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지혜의 종교이며 궁극적인 열반의 길도 지혜의 완성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수행용어중에서 사념처 위파사나 사띠수행을 말하면서도 빠지지 않는 것이 지혜라는 단어이다.
이러한 지혜란 쉽게 말해서 "꿰뚫어 통찰하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불교적 지혜라고 할 때 지혜를 단순한 사전적 의미보다는 관찰과 힘(power)과 본다(see)라는 의미에 더 치우쳐 있다. 쉽게말해서 '현상을 보이는대로 보는 것(주관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는(see) 눈(힘.power)'를 지혜라고 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즉 무상 고 무아와 연기를 본다는 것이다. 무상 고 무아를 있는 그대로 보면(see) 그것이 아라한의 지혜의 힘(power)이다.
이러한 불교적 지혜를 얻고 힘을 기르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이 선정이라는 수행법이고 이를 붓다는 권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선정이란 목적이라기 보다는 지혜와 힘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물론 이 둘은 별개의 수행이긴 하지만 삼위일체처럼 상호 보완하고 북돋아 주며 함께 증장하는 역활을 한다.
그런데 흔히들 선불교등에서는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라고 하여 선정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계율을 무시하고 그리고 깨달음만 얻으면 모든 것을 초월한다는 식으로 수행을 하기 때문에 이는 필연적으로 절름발이가 될 수 밖에 없다. 그토록 '내려 놓아라, 버려라, 공...'을 부르짖는 큰 스님들의 행동을 보면 일반 재가자들초자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언행일치가 안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된다. 이는 선정의 능력은 커졌을지 모르지만 지혜가 함께 증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붓다나 아라한도 아픔을 느끼고 배고픈줄 알며 여자를 보면 여자인 줄 안다. 우리와 조금도 다름없이 세상의 현상을 보면서 생을 살아간다. 하지만 일반 범부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현상에 대해서 갈애를 일으키고 취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범부들은 여자를 보면 순간 온갖 갈애를 일으키고 분별하고 거머쥘려는 취착심을 일으키지만 성자들은 그러한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화살의 경에 아주 잘 설명되어 있다. 경전에는 느낌에는 몸의 느낌(첫번째 화살)과 마음의 느낌(두 번째 화살)을 구분하고 범부들은 첫번째 화살을 맞고 다시 두번째 화살까지 맞지만, 성자들은 첫번째 화살만 맞고 두번째는 맞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성자나 아라한이나 첫번째 화살은 모두다 맞지만 두번째 화살을 맞느냐 맞지 않느냐에 따라서 범부와 성자가 구분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상을 바라보는 지혜의 힘에서 결판이 난다고 보면 된다. 성자들은 모든 사물들에 대해서 무상 고 무아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대상에 대해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고 취착을 하지 않지만, 범부들은 무아를 자아로, 무상을 영원한 것으로, 고를 행복으로 전도된 마음으로 바라보고 번뇌를 일으키고 집착한다는 것이다.
사실 어느정도 선정수행을 하다보면 누구나 한번쯤은 스스로의 육신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온갖 마음을 보고 나아가 무상 고 무아에 대해서 번갯불 같은 순간이나마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순간이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지혜를 꽉 붙들어 매질 못한다. 다시말해서 명상센터나 법당에서 참회를 하거나 명상을 하는 그 시간만큼은 마음이 잔잔하고 여러가지 망상들을 떨쳐버릴 수도 있지만 그 마음을 그대로 붙들어 매질 못하고 문짓방을 나서는 순간 중생심이 되어 도루묵이 되어 버린다. 이는 지혜를 붙들어 매는 힘(power)가 없기 때문이다.
간화선의 참선이나 도교의 수행을 오래하다보면 선정의 능력은 커진다. 그래서 조용하고 속세를 떠난 곳에서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수 있지만 번잡한 중생세계에서 온갖 일을 보고 듣고 느끼면 산 속에서의 그러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거나 그럴 자신이 없는 수행승이 많은게 현실이다. 왜냐하면 일어나고 소멸하는 온갖 마음을 보고 그것을 억누를 수 있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초기불교의 수행과 간화선 수행의 차이점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즉 초기불교 수행은 선정과 지혜의 힘을 함께 증장시키지만 간화선의 참선은 선정만을 키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닫고 나서도 몇년간은 다시 조용한 곳에 찾아가서 수행을 또 한다. 예를 들자면 흙탕물 속의 찌꺼기를 가라앉힌 것이지 결코 필터로 깨끗하게 제거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언제든지 어떤 대상에 따라서 흙탕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너무 깊이있게 비난할 입장이 아니기에 여기서 멈추고자 한다.
일반 재가자들보고 사띠나 위파사나 수행을 틈틈이 하지 말라는 소리는 절대로 아니다. 명상이나 선정수행은 마음을 다스리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수행승처럼 계속하여 그러한 수행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재가자들에게는 없다. 따라서 명상센터 안에서의 마음과 밖의 마음이 수시로 바뀌고 180도 다른게 현실이다. 뒤죽박죽이 되는 것이고 아무리 높이 쌓아도 다시 무너지는 모래위의 성과 같은 것이다. 붓다께서 정말로 재가자들도 틈틈이 위파사나 수행을 하면 좋다면 왜 그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권유하지 않았겠는가?
그러한 물 위에 떠있는 부평초 같은 결과를 낳은 수행보다는 보시나 자비의 마음에서 생겨나는 희열이 훨씬 더 재가자들에게는 유리하고 결과도 좋기 때문에 재가자들에게는 세간의 현실에 맞는 수행법을 일러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불우이웃을 돕고 난 뒤에 집에 돌아와 조용히 하루일과를 되돌아 볼 때, 조그만 도움을 받고 감사하며 고마워하던 분들을 생각하고 또는 쉽게 죽일 수도 있는 동물들을 안전하게 놓아주면서 느끼는 그 표현하기 힘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행복감과 희열 ... 그 마음이 어찌 명상센터의 마음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어찌 공덕이 같다고 할 것이며, 어찌 헛된 시간을 보낸 것이라고 할 것이며, 어찌 이런 공덕을 다음생으로 가져가지 못하겠는가.
이것이 초기불교이며 붓다께서 재가자들에게 일러주신 가르침이다. 그러한 마음이 쌓이고 쌓이면 어찌 악한 마음이 일어날 것이며 어찌 지혜를 얻지 못하겠는가. 이러한 행복과 희열은 돌고도는 윤회속에서 해탈과 열반으로 반드시 이끌게 되어 있다. 마치 그림자가 몸을 따르듯, 마차가 소의 발자욱을 따르듯.
초기불교를 할려면 백지상태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타종교로 개종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초기경전 공부하고 사띠 위파사나 수행한다고 초기불자가 아니다. 무엇이 붓다의 육성이며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구름타고 한순간 정상에 올라 서는게 아니라 매표소부터 한 발자욱 한발자욱씩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다. 올라가는 높이에 따라서 내가 바라보는 경치가 달라지고 밑에서 보이지 않든 경치도 보이게 된다. 그렇게 대나무 마디가 모여서 하나의 대나무를 이루듯 수행은 완성되는 것이다.
대나무가 위로 곧게 뻗어갈 때 첫 번째 마디의 완성없이 두 번째 마디가 자라날 수가 없는 것이다. 첫 번째 마디가 튼튼할 수록 두 번째 세 번째 마디도 튼튼해 지는 것이다. 식물이 땅에 의지하지 않고 어떻게 자랄 수 있으며 대나무가 첫 번째 마디없이 어떻게 위로 뻗을 수 있는가. 진정한 초기불교의 참 뜻을 알고 그 진실된 맛을 알려면 하루라도 빨리 깨달음이란 헛된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붓다의 말씀에 따라 자신부터 달라지면 주위 사람들도 달라진다. 어려움을 이겨내는 가르침을 경전에서 찾다보며 행복은 오고 그 행복은 우리들의 삶을 편안하게 하고 안락하게 한다. 행복한 삶에서 악의의 마음이 일어나기는 어렵다. 악의 마음이 없다는 것은 곧 보시며 자비의 마음이다.
보시란 내 것을 포기하고 나의 욕심을 드러내며 비우는 행위를 말한다. 포기하고 비우고 집착심을 제거하는 것 만큼 자비심이 늘어나고 빈 곳을 자비심으로 채우는 것이다. 욕심과 집착이 있는만큼 절대로 자비의 마음을 낼 수 없다. 비우고 포기하고 나의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곧 불교의 수행아니든가. 그것이 탐진치 삼독심을 제거하고 해탈하고 열반을 획득하는 방법이 아니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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