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재가 불자의 올바른 사회참여를 위하여

실론섬 2015. 9. 9. 13:19

아래 글은 어느 불교학자분의 글에서 빌려온 글이다.


"재가 불자의 올바른 사회참여를 위해서


1) 불교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사회참여를 하고자 하는 재가불자는 

   불교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전반적이고 체계적이며 올바른 이해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2) 보리심을 가져야 한다. 보리심은 곧 자비희사의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이다.

3) 자신의 수행이 있어야 한다. 사회참여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수행이 있어야 한다.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4) 사회의 현안문제에 대해 지혜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5) 적절한 방편으로 이끌어야 한다. 보살은 내면적인 수행의 완성을 통해 지혜를 얻고 사회적 

   실천을 방편으로 드러내야 한다. 재가불자는 사회규범에만 따라서는 안되며 진리에 입각해야 

   한다. 불교사상을 올바로 이해하고 스스로 불교수행을 하면서 자비심과 서원을 세워야 하며 

   사회현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판단을 가지고 사회참여를 해야만 한다. 해탈을 이룬뒤에 

   사회참여를 하는게 가장 이상적이지만 그렇다고 해탈하지 못한 사람이 사회참여를 하지 

   못한다는 건 아니다. 다만 항상 겸손한 자세로 끊임없이 자신과 사회의 문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위의 글을 읽어보면 무엇하나 틀린 부분이 없는 것 같다. 특히 첫 번째로 내세운 "불교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전반적이고 체계적이며 올바른 이해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라는 말은 백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연꽃의 글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연꽃이 초기 경전을 인용하면서 스스로의 체계적이고 올바른 이해와 공부가 없이 순수하게 자신의 지적 수준에 맞추어서 해석한 경전의 가르침을 멋대로 그게 붓다의 가르침인냥 인터넷에 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꽃의 행태는 초기불교 국가에 그것도 빠알리어 경전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에 살고 있는 나로써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초기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입문할려는 초보자들에게 크게 잘못된 불교관과 가르침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끝까지 단추가 잘못 끼워지듯 처음 초기불교에 입문하는 불자들이 잘못된 정보와 안내를 받아서 엉터리 불교를 한다면 도대체 이걸 누구의 잘못으로 돌려야 할까.


불교는 알고 짓는 죄보다 모르고 짓는 죄가 더 크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는 스스로의 행동이 계율이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면 언젠가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참회하고 되돌아 올 가능성이 있지만, 만약에 불교를 잘못 이해하고 공부해서 자신의 행동에 있어서 잘못된 점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계속하여 같은 행동을 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나쁜 업보를 쌓게 된다는 것이다. 참회하고 방향을 틀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는 자업자득 논리이다. 즉 자신의 행위가 만든 업은 자신의 것이다. 따라서 내가 몰라서 그랬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붓다의 법문을 8만 법문이라고 한다. 빠알리어 경전만 하더라도 만여개가 넘는 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복되는 많은 부분들도 있지만 경의 하나하나에는 설법하는 주제와 설법의 이유 그리고 무엇을 훈계하고 가르칠려고 하는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 손으로 달을 가르키고 있는데 손가락을 보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빠알리어 경전은 그 성격상 출가자 위주의 가르침이다. 경전은 수행승들을 위한 교리를 대부분 담고 있다. 불교는 사부대중이며 출가자와 재가자는 엄연히 구분이 된다. 재가자들이 250여개의 계율을 지키며 세간사를 살 수도 없고, 직장과 가족을 팽개치고 수행한다고 방에 앉아서 명상만 할 수도 없다. 반대로 수행승들이 출가자들처럼 생활하는 것도 물론 안된다.


재가자인 연꽃의 99% 글은 출가자들을 위한 글귀를 가져와서 그것을 인터넷에 올리고 있다. 그의 글을 읽어보면 '그래서 지금 출가해서 수행승처럼 살아라는 말이냐? 아니면 재가자가 세간사를 살면서 250여개의 계율을 지키고 수행승처럼 수행하란 말이냐?' 라는 의문이 절로 든다. 왜냐하면 재가자 주제에 교만과 어리석음에 빠져서 똥과 된장도 구분 못하고 그냥 글귀만 가져와서 상대방을 비난하고 지적하며 옳네 틀리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행승을 위한 가르침을 가져와서 재가자들에게 이러쿵 저러쿵 하거나 또는 얄팍한 경전 지식을 동원하여 타 승가를 비난하는 행태는 결코 참된 불자의 모습이 아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목적이 타 승가를 비난하는데 있지 않다.


세간사를 사는 재가자들은 오계도 지키며 살기 힘든게 현실이다. 연꽃이나 본인이나 그 누구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살면서 먹기 살기 바빠서 사무량심(자비희사)을 내 이웃에게 베풀기도 쉽지 않다. 타 종교에 비해서 불자들의 사회참여와 봉사가 저조한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그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애초부터 훈련과 연습이 안되어 있어서이다. 내가 이웃에게 봉사하겠다고 마음만 먹는다고 당장 행동으로 옮겨지는게 아니다. 작심 삼일인 것이 중생들의 마음이다. 따라서 마음을 먹고 끊임없이 훈련과 연습을 되풀이하여 그것을 습관으로 만들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말로만 떠든다고 되는게 아니다. 


연꽃에게 또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틀리다고 지적을 하고 잘못을 알았으면 당연히 과거의 잘못된 행위를 인정하고 고쳐야 하는게 인간의 기본적인 양심이다. 하지만 연꽃은 결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슬그머니 자신의 글을 바꾸어 버린다. 예를 들어서 예전에 연꽃은 자신의 글에서 끊임없이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해탈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내가 수십번은 '해탈과 열반에 대해서 구분해서 설명해 달라' 라고 지적을 하고 질문을 했다. 그랬더니만 최근의 글에는 해탈이란 말은 싹 없어지고 '열반'이라는 글자만 등장한다.


그는 최근 미디어 붓다라는 인터넷 신문에 글을 올리고 있다. 그래서 내가 몇몇의 글에 비판의 댓글을 달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그럴 것이다. 최근에는 연꽃이 꼬삼비 비구 사건을 올려서

복수니 용서니 원한이니 하면서 헛소리를 했길래 비판의 댓글을 달아 두었다.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율장이란 재가자들이 알아야 할 부분은 당연히 알아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수행승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계율을 만든 이유와 사건들을 재가자 주제에 인터넷에 떠들 이유는 전혀 없다. 


이곳에도 율장을 올려 놓았지만 그것을 재가자들이 읽을 때는 마음가짐을 두번 세번 새로이 가져야 하고 특히 타 승가를 비난하는데 이용하여서는 더더욱 안된다. 


이곳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12세에 출가를 한다. 그리고 중학교/고등학교 과정이 있는 불교학교에 진학을 한다. 그곳에서는 불교공부와 일반과목을 함께 가르친다. 그리고 20세가 되면 비로소 구족계를 받는다. 또한 불교학교를 졸업하면 다시 대학교로 진학하여 공부를 계속한다. 짧게 잡아도 공부하는 기간이 8년이며, 어머니의 뱃속에서 부터 계산하면 20년을 불교공부를 하는 것이다. 보통의 일반인들은 불교대학에서 5-8년간 공부를 한다. 일반인들은 한달에 서너번씩 사찰에 가서 수행승들의 설법을 듣는다. 물론 별도로 공부도 한다.


연꽃은 태국 라오스 미얀마 스리랑카등의 초기불교 국가 그 어디에도 단한번의 여행이라도 다녀 온 적이 없다. 더더욱 체계적이고 올바른 초기불교 공부를 받은 적도 없다. 그가 들고 있는 경전은 한글로 번역된 경전이지 결코 원문도 아니며 초기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다. 그런 재가자가 경전의 귀절을 들고 나와서 단지 yes or no 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으로 타인의 행위에 대해서 비난을 하고 있다. 물론 잘잘못에 대해서 비판이나 비난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불자로써 올바르지 않은 불자들을 비난하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럴수록 위에서 언급한 대로 제대로 올바르게 공부를 하고 또한 자신부터 되돌아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한 손가락으로 남을 가르키면 나머지 네 개의 손가락은 자신을 향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