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수행승답지 못하고 재가자답지 못한가?
불교는 사부대중으로 구성되고 그리고 팔정도와 열반의 문에는 차별이 없이 모두에게 열려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부대중에게는 각자의 역활이 분명히 있다. 수행승이 수행승답지 못할 때, 재가자가 재가자답지 못할 때는 불법을 훼손하고 스스로의 불행으로 빠지게 된다. 또한 경전에서 말하는 궁극적 목적이나 도달해야 하는 목표점은 교리적으로 수행적으로 실천가능하고 도달할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이론(가르침)이다.
붓다께서는 마음에 걱정이 없어야 수행도 잘 되고, 돈도 많이 벌어야 보시도 많이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재가자들에게는 돈 많이 벌어라고 충고하고 있다. 내일 당장 먹을 쌀이 없거나 어린애가 아파도 우는데도 병원 갈 돈도 없는 중생들에게 해탈이니 열반이니 고의 소멸이니 이야기하면 이게 바로 미친사람인 것이다. 불교라는 종교는 허황되거나 현실을 도외시하지 않는다. 어느 종교보다도 현실적이며 중생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바로 허황된 망상을 가지고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허황된 망상을 가지게 되면 정견이 확립되지 않는다. 정견이 확립이 안되니 횡설수설하는 것이고 사이비 불자가 되어 버린다.
한국불교가 지금처럼 침체되고 갈수록 신도가 줄어드는 것은 결국 수행승이든 재가자이든 모두다 허황된 망상에 빠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행승이 사는 세상도 재가자가 사는 세상도 모두다 꿈 속의 세계가 아닌 현실의 세계이다. 불교는 허황된 망상이나 돈키호테식의 어리석은 짓거리를 하라고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현실의 세간사에서 출발한 종교이며 그 현실의 세간의 진리를 모르면 최고의 진리가 없으며 당연히 해탈도 열반도 없다고 강조한다.
한국불교는 선불교의 영향으로 너도나도 깨달음이란 환상에 빠져서 허우적 거린다. 특히 재가자 주제에 수행승 흉내를 내거나 마치 한 소식 한 것처럼 떠벌리기도 한다. 수행승은 수행승대로 제대로 공부한 것이 없으니 붓다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달할 능력도 지혜도 갖추지 못하니 물과 기름처럼 설법이 중생들의 삶과 따로 논다. 또한 붓다의 가르침을 설법하는게 아니라 자신의 개인생각이나 사견만을 늘어놓는게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건 신변잡기이지 설법이 아니다.
남방불교 어느 수행승의 설법에서도 재가자들을 향하여 해탈이니 열반이니 하는 허황된 설법을 하지 않는다. 오계 지키고 열심히 가족 부양하고 돈 벌어 잘 쓰라고 가르친다. 보시와 자비를 강조한다. 그렇게 가르쳐도 오계조차 제대로 못 지키는게 중생들의 삶이다. 중생들의 현실을 도외시하면 불교는 망한다. 출가 수행승도 몇십년 수행해도 도달하기 힘든 해탈과 열반을 마치 식은죽 먹기처럼 이야기하는 황당함을 남방불교는 금기시 한다. 한국불교에서 중생들의 현실이란 어떤 것인가? 그 현실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생각이 잘 안 들것이고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할 것이다. 한국분들 자체가 불교를 선불교나 대승불교식으로 믿어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간사를 사는 지혜를 이야기하고, 현실을 직시하여 헤쳐나가는 바른 노력을 한다고 해서 결코 해탈이니 열반을 도외시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점진적 단계적 수행이고 깨달음이다. 첫번째 사다리를 밟지 않고는 결코 다음 계단을 올라갈 수 없다. 굳이 입으로 떠들지 않더라도 궁극의 목적은 불자라면 모두다 알고 있다. 깨달음을 얻는데에는 한줄 경전 귀절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라한이 못되는 것은 행이 없기 때문이다. 아라한 되는 법을 몰라서 아라한이 안되는게 아니라는 말이다. 혹시 모를까봐 이야기하지만 탐진치 삼독심을 끊으면 그게 아라한이다. 그건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아라한 성취법이다.
해탈 열반을 입에 담으면 똑똑하고 제대로 된 불자이고, 오계를 입에 담으면 근기 낮은 불자이고 머리속에 든 것이 없을 것이라는 그런 오해부터 불식하는게 좋을 것이다. 다시말하지만 아라한이 되는 법을 몰라서 오계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결코 어떠한 경우에도 한순간 구름타고 정상에 도달하는 방법은 없다. 그런 방법을 찾고자 한다면 타종교로 개종하는게 더 빠를 것이다. 한국에서 낯설고 물설은게 초기불교이다. 태반의 사람들은 남방권에 평생 와본적도 없다. 역사적으로 실존하셨던 고타마 붓다라는 인간과 대승경전이 만들어 낸 부처님이 어떻게 다른지조차 제대로 설명할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게 현실이다. 한글로 번역된 빠알리어 니까야 읽어본다고 초기불자가 되는게 아니다.
적어도 초기불자라면 오계를 지킬려고 노력하고 16가지 재가자의 덕목(자비 보시포함)을 갖출려고 노력해야 한다. 내 자식부터 불교도로 만들어 놓아야 한다. 부처님 앞에서 절은 한국식으로 오체투지를 하면서 오히려 오른무릎 꿇고 발에 입맞추는 그런 절을 평생 해 본적도 없는 한국불자들이 초기경전들고 너도나도 초기불자라고 나서는 행태는 솔직히 안타깝기만 하다. 진짜로 초기불자 되고 싶으면 지금부터라도 한가지를 실천해 보자. 즉 부처님 앞에서나 스님들에게 절을 할 때 오른쪽 무릎꿇고 절을 해보라. 이게 경전의 가르침이다. 이런 실천조차 못하면서 무엇을 입에 담는가?
불자들은 어떤 법담을 할 것인가?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상생활들 즉 아이탄생, 집 이사, 회사창립, 주변의 죽음, 사랑, 미움, 연애, 결혼등등을 가지고 설법을 해도 수년은 걸린다. 인생상담이나 중생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그 해결방법을 붓다의 가르침에서 찾더라도 10년은 더 걸린다.
붓다의 일생을 가지고도 3년은 설법할 수 있다.
불교의 발전사나 사상사의 변천등을 가지고 설법을 해도 10년은 할 수 있다.
오계를 설법할려면 평생해도 모자란다.
오온을 설법할려면 무수한 윤회의 세월을 보내야 할 것이다.
단상에 올라서서 굳이 해탈이니 열반이니 그런것을 설법해야 제대로 유식하게 보인다는 하등 근거없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는게 올바른 불교하는 것이다. 오늘부터라도 붓다의 일생부터 차근차근 공부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왜 초기불교를 한다고 하면서 한국불교나 대승불교를 욕하는가?
불교는 초기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밀교 순으로 발전을 하여왔다. 그리고 붓다의 초기 가르침도 사상적 교리적 철학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거듭하였다. 특히 불교는 중국으로 들어온 이후에 선불교라는 독특한 종파를 만들어 냈다.
주지하다시피 남방권의 스님들 법문이나 글들을 보면 그 어디에도 대승불교나 타불교의 종파들을 비난하거나 비판한 글이 없다. 왜냐하면 일차적으로 그것은 구업을 짓는 것이며 그리고 굳이 다른나라의 불교를 놓고 이러쿵 저러쿵 할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차피 다른나라 다른 불교일 뿐이기 때문이다.
초기불자라면 초기불교만 열심히 하면 된다. 어차피 선불교나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와 다른 불교이다. 각자의 신앙이나 교리적 사상적 철학적 토대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초기불교나 대승불교의 잣대만을 갖다대어 상대방을 비난한다면 이는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잘못된 일임에 틀림없다. 최근의 학자들은 불교를 나누기를 남방불교, 중국불교, 한국불교, 일본불교, 티벳불교, 서양불교식으로 각 나라의 문화와 사람들에 따라 변해온 것을 인정하는 측면에서 나라별로 불교를 나누고 있다. 각자가 처해있는 상황이 다른 것이다.
초기불자라면 초기불교 공부에 집중하면 될 뿐 남의 나라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서로 다른 소의경전을 들이대어 무우 자르듯 옳으니 그르니 말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철학적 사상적으로 접근할 수는 있지만, 한겨울 영하 20도의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왜 남방식 가사를 걸치지 않고 쟈켓을 걸치고 다느냐고 비난한다면 이는 뭔가 정신나간 사람의 말에 불과할 뿐이다. 경전의 글귀를 앵무새처럼 옮겨와서 문자 그대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천박한 무지의 소치이다. 적어도 한번쯤은 남방권의 불교에 와서 직접 체험하고 2500년이 지난 지금의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붓다의 정통성을 지켜 나가는지를 한번쯤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더우기 그렇게 초기불교를 신봉한다는 당사자는 한국불교를 비난할 만큼이나 자신은 과연 테라와다불교 종단에 한번이라도 가봤거나 또는 테라와다 불교를 지양하는 사찰에 신도로 등록이나 되어 있는지 되돌아 봐야 할 것이다.
요즈음 제법 잘 나간다는 재가자분들의 글을 보면 천편일률적으로 조계종이나 한국불교를 비난하고 있다. 그 비난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일단 자신은 진실된 재가로써 얼마나 청정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되돌아 보고 또한 16가지 재가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중에서 몇 가지를 갖추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라고 나는 주장하고 있다.
물론 붓다께서도 외도들이 붓다나 가르침을 왜곡하면 이를 올바르게 시정할 수 있도록 훈계나 충고를 할 수 있으며 또한 재가자는 출가자들이 청정한 수행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공양드리고 지켜볼 수 있다고 하였다. 율장의 많은 부분들이 재가자들의 비난이나 요청에 의해서 제정되었다는 것을 많은 것을 우리들에게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재가자로써 갖추어야 할 덕목을 제대로 갖추고 난 다음의 일이다. 남의 얼굴에 뭍은 티끌은 지적하면서 진작 자신의 얼굴에 뭍은 티끌을 못 본다면 이는 십악행을 행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수행승이나 학자적인 양심으로 불교의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잘잘못을 공개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최소한의 지켜야 할 재가자로써의 덕목은 갖추어야 한다. 자신의 이름석자나 얼굴을 떳떳하게 공개하고 상대방을 비난하면 된다. 그렇게 한다면 주위의 사람들이 과연 그 사람이 잘못된 한국 불교의 행태에 대해서 비난할 만한 자격을 갖추었는지 아닌지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누워서 침뱉기를 하는 사이비 불자들
누워서 침으르 뱉으면 다른 곳으로 가는게 아니라 자신에게 떨어진다. 초기불교를 내세우면서 대승불교나 한국불교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전부다 사이비들이다. 그들의 글에 열심히 댓글을 다는 작자들은 99% 기독교나 타종교인들이다. 기독교 입장에서는 연꽃님이나 기타 멋대로 한국불교를 비판하는 재가자들은 붓다의 자제가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이다.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의 글은 얼마나 좋은 선교대상이겠는가. 불교는 이렇게 썩었다느니 불자라는 사람들이 불교를 이렇게 비난할 정도로 불교는 개판이라느니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것이다.
세상 어느나라를 가든지 완벽한 불교계는 없다. 여기도 불교계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실망스러운 점들이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어느 한 사람 출가자나 승단을 비난하지 않는다. 계율 제대로 안 지키는 사찰의 수행승들에게 공양을 올리지 않는다. 조용히 그 사찰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굳이 스스로 구업 지을 필요도 없고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스스로도 완벽한 재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재가자들에게는 이런 암묵적인 행동에 대한 동의가 되어 있기 때문에 계율을 지키지 않는 수행승은 발을 붙일 곳이 없게 된다. 출가자들이 굶어 죽지 않을려면 청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국처럼 재가자들이 앞장서서 수행승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타락시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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