟁거리이다. 수행의 맛을 본 사람들은 교학보다 수행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교학의 즐거움을 맛본 사람들은 수행도 좋지만 교학이 바탕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논쟁이 초기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 ‘마하쭌다의 경(A6.46)’에 실려 있는 교학승과 선정승의 논쟁이 그것이다.

 

선정승을 비난하는 교학승 

선정승은 선정의 즐거움을 안다. 그러나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반면 교학승들은 전승된 가르침을 외고 독송하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이런 교학승들에게 있어서 선정승들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선정승은 교학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험담을 한다. .  

 

벗들이여, 세상에 가르침을 중시하는 수행승들은 선정을 닦는 수행승들을 이와 같이 ‘이들은 ‘우리는 선정에 든다. 우리는 선정에 든다.’라고 선정에 들고 명상에 든다. 이들은 도대체 무슨 선정에 든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선정에 든단 말인가?’라고 헐뜯습니다.  

(마하쭌다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6.46, 전재성님역) 

 

선정승의 불만에 대한 것이다. 교학승에 대한 비판이다. 교학승들은 선정의 경지를 경험해 보지도 않고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학승들은 “도대체 무슨 선정에 든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선정에 든단 말인가”라고 비난한다는 것이다.

 

교학승을 비난하는 선정승 

교학승들은 확실한 대상이 있다. 그것은 말이나 글로서 전승되어 온 가르침을 공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외워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이렇게 말로서 가르침을 표현하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체험한 것을 말로 표현을 할 수 없는 선정승의 입장에서 본다면 교학승들은 말로만 수행하는 것처럼 비추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교학승은 선정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험담을 한다. 

 

벗들이여, 선정에 드는 수행승들은 가르침을 중시하는 수행승들을 이와 같이 ‘이들은 ‘그러나 이들은 ‘우리는 가르침을 중시한다. 우리는 가르침을 중시한다.’라고 생각하지만, 들뜨고 오만하고 동요하고 수다스럽고 쓸데없이 지껄이고 새김을 잃고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마음이 혼란되고 감관은 거칠다.’라고 헐뜯습니다. (마하쭌다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6.46, 전재성님역) 

 

교학승의 불만에 대한 것이다. 선정승들은 교학승들에 대하여 말만 앞서는 수다쟁이 정도 취급하는 것이다. 말이 많다는 것은 말이 사로 잡혀 본질을 놓치기 쉬울 것이다. 그래서 선정승은 말 많은 교학승들에 대하여 그다지 좋지 않게 본다. 경에 따르면 “들뜨고 오만하고 동요하고 수다스럽고 쓸데없이 지껄이고 새김을 잃고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마음이 혼란되고 감관은 거칠다”라고 비난한다. 

 

지향하는 목표는 같은데 

선정승과 교학승은 서로 헐뜯고 비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수행승들이 지향하는 공통적인 목표는 같다. 그것은 ‘행복’이다.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학을 하고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 헐뜯고 다투는 모습은 볼썽사나울 것임에 틀림없다. 이에 마하쭌다는 양시론적 입장에서 두 부류의 수행승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벗들이여, 이와 같이 ‘가르침을 중시하면서 선정에 드는 수행승을 칭찬하리라.’라고 배워야 합니다. 벗들이여, 이와 같이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벗들이여, 세상에 이러한 불사의 세계를 몸으로 접촉하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을 세상에서 만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벗들이여, 이와 같이 ‘선정에 들면서 가르침을 중시하는 수행승을 칭찬하리라.’라고 배워야 합니다. 벗들이여, 이와 같이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벗들이여, 세상에 이러한 심오한 의취를 지혜로 꿰뚫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을 세상에서 만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마하쭌다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6.46, 전재성님역) 

 

두 종류의 수행승에 대하여 각각 장점을 칭찬해야 함을 말한다. 선정위주의 수행이든 교학위주의 수행이든 모두 행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모르는 점을 지적하기보다 각각의 경지를 인정해 주어 서로 배우자는 것이다. 

 

교학승이 선정승에게 배워야 할 것은 ‘불사의 세계를 몸으로 접촉’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열반의 경지이다. 실제로 수행을 하여 체득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선정승이 교학승에게 배워야 할 것은 ‘심오한 의취를 지혜로 꿰뚫음’이다. 이는 다름 아닌 통찰지를 말한다. 교학을 공부하는 것으로도 통찰지를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경에 따르면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려면 선정수행을 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선정승이 수행승 보다 더 수승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단점만을 말한다면 비난이 되지만 장점을 말한다면 칭찬이 된다. 서로 장점을 칭찬함으로서 서로 배우자는 것이 경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잘못된 비유 

국자는 국의 맛을 모른다고 하였다. 어떤 이들은 이 게송을 이용하여 교학에만 몰두하는 것에 대하여 국자가 국의 맛을 모르는 것과 같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부처님가르침을 모독하는 것과 같다. 

 

앙굿따라니까야 마하쭌다의 경에서 “선정에 들면서 가르침을 중시하는 수행승을 칭찬하리라.’라고 배워야 합니다. 벗들이여, 이와 같이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벗들이여, 세상에 이러한 심오한 의취를 지혜로 꿰뚫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을 세상에서 만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A4.46)”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교학수행만 하는 것에 대하여 국자가 국의 맛을 모르는 것이라 말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비유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통찰지는 반드시 선정수행을 해야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교학수행을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선정수행(paṭipatti) 과 교학수행(pariyatti)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였을 때 빨리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은 자가 되려면 

깨닫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참선만 하면 깨닫게 되는 것일까? 교학만 한다고 깨닫게 될까? 반드시 그렇지 않다. 숫따니빠따에 따르면 교학과 수행을 함께 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새의 양 날개와 같다. 새가 한쪽 날개로 날 수 없듯이 교학과 수행이 받침이 되었을 때 훨씬 더 빨리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숫따니빠따 ‘셀라의 경(Sn3.7)’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Abhiññeyyaṃ abhiññātaṃ,   

bhāvetabbañca bhāvitaṃ;    

Pahātabbaṃ pahīnaṃ me,     

tasmā buddhosmi brāhmaṇa.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은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입니다.(stn558) 

 

여기서 ‘알아야 할 것(pariññeyyā)’은 일반적으로 ‘교학’을 말하고, ‘닦아야 할 것(bhāvetabbā)’은 ‘수행’을 말한다. ‘버려야 할 것(pahātabbā)’은 오염원을 버린다는 뜻이다. 오염원 소멸 되었을 때 청정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교학과 수행으로 통찰지를 증득하였을 때 ‘깨달은 자(buddha)’가 된다고 하였다.

 

맛지마니까야에서는 

맛지마니까야에서는 알아야 할 것, 닦아야 할 것, 버려야 할 것과 함께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실현해야 할 것이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 수행승들이여, 곧바른 앎으로 두루 알아야 할 것이란 어떠한 것인가?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을 말한다. 곧 물질의 집착다발, 느낌의 집착다발, 지각의 집착다발, 형성의 집착다발, 의식의 집착다발이 있는데, 이것들은 두루 알아야 할 것이다.

 

2) 수행승들이여, 곧바른 앎으로 버려야 할 것이란 어떠한 것인가? 무명과 존재의 갈애가 있는데, 이것들은 버려야 할 것이다.

 

3) 수행승들이여, 곧바른 앎으로 닦아야 할 것이란 어떠한 것인가? 멈춤과 관찰이 있는데, 이것들은 닦아야 할 것이다.

 

4) 수행승들이여, 곧바른 앎으로 실현해야 할 것이란 어떠한 것인가? 명지와 해탈이 있는데, 이것들은 실현해야 할 것이다. 

(Mahāsaḷāyatanika suttaṃ-커다란 여섯 감역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149,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알아야 할 것에 대하여 ‘오온’이라 하였다. 버려야 할 것은 ‘무명과 갈애’라 하였다. 또 닦아야 할 것에 대하여 ‘멈춤과 관찰’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바탕에서 실현해야 할 것은 ‘명지와 해탈’이라 하였다.

 

혀가 국 맛을 아는 것처럼 

어리석은 자는 현명한 자가 옆에 있어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고집한다면 현명한 자와 평생을 살아도 가르침을 접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국자가 국의 맛을 모른다는 국자의 비유로 설명된다. 그러나 양식이 있는 자는 금방 알아챈다. 현명한 자의 행동거지를 보고 잠시만 보아도 섬기는 것이다. 마치 혀가 국 맛을 아는 것과 같다.

 

국 맛은 혀로 맛보아야 한다. 혀끝으로 대자마자 짠맛 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현자는 현명한 사람과 잠시만 사귀어도 진리를 알 수 있다. 주석에 따르면 “그로부터 교법을 배우고 질문하고 이해한다. 그로부터 명상주제와 실천수행, 그리고 출세간적 가르침도 곧바로 이해한다.”라 하였다. 이는 혀끝으로 국 맛을 곧바로 아는 것과 같다.

 

교학과 수행 양 날개로 더 높이 더 멀리 

경전을 근거로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거의 매일 글을 생산한다. 이런 글을 인터넷에 올려서 공유한다.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거 없는 비난을 일삼는 자들도 있다. 그것은 백날 교학만 공부해 보았자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국자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앙굿따라니까야에 따르면 경을 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국자의 비유로 비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왜 그런가? 교학으로도 통찰지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학은 한계가 있다. 불사의 경지, 즉 열반을 증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수행의 영역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교학과 수행을 병행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교학과 수행을 병행해야 한다고 ‘셀라의 경(Sn3.7)’에서도 말씀 하셨다. 또 수행은 멈춤(지)과 통찰(관)을 병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법구경에서 “선정과 지혜가 있으면 참으로 그에게 열반이 현전한다.(DHP372)”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궁극적 목적에 가장 빨리 도달 하기 위해서는 교학과 수행을 병행하는 것이다. 마치 새가 양 날개로 날듯이, 교학과 수행을 병행하면 더 높이 더 멀리 날아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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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문장이지만 일단 전체를 옮겨왔다. 연꽃의 글이 왜 잘못되었는지 의견을 개진해 보고자 한다.



“교학으로 통찰지 얻고…수행을 통해 열반 증득”이라고 ...?? 

솔직히 이 말을 보고 할 말을 잊어 버렸다. 왜냐하면 통찰지는 선정 수행으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마타(지) 와 위빠사나(관) 수행론은 워낙에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에 여기서 굳이 거론하지 않겠지만 교학으로 통찰지를 얻는다는 저런 생각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초기불교의 기본 가르침은 교학과 수행의 둘이다. 교학은 5온·12처·18계·22근·4성제·12연기이고, 수행은 4념처·4정근·4여의족·5근· 5력·7각지·8정도이다. 교학이란 이론을 말하는 것이요, 수행이란 실천덕목을 말하는 것이다. 교학이란 올바른 정견을 갖게 하는 공부요, 수행이란 올바른 정견에서 오는 실천이다.


불교는 교학체계와 수행체계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교학체계란 즉 공부 system 이다. 우리나라의 교학체계는 각사찰의 승가대학을 들 수 있다. 수행체계란 수행방법 즉 간화선일 것이다. 교학이란 이론을 말하는 것이다. 수행이란 이론으로 뒷받침이 된 실천덕목일 것이다.


따라서 연꽃이 예를 든 쭌다경은 교학이나 선정이니 하는 것을 두고 말한게 아니다. 쭌다경의 전문을 옮겨와서 살펴보자.


쭌다 경(A6:46) 

Cund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마하쭌다 존자가 쩨띠에서 사하자띠에 머물렀다. 거기서 마하쭌다 존자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불렀다. ‘존자시여.“라고 비구들은 마하쭌다 존자에게 응답했다. 마하쭌다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2. “도반들이여, 여기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은 선정을 닦는 비구들을 비난합니다. ‘이들은 ‘우리는 선정을 닦는 자들이다. 우리는 선정을 닦는 자들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선정수행하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선정하고, 도대체 어떻게 선정수행을 하는가?’라고. 이 경우에는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도 기쁘지 않고, 참선하는 비구들도 기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 신과 인간의 이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도 닦는 것이 아닙니다.” 


3. “도반들이여, 여기 선정을 닦는 비구들은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을 비난합니다. ‘이들은 ‘우리는 법에 열중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법에 열중하는 자들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경솔하고, 거들먹거리고, 촐랑대고, 수다스럽고, 산만하게 말하고, 마음 챙김을 놓아버리고, 분명하게 알아차림[正知]이 없고, 집중되지 못하며 마음이 산란하고 감각기능이 제어되어 있지 않다. 그러면 도대체 이들은 무슨 법에 열중하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법에 열중하고, 도대체 어떻게 법에 열중하는가?’라고. 이 경우에는 선정을 닦는 비구들도 기쁘지 않고,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도 기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 신과 인간의 이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도 닦는 것이 아닙니다.” 


4. “도반들이여, 여기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은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만 칭송하고 선정을 닦는 비구들은 칭송하지 않습니다. 이 경우에는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도 기쁘지 않고, 선정을 닦는 비구들도 기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 신과 인간의 이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도 닦는 것이 아닙니다.” 


5. “도반들이여, 여기 선정을 닦는 비구들은 선정을 닦는 비구들만 칭송하고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은 칭송하지 않습니다. 이 경우에는 선정을 닦는 비구들도 기쁘지 않고,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도 기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 신과 인간의 이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도 닦는 것이 아닙니다.” 


6. “도반들이여, 그러므로 이와 같이 정진하여야 합니다. ‘법에 열중하는 우리는 선정을 닦는 비구들을 칭송하리라.’라고.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정진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도반들이여, 불사(不死)의 경지를 몸으로 체득하여 머무는 이러한 경이로운 인간들은 세상에서 얻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7. “도반들이여, 그러므로 이와 같이 정진하여야 합니다. ‘참선하는 우리는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을 칭송하리라.’라고.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정진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도반들이여, 심오한 뜻의 경지를 지혜로 꿰뚫어서 보는 이러한 경이로운 인간들은 세상에서 얻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쭌다경의 욧점은 [불사(不死)의 경지를 몸으로 체득하여 머무는 이러한 경이로운 인간들은 세상에서 얻기 힘들기 때문입니다]와 그리고 [심오한 뜻의 경지를 지혜로 꿰뚫어서 보는 이러한 경이로운 인간들은 세상에서 얻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라는 두 가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아라한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중생제도를 위한 법을 제대로 설법하지 못하거나, 또는 교리와 이론에 밝다고 하더라도 열반을 획득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도를 이루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법을 공부하는 수행승의 측면에서 본다면 경전 귀절처럼 붓다의 가르침의 심오한 뜻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많은 외도들은 붓다께서 말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고 하고, 말하지 않은 것을 말했다고 비난하며 나아가 불자들이라도 붓다의 설법이 가지는 심오한 의미와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달을 가르키는데 손가락을 본다는 것이다. 문장이 올바르지 못하고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면 이것이 곧 불법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귀절이 경전 곳곳에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많은 논쟁을 하는 것도 바로 붓다의 가르침의 뜻이 이런것이다 저런것이다라고 하면서 서로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불교가 18-20개의 부파로 나뉘어진 것도 결국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쭌다경에서 법에 열중하는 수행승이란 의미는 붓다의 설법을 제대로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의미이다. 이말은 붓다의 가르침의 의미와 뜻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연꽃처럼 엉터리로 경전의 뜻을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쭌다경은 이런 두 가지 점에서 경계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과연 누가 국맛을 모르는 국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