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불자로 살며 생각하며

실론섬 2015. 9. 17. 22:21

보시와 자비의 마음 그리고 자비의 마음과 보시


자비희사라는 말이 있다. 흔히 이를 네 가지 무량심이라고 하여 초기불교에서 가장 큰 수행의 덕목으로 여기고 있다. 이러한 네 가지 무량심이 커지면 커질수록 보시의 행위도 쉬워지고 또한 보시의 행위가 커질수록 네 가지 무량심도 늘어나게 되는 것이며 이는 상호보완 작용을 한다.


흔히들 사람들은 보시나 자비를 입에 담으면서 굉장히 쉽게 너무나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무슨 말이냐하면 보시나 자비의 마음은 내가 챙기겠다고 결심하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쉽게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굳게 결심해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고 그것이 내 몸에서 습관처럼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행동과 실천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차를 몰거나 컴퓨터를 다루거나 기술등을 익힐 때 그것이 자유자재로 되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행동과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컴퓨터를 배우겠다는 결심만으로 결코 컴퓨터가 배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비와 보시도 마찬가지로 마음을 굳게 먹고 그리고 오랫동안 실천적인 행동을 요구한다.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또 연습함으로써 비로서 자비와 보시의 행위가 자연스럽게 내 몸에 안착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롭게 자동차를 몰듯이 세상을 살면서 자비와 보시의 행위도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보시와 자비의 마음이 주는 편안함과 행복


많은 분들이 경험했다고 믿지만, 우리가 불쌍한 거지나 아주 어려운 이웃을 만났을 때 스스로가 불쌍한 마음을 내어 가진 것을 최대한 보시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누워서 가만히 좀전에 스스로가 행한 행동으로 인하여 상대방이 고마워하는 얼굴을 떠 올리고 또한 조그만 정성이나마 상대방에게 도움이 됐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희열이 솟아 오르는 경우가 많다. 마음이 너무 편안하고 행복해지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렇듯 자비와 보시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중생들의 마음을 행복하게 하고 편안하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이 커질수록 악의는 저절로 사라진다. 악의가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이 바로 자비와 보시의 마음이다. 열심히 연습하고 노력하여 그러한 자비와 보시의 행위가 일상적으로 행해진다면 해탈과 열반은 그림자가 몸을 따르고 마차가 소의 뒤를 따르듯 자연스럽게 오게 되어 있다.


설사 이 생애에서 해탈과 열반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그가 내생에 갈 때 다른 것은 모두다 가져 가지 못하지만 현생에서 쌓은 공덕만은 가져간다. "상윳따 니까야"의 '코살라 사람들과 대화'라는 경전에 보면 보시와 자비의 공덕에 대해서 잘 설명되어 있다. 


수행이 마음을 너그럽게 하고 자비심을 키울까


수행승이든 재가자이든 모두다 수행을 이야기한다. 그들이 말하는 수행이란 바로 사띠, 위파사나등의 수행법을 말한다. 일견 이러한 명상 수행이 마음을 잔잔하게 해주고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도움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명상센터를 나서는 순간 마음은 다시 중생심으로 돌아오는게 일반적이다. 그래도 수행을 한 시간과 돈이 아까우니 수행을 했다는 아만과 교만과 자존심은 있어서 '나는 수행했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리고 자신이 마치 뭔가 대단한 존재인냥 으시대기도 한다.


이곳도 수행하는 수행승이 있다. 그들은 공양을 받더라도 철저하게 고마워하고 중생들이 힘든 삶 속에서도 올린 공양물에 대해서 받는 것 만큼 책임감을 느낀다. 이는 공양게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러하기에 위파사나 수행을 한다고 숲 속에 있어도 절대로 자비심을 잃지 않는다. 물론 재가자들도 명상센터에 가서 마음을 가다듬는다. 하지만 이는 자신을 참회하고 되돌아보고 마음을 가다듬기 위함이지 결코 수행승 흉내를 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한국에서 지금 재가자들 사이에서 성행하는 사띠나 위파사나 수행이 과연 얼마나 자비와 보시의 마음을 일으키고 굳건하게 할까하는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오히려 자만과 교만을 키우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초기불교권의 수행승 흉내낸다고 가랭이가 찢어 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봤지만 십년 위파사나 수행해 봤자 오늘 길거리에서 거지에게 동전 한닢 준 공덕만도 못한 것이다.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있다. 불교에서는 의도적인 행위만이 업을 형성한다고 한다. 그리고 의도적인 행위에는 선한 것과 선하지 않은 것 딱 두 가지 밖에 없다. 그러한 의도적인 행위를 열 가지로 나누어서 십선행이라고 하고 반대는 십악행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명상을 하는 행위에도 딱 두 가지가 있다. 옳은 명상수행은 선한 행위이지만 나쁜 명상 행위는 선하지 않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명상한다고 모두다 선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명상을 하는 각자의 마음이 어떠하고 행동이 어떠한가가 바로 선과 악을 구분짓는 것이다. 십년을 명상수행했는데도 불구하고 길거리의 거지에게 동전 한닢 줄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이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명상으로 오히려 악행만 거듭하여 쌓아 온 것에 불과하다.


겉 멋만 아는 불자가 되면 안된다


어느 댓글에서도 말했지만 많은 불자들이 겉 멋만 부리는 것 같다. 초기경전 옆구리에 끼고 앉아서 붓다 가라사데.. 라고 외친다. 다시말하지만 경전은 출가위주의 가르침이고 또한 수행승들의 수행을 위한 교리책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재가자들이 듣고 배우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경전은 재가자들에게 별로 의미가 없다. 오계도 못 지키는데 사성제니 팔정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계도 못 지키면서 사성제니 팔정도니 그런 가르침이 진정으로 자신에게 받아들여 질까. 설사 받아 들여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머리속으로만 불교이지 결코 붓다의 불교는 아닌것이다.


대승경전의 부처님과 초기경전의 역사적으로 실존하셨던 붓다를 구분하여 아이들에게 설명할 줄도 모르면서 초기불교 한다고 떠들면 그건 사이비로 빠지는 지름길이다. 인간 붓다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는 경전의 글귀는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듯이 불자들에게 독이 될 뿐이다. 결코 소가 먹어 우유를 만들지 못한다. 그러한 예를 지금 한국 초기불교에서 많이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만 하다.


와서 보라고 했다


초기불교권은 초기경전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2000년을 넘게 불교의 생활화를 이루고 있다. 즉 그들이 오리지널이고 표본이고 모범인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게 옳고 그들의 주장이 옳은 것이다. 이제 겨우 십년정도 초기불교를 받아 들이고 막 새로 초기불교에 입문한 불자들이 한국식의 사고방식으로 초기불교를 생각하고 자기 멋대로 초기불자라고 행동한다면 이는 잘못 되어도 보통 잘못된 것이 아니다.


흔히들 재판관이 법의 양심으로 판결한다고 하는데 어떤 재판관은 사회적으로 상식적으로 전혀 받아 들일 수 없는  엉뚱한 판결문을 내놓고 그게 법관의 양심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법관이 법에 따라 판결한게 아니라 개인이 아집과 고집과 편견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듯 초기불교는 초기불교를 2000년이상 전승하고 불자로 살아 온 사람들을 일단 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을 보고 난 후에 비로소 각 나라와 풍습과 개인적인 사견을 내 놓아도 늦지 않는다. 그게 옳바른 길이다.


이곳은 사찰에서 신발을 벗고 모자를 벗고 무릎이 드러나는 짧은 옷은 걸치지 못하고 또한 한국식으로 절을 하지 않고 오른쪽 무릎을 굻고 절을 한다. 그럼 한국은 어떠한가. 실제로 행동에 옮길 수 있는 것도 옮기지 않는다. 입으로만 초기불자이지 행동으로는 전혀 초기불자가 아닌 것이다.


크리켓을 배울려면 동영상이나 책만으로 제대로 배울 수 없다. 크리켓을 하는 국가에 와서 직접 몸으로 부딛혀야 제대로 배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