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맛지마 니까야

MN 70. 끼따기리 경(kīṭāgirisuttaṃ)

실론섬 2016. 4. 23. 16:45

MN 70. 끼따기리 경(kīṭāgirisuttaṃ)

 

174.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많은 비구 대중과 함께 까시를 유행하고 계셨다. 그 무렵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나는 오직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는다(저녁을 먹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는 나는 병이 없고, 아프지 않고, 몸이 가벼워 활력이 있고, 힘 있고, 편안하게 머무는 것을 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오직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어라. 비구들이여,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는 그대들도 병이 없고, 아프지 않고, 몸이 가벼워 활력이 있고, 힘 있고, 편안하게 머묾을 알 것이다."라고.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까시에서 차례로 유행하시다가 끼따기리라는 까시의 성읍에 도착하셨다. 세존께서는 거기 끼따기리라는 까시의 성읍에 머무셨다.

 

*까시(Kasi 혹은 Kasika)는 세존 당시 인도 중원의 16국 가운데 하나로 바라나시(Baranasi)를 수도로 하였다. 까시와 바라나시는 초기경전에서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 옛적부터 바라나시를 까시 혹은 까시까라고도 불렀다.  
「앙굿따라 니까야」 제1권 「팔관재계 경」(A3.70)등에 의하면 16개국은 앙가(Anga), 마가다(Magadha), 까시까(Kasika,까시, 바라나시), 꼬살라(Kosala), 왓지(Vajji), 말라(Malla), 제띠(Ceti), 왐사(Vamsa), 꾸루(Kuru), 빤짤라(Pancala), 맛차(Maccha), 수라세나(surasena), 앗사까(Assaka), 아완띠(Avanti), 간다라(Gandhara), 깜보자(Kamboja)이다. 그리고 후에 까시는 마가다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까시에서 만든 천 혹은 비단(Kasika vattha)은 초기불전의 몇몇 군데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지금도 바라나시에서 만든 비단과 천과 향은 유명하다.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병이 없고 고통이 없는 등의] 이러한 다섯 가지 이익을 보면서 밤에 먹는 것(ratti-bhojana)을 삼가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세존께서는 때 아닌 때인 밤에 먹는 것(rattim vikala-bhojana)과 때 아닌 때인 오후에 먹는 것(diva vikala-bhojana)의 두 가지를 한꺼번에 버리게 하지 않으시고 먼저 오후에 먹는 것을 버리게 하시고 다시 시간이 흐른 뒤 밤에 먹는 것을 버리게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무슨 이유로 이렇게 단계적으로 금하셨는가? 이 두 가지 식사는 이 세상에서 습관적으로 이행되고 실행되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잘 보호된 마을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자란 아직은 어린,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이러한 두 가지 식사를 한꺼번에 버리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한꺼번에 버리게 하지 않으시고 본서 밧달리 경(M65)에서는 오후에 먹는 것을 버리게 하시고 본경에서는 저녁에 먹는 것을 버리게 하시는 것이다. 버리게 하시면서 강제를 하거나 꾸중을 하시면서 버리게 하신 것이 아니라 '병이 없는 것을 알 것이다.'라고 이렇게 이익을 보이시면서 버리게 하셨다."(MA.ii.186)   
*적당한 때가 아닌 때에 음식을 먹지 말라는 세존의 말씀은 본서 메추라기 비유 경(M66)에도 나타난다. 이 경에서 보듯이 세존께서는 처음에 오후에 먹는 것을 금하셨고, 그 다음에 저녁에 먹는 것을 금하셨다. 주석서는 세존께서는 한꺼번에 점심과 저녁을 모두다 금하게 되면 약한 비구들에게 무리가 따를 것이므로 이렇게 점진적으로 금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MA.ii.186)       

*본경에 나타나듯이 끼따기리(Kitagiri)는 까시에서 사왓티로 향하는 도로에 있는 성읍이며, 육군비구(六群比丘,chabbaggiya bhikkhu)에 속하는 앗사지와 뿌납바수까(Assaji-Punabbasuka)의 거주지였다. 율장등에 의하면 사왓티의 제따 숲으로 향하는 어떤 비구에게 이곳의 어떤 신심 깊은 청신사가 이 두 비구의 나쁜 행실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으며 그 비구는 세존께 말씀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이 두 비구를 경책하기 위해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존자를 보냈다고 한다.(Vin.ii.9f,ii.179f;DhpA.ii.108f) 그 후 세존께서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를 포함한 많은 비구들과 그곳을 방문했는데 그들은 이 두 존자를 위해서는 아무런 거처를 제공하지 않았다고 한다.(Vin.ii.171)   
 

175. 그 당시 앗사지와 뿌납바수까라는 두 비구가 끼따기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때 많은 비구들이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앗사지와 뿌납비수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세존과 비구 승가는 오직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습니다. 도반들이여,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으면 병이 없고, 아프지 않고, 몸이 가벼워 활력이 있고, 힘 있고, 편안하게 머묾을 압니다. 오십시오, 도반들이여, 그대들도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으십시오. 비구들이여,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는 그대들도 병이 없고, 아프지 않고, 몸이 가벼워 활력이 있고, 힘 있고, 편안하게 머묾을 알 것입니다."라고.

이렇게 말하자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는 그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우리는 저녁과 아침과 낮에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먹습니다. 저녁과 아침과 낮에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먹는 우리는 병이 없고, 아프지 않고, 몸이 가벼워 활력이 있고, 힘 있고, 편안하게 머묾을 압니다. 그런 우리가 왜 눈에 보이는(지금·여기에서) 이익을 버리고 시간의 제약을 받는 것을 따르겠습니까? 우리는 저녁과 아침과 낮에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먹을 것입니다."라고.

 

*'앗사지(Assaji) 와 뿌납바수까(Punabbasuka)는 「율장」 「건도부」등에서 언급되는 육군비구 가운데 무리를 거느리는 두 비구이다. 이들 여섯 명은 빤두까(Panduka), 로히따까(Lohitaka), 메띠야(Mettiya), 붐마자까(Bhummajaka), 앗사지(Assaji), 뿌납바수까(Punabbasuka)인데, 이들 여섯 명을 육군비구라 한다. 이 중에서 빤두까와 로따까는 자기들의 대중을 거느리고 사왓티에서 머물렀고, 메띠야와 붐마자까는 라자가하에서, 이 두 사람은 끼따기리에서 머물렀다.(MA.ii.186-187)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를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 비구들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그 비구들은 세존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여기,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에게 다가갔습니다. 가서는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반들이여, 세존과 비구 승가는 오직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습니다. 도반들이여,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으면 병이 없고, 아프지 않고, 몸이 가벼워 활력이 있고, 힘 있고, 편안하게 머묾을 압니다. 오십시오, 도반들이여, 그대들도 오직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으십시오. 비구들이여,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는 그대들도 병이 없고, 아프지 않고, 몸이 가벼워 활력이 있고, 힘 있고, 편안하게 머묾을 알것입니다.'라고. 이렇게 말하자, 세존이시여,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는 저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반들이여, 우리는 저녁과 아침과 낮에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먹습니다. 저녁과 아침과 낮에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먹는 우리는 병이 없고, 아프지 않고, 몸이 가벼워 활력이 있고, 힘 있고, 편안하게 머묾을 압니다. 그런 우리가 왜 눈에 보이는이익을 버리고 시가의 제약을 받는 것을 따르겠습니까? 우리는 저녁과 아침과 낮에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먹을 것입니다.'라고.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를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세존께 이 사실을 말씀드립니다."라고.

 

176. 그러자 세존께서는 어떤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오라, 비구여. 그대는 내 이름으로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에게 말하라. '스승께서 존자들을 부릅니다.'라고."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그 비구는 세존께 대답하고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승께서 존자들을 부릅니다."라고.

"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는 그 비구에게 대답한 뒤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많은 비구들이 그대들에게 가서 도반들이여, 세존과 비구 승가는 오직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습니다. 도반들이여,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으면 병이 없고, 아프지 않고, 몸이 가벼워 활력이 있고, 힘 있고, 편안하게 머묾을 압니다. 오십시오, 도반들이여, 그대들도 오직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으십시오. 도반들이여,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는 그대들도 병이 없고, 아프지 않고, 몸이 가벼워 활력이 있고, 힘 있고, 편안하게 머묾을 알 것입니다.'라고 이렇게 말했고, 이렇게 말했을 때,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그 비구들에게 '도반들이여, 우리는 저녁과 아침과 낮에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먹습니다. 저녁과 아침과 낮에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먹는 우리는 병이 없고, 아프지 않고, 몸이 가벼워 활력이 있고, 힘 있고, 편안하게 머묾을 압니다. 그런 우리가 왜 눈에 보이는 이익을 버리고 시간의 제약을 받는 것을 따르겠습니까? 우리는 저녁과 아침과 낮에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먹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이 사실인가?"라고.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177.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경험하는 이 사람은 누구든지 불선법들은 줄어들고 선법들은 증장한다.'라고 법을 설했다고 생각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런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들은 증장하고 선법들은 줄어 들고, 이런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는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들은 줄어들고 선법들은 증장하고, 이런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는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들은 증장하고 선법들은 줄어 들고, 이런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들은 줄어들고 선법들은 증장하고, 이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들은 증장하고 선법들은 줄어들고, 이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들은 줄어 들고 선법들은 증장한다.'라고 나에 의해 설해진 이런 법을 아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첫 번째 즐거운 느낌은 재가에 바탕한 기쁨(gehassita-somanassa)에 의한 것이고, 후자는 출가에 바탕한 기쁨(nekkhammasita-somanassa)에 의한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다음에 나타나는 [괴로운 느낌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각각 재가와 출가에 바탕한 슬픔과 평온에 의한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MA.ii.187)  

 

178. "훌륭하고 훌륭하다, 비구들이여! 비구들이여, 만약 '이런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들은 증장하고 선법들은 줄어든다.'라고 내가 지혜로써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했다면, 그렇게 알지 못하는 내가 '이런 즐거운 느낌을 버려야 한다.'라고 말하겠는가? 비구들이여, 이것이 나에게 타당한 일이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런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들은 증장하고 선법들은 줄어든다.'라고 내가 지혜로써 알고 보고 경험하고 실현하고 성취했기 때문에 '이런 즐거운 느낌을 버려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만약 '이런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들은 줄어들고 선법들은 증장한다.'라고 내가 지혜로써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했다면, 그렇게 알지 못하는 내가 '이런 즐거운 느낌을 성취하여 머물러야 한다.'라고 말하겠는가? 비구들이여, 이것이 나에게 타당한 일이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런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들은 줄어들고 선법들은 증장한다.'라고 내가 지혜로써 알고, 보고, 경험하고, 실현하고, 성취했기 때문에 '이런 즐거운 느낌을 성취하여 머물러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179. 비구들이여, 만약 '이런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들은 증장하고 선법들은 줄어든다.'라고 내가 지혜로써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했다면, 그렇게 알지 못하는 내가 '이런 괴로운 느낌을 버려야 한다.'라고 말하겠는가? 비구들이여, 이것이 나에게 타당한 일이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런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들은 증장하고 선법들은 줄어든다.'라고 내가 지혜로써 알고, 보고, 경험하고, 실현하고, 성취했기 때문에 '이런 괴로운 느낌을 버려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만약 '이런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들은 줄어들고 선법들은 증장한다.'라고 내가 지혜로써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했다면, 그렇게 알지 못하는 내가 '이런 괴로운 느낌을 성취하여 머물러야 한다.'라고 말하겠는가? 비구들이여, 이것이 나에게 타당한 일이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런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들은 줄어들고 선법들은 증장한다.'라고 내가 지혜로써 알고, 보고, 경험하고, 실현하고, 성취했기 때문에 '이런 괴로운 느낌을 성취하여 머물러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180. 비구들이여, 만약 '이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들은 증장하고 선법들은 줄어든다.'라고 내가 지혜로써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했다면, 그렇게 알지 못하는 내가 '이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버려야 한다.'라고 말하겠는가? 비구들이여, 이것은 나에게 타당한 일이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들은 증장하고 선법들은 줄어든다.'라고 내가 지혜로써 알고, 보고, 경험하고, 실현하고, 성취했기 때문에 '이러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버려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만약 '이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들은 줄어들고 선법들은 증장한다.'라고 내가 지혜로써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했다면, 그렇게 알지 못하는 내가 '이러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성취하여 머물여야 한다.'라고 말하겠는가? 비구들이여, 이것이 나에게 타당한 일이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들은 줄어들고 선법들은 증장한다.'라고 내가 지혜로써 알고, 보고, 경험하고, 실현하고, 성취했기 때문에 '이러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성취하여 머물러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181. 비구들이여, 나는 모든 비구들에게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나는 모든 비구들에게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하는 것이 없다.''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비구들이여, 번뇌를 부수고, 청정한 삶을 성취하고,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 윤회의 결박을 끊어 버리고, 올바른 궁극의 지혜에 의해서 해탈한 아라한인 비구들에게, 비구들이여, 나는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하는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들에게 방일하지 않음에 의한 것은 행해졌다. 그들이 방일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구들이여, 아라한과를 얻지 못했지만 위없는 유가안온(瑜伽安穩)을 원하면서 머무는, 유학인 비구들에게, 비구들이여, 나는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적당한 거처를 수용하고 선우들과 사귀며 감각의 근[根]들을 잘 제어하는 이 존자들은 아마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인 그 위없는 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들의 이런 방일하지 않음의 열매를 보는 나는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182.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일곱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무엇이 일곱 인가?

양면으로 해탈[兩面解脫]한 자, 지혜로 해탈[慧解脫]한 자, 몸으로 실현한 자, 견해를 성취한 자, 믿음으로 해탈한 자, 법을 따르는 자, 믿음을 따르는 자이다.

 

*'일곱 부류의 사람들(satta puggala)'은 「인시설론 주석서」(PugA.194-195)에도 잘 설명되어 있는데 이 부분은 본서 「밧달리 경」(M65)에도 나타난다. 

*'이 일곱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서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appamadena karaniya)이 더 이상 없는 사람은 두 부류(양면해탈자와 혜해탈자)이고, 해야 할 일이 남이 있는 사람은 다섯 부류이다. 그리하여 모두 일곱 부류의 사람이 있다.(MA.ii.188)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양면해탈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물질을 초월한 무색계의 평화로운 해탈을 몸으로 실현하여 머물고, 지혜로써 보면서 번뇌들이 다한다. 이런 사람이, 비구들이여, 양면해탈자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비구에게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하는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그들에게 방일하지 않음에 의한 것은 행해졌다. 그들이 방일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양면으로 해탈한 자(ubhato-bhaga-vimutta)'란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해탈한 자이다. 즉 무색계 증득으로 물질의 몸에서 해탈했고, 도를 얻음으로 정신의 몸에서 해탈했다. 네 가지 무색계 증득 가운데 어느 하나에서 출정하여 심리현상들(행.sankhara)을 명상하며 아라한과를 증득한 네 부류의 사람과 상수멸에서 출정하여 아라한과를 얻은 불환자, 이렇게 다섯 부류의 사람이 양면으로 해탈한 자이다.
그러나 「인시설론」(Pug.73)에서는 "어떤 사람이 양면으로 해탈한 자인가? 여기 어떤 사람이 여덟 가지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여 머물고, 또 지혜로써 번뇌들을 보아 그들을 완전히 제거한다'라고 나타난다. 이처럼 「논장」(Abhidhamma)에서는 여덟 가지 해탈을 얻은 것(attha-vimokkha-labhi)으로 설명하고 있다. (MA.ii.188)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혜해탈자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물질을 초월한 무색계의 평화로운 해탈을 몸으로 실현하여 머물지 않지만, 지혜로써 보면서 번뇌들이 다한다. 이런 사람이, 비구들이여, 혜해탈자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비구에게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하는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그들에게 방일하지 않음에 의한 것은 행해졌다. 그들이 방일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혜로 해탈한 자(panna-vimutta)'란 지혜를 닦아 해탈한 자이다. 마른 위빳사나를 닦은 자와 네 가지 색계선에서 출정하여 아라한과를 얻은 네 사람, 이렇게 다섯 부류의 사람이 지혜로 해탈한 자이다. 그러나 인시설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오직 여덟 가지 해탈과 반대되는 것만으로 설명했다. "그는 여덟 가지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머문다. 그러나 지혜로써 번뇌들을 보아 그들을 완전히 제거한다. 이런 사람을 지혜로 해탈한 자라고 한다."(Pug.73)라고."(MA.ii.188)   
마른 위빳사나를 닦은 자(sukkha-vipassaka)란 禪 혹은 삼매의 습기가 없이 위빳사나를 닦은 자를 말하며, 순수 위빳사나를 닦는 자(suddha-vipassaka)라고도 불린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몸으로 실현한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물질을 초월한 무색계의 평화로운 해탈을 몸으로 실현하여 머물고, 지혜로써 보면서 번뇌들의 일부가 다한다. 이런 사람이, 비구들이여, 몸으로 실현한 자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비구들에게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적당한 거처를 수용하고 선우들을 사귀면서 감각의 근들을 잘 제어하는(기능들을 잘 갖춘) 이 존자들은 아마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인 그 위없는 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들의 이런 방일하지 않음의 열매를 보는 나는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감촉하면서(phutthanta) 실현한다(sacchikaroti)'고 해서 '몸으로 체험한 자(kaya-sakkhi)'라 한다. 禪의 감촉(jhana-phassa)에 먼저 닿고 나중에 소멸인 열반을 실현한다. 그는 예류과의 경지를 시작으로 아라한 도의 경지까지 여섯 부류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여기 어떤 자는 여덟 가지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여 머물고 또 지혜로써 번뇌들을 보아 그들의 일부를 제거한다. 이를 일러 몸으로 체험한 자라 한다."(Pug.73)라고.(Ma.iii.188)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견해를 얻은 자(성취한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물질을 초월한 무색계의 평화로운 해탈을 몸으로 실현하여 머물지 못하지만그는 지혜로써 보면서 번뇌들의 일부가 다하고, 여래가 선언한 법들을 지혜로써 충분히 이해하고 꿰뚫는다.' 비구들이여, 이런 사람이, 비구들이여, 견해를 얻은 자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비구들에게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적당한 거처를 사용하고 선우들을 사귀면서 감각의 근들을 잘 제어하는 이 존자들은 아마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인 그 위없는 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들의 이런 방일하지 않음의 열매를 보는 나는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견해를 얻은 자(ditthi-ppatta)'의 간단한 특징은 이렇다. '형성된 것들은 괴로움이고, 소멸은 행복이다.'라고 알고 (nata), 보고(dittha), 체험하고(vidita), 실현하고(sacchikata), 체득한 것(phusita)을 분명하게 안다(pannayati)고 해서 '견해를 얻은 자'이다.

상세하게 설하면 이런 사람도 몸으로 체험한 자처럼 여섯 부류이다. 그러므로 「인시설론」에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여기 어떤 사람이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여래께서 선언하신 가르침들을 지혜로써 잘 보고 바르게 관찰한다. 이런 사람을 일러 견해를 얻은 사람이라 한다."(Pug.74)라고."(MA.ii.188)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해탈한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물질을 초월한 무색계의 평화로운 해탈을 몸으로 실현하여 머물지 못하지만, 지혜로써 보면서 번뇌들의 일부가 다하고, 여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고, 뿌리내리고, 확립되었다.' 이런 사람이, 비구들이여, 믿음으로 해탈한 자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비구들에게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적당한 거처를 수용하고 선우들을 사귀면서 감각의 근들을 잘 제어하는 이 존자들은 아마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인 그 위없는 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들의 이런 방일하지 않음의 열매를 보는 나는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믿음으로 해탈한 자(saddha-vimutta)도 여섯 부류가 된다. 그러므로 인시설론에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여기 어던 사람이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그는 여래께서 선언하신 가르침들을 지혜로써 잘 보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지혜로써 번뇌들을 보고 그들의 일부를 제거한다. 그러나 견해를 증득한 사람처럼 [번뇌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해탈한다.] 그러므로 이 사람을 일러 믿음으로 해탈한 자라 한다."(Pug.74)라고."(MA.ii.189-190) 여기서 [ ] 안의 부분은 아래에서 인용하는 디가 니까야 복주석서의 설명을 참조하여 넣은 것이다. 디가 니까야 복주석서는 '견해를 얻은 사람처럼 번뇌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해탈한다.'라는 이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견해를 얻은 자와 믿음으로 해탈한 자 간에 오염원들을 버림에 다른 점이 있는가? 없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믿음으로 해탈한 자는 견해를 얻지 못하는가? 道가 오는 근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견해를 얻은 자의 경우 道가 나타나서 오염원들을 억압할 때 고통스럽지 않고 힘들이지 않고 어렵지 않게 억압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해탈한 자는 오염원들을 억압할 때 고통스럽고 힘들이고 어렵게 억압하기 때문에 견해를 얻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지혜에 의해서도 차이가 있다. 견해를 얻은 자는 앞의 세 가지 도(예류도부터 일래도까지)의 위빳사나의 지혜가 예리하고 용감하고 밝다. 믿음으로 해탈한 자는 위빳사나 지혜가 예리하지 않고 용감하지 않고 밝지 않기 때문에 그는 견해를 얻지 못한다."(DAT.iii.94)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법을 따르는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물질을 초월한 무색계의 평화로운 해탈을 몸으로 실현하여 머물지 못하지만, 지혜로써 보면서 번뇌들의 일부가 다하고, 여래가 선언한 법들을 지혜로 충분히(웬만큼) 이해한다. 또한, 믿음의 근, 정진의 근, 마음챙김의 근, 삼매의 근, 지혜의 근이라는 이런 법들이 있다.' 이런 사람이, 비구들이여, 법을 따르는 자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비구들에게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적당한 거처를 수용하고 선우들을 사귀면서 감각의 근들을 잘 제어하는 이 존자들은 아마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인 그 위없는 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비구들이여, 이 비구들의 이런 방일하지 않음의 열매를 보는 나는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법을 따르기 때문에 '법을 따르는 자(dhamma-anusari)'이다. 법이란 지혜이다. 지혜를 앞세운 도를 닦는다는 뜻이다. '믿음을 따르는 자(saddhanusari)'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이 둘은 예류도의 경지에 머무는 자들(sotapatti-magga-ttha)이다. 인시설론에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예류과를 실현하기 위해 도닦는 자가 지혜의 기능(pannindriya)이 강하고, 지혜를 가져오고 지혜를 앞세운 성스러운 도를 닦는 자를 법을 따르는 자라고 한다."(Pug.74)라고, 마찬가지로 "예류과를 실현하기 위해 도닦는 자가 믿음의 기능(saddhindirya)이 강하고, 믿음을 가져오고 믿음을 앞세운 성스러운 도를 닦는 자를 믿음을 따르는 자라고 한다."(Pug.74)라고 여기서 설명한 것은 간략한 것이다. 상세한 것은 청정도론의 지혜의 수행 편(panna-bhavanadhikara, Vis.XVII.74-78)에 설명되어 있다."(MA.ii.190-191)   
*"색계 증득 없이는 무색계 증득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 무색계라고 표현했지만 여덟 가지 해탈을 말한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MA.ii.191)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믿음을 따르는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물질을 초월한 무색계의 평화로운 해탈을 몸으로 실현하여 머물지 못하지만, 지혜로써 보면서 번뇌들의 일부가 다하고, 여래에 대한 믿음이 웬만하고(충분하고), 사랑이 웬만하다. 또한 믿음의 근, 정진의 근, 마음챙김의 근, 삼매의 근, 지혜의 근이라는 이런 법들이 있다.' 이런 사람이, 비구들이여, 믿음을 따르는 자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비구들에게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적당한 거처를 사용하고 선우들을 사귀면서 감각의 근들을 잘 제어하는 이 존자들은 아마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인 그 위없는 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들의 이런 방일하지 않음의 열매를 보는 나는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183. 비구들이여, 나는 즉시에 성취되는 궁극의 앎을 말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비구들이여, 점진적인 닦음, 점진적인 성과, 점진적인 실천으로부터 궁극의 앎은 성취된다비구들이여, 어떻게 점진적인 닦음, 점진적인 성과, 점진적인 실천으로부터 궁극의 앎은 성취되는가? 여기, 구들이여, (스승에 대한) 믿음이 생긴 자는 가까이 한다. 가까이 하는 자는 (스승을) 섬긴다. 섬기는 자는 귀를 기울인다. 귀를 기울이는 자는 법을 배운다. 배운 뒤에 법을 명심한다. 명심한 법들의 의미(뜻)를 조사한다. 의미를 조사하는 자에게 법들은 기쁨을 준다. 이 기쁨을 줄 때 열의(관심)가 생긴다. 열의가 생긴 자는 시도한다.도한 뒤에 판단한다. 판단한 뒤에 정진한다. 단호한 의지를 가진 자는 몸으로 궁극의 진리를 실현하고, 혜로써 그것을 꿰뜷어 본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그런 믿음이 없고, 비구들이여, 그런 가까이함도 없고, 비구들이여, 그런 섬김도 없고, 비구들이여, 그런 귀를 기울임도 없고, 비구들이여, 그런 법을 배움도 없고, 비구들이여, 그런 법을 명심함도 없고, 비구들이여, 그런 의미를 조사함도 없었다. 비구들이여, 그런 법은 기쁨을 주지도 않고, 비구들이여, 그런 열의도 생기지 않고, 비구들이여, 그런 시도도 없고, 비구들이여, 그런 판단도 없고, 비구들이여, 그런 정진도 없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잘못된 행동이 있었고,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잘못된 실천이 있었다. 비구들이여, 이 쓸모없는 자들은 이 법과 율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184. 비구들이여. 네 구절로 된 설명이 있다. 그것을 암송할 때, 현자는 오래지 않아 지혜로써 그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대들을 위해 암송할테니,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암송한 것을 이해하도록 하라."

“저희는 누구이고, 세존이시여, 법을 아는 자는 누구입니까?” 

"비구들이여, 세속적인 것(재물)에 관심이 있고, 세속적인 것을 상속받고, 세속적인 것에 애착을 가지고 머무는 스승에게도 '저희가 이렇게 된다면 그것을 하겠습니다. 저희가 이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이렇게 흥정하듯 접근하지 않아야 하는데, 비구들이여, 세속적인 것에서 완전히 벗어난 여래에 대해서야 어떻겠는가(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비구들이여, 믿음을 가진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에 들어갈 때 이런 법이 뒤따라야 한다.

'세존은 스승이시고, 나는 제자이다. 세존께서는 아시고, 나는 알지 못한다.'라고.

비구들이여, 믿음을 가진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에 들어갈 때 스승의 가르침은 용기를 북돋워주고 자양분이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믿음을 가진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에 들어갈 때 이런 법이 뒤따라야 한다.  

'참으로 피부와 힘줄과 뼈만 남고, 몸에서 살과 피가 말라버려라!  남자의 힘과 남자의 정진과 남자의 분발로 얻어야 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정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믿음을 가진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에 들어갈 때 지금·여기에서 궁극의 앎을 성취하거나, 집착이 남아 있다면 불환자의 상태를 성취하는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가 예상된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그 비구들은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

  

 

끼따기리 경이 끝났다.

제7장 비구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