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N 66. 메추라기 비유 경(laṭukikopamasuttaṃ)
148.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앙굿따라빠에서 아빠나라는 앙굿따라빠의 성읍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시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시고 아빠나로 탁발을 가셨다. 아빠나에서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시고 돌아와 낮 동안의 머묾을 위해서 어떤 숲으로 가셨다. 그 숲에 들어가서 어떤 나무 밑에 낮 동안의 머묾을 위해 앉으셨다. 우다이 존자도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아빠나로 탁발을 갔다. 아빠나에서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 낮 동안의 머묾을 위해서 어떤 숲으로 갔다. 그 숲에 들어가서 어떤 나무 밑에 낮 동안의 머묾을 위해 앉았다. 그때 한적한 곳에서 홀로 머무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런 마음의 온전한 생각이 떠올랐다.
'세존께서는 우리를 위해 많은 괴로운 법들을 제거해주셨고, 세존께서는 우리를 위해 많은 즐거운 법들을 가져다주셨다. 세존께서는 우리를 위해 많은 선하지 않은 법들을 제거해주셨고, 세존께서는 우리를 위해 많은 선한 법들을 가져다주셨다.'라고.
저녁 무렵에 낮 동안의 홀로 머묾에서 일어난 우다이 존자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149. 한 곁에 앉아서 우다이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여기, 세존이시여, 한적한 곳에서 홀로 머물던 저에게 이런 마음의 온전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세존께서는 우리를 위해 많은 괴로운 법들을 제거해주셨고, 세존께서는 우리를 위해 많은 즐거운 법들을 가져다주셨다. 세존께서는 우리를 위해 많은 선하지 않은 법들을 제거해주셨고, 세존께서는 우리를 위해 많은 선한 법들을 가져다주셨다.'라고.
세존이시여, 예전에 저희들은 저녁에도 아침에도 낮에도 때 아닌 때에 먹었습니다. 그때,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낮의 때아닌 때에 음식을 먹는 것을 버려라'.라고. 세존이시여, 그런 저희들은 마음이 흔들렸고 고뇌가 생겼습니다. '믿음있는 장자들이 낮의 때 아닌 때에 우리에게 주는 맛있고 먹기 좋은 음식을 세존께서는 버리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선서께서는 그것을 포기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라고. 그런 저희들은, 세존이시여, 세존에 대한 사랑과 존경과,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과 뉘우침을 보면서 이런 낮의 때아닌 때에 음식을 먹는 것을 버렸습니다. 그런 저희들은, 세존이시여, 저녁과 아침에만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때,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밤의 때아닌 때에 음식을 먹는 것을 버려라.'라고. 세존이시여 그런 저희들은 마음이 흔들렸고 고뇌가 생겼습니다. '이런 두 번의 공양 중에 더 맛있게 조리된 음식을 세존께서는 버리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선서께서는 그것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셨다.'라고. 예전에, 세존이시여, 어떤 사람이 오후에 국을 얻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이것을 남겨두었다가 저녁에 함께 먹읍시다.'라고. 세존이시여, 무엇이든지 조리된 것은 저녁에 하고 낮에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런 저희들은, 세존이시여, 세존에 대한 사랑과 존경과,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과 뉘우침을 보면서 이렇게 밤의 때아닌 때의 음식을 먹는 것을 버렸습니다. 예전에는, 세존이시여,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탁발을 위해 돌아다니는 비구들이 오물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가시 담장을 오르기도 하고, 잠든 소를 밝기도 하고, 도둑질을 이미 했거나 꾀하고 있는 불량배들을 만나기도 하고, 여인들로부터 부정하게 유혹받기도 했습니다. 예전에 저는, 세존이시여,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탁발을 위해 돌아 다녔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릇을 씻던 어떤 여인이 번개불이 번쩍일 때 저를 보았습니다. 보고서 두려운 그 여인은 저에게 소리쳤습니다. '아이고! 나에게 귀신이 나타났어요.'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세존이시여, 저는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매여, 나는 귀신이 아닙니다. 탁발을 온 비구입니다.'라고. '부모님이 다 죽은 비구겠지!. 비구여, 그대는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탁발을 위해 돌아 다니는 것보다 소 잡는 날카로운 칼로 그대의 창자를 잘라버리는게 더 나을 거요.'라고.
세존이시여, 그것을 기억하는 저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존께서는 우리를 위해 많은 괴로운 법들을 제거해주셨고, 세존께서는 우리를 위해 많은 즐거운 법들을 가져다주셨다. 세존께서는 우리를 위해 많은 선하지 않은 법들을 제거해주셨고, 세존께서는 우리를 위해 많은 선한 법들을 가져다주셨다.'라고.
150. "그러하다, 우다이여. 그러나 여기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대들은 이것을 버려야 한다.'라고 내가 말했을 때 '왜 이 사문은 이런 사소하고 하잘것 없는 것까지 사사건건 간섭하는가! 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것을 버리지 않고, 나에게 불만을 드러낸다. 범행을 원하는 비구들에게, 우다이여, 그것은 힘센 속박이고, 강한 속박이고, 견고한 속박이고, 질긴 속박이고, 강력한 멍에이다. 예를 들면, 우다이여, 썩은 줄에 묶인 메추라기 암컷은 단지 거기에서 부딛치고 묶이고 죽을 것이다. 우다이여, 어떤 사람이 '어떤 썩은 줄에 묶인 메추라기 암컷이 단지 거기에서 부딛치고 묶이고 죽을 것이다. 참으로 그 줄은 메추라기 암컷에게 강하지 않은 결박이고, 견고하지 않은 결박이고, 질기지 않은 결박이고, 썩은 결박이라고 말한다면, 우다이여, 이것은 바르게 말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썩은 줄에 묶인 메추라기 암컷이 단지 거기에서 부딛치고 묶이고 죽는다면, 참으로 그 줄은 그 메추라기 암컷에게 힘센 결박이고 강한 결박이고, 견고한 결박이고, 질긴 속박이고, 강한 멍에입니다."
"이처럼, 우다이이여, '그대들은 이것을 버려야 한다.'라고 내가 말했을 때 '왜 이 사문은 이런 사소하고 하잘것 없는 것까지 사사건건 간섭하는가! 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것을 버리지 않고, 나에게 불만을 드러낸다. 범행을 원하는 비구들에게, 우다이여, 그것은 힘센 속박이고, 강한 속박이고, 견고한 속박이고, 질긴 속박이고, 강력한 멍에이다.
151. 또한, 우다이여, 여기 어떤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그대들은 이것을 버려야 한다.'라고 내가 말했을 때 '그런데 왜 이런 사소하고 하잘것없는 것의 버림을 위해 세존께서는 우리에게 버리라고 말씀하시고, 선서께서는 우리에게 포기하라고 말씀하셨을까!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것을 버리고, 나에게 불만을 품지 않는다. 범행을 원하는 비구들은 그것을 버린 뒤에 관심을 두지 않고 차분하고 남이 준 공양물로만 살고 사슴의 마음으로 머문다. 그들에게 우다이여, 그것은 강하지 않은 속박이고, 약한 속박이고, 낡은 속박이고, 썩은 속박이다. 예를 들면, 우다이여, 강한 가죽끈에 묶여있는 건장하고 혈통 좋고 전쟁에 능숙한 왕의 이사단따(마차 축 같은 약간 휘어진 상아를 가진)코끼리는 단지 몸을 조금 비틀어 그 결박을 끊고 자른 뒤에 원하는 곳으로 간다. 우다이여, 어떤 사람이 '어떤 강한 가죽끈에 묶여있는 건장하고 혈통이 좋고 전쟁에 능숙한 왕의 이사단따 코끼리는 단지 몸을 조금 비틀어 그 결박을 끊고 자른 뒤에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갈 것이다. 참으로 그 가죽끈은 그 코끼리에게 힘센 결박이고 강한 결박이고 견고한 결박이고 낡지 않은 결박이고 강력한 멍에'라고 말한다면, 우다이여, 우다이여, 이것은 바르게 말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어떤 강한 가죽끈에 묶인 건장하고 혈통이 좋고 전쟁에 능숙한, 왕의 이사단따 코끼리가 단지 몸을 조금 비틀어 그 결박을 끊고 자른 뒤에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간다면, 참으로 그 가죽끈은 그 코끼리에게 강하지 않은 결박이고 약한 결박이고 낡은 결박이고 썩은 결박입니다."
"이처럼, 우다이여, 여기 어떤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그대들은 이것을 버려야 한다.'라고 내가 말했을 때 '그런데 왜 이런 사소하고 하잘것없는 것의 버림을 위해 세존께서는 우리에게 버리라고 말씀하시고, 선서께서는 우리에게 포기하라고 말씀하셨을까!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것을 버리고, 나에게 불만을 품지 않는다. 범행을 원하는 비구들은 그것을 버린 뒤에 관심을 두지 않고 차분하고 남이 준 공양물로만 살고 잘못됨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으로 머문다. 그들에게 우다이여, 그것은 강하지 않은 속박이고, 약한 속박이고, 낡은 속박이고, 썩은 속박이다.
*"'사슴과 같은 마음으로 머문다(migabhutena cetasa viharanti)'는 ㄳ은 인적이 없는 쪽을 의지하여 머문다는 뜻이다. 마치 사슴은 공격을 받으면 사람이 사는 곳으로 가서 약이나 연고를 얻어 오리라는 생각을 하는 대신 인적이 없는 숲으로 들어가서 공격당한 부분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낮추어서 상처가 아물면 일어나서 간다. 이와 같이 사슴은 인적이 없는 쪽을 의지하여 머문다."(MA.ii.167)
152. 예를 들면, 우다이여,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고 빈곤한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낡고 부서지고 까마귀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초라한 작은 집 한 채, 낡고 부서지고 초라한 침상이 하나, 곡식을 저장하는 초라한 항아리 하나, 초라한 한 명의 아내가 있다. 그가 승원에 사는 비구가 손과 발을 씻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서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 높은 마음을 닦는 것을 볼 것이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존자여, 참으로 사문의 삶은 즐겁군요. 존자여, 참으로 사문의 삶은 건강하군요! 나는 머리와 수염을 깎고 노란 옷을 입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면 좋겠다.'라고.
그는 낡고 부서지고 까마귀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초라한 작은 집 한 채를 버리고, 낡고 부서지고 초라한 침상 하나를 버리고, 곡식을 저장하는 초라한 항아리 하나를 버리고, 초라한 한 명의 아내를 버리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노란 옷을 입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지 못할 것이다. 우다이여, 어떤 사람이 '어떤 속박에 묶인 그 사람이 낡고 부서지고 까마귀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초라한 작은 집 한 채를 버리고, 낡고 부서지고 초라한 침상 하나를 버리고, 곡식을 저장하는 초라한 항아리 하나를 버리고, 초라한 한 명의 아내를 버리고 머리와 수염을 갂고, 노란 옷을 입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지 못한다면, 그에게 그것은 강하지 않은 속박이고, 약한 속박이고, 낡은 속박이고, 썩은 속박이다.'라고 말한다면, 우다이여, 이것은 바르게 말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어떤 속박에 묶인 그 사람이 낡고 부서지고 까마귀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초라한 작은 집 한 채를 버리고, 낡고 부서지고 초라한 침상 하나를 버리고, 곡식을 저장하는 초라한 항아리 하나를 버리고, 초라한 한 명의 아내를 버리고 머리와 수염을 갂고, 노란 옷을 입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그에게 그것은 힘센 결박이고 강한 결박이고 견고한 결박이고 낡지 않은 결박이고 강력한 멍에입니다."
"이처럼, 우다이여, 여기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대들은 이것을 버려라 한다.'라고 내가 말했을 때 '왜 이 사문은 이런 사소하고 하잘것 없는 것까지 사사건건 간섭하는가! 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것을 버리지 않고, 나에게 불만을 드러낸다. 범행을 원하는 비구들에게, 우다이여, 그것은 힘센 속박이고, 강한 속박이고, 견고한 속박이고, 질긴 속박이고, 강력한 멍에이다.
153. 예를 들면, 우다이여, 큰 재물과 큰 재산을 가진 부유한 장자나 장자의 아들에게 많은 금괴 무더기, 많은 곡식 무더기, 많은 밭, 많은 토지, 많은 아내, 많은 하인, 많은 하녀가 있다. 그가 승원에 사는 비구가 손과 발을 씻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서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서 높은 마음을 닦는 것을 볼 것이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존자여, 참으로 사문의 삶은 즐겁군요. 존자여, 참으로 사문의 삶은 건강하군요! 나는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입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면 좋겠다.'라고.
그는 많은 금괴 무더기를 버리고, 많은 곡식 무더기를 버리고, 많은 밭을 버리고, 많은 토지를 버리고, 많은 아내를 버리고, 많은 하인을 버리고, 많은 하녀를 버리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노란 가사를 입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할 것이다. 우다이여, 어떤 사람이 '어떤 속박에 묶인 큰 재물과 큰 재산을 가진 부유한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많은 금괴 무더기를 버리고, 많은 곡식 무더기를 버리고, 많은 밭을 버리고, 많은 토지를 버리고, 많은 아내를 버리고, 많은 하인을 버리고, 많은 하녀를 버리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노란 가사를 입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다면, 그에게 그것은 힘센 결박이고, 강한 결박이고 견고한 결박이고 낡지 않은 결박이고 강력한 멍에이다.'라고 말한다면, 우다이여, 이것은 바르게 말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어떤 속박에 묶인 큰 재물과 큰 재산을 가진 부유한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많은 금괴 무더기를 버리고, 많은 곡식 무더기를 버리고, 많은 밭을 버리고, 많은 토지를 버리고, 많은 아내를 버리고, 많은 하인을 버리고, 많은 하녀를 버리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노란 가사를 입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다면, 참으로 그에게 그것은 강하지 않은 속박이고, 약한 속박이고, 낡은 속박이고, 썩은 속박입니다."
"이처럼, 우다이여, 여기 어떤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그대들은 이것을 버려야 한다.'라고 내가 말했을 때 '그런데 왜 이런 사소하고 하잘것없는 것의 버림을 위해 세존께서는 우리에게 버리라고 말씀하시고, 선서께서는 우리에게 포기하라고 말씀하셨을까!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것을 버리고, 나에게 불만을 품지 않는다. 범행을 원하는 비구들은 그것을 버린 뒤에 관심을 두지 않고 차분하고 남이 준 공양물로만 살고 잘못됨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으로 머문다. 그들에게 우다이여, 그것은 강하지 않은 속박이고, 약한 속박이고, 낡은 속박이고, 썩은 속박이다.
154. 우다이여, 세상에는 이런 네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무엇이 넷인가?
여기, 우다이여, 어떤 사람은 재생의 조건(근거)을 버리고 재생의 조건을 놓아버리기 위해 법을 닦는다. 그가 재생의 조건을 버리고 재생의 조건을 놓아버리기 위해 법을 닦을 때 재생의 조건과 관련된 기억과 사유가 일어난다. 그는 그것을 수용하고 버리지 않고 제거하지 않고 끝내지 않고 없애지 않는다. 우다이여, 나는 이런 사람을 '속박된 자'라고 말하지 '속박되지 않은 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다이여, 기능의 차이 때문이라고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알기 때문이다.
*여기서 '재생의 조건(근거)'는 upadhi를 옮긴 것이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그 위에 무엇이 놓여진'을 의미한며 그래서 삶에 필요한 토대나 소지품이나 설비 등을 뜻한다. 그래서 디가 니까야 복주석서는 "여기에 괴로움이 놓이기 때문에 우빠디(upadhi, 재생의 조건)라고 한다. 즉 무더기(蘊.온) 등을 말한다."(DAT.ii.76) 이것은 외적인 입장과 내적인 입장에서 살펴볼 수 있다. 외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얻어진 것들을 뜻하는데 자신의 재산이나 소유물을 뜻한다. 내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갈애가 생겨서 소유하려는 행위를 말한다. 이것은 다시 태어남(재생)의 조건(근거)이 된다.
주석서에 의하면 네 가지 재생의 조건이 있는 그것은 무더기(蘊)이라는 재생의 조건(khandha-upadhi), 오염원이라는 재생의 조건(kilesa-upadhi), 업형성력이라는 재생의 조건(abhisankhara-upadhi), 다섯 가지 얽어매는 감각적 쾌락이라는 재생의 조건(kama-upadhi)이다.(MA.ii.170)
여기, 우다이여, 어떤 사람은 재생의 조건을 버리고 재생의 조건을 놓아버리기 위해 법을 닦는다. 그가 재생의 조건을 버리고 재생의 조건을 놓아버리기 위해 법을 닦을 때 재생의 조건과 관련된 기억과 사유가 그에게 일어난다. 그는 그것을 수용하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우다이여, 나는 이런 사람을 '속박된 자'라고 말하지 '속박되지 않은 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다이여, 기능의 차이 때문이라고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알기 때문이다.
여기, 우다이여, 어떤 사람은 재생의 조건을 버리고 재생의 조건을 놓아버리기 위해 법을 닦는다. 그가 재생의 조건을 버리고 재생의 조건을 놓아버리기 위해 법을 닦을 때 간혹 마음챙김을 놓아버려 재생의 조건과 관련된 기억과 사유들이 그에게 일어난다. 우다이여, 일어남은 느리지만 그는 빨리 그것을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예를 들면, 우다이여, 사람이 온종일 달구어진 철판 위에 두 세 방울의 물을 떨어뜨리면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은 느리지만 그것은 즉시에 증발해서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우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재생의 조건을 버리고 재생의 조건을 놓아버리기 위해 법을 닦는다. 그가 재생의 조건을 버리고 재생의 조건을 놓아버리기 위해 법을 닦을 때 간혹 마음챙김을 놓아버려 재생의 조건과 근거와 관련된 기억과 사유들이 그에게 일어난다. 우다이여, 일어남은 느리지만 그는 빨리 그것을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우다이여, 나는 이런 사람을 '속박된 자'라고 말하지 '속박되지 않은 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다이여, 기능의 차이 때문이라고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알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①버리지 않는 자(nappajahati), ②버리는 자(pajahati), ③빨리 버리는 자(khippam pajahati)의 세 가지 무리(rasi)를 설하셨다.
①여기서 범부(puthujjana)와 예류자(sotapanna)와 일래자(sakadagami)와 불환자(anagami)인 이 네 부류의 사람을 버리지 않는 자라고 한다. 앞의 세 부류의 사람은 제쳐두고라도 어떻게 불환자를 그렇게 말하는가? 불환자에게도 존재에 대한 탐욕이 있어서 '오! 행복해', '오! 행복해.'라고 즐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를 버리지 않는 자라 한다.
②또한 이 네 부류의 사람을 버리는 자라고도 한다. 예류자등은 그렇다 하더라도 어떻게 범부를 그렇게 말하는가? 위빳사나를 시작한 비구가 마음챙김을 놓아버려 급히 오염원이 일어나면 '나 같은 비구에게 오염원이 일어나다니.'라고 절박감에 사로잡혀 정진을 일으켜 위빳사나를 증장하여 도(道)로써 오염원들을 뿌리 뽑는다. 그러므로 그를 버리는 자라 한다.
③또한 바로 이 네 뷰류의 사람을 빨리 버리는 자라 한다."(MA.ii.170)
여기 우다이여, 어떤 사람은 ‘재생의 조건은 괴로움의 뿌리이다.’라고 알아서 재생의 조건을 벗어나고, 재생의 조건을 파괴하고, 해탈한다. 우다이여, 나는 이런 사람을 ‘속박되지 않은 자’라고 말하지 ‘속박된 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다이여, 기능의 차이 때문이라고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안다. 우다이여, 이 세상에는 이런 네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재생의 조건은 괴로움의 뿌리이다(upadhi dukkhassa mulam)'라고 하셨다. 여기서 재생의 조건은 다섯 가지의 무더기(오온)라는 재생의 조건을 말한다. 그 오온이 괴로움의 뿌리라고 알아 오염원이라는 재생의 조건에서 재생의 조건을 여읜다. 즉 거머쥠이 없다(niggahana), 갈애가 없다(nitanha)는 말이다. '재생의 근거를 부수어 해탈한다(upadhisankhaye vimutto).'는 것은 갈애가 다한(tanha-kkhaya) 열반을 대상으로 해탈한다는 것이다."(MA.iii.171) 이것은 모든 족쇄를 다 부순 아라한을 말한다.
155. 우다이여, 이런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불러 일으키고 환락을 야기하는,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 ···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 ··· 혀로 인식되는 맛들,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불러 일으키고 환락을 야기하는,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 이것이, 우다이여,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이다. 우다이여, 이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을 연(緣)하여 생기는 즐거움과 만족, 이것이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 불결한 즐거움, 범부들의 즐거움, 성스럽지 못한 즐거움이라고 불린다. 이런 즐거움은 실천하지 않아야 하고, 닦지 않아야 하고, 많이 행하지 않아야 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156. 우다이여,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 머무는 생각. 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우다이여,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우다이여,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문다. 우다이여,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우다이여, 이것이 출리의 즐거움, 버림의 즐거움, 고요함의 즐거움, 깨달음의 즐거움이라고 불린다. '그 즐거움은 실천해야 하고, 닦아야 하고, 많이 행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나는 말한다.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에 들어 머문다. 우다이여, 이것은 동요하는 법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여기서 동요하는가? 여기서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소멸되지 않았는데 이것이 동요한다.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에 들어 머문다. 우다이여, 나는 이것을 동요하는 법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여기서 동요하는가? 여기서는 기쁨과 즐거움이 소멸되지 않았는데 이것이 동요한다.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에 들어 머문다. 우다이여, 나는 이것을 동요하는 법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여기서 동요하는가? 여기서는 평정과 즐거움이 소멸되지 않았는데 이것이 동요한다.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을 지닌 제4선에 들어 머문다. 우다이여, 나는 이것을 동요하지 않는 법이라고 말한다.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에 들어 머문다. 우다이여, 이것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 '버려야 한다'라고 나는 말하고, '넘어서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무엇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인가?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우다이여, 이것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 '버려야 한다'라고 나는 말하고, '넘어서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무엇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인가?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우다이여, 이것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 '버려야 한다'라고 나는 말하고, '넘어서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무엇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인가?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을 지닌 제4선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우다이여, 이것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 '버려야 한다'라고 나는 말하고, '넘어서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무엇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인가?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우다이여, 이것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 '버려야 한다'라고 나는 말하고, '넘어서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무엇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인가?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우다이여, 이것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 '버려야 한다'라고 나는 말하고, '넘어서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무엇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인가?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우다이여, 이것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 '버려야 한다'라고 나는 말하고, '넘어서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무엇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인가?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우다이여, 이것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 '버려야 한다'라고 나는 말하고, '넘어서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무엇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인가?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이렇게, 우다이여, 비상비비상처를 버릴 것도 나는 말한다. 우다이여, 작든 크든 그것을 버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는 족쇄를 그대는 보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우다이 존자는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
메추라기 비유 경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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