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맛지마 니까야

MN 26. 덫 경(pāsarāsisuttaṃ)

실론섬 2016. 4. 4. 16:14

MN 26. 덫 경(pāsarāsisuttaṃ)

 

272.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시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시고 사왓티로 탁발을 가셨다. 그때 많은 비구들이 아난다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도반 아난다여, 우리는 세존의 앞에서 법문을 들은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도반 아난다여, 우리가 세존의 앞에서 법문을 들을 수 있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그렇다면 존자들은 람마까 바라문의 아쉬람으로 오십시오. 세존의 앞에서 법문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그 비구들은 아난다 존자에게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시고 탁발에서 돌아와 아난다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낮 동안의 머묾을 위해 동쪽 숲의 녹자모 저택으로 가자."라고.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아난다 존자와 함께 동쪽 숲의 녹자모 강당(뿝바라마의 미가라마뚜 저택)으로 가서 낮 동안을 머무셨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해거름에 낮 동안의 홀로 머묾에서 일어나셔서 아난다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뿝바꼿타까로 목욕을 가자."라고.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대답했다.

*동쪽 숲[東園林, Pubbārāma]은 사왓티의 동쪽 대문 밖에 있는 원림이다.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무시면서 낮 동안에는 이 동원림에서 지내셨다고 한다.(DhpA.i.413; MA.i.369) 바로 이곳에 위사카(Visākhā)가 세존과 승가를 위해서 본경의 녹자모 강당(Migāramātu-pāsāda)을 건립하였다.  
*녹자모 강당(Migāramātu-pāsāda)은 위사카(Visakhā)가 지은 강당이다. 그녀는 상인이었던 그녀의 남편 미가라에 의해 어머니의 대접을 받았기 때 문에 미가라마따(Migāramātu, 녹자모, 鹿子母)라고 불렸다. 그 일화는 다음과 같다. 위사카의 남편 미가라는 처음에는 니간타(Nigaṇṭha)를 따르던 신도였는데, 나중에 그의 아내 위사카의 설득으로 휘장 뒤에서나마 세존의 설법을 듣고 예류과를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아내에게 너무도 감사하여 '당신은 오늘부터 나의 어머니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위사카라는 이름 보다는 미가라의 어머니(미가라마따, 鹿子母)로 더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MA.ii.296; DhpA.i.387; AA.i.220)  

273. 세존께서는 아난다 존자와 함께 뿝바꼿타까로 목욕을 가셨다. 뿝바꼿타까에서 목욕을 하고 나와서 가사 하나만을 입고 몸을 동쪽을 향하여 서 계셨다. 그때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람마까 바라문의 아쉬람이 멀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람마까 바라문의 아쉬람은 상쾌하고, 세존이시여, 람마까 바라문의 아쉬람은 편안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연민의 마음을 일으켜 라마까 바라문의 아쉬람으로 가시면 좋겠습니다." 
세존께서는 침묵으로 승낙하셨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람마까 바라문의 아쉬람으로 가셨다. 그때 많은 비구가 법담을 나누며 람마까 바라문의 아쉬람에 모여 있었다. 세존께서는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문밖에 서 계셨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이야기가 끝난 것을 아시고 헛기침을 하시며 문을 가볍게 두드리셨다. 그 비구들은 세존께 문을 열어드렸다. 세존께서는 람마까 바라문의 아쉬람에 들어가셔서 마련해 드린 자리에 앉으셨다. 자리에 앉으신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무슨 이야기를 위해 지금 여기에 함께 모여 앉았는가? 그대들 간에 끝내지 못한 이야기는 무엇인가?"라고.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세존에 대한 법담을 나누고 있었고 그때에 세존께서 들어 오셨습니다."
"훌륭하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법담을 위해 모인 것은, 비구들이여, 믿음으로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그대 좋은 가문의 아들들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일이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함께 모이면 오직 두 가지 할 일이 있으니, 법담을 나누거나 성스러운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274.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구함과 성스럽지 못한 구함이라는 두 가지 구함이 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성스럽지 못한 구함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자신이 태어나는 존재이면서) 오직 태어남의 법을 구하고, 여기 어떤 사람은 늙음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직 늙음의 법을 구하고, 여기 어떤 사람은 병듦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직 병듦의 법을 구하고, 여기 어떤 사람은 죽음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직 죽음의 법을 구하고, 여기 어떤 사람은 슬픔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직 슬픔의 법을 구하고, 여기 어떤 사람은 오염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자신이 오염되는 존재이면서) 오직 오염의 법을 구한다. 

비구들이여, 무엇을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비구들이여, 자식과 아내가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하인과 하녀가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염소와 양이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닭과 돼지가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코끼리와 소와 말과 당나귀가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금. 은이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재생의 조건들이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욕심내고, 탐착하고, 묶여있기 때문에 자신이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직 태어남의 법을 구한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늙음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비구들이여, 자식과 아내가 늙음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하인과 하녀가 늙음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염소와 양이 늙음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닭과 돼지가 늙음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코끼리와 소와 말과 당나귀가 늙음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금. 은이 늙음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재생의 조건들이 늙음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욕심내고, 탐착하고, 묶여있기 때문에 자신이 늙음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직 늙음의 법을 구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병듦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비구들이여, 자식과 아내가 병듦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하인과 하녀가 병듦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염소와 양이 병듦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닭과 돼지가 병듦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코끼리와 소와 말과 당나귀가 병듦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재생의 조건들이 병듦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욕심내고, 탐착하고, 묶여있기 때문에 자신이 병듦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직 병듦의 법을 구한다. 

*"'병듦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byadhi-dhamma)'의 내용에서 금과 은(jata-rupa)은 제외되었다. 왜냐하면 이 금과 은에게는 두통 등의 병듦이 없고, 중생들에게서처럼 죽음이라 부르는 사망도 없고, 슬픔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aya)등의 오염원에 오염되기 때문에 아래 '오염의 법을 지닌고 있는 것'의 내용에는 포함되었다."(MA.ii.170)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죽음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비구들이여, 자식과 아내가 죽음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하인과 하녀가 죽음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염소와 양이 죽음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닭과 돼지가 죽음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코끼리와 소와 말과 당나귀가 죽음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금. 은이 죽음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재생의 조건들이 죽음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욕심내고, 탐착하고, 묶여있기 때문에 자신이 죽음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직 죽음의 법을 구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슬픔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비구들이여, 자식과 아내가 슬픔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하인과 하녀가 슬픔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염소와 양이 슬픔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닭과 돼지가 슬픔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코끼리와 소와 말과 당나귀가 슬픔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금. 은이 슬픔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재생의 조건들이 슬픔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욕심내고, 탐착하고, 묶여있기 때문에 자신이 슬픔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직 슬픔의 법을 구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을 오염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비구들이여, 자식과 아내가 오염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하인과 하녀가 오염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염소와 양이 오염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닭과 돼지가 오염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코끼리와 소와 말과 당나귀가 오염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금. 은이 오염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재생의 조건들이 번뇌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욕심내고, 탐착하고, 묶여있기 때문에 자신이 오염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직 오염의 법을 구한다. 

275.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성스러운 구함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지만 이러한 태어남의 법이 지니고 있는 잘못됨을(위험을) 보아서 태어남의 법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온(瑜伽安穩)인 열반을 구하고, 여기 어떤 사람은 병듦의 법을 지니고 있지만 이러한 병듦의 법이 지니고 있는 잘못됨을 보아서 태어남의 법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온인 열반을 구하고, 여기 어떤 사람은 죽음의 법을 지니고 있지만 이러한 죽음의 법이 지니고 있는 잘못됨을 보아서 태어남의 법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온인 열반을 구하고, 여기 어떤 사람은 슬픔의 법을 지니고 있지만 이러한 슬픔의 법이 지니고 있는 잘못됨을 보아서 태어남의 법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온인 열반을 구하고, 여기 어떤 사람은 오염의 법을 지니고 있지만 이러한 오염의 법이 지니고 있는 잘못됨을 보아서 태어남의 법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온인 열반을 구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구함이다. 

276. 나도, 비구들이여, 깨닫기 이전,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자신이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직 태어남의 법을 구하고, 자신이 늙음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직 늙음의 법을 구하고, 자신이 병듦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직 병듦의 법을 구하고, 자신이 죽음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직 죽음의 법을 구하고, 자신이 슬픔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직 슬픔의 법을 구하고, 자신이 오염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직 오염의 법을 구했다. 그런 나에게, 비구들이여,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왜 나는 자신이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직 태어남의 법을 구하고, 자신이 늙음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 자신이 병듦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 자신이 죽음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 자신이 슬픔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 자신이 오염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직 오염의 법을 구하는가? 나는 자신은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이러한 태어남의 법이 지니고 있는 잘못됨을 보아서 태어남의 법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온인 열반을 구하고, 자신은 늙음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이러한 늙음의 법이 지니고 있는 잘못됨을 보아서 늙음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온인 열반을 구하고, 자신은 병듦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이러한 병듦의 법이 지니고 있는 잘못됨을 보아서 병듦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온인 열반을 구하고, 자신은 죽음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이러한 죽음의 법이 지니고 있는 잘못됨을 보아서 죽음의 법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온인 열반을 구하고, 자신은 슬픔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이러한 슬픔의 법이 지니고 있는 잘못됨을 보아서 슬픔의 법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온인 열반을 구하고, 자신은 오염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이러한 오염의 법이 지니고 있는 잘못됨을 보아서 오염의 법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온인 열반을 구해야겠다.'라고. 

277.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한껏 치장하고 새까맣고 윤기 흐르는 머리 나풀대며 즐길 것 많던 젊은 나이에 부모와 친지들을 슬픔에 몰아 넣고 수염과 머리를 깎고 노란 옷을 입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했다. 이렇게 무엇이 유익함(선.善)인지를 구하여 출가한 나는 위없이 평화롭고 고귀한 경지를 찾아 알라라 깔라마에게 갔다. 가서는 알라라 깔라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깔라마여, 나는 이 법과 율에서 범행을 닦고자 합니다.'라고.
이렇게 말하자, 비구들이여, 알라라 깔라마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는 머무십시오.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오래지 않아 자기 스승에게서 배운 것을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 수 있는 이런 법이 있습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오래지 않아 그 법을 완전히 익혔다. 비구들이여, 나는 스스로 아는만큼 입을 열고 말을 통해 법에 대한 앎과 확실함을 말했다. '나는 알고 본다'라고 공언했고, 다른 사람들도 인정했다. 비구들이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알라라 깔라마는 이 법을 단지 믿음만으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문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알라라 깔라마는 이 법을 알고 보면서 머문다.' 라고. 
비구들이여, 나는 알라라 깔라마에게 갔다. 가서는 알라라 깔리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깔라마시여, 얼마만큼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문다고 선언하십니까?'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자 알라라 깔라마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선언했다. 비구들이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알라라 깔라마에게만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도 믿음이 있다. 알라라 깔라마에게만 정진이 있는 것이 아니다. ··· 마음챙김이 ··· 삼매가 ···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도 지혜가 있다. 참으로 나는 알라라 깔라마가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문다고 선언하는 그 법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리라.'라고.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오래지 않아 그 법을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비구들이여, 나는 알라라 깔라마에게 갔다. 가서는 알라라 깔라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이시여, 존자께서는 이만큼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했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까?'라고.
'도반이여, 나는 이만큼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했다고 선언합니다.'
'도반이시여, 나도 이만큼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뭅니다.'
'도반이여, 우리가 존자와 같은 동료 수행자를 보는 것은 참으로 이득이고 참으로 큰 이득입니다. 이렇게 내가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선언한 그 법을 그대도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대가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무는 법을 나도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선언합니다. 이렇게 내가 아는 법을 그대가 알고, 그대가 아는 그 법을 내가 압니다. 이렇게 그대는 나와 같고, 나는 그대와 같습니다. 오십시오, 도반이여. 이제 우리 둘이 함께 머물면서 이 대중들을 이끌어 나갑시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렇게 나의 스승이였던 알라라 깔라마는 제자인 나를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나를 존중했다. 비구들이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 법은 염오(싫어하여 떠남)로, 탐욕의 떠남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완전한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단지 무소유처에 태어남으로 인도할 뿐이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그 법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법으로부터 염오하여 떠났다. 

278. 비구들이여, 그렇게 무엇이 유익함인지를 구하는 나는 위없이 평화롭고 고귀한 경지를 찾아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갔다. 가서는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이여, 나는 이 법과 율에서 범행을 닦고자 합니다.'라고.
이렇게 말하자, 비구들이여, 웃다까 라마뿟따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는 머무십시오.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오래지 않아 자기 스승에게서 배운 것을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 수 있는 이런 법이 있습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오래지 않아 그 법을 완전히 익혔다. 비구들이여, 나는 스스로 아는만큼 입을 열고 말을 통해 법에 대한 앎과 확실함을 말했다. '나는 알고 본다'라고 공언했고, 다른 사람들도 인정했다. 비구들이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라마는 이 법을 단지 믿음만으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문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라마는 이 법을 알고 보면서 머문다.' 라고. 
비구들이여, 나는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갔다. 가서는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이시여, 얼마만큼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문다고 선언하십니까?'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자 웃다까 라마뿟따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선언했다. 비구들이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라마에게만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도 믿음이 있다. 라마에게만 정진이 있는 것이 아니다. ··· 마음챙김이 ··· 삼매가 ···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도 지혜가 있다. 참으로 나는 라마가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문다고 선언하는 그 법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리라.'라고.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오래지 않아 그 법을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비구들이여, 나는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갔다. 가서는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이시여, 존자께서는 이만큼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했다고 선언하십니까?'라고.
'도반이여, 나는 이만큼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했다고 선언합니다.'
'도반이시여, 나도 이만큼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뭅니다.'
'도반이여, 우리가 존자와 같은 동료 수행자를 보는 것은 참으로 이득이고 참으로 큰 이득입니다. 이렇게 내가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선언한 그 법을 그대도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대가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무는 법을 나도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선언합니다. 이렇게 내가 아는 법을 그대가 알고, 그대가 아는 그 법을 내가 압니다. 이렇게 그대는 나와 같고, 나는 그대와 같습니다. 오십시오, 도반이여. 이제 우리 둘이 함께 머물면서 이 대중들을 이끌어 나갑시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렇게 나의 스승이였던 알라라 깔라마는 제자인 나를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나를 존중했다. 비구들이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 법은 염오(싫어하여 떠남)로, 탐욕의 떠남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완전한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단지 비상비비상처에 태어남으로 인도할 뿐이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그 법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법으로부터 염오하여 떠났다.  

279. 비구들이여, 그렇게 무엇이 유익함인지를 구하는 나는 위없이 평화롭고 고귀한 경지를 찾아  마가다 지방에서 차례로 유행하면서 우루웰라 근처의 쎄나니가마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땅과 고요한 숲과 유유히 흐르는 깨끗한 강과 튼튼한 강둑과 근처에 탁발할 수 있는 마을을 보았다. 왕자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땅과 고요한 숲과 유유히 흐르는 깨끗한 강과 튼튼한 강둑과 근처에 탁발할 수 있는 마을이 있다. 참으로 이곳은 정진을 원하는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정진하기에 적당한 곳이다.'라고. 

280. 그런 나는, 비구들이여, 자신이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태어남의 법이 지니고 있는 잘못됨을 본 뒤에 태어남의 법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온인 열반을 구하여 태어남의 법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온인 열반을 증득했다. 자신이 늙음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늙음의 법이 지니고 있는 잘못됨을 본 뒤에 늙음의 법이 없는위없는 유가안온인 열반을 구하여 늙음의 법이 없는 위없는 유간안온인 열반을 증득했다. 자신이 병듦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병듦의 법이 지니고 있는 잘못됨을 본 뒤에 병듦의 법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온인 열반을 구하여 병듦의 법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온인 열반을 증득했다. 자신이 죽음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죽음의 법이 지니고 있는 잘못됨을 본 뒤에 죽음의 법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온인 열반을 구하여 죽음의 법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온인 열반을 증득했다. 자신이 슬픔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슬픔의 법이 지니고 있는 잘못됨을 본 뒤에 슬픔의 법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온인 열반을 구하여 슬픔의 법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온인 열반을 증득했다. 자신이 오염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염의 법이 지니고 있는 잘못됨을 알아 오염의 법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온인 열반을 구하여 오염의 법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온인 열반을 증득했다. 나에게 앎과 봄이 생겼다. '나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태어남이다. 더 이상 다시 태어남[再生]은 없다.'라고. 

281. 그런 나에게, 비구들이여,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증득한 이 법은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숭고하고, 사유의 영역을 넘어섰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다. 그러나 존재들은 집착을 좋아하고 집착을 기뻐하고 집착을 즐긴다. 집착을 좋아하고 집착을 기뻐하고 집착을 즐기는 사람들은 이런 토대(경지) 즉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를 보기 어렵다. 또한 이러런 토대 즉 모든 형성의 그침, 모든 재생의 조건(근거)을 놓음이고, 갈애의 부서짐이고, 탐욕의 사라짐이고, 소멸인 열반을 보기 어렵다. 그러니 내가 법을 설한다 하더라도 저들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를 피곤하게 하고 나를 불편하게 할 것이다.'라고. 그때 나에게 이전에 들어 보지 못한 게송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나에게 어렵게 증득된 법을 설하는것이 이제 필요할까?
탐욕과 성냄으로 가득한 자들에게 이 법을 잘 깨달아지지 않는다.
흐름을 거스르고, 독창적이고,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미묘한 법을
어둠의 무더기에 덮이고, 탐욕에 사로잡힌 자들은 보지 못한다.'라고.

*주석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깨달음을 이루신 뒤 8번째 칠 일(atthama sattaha)에 염소치기의 니그로다 나무(ajapala-nigrodha) 아래에서 있었던 것이라고 적고 있다.(SA.i.195) 
한편 주석서(MA.ii.181-186)는 세존께서 깨달음을 증득하신 뒤 초전법륜을 결심하기 전의 7x7=49일 동안에 하셨던 일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 그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세존께서 깔라 용왕의 거처가 있는(Kalanagarajassa bhavana) 만제리까(Manjerika)라는 숲에서 깨달으셨는데 첫 번째 칠 일은 바로 그 장소에서 가부좌한 하나의 자세로 앉아 계셨다.
②두 번째 칠 일은 깨달음을 증득하신 바로 그 자리와 그 나무(보리수.bodhi-rukkha)를 눈을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면서 보내셨다.
③세 번째 칠 일은 그곳 가까이에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길게 포행을 하시면서 보내셨다.
④네 번째 칠 일은 신들에게 논장(Abhidhamma-pitaka)을 자세하게 설하셨다.
⑤다섯 번째 칠 일은 보리수 아래에서 염소치기의 니그로다 나무로 가셔서 아비담마에 대한 체계적인 도(naya-magga)를 명상하셨다.
⑥여섯 번째 칠 일은 무짤린다(Mucalinda) 나무아래에서 머무셨다.
⑦일곱 번째 칠 일은 왕의 처소(Rajayatana)라 불리는 나무아래에서 머무셨다.
이렇게 칠 일을 보내신 뒤 여덟 번째 칠 일에는 다시 염소치기 니그로다 나무 아래로 가셔서 본경의 이 부분처럼 법을 전하는 것을 주저하는 사유를 하셨고, 사함빠띠 범천은 세존께서 이 세상에 법을 설해주시기를 간청하게 된다. 

282. 이렇게 숙고할 때, 비구들이여, 나의 마음은 법을 설하기보다는 무관심으로 기울었다. 그때, 비구들이여, 사함빠띠 범천은 나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차란 뒤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어떤 경우에도 여래‧아라한‧정등각자의 마음이 법을 설하기보다는 무관심으로 기운다면 세상은 참으로 타락할 것이고, 세상은 참으로 파멸할 것이다.'라고. 그러자 사함빠띠 범천은 마치 힘센 사람이 구부린 팔을 펴고 편 팔을 구부리듯이 그렇게 바른 시간안에 범천의 세상에서 사라져 내 앞에 나타났다. 그때, 비구들이여, 사함빠띠 범천은 한쪽 어깨가 드러나게 윗옷을 입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고, 합장하여 나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법을 설하십시오. 선서께서는 법을 설하십시오. 태어날 때 부터 더러움이 적은 중생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법을 듣지 않으면 쇠퇴할 것입니다. 법을 이해할만한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사함빠띠 범천은,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말하고 다시 이렇게 게송을 읊었다. 

*"사함빠띠 범천(brahma Sahampati)은 이전의 깟사빠 세존의 승가에서 사하까(Sahaka)라는 이름의 장로였다. 그가 초선을 증득하여 초선의 세계에 겁의 수명을 가진 대범천으로 태어났다. 그곳에서 그를 사함빠띠 범천이라고 불렀는데, 이렇게 해서 그는 사함빠띠 범천이라 불리었다."(MA.ii.177) 

'예전에 마가다에 오염된 생각 때문에 청정하지 못한 법이 나타났지만,
그대들은 이제 때 없는 분이 깨달으신 불사의 문을 여는 법을 들으십시오. 

산 꼭대기의 바위 위에 사방의 사람들을 보는 것처럼,
현자이시여, 모든 것을 보는 눈을 가진 분이시여, 그와 같이 법으로 만든 궁전에 올라
슬픔을 제거한 분께서는 슬픔에 빠져있고 태어남과 늙음에 고통받는 중생들을 살피십시오.

일어서십시오. 영웅이여, 승리자여, 대상((隊商)을 이끄는 분이여, 허물없는 없는 분이여(빚 없는 분이여),
세상을 유행하십시오(세상으로 나아가십시오). 세존께서는 법을 설하십시오. 아는 사람들이(법을 이해할만한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283. 그러자, 비구들이여, 나는 범천의 간청을 알고서 중생에 대한 연민으로 깨달은 이의 눈[佛眼]으로 세상을 살펴보았다. 깨달은 이의 눈으로 세상을 살펴보던 나는 더러움이 적은 자들(조금 밖에 오염되지 않은 중생), 더러움이 많은 자들, 기능이 예리한 자들, 기능이 둔한 자들, 자질(기질)이 좋은 자들, 자질이 나쁜 자들, 가르치기 쉬운 자들, 가르치기 어려운 자들, 저 세상의 결함에 대해 두려움을 보며 지내는 어떤 자들(내세와 죄악에 대해 두려움을 보며 지내는 자), 저 세상의 결함에 대해 두려움을 보지 않고 지내는 어떤 자들 등 중생들을 보았다. 예를 들면,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이 있다. 어떤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은 물속에서 생겨나 물속에서 성장하고 물에 잠겨 그 속에서만 자란다. 어떤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은 물속에서 생겨나 물속에서 자라서 물의 표면까지 나온다. 어떤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은 물속헤서 생겨나 물속에서 성장하여 물 위로 올라와 서서 물에 의해 얼룩지지 않는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깨달은 이의 눈으로 세상을 살펴본 나는 더러움이 적은 자들, 더러움이 많은 자들, 기능이 예리한 자들, 기능이 둔한 자들, 자질(기질)이 좋은 자들, 자질이 나쁜 자들, 가르치기 쉬운 자들, 가르치기 어려운 자들, 저 세상의 결함에 대해 두려움을 보며 지내는 어떤 자들, 저 세상의 결함에 대해 두려움을 보지 않고 지내는 어떤 자들 등 중생들을 보았다. 그때 나는, 비구들이여, 나는 사함빠띠 범천에게 게송으로 대답했다.    

'그들에게 불사(不死. 열반)의 문은 열렸다.
귀를 가진 자들은 믿음을 버려라(삿된 믿음을 버려라).
범천이여, (중생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없었던 과거의 나는
잘 실천되고 수승한 법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비구들이여, 사함빠띠 범천은 '나는 세존에 의해 법이 설해지도록 말씀을 드렸다.'라고 생각하면서 내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공경의 의미로 오른쪽으로 돌아 그곳에서 사라졌다. 

284. 비구들이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누구에게 제일 먼저 법을 설해야 할까? 누가 이 법을 빨리 이해할 수 있을까?'라고. 그런 나에게, 비구들이여,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알라라 깔라마는 현자이고 배운 자이고 총명한 자이고 오랫동안 태어날 때부터 더로움이 적은 자이다(눈에 때가 엷게 낀 분이다). 나는 알라라 깔라마에게 제일 먼저 법을 설해야겠다. 그는 이 법을 빨리 이해할 것이다.'라고. 그러자, 비구들이여, 신이 내게 와서 '세존이시여, 알라라 깔라마는 칠 일 전에 죽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비구들이여, 내게도 '알라라 깔라마는 칠 일 전에 죽었다.'라는 앎과 봄이 일어났다. 그런 나에게, 비구들이여,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알라라 깔라마는 큰 이득을 잃었다. 그가 이 법을 들었더라면 즉시 이해했을 것이다.'라고. 

그런 나에게, 비구들이여,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누구에게 제일 먼저 법을 설해야 할까? 누가 이 법을 빨리 이해할 수 있을까?'라고. 그런 나에게, 비구들이여,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웃다까 라마뿟따는 현자이고 배운 자이고 총명한 자이고 오랫동안 태어날 때부터 더러움이 적은 자이다. 나는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제일 먼저 법을 설해야겠다. 그는 이 법을 빨리 이해할 것이다.'라고. 그러자 비구들이여, 신이 내게 와서 '세존이시여, 웃다까 라마뿟따는 지난밤에 죽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비구들이여, 내게도 '웃다까 라마뿟따는 지난밤에 죽었다.'라는 앎과 봄이 일어났다. 그런 나에게, 비구들이여,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웃다까 라마뿟따는 큰 이득을 잃었다. 그가 이 법을 들었다면 즉시 이해했을 것이다.'라고. 

그런 나에게, 비구들이여,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누구에게 제일 먼저 법을 설해야 할까? 누가 이 법을 빨리 이해할 수 있을까?'라고. 그런 나에게, 비구들이여,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굳세게 정진하던 나를 도와주던 함께하는 다섯 비구는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함께하는 다섯 비구에게 제일 먼저 법을 설해야겠다.'라고. 그런 나에게, 비구들이여,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함께하는 다섯 비구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을까?'라고. 비구들이여, 나는 인간을 넘어선 청정한 하늘눈[天眼]으로 함께하는 다섯 비구가 바라나시에서 이시빠다나의 사슴동산에 머물고 있는 것을 보았다. 비구들이여, 나는 우루웰라에서 원하는만큼 머문 뒤에 바라나시로 유행을 떠났다. 

285. 비구들이여, 아지와까 유행승(사명외도)인 우빠까가 가야와 보리수 사이에 큰길을 가고 있는 나를  보았다. 보고서 나에게 '도반이여, 그대의 감관(기능)은 아주 맑밝습니다. 피부색은 청정하고 빛이 납니다(순결합니다). 도반이여, 그대는 누구에 의지해 출가했습니까? 그대의 스승은 누구십니까? 그대는 누구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했을 때, 비구들이여, 나는 아지와까 유행승인 우빠까에게 게송으로 말했다. 

'나는 모든 것을 정복했고, 모든 것을(일체를) 아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에서 흠이 없으며, 모든 것에서 벗어났고, 갈애의 부서짐에 의해 해탈했습니다.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알았는데 누구를 스승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는 스승도 없고 나와 같은 이도 없으며
신을 포함한 세상에 나에게 비할 사람이 없습니다.
참으로 나는 세상에 있는 아라한이고, 나는 위없는 스승이며
나는 유일한 정등각이고, 고요한 자이고, 적멸을 얻은 자(꺼진 자)입니다.

나는 법의 바퀴(법륜.法輪)를 굴리기 위해 까시로 갑니다.
나는 눈먼 자들의 세상에서 불사(不死)의 북을 울릴 것입니다.'

'도반이여, 그처럼 그대는 무한한 승리자라고 동의하고 인정합니다(그대가 무한한 승리자가 될만한다고 자인합니까?)'

'번뇌의 부서짐이 성취된 나 같은 사람들은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악한 법들은 나에게 정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빠까여, 나는 승리자입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비구들이여, 아자와까 유행승인 우빠까는 '그럴 것입니다, 도반이여.'라고 말한 뒤에 머리를 흔들면서 다른 길로 떠났다.

286. 비구들이여, 나는 차례대로 유행하여 바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으로 함께하는 다섯 비구에게 갔다. 비구들이여, 함께하는 다섯 비구는 멀리서 오고 있는 나를 보았다. 보고는 서로 간에 의견을 맞추었다. '도반들이여, 저기 풍족하게 사는 자, 노력을 포기하고 풍족한 삶으로 되돌아 간 사문 고따마가 오고 있습니다. 그에게 인사를 해서는 안되고, 일어서서 맞이 해서도 안되고, 발우와 가사를 받아주어서도 안됩니다. 만약 그가 원한다면 앉을 수는 있도록 자리는 마련해줍시다.'라고. 비구들이여, 내가 점점 함께하는 다섯 비구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함께하는 다섯 비구는 그들 스스로 동의한 의견을 지킬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은 마중 나와 발우와 가사를 받았고, 어떤 사람은 자리를 마련하였고, 어떤 사람은 발 씻을 물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이름을 부르고 "도반이여."라고 말을 썼다. 

*다섯 비구의 이름은 꼰단냐(Kondanna 혹은 안냐 꼰단냐, Anna-Kondanna), 밧디야(Bhaddiya), 왑빠(Vappa), 마하나마(Mahanama), 앗사지(Assaji)이다. 다섯 비구는 세존의 「초전법륜 경」(S56.11)을 듣고 이때 이미 유학(sekha)이 되어 있었으며, 세존께서 이 세상에서 두 번째 설법인 「무아의 특징 경」(S22.59)을 듣고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고 율장 대품(Vin.i.13-14)과 무아의 특징 경의 마지막에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말했을 때, 비구들이여, 나는 함께하는 다섯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여래(如來)에게 이름으로 불러서도 안되고 '도반이여.'라고 불러서도 안된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아라한이고, 바르게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정등각자.正等覺者]이다. 비구들이여, 귀를 기울여라. 불사(不死)가 성취되었다. 나는 가르친다. 나는 법을 설한다. 내가 가르친 대로 실천하면 그대들은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목적인 그 위없는 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자 함께하는 다섯 비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고따마여, 그대는 그런 행동과 그런 실천과 그런 행하기 어려운 행함(고행)으로도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들에게 적합한 특별한(차별적) 앎과 봄을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풍족하게 살고, 노력을 포기했고, 풍족한 삶으로 되돌아간 그대가 어떻게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들에게 적합한 특별한 앎과 봄을 성취하겠습니까?'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비구들이여, 나는 함께하는 다섯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풍족하게 사는 자가 아니다.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고, 풍족한 삶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아라한이고, 정등각이다. 비구들이여, 귀를 기울여라. 불사가 성취되었다. 나는 가르친다. 나는 법을 설한다. 내가 가르친 대로 실천하면 그대들은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목적인 그 위없는 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두 번째도 함께하는 다섯 비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고따마여, 그런 행동과 그런 실천과 그런 행하기 어려운 행함으로도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들에게 적합한 특별한 앎과 봄을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풍족하게 살고, 노력을 포기했고, 풍족한 삶으로 되돌아간 그대가 어떻게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들에게 적합한 특별한 앎과 봄을 성취하겠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두번째도 나는 함께하는 다섯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풍족하게 사는 자가 아니다.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고, 풍족한 삶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아라한이고, 정등각이다. 비구들이여, 귀를 기울여라. 불사가 성취되었다. 나는 가르친다. 나는 법을 설한다. 내가 가르친 대로 실천하면 그대들은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목적인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세 번째도 함께하는 다섯 비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고따마여, 그런 행동과 그런 실천과 그런 행하기 어려운 행함으로도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들에게 적합한 특별한 앎과 봄을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풍족하게 살고, 노력을 포기했고, 풍족한 삶으로 되돌아간 그대가 어떻게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들에게 적합한 특별한 앎과 봄을 성취하겠습니까?'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비구들이여, 나는 함께하는 다섯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지금 이전에 이런 고결한 모습(개발된 모습)을 나에게서 본 적이 있는가?'라고. '없습니다, 존자시여.' '비구들이여, 여래는 풍족하게 사는 자가 아니다.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고, 풍족한 삶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아라한이고, 정등각이다.  비구들이여, 귀를 기울여라. 불사가 성취되었다. 나는 가르친다. 나는 법을 설한다. 내가 가르친 대로 실천하면 그대들은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목적인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나는 함게하는 다섯 비구를 설득할 수 있었다. 비구들이여, 내가 두 명의 비구를 가르치는 동안 세 명의 비구가 탁발을 나갔다. 세 명의 비구가 탁발하여 가져온 것으로 여섯 명이 먹었다. 내가 세 명의 비구를 가르치는 동안 두 명의 비구가 탁발을 나갔다. 두 명의 비구가 탁발하여 가져온 것으로 여섯 명이 먹었다. 비구들이여, 다섯 비구는 나에게 이와 같이 듣고 이와 같이 가르침을 받아, 자신들이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태어남의 법이 지니고 있는 잘못됨을 알아 태어남의 법이 없는 위없는 열반을 구하여 태어남의 법이 없는 위없는 열반을 증득했다. 자신들이 늙음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늙음의 법이 지니고 있는 잘못됨을 알아 알아 늙음의 법이 없는 위없는 열반을 구하여 늙음의 법이 없는 위없는 열반을 증득했다. 자신들이 병듦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병듦의 법이 지니고 있는 잘못됨을 알아 병듦의 법이 없는 위없는 열반을 구하여 병듦의 법이 없는 위없는 열반을 증득했다. 자신들이 죽음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죽음의 법이 지니고 있는 잘못됨을 알아 죽음의 법이 없는 위없는 열반을 구하여 죽음의 법이 없는 위없는 열반을 증득했다. 자신들이 슬픔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슬픔의 법이 지니고 있는 잘못됨을 알아 슬픔의 법이 없는 위없는 열반을 구하여 슬픔의 법이 없는 위없는 열반을 증득했다. 자신들이 번뇌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번뇌의 법이 지니고 있는 잘못됨을 알아 번뇌의 법이 없는 위없는 열반을 구하여 번뇌의 법이 없는 위없는 열반을 증득했다. 그들에게 앎과 봄이 생겼다. '우리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다. 이것이 마지막 태어남이다. 더 이상 다시 태어남[再生]은 없다.'라고. 

287. 비구들이여, 이런 다섯 가지의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불러 일으키고 횐락을 야기하는,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 ···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 ··· 혀로 인식되는 맛들 ···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불러 일으키고 횐락을 야기하는,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다섯 가지의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을 욕심내고 마음을 빼앗기고 묶여있기 때문에 위험을 보지 못하고 벗어남의 지혜가 없이 즐기는 어떤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누구든지 '불행에 처했고, 고통에 처했고, 마라 빠삐만뜨는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라고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숲에 사는 사슴이 덫에 걸려 쓰러져 있을 것이다. 그는 '불행에 처했고, 고통에 처했고, 사냥꾼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사냥꾼이 올 때 원하는 곳으로 달려가지 못한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이 다섯 가지의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을 욕심내고 마음을 빼앗기고 묶여있기 때문에 위험을 보지 못하고 벗어남의 지혜가 없이 즐기는 어떤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누구든지 '불행에 처했고, 고통에 처했고, 마라 빠삐만뜨는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라고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을 욕심내지 않고,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묶여있지 않기 때문에 벗어남의 지혜를 갖춘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누구든지 '불행에 처하지 않았고, 고통에 처하지 않았고, 마라 빠삐만뜨는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다.'라고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숲에 사는 사슴이 올가미에 걸리지 않았고 누워있을 것이다. 그는 불행을 만나지 않았고 고통에 처하지 않았고 사냥꾼의 손아귀에 들지 않았다. 사냥꾼이 오더라도 그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이들 다섯 가지의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을 탐착하지 않고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탐닉하지 않고 잘못됨을 보고 벗어남에 대한 지혜를 갖추어 구족한 어떤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누구든지, 그들은 불행을 만나지 않았고, 고통에 처하지 않았고, 사악한 마라의 손아귀에 들지 않았다.'라고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숲에 사는 사슴이 숲에서 다닐 때 두려움 없이 가고 두려움 없이 서고 두려움 없이 앉고 두려움 없이 잠을 자는 것과 같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사냥꾼의 영역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으로 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라를 눈이 멀고 발이 없게 만들었다. 마라의 눈을 파괴한 뒤에 마라가 없는 곳으로 갔다.'라고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라를 눈이 멀고 발이 없게 만들었다. 마라의 눈을 파괴한 뒤에 마라가 없는 곳으로 갔다.'라고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라를 눈이 멀고 발이 없게 만들었다. 마라의 눈을 파괴한 뒤에 마라가 없는 곳으로 갔다.'라고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라를 눈이 멀고 발이 없게 만들었다. 마라의 눈을 파괴한 뒤에 마라가 없는 곳으로 갔다.'라고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色]에 대한 지각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잡다한(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끝이 없는 허공)'이라고 하는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을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라를 눈이 멀고 발이 없게 만들었다. 마라의 눈을 파괴한 뒤에 마라가 없는 곳으로 갔다.'라고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없는 공무변처를 넘어선, '무한한 의식(끝이 없는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라를 눈이 멀고 발이 없게 만들었다. 마라의 눈을 파괴한 뒤에 마라가 없는 곳으로 갔다.'라고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라를 눈이 멀고 발이 없게 만들었다. 마라의 눈을 파괴한 뒤에 마라가 없는 곳으로 갔다.'라고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일체의 아무것도 없다는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라를 눈이 멀고 발이 없게 만들었다. 마라의 눈을 파괴한 뒤에 마라가 없는 곳으로 갔다.'라고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想受滅)을 구족하여 머문다. 그는 그의 지혜로써 보아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라를 눈이 멀고 발이 없게 만들었다. 마라의 눈을 파괴한 뒤에 마라가 없는 곳으로 갔다. 이 세상에 대한 강한 집착을 건넜고, 걸림 없이 가고, 걸림 없이 서고, 걸림 없이 앉고, 걸림 없이 눕는다.라고 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마라 빠삐만뜨의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그 비구들은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


덫 경이 끝났다.

**PTS에는 본경의 제목이 ariyapariyesana sutta(성스러운 구함 경)으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