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N 77. 사꿀루다이 긴 경(mahāsakuludāyisuttaṃ)
237.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아주 잘 알려진 많은 유행승들이 모리나와빠에 있는 유행승들의 사원에 거주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안나바라, 와라다라, 사꿀루다이 유행승과 다른 아주 잘 알려진 유행승들이었다.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시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시고 라자가하로 탁발을 가셨다. 탁발을 가시는 도중에 세존께서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라자가하로 탁발을 가는 것은 너무 이르다. 나는 모리나와빠에 있는 유행승들의 사원으로 사꿀루다이 유행승을 만나러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그래서 세존께서는 모리나와빠에 있는 유행승들의 사원으로 가셨다. 그때 사꿀루다이 유행승은 많은 유행승 대중과 함께 시끄럽게 큰 소리로 떠들썩하게, 예를 들면, 왕에 대한 이야기, 도둑에 대한 이야기, 대신에 대한 이야기, 군대에 대한 이야기, 공포에 대한 이야기, 전쟁에 대한 이야기, 음식에 대한 이야기, 음료에 대한 이야기, 의복에 대한 이야기, 침상에 대한 이야기, 화환에 대한 이야기, 향료에 대한 이야기, 친척에 대한 이야기, 탈것에 대한 이야기, 마을에 대한 이야기, 성읍에 대한 이야기, 도시에 대한 이야기, 지방에 대한 이야기, 여자에 대한 이야기, 영웅에 대한 이야기, 거리에 대한 이야기, 우물에 대한 이야기, 전에 죽은 자에 대한 이야기, 잡다한 이야기, 세상에 대한 이야기, 바다에 대한 이야기, 이렇다거나 이렇지 않다는 이야기등 여러 가지 하챦은 이야기를 하면서 앉아 있었다. 사꿀루다이 유행승은 멀리서 오고 있는 세존을 보았다. 본 뒤에 자신의 대중을 정돈시키고 조용히 하도록 했다.
"존자들은 조용히 하십시오. 존자들은 소리를 내지 마십시오. 사문 고따마가 오고 있습니다. 저 존자는 조용함을 좋아하고, 조용함으로 길들여져 있고, 조용함을 칭찬합니다. 만약 우리 대중이 조용한 것을 알면 그가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대중은 조용히 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사꿀루다이 유행승에게로 다가 가셨다. 사꿀루다이 유행승은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십시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잘 오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여기에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이 자리에 앉으십시오."라고.
세존이시여, 이것이 마련된 자리입니다."
세존께서는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사꿀루다이 유행승은 어떤 낮은 자리를 잡아서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사꿀루다이 유행승에게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238. "우다이여, 무슨 이야기를 위해 지금 여기 함께 모여 앉았습니까? 그대들 간에 끝내지 못한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지금 앉아서 하던 이야기에 대해서는 그냥 두십시오. 그 이야기는 세존께서 나중에라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최근에 토론하는 장소에 많은 외도의 사문‧바라문들이 함께 모여 앉았을 때 그들 간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존자들이여, 앙가와 마가다 사람들에게 참으로 이득입니다. 존자들이여, 앙가와 마가다 사람들에게 참으로 큰 이득입니다. 따르는 자들의 무리를 가졌고(승가), 따르는 자들의 주인이고, 스승이고, 잘 알려졌고, 명성을 가졌고, 교단의 창시자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성자로 인정되는 뿌라나 깟사빠도 안거기간 동안 머물기 위해 라자가하에 왔습니다. ··· 막칼리 고살라 ··· 아지따 께사깜발라··· 빠꾸다 깟짜야나··· 산자야 웰랏타뿟따 ··· 따르는 자들의 무리를 가졌고, 따르는 자들의 주인이고, 스승이고, 잘 알려졌고, 명성을 가졌고, 교단의 창시자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성자로 인정되는 니간타 나따뿟따도 안거기간 동안 머물기 위해 라자가하에 왔습니다. 따르는 자들의 무리를 가졌고, 따르는 자들의 주인이고, 스승이고, 잘 알려졌고, 명성을 가졌고, 교단의 창시자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성자로 인정되는 사문 고따마도 안거기간 동안 머물기 위해 라자가하에 왔습니다. 따르는 자들의 무리를 가졌고, 따르는 자들의 주인이고, 스승이고, 잘 알려졌고, 명성을 가졌고, 교단의 창시자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성자로 인정되는 이 사문·바라문 존자들 가운데 누가 자기 제자들에게 존경받고, 존중되고, 숭상되고, 예배받는지 그리고 제자들은 누구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뭅니까?'라고.
*앙가(Anga)는 인도 중원의 16개국 중의 하나였다. 앙가는 마가다의 동쪽에 있으며 짬빠(현재의 바갈뿌르)가 수도였다. 그러나 세존의 시대에 이미 마가다에 편입되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앙가가 독립된 나라로 언급되기보다는 종족이나 지역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본경에서처럼 앙가와 마가다로 함께 언급되어 나타난다.
239. 그때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따르는 자들의 무리를 가졌고, 따르는 자들의 주인이고, 스승이고, 잘 알려졌고, 명성을 가졌고, 교단의 창시자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성자로 인정되는 뿌라나 깟사빠는 제자들에게서 존경받지 못하고, 존중되지 못하고, 숭상되지 못하고, 예배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뿌라나 깟사빠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지 않습니다. 이전에 뿌라나 깟사빠가 수백 명이 모인 자리에서 법을 설했습니다. 그때 뿌라나 깟사빠의 어떤 제자가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자들은 뿌라나 깟사빠에게 그것의 의미를 묻지 마십시오.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우리는 그것을 압니다. 우리에게 그것의 의미를 물어보십시오. 우리가 그것의 의미를 존자들에게 설명하겠습니다.'라고.
그때 뿌라나 깟사빠는 손을 내저으며 '존자들은 조용히 하시오. 존자들은 소리치지 마시오. 저들은 존자들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우리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저들에게 설명할 것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말하였지만 조용히 시키지 못했습니다(설득시키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많은 뿌라나 깟사빠의 제자들은 다음과 같이 그의 교설의 허점을 지적하면서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대는 이 법과 율을 알지 못합니다. 나는 이 법과 율을 압니다. 그대가 이 법과 율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어떻게 그대가 이 법과 율을 제대로 알겠습니까)? 그대는 잘못 실천하는 자이고(그대는 잘못된 길을 닦는 자이고) 나는 바르게 실천하는 자입니다. 나는 일관되지만(나의 말을 일관되지만), 그대는 일관되지 않습니다. 그대는 앞에 말해야 하는 것을 뒤에 말하고, 뒤에 말해야 하는 것을 앞에 말했습니다. 그대가 성취한 것은 파기되었습니다. 그대가 준비한 말은 비난되었습니다(나는 그대의 교설의 허점을 지적했고 그대는 패했습니다). 말을 취소하십시오. 아니면 할 수 있다면 설명해 보십시오.'라고.
이렇게 뿌라나 깟사빠는 제자들에게는 존경받지 못하고 존중되지 못하고 숭상되지 못하고 예배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뿌라나 깟사빠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지 않습니다. 뿌라나 깟사빠는 그의 법에 대한 모욕으로 경멸당했습니다 .
*"어떤 이들은 여행을 떠났고, 어떤 이들은 재가자의 삶으로 되돌아 갔고, 또 어떤 이들은 세존의 밑으로 출가를 하였다."(MA.iii.237)
*'나의 말은 일관된다'는 sahitam me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에서는 "일관된다는 것은 부드럽고(silittha), 의미를 지니고(attha-yutta), 원인을 가졌다(karana-yutta)는 뜻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MA.iii.237)
*"'그대가 성취한 것은 파기되었다(adhicinnam te viparavattam)'는 당신이 오랜 세월 익혀온(digha-ratt-acinna) 훌륭한 학식(suppaguna)은 나의 말 한 마디로 뒤집혔다, 역전되었다, 즉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다."(MA.iii.237)
*"'말을 취소하십시오'는 cara vadappamokkkhaya을 옮긴 것이다. 즉 그대의 이 교설의 허점에서 벗어나고 자유롭기 위해 떠나시오, 행하시오, 여기저기 가서 더 배우시오라는 말이다.(MA.iii.237)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막칼리 고살라는 ··· 아지따 께사깜발라는 ··· 빠꾸다 깟짜야나는 ··· 산자야 웰랏타뿟따는 ··· 따르는 자들의 무리를 가졌고, 따르는 자들의 주인이고, 스승이고, 잘 알려졌고, 명성을 가졌고, 교단의 창시자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성자로 인정되는 니간타 나따뿟따는 제자들에게서 존경받지 못하고, 존중되지 못하고, 숭상되지 못하고, 예배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니간타 나따뿟따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지 않습니다. 이전에 니간타 나따뿟따가 수백 명이 모인 자리에서 법을 설했습니다. 그때 니간타 나따뿟따의 어떤 제자가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자은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그것의 의미를 묻지 마십시오.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우리는 그것을 압니다. 우리에게 그것의 의미를 물어보십시오. 우리가 그것의 의미를 존자들에게 설명하겠습니다.'라고.
그때 니간타 나따뿟따는 손을 내저으며 '존자들은 조용히 하시오. 존자들은 소리치지 마시오. 저들은 존자들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우리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저들에게 설명할 것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말하였지만 조용히 시키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많은 니간타 나따뿟따의 제자들은 다음과 같이 그의 교설을 지적하면서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대는 이 법과 율을 알지 못합니다. 나는 이 법과 율을 압니다. 그대가 이 법과 율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대는 잘못 실천하는 자이고 나는 바르게 실천하는 자입니다. 나는 일관되지만, 그대는 일관되지 않습니다. 그대는 앞에 말해야 하는 것을 뒤에 말하고, 뒤에 말해야 하는 것을 앞에 말했습니다. 그대가 성취한 것은 파기되었습니다. 그대가 준비한 말은 비난되었습니다. 말을 취소하십시오. 아니면 할 수 있다면 설명해 보십시오.'라고.
이렇게 니간타 나따뿟따는 제자들에게는 존경받지 못하고 존중되지 못하고 숭상되지 못하고 예배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니간타 나따뿟따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지 않습니다. 니간타 나따뿟따는 그의 법에 대한 모욕으로 경멸당했습니다.
240.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따르는 자들의 무리를 가졌고, 따르는 자들의 주인이고, 스승이고, 잘 알려졌고, 명성을 가졌고, 교단의 창시자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성자로 인정되는 사문 고다마는 제자들에게 존경받고, 존중되고, 숭상되고, 예배받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사문 고따마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뭅니다. 이전에 사문 고따마가 수백 명이 모인 자리에서 법을 설했습니다. 그때 사문 고따마의 어떤 제자가 기침을 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동료 비구가 그의 무릎을 슬쩍 건드리며, '존자여, 조용히 하십시오. 존자는 소리를 내지 마십시오. 우리의 스승이신 세존께서 법을 설하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문 고따마가 수백 명이 모인 자리에서 법을 설할 때에 사문 고따마의 제자들은 헛기침 소리도 내지 않습니다. 그 대중들은 '세존께서 법을 설하시면 우리는 경청하리라.'라고 기대를 품고 앉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사거리에서 순수한 작은 벌집을 으깨면 많은 사람이 기대를 품고 그 앞에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문 고따마가 수백 명이 모인 자리에서 법을 설할 때 사문 고따마의 제자들은 헛기침 소리도 내지 않습니다. 그 대중들은 '세존께서 법을 설하시면 우리는 그것을 경청하리라.'라고 기대를 품고 앉아 있습니다. 동료 비구들과 말다툼을 하여 청정한 삶을 포기하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간 사문 고따마의 제자들도 스승을 칭송하는 말을 하고 법을 칭송하는 말을 하고 승가를 칭송하는 말을 하고, '우리는 운이 없었다. 우리는 공덕이 없었다. 그런 우리는 이렇게 잘 설해진 법과 율에 출가한 뒤에 목숨이 다할 때까지 온전하게 완전하고 청정한 범행을 실천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라고 자신을 탓하지 남을 탓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승원의 관리자가 되거나 재가 신도가 되어서 오계를 받아 지니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사문 고따마는 제자들에게 존경받고 존중되고 숭상되고 예배받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사문 고따마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뭅니다.' 라고."
241. "그렇다면, 우다이여,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제자들이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게 하는 내가 설한 법을 그대는 몇 가지나 봅니까?"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제자들이 세존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게 하는 다섯 가지 법을 세존에게서 봅니다. 어떤 다섯 가지입니까?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적게 먹고, 적게 먹는 것을 칭찬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적게 먹고 적게 먹는 것을 칭찬하는 것이, 세존이시여, 제가 세존에게서 보는 세존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제자들이 세존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게 하는 첫 번째 법입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어떤 옷으로도 만족하고 어떤 옷으로도 만족하는 것을 칭찬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어떤 옷으로도 만족하고, 어떤 옷으로도 만족하는 것을 칭찬하는 것이, 세존이시여, 제가 세존에게서 보는 세존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제자들이 세존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게 하는 두 번째 법입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어떤 탁발 음식으로도 만족하고, 어떤 탁발 음식으로도 만족하는 것을 칭찬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어떤 탁발 음식으로도 만족하고 어떤 탁발 음식으로도 민족하는 것을 칭찬하는 것이, 세존이시여, 제가 세존에게서 보는 세존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제자들이 세존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게 하는 세 번째 법입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어떤 거처로도 만족하고 어떤 거처로도 만족하는 것을 칭찬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어떤 거처로도 만족하고 어떤 거처로도 만족하는 것을 칭찬하는 것이, 세존이시여, 제가 세존에게서 보는 세존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제자들이 세존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게 하는 네 번째 법입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홀로 머물며 홀로 머무는 것을 칭찬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홀로 머물며 홀로 머무는 것을 칭찬하는 것이, 세존이시여, 제가 세존에게서 보는 세존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제자들이 세존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게 하는 다섯 번째 법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제자들이 세존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게 하는 이런 다섯 가지 법을 세존에게서 봅니다."
242. "만약에, 우다이여,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제자들이 '사문 고따마는 적게 먹고 적게 먹는 것을 것을 칭찬한다.'라는 것에 의해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 것이라면. 우다이여, 한 컵(공기)의 음식을 먹거나, 컵의 절반의 음식을 먹거나, 빌바 나무 열매 한 개 정도의 음식을 먹거나, 빌바 나무 열매 절반 정도의 음식을 먹는 나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더구나, 우다이여, 나는 때때로 이 발우 가득 음식을 먹기도 하고, 더 먹기도 합니다. 만약에 우다이여,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제자들이 '사문 고따마는 적게 먹고 적게 먹는 것을 칭찬한다.'라는 것에 의해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 것이라면, 우다이여, 한 컵의 음식을 먹거나 컵의 절반의 음식을 먹거나 빌바 나무 열매 한 개 정도의 음식을 먹거나 빌바 나무 열매 절반 정도의 음식을 먹는 나의 제자들은 이것에 의해서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지 않을 것이며,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다이여,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제자들이 '사문 고따마는 어떤 옷으로도 만족하고 어떤 옷으로도 만족하는 것을 칭찬한다.'라는 것에 의해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 것이라면, 우다이여, 분소의만을 입고 낡고 허럼한 옷만을 입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공동묘지에 버리거나 쓰레기더미에 버리거나 가게에서 버린 천 조각을 주워서 누더기 가사를 만들어 입습니다. 더구나, 우다이여, 나는 때때로 튼튼하고 부드러운 실로 잘 만든 옷을 장자들로부터 받습니다. 만약에 우다이여,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제자들이 '사문 고따마는 어떤 옷으로도 만족하고 어떤 옷으로도 만족하는 것을 칭찬한다.'라는 것에 의해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것이라면, 우다이여, 분소의만을 입고 낡고 허럼한 옷만을 입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공동묘지에 버리거나 쓰레기더미에 버리거나 가게에서 버린 천 조각을 주워서 누더기 가사를 만들어 입는 나의 제자들은 이것에 의해서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지 않을 것이며,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다이여,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제자들이 '사문 고따마는 어떤 탁발 음식으로도 만족하고, 어떤 탁발 음식으로도 만족하는 것을 칭찬한다.'라는 것에 의해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 것이라면, 우다이여, 탁발 음식만 수용하고, 집집마다 차례대로 탁발하고, 먹을 것을 위해 이삭을 모으면서도 기뻐하는 나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집안에 들어갔을 때 자리에 앉으라는 초청을 받더라도 응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우다이여, 나는 때때로 초청을 받아 좋은 쌀로 지은 밥과 여러 가지 국과 여러 반찬들을 먹습니다. 만약에, 우다이여,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제자들이 '사문 고따마는 어떤 탁발 음식으로도 만족하고 어떤 탁발 음식으로도 만족하는 것을 칭찬한다.'라는 것에 의해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 것이라면, 우다이여, 탁발 음식만 수용하고 집집마다 차례대로 탁발하고, 탁발음식을 얻는 의무에 기뻐하고, 집안에 들어갔을 때 자리에 앉으라는 초청을 받더라도 응하지 않는 나의 제자들은 이것에 의해서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지 않을 것이며,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먹을 것을 위해 이삭을 모으며'는 ucchepake vate rata를 옮긴 것이다. 음식을 얻는 임무에 기뻐한다는 말이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삭을 줍는 행위라고 불리는(unch-acariya-sankhata) 비구들의 본연의 의무에 기뻐한다는 뜻이다. 높거나 낮은 대문에 서서 잡곡밥 또는 밥을 얻어 수용한다는 말이다.(MA.iii.240)
만약에, 우다이여,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제자들이 '사문 고따마는 어떤 거처로도 만족하고 어떤 거처로도 만족하는 것을 칭찬한다.'라는 것에 의해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 것이라면, 우다이여, 오직 나무 아래 머물고, 빈 장소에 머무는 나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 년 중] 여덟 달 동안을 지붕 아래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구나, 우다이여, 나는 때때로 안팎으로 회반죽이 잘 칠해졌고 바람막이가 잘 되었으며 빗장이 채워졌고 창문이 닫힌 뾰족지붕의 저택에 머뭅니다. 만약에 우다이여,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제자들이 '사문 고따마는 어떤 거처로도 만족하고 어떤 거처로도 만족하는 것을 칭찬한다.'라는 것에 의해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 것이라면, 우다이여, 오직 나무 아래 머물고, 빈 장소에 머물고 여덟 달 동안을 지붕 아래 들어가지 않는 나의 제자들은 이것에 의해서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지 않을 것이며,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다이여,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제자들이 '사문 고따마는 홀로 머물고 홀로 머무는 것을 칭찬한다.'라는 것에 의해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 것이라면, 우다이여, 오직 숲 속에 머물고 깊은 숲 속과 외딴 거처에 머무는 나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계목의 암송을 위해 보름에 한 번씩 승가에 옵니다. 더구나 우다이여, 나는 때때로 비구들이나 비구니들이나 청신사들이나 청신녀들이나 왕들이나 왕의 대신들이나 이교도들이나 이교도의 제자들과 함께 머뭅니다. 만약에 우다이여,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항하고 예배하는 제자들이 '사문 고따마는 홀로 머물고 홀로 머무는 것을 칭찬한다.'라는 것에 의해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 것이라면, 우다이여, 오직 숲 속에 머물고 깊은 숲 속과 외딴 거처에 머물면서 계목의 암송을 위해 보름에 한 번씩 승가에 오는 나의 제자들은 이것에 의해서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지 않을 것이며,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다이여,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제자들은 이런 다섯 가지 법들에 의해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지 않습니다.
243. 우다이여,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나의 제자들이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게 하는 다른 다섯 가지 법들이 있습니다. 어떤 다섯 가지입니까?
여기, 우다이여, 나의 제자들은 '사문 고따마는 계를 중시하는 자여서 최상의 계의 무더기[계온.戒蘊]를 갖추었다.'라고 높은 계 때문에 나를 존경합니다. 우다이여, 나의 제자들이 '사문 고따마는 계를 중시하는 자여서 최상의 계의 무더기를 갖추었다.'라고 높은 계 때문에 존경하는 것이, 우다이여,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나의 제자들이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게 하는 첫 번째 법입니다.
244. 다시 우다이여, 나의 제자들은 '사문 고따마는 오직 아는 것에 대해 '나는 안다'라고 말하고, 사문 고따마는 오직 보는 것에 대해서 '나는 본다'라고 말한다. 사문 고따마는 있는 그대로 알면서 법을 설하지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면서 법을 설하지 않는다. 사문 고따마는 인연(원인)과 함께 법을 설하지 인연(원인) 없이 법을 설하지 않는다. 사문 고따마는 비범한 법을 설하지 평범한 법을 설하지 않는다.'라고 뛰어난 지(知)와 견(見) 때문에 존경합니다. 우다이여, 나의 제자들이 '사문 고따마는 오직 아는 것에 대해 '나는 안다'라고 말하고, 사문 고따마는 오직 보는 것에 대해서 '나는 본다'라고 말한다. 사문 고따마는 있는 그대로 알면서 법을 설하지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면서 법을 설하지 않는다. 사문 고따마는 인연(원인)과 함께 법을 설하지 인연 없이 법을 설하지 않는다. 사문 고따마는 비범한 법을 설하지 평범한 법을 설하지 않는다.'라고 뛰어난 지(知)와 견(見) 때문에 존경하는 것이, 우다이여,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나의 제자들이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게 하는 두 번째 법입니다.
245. 다시 우다이여, 나의 제자들은 '사문 고따마는 지혜로운 자여서 최상의 지혜의 무더기[혜온.慧蘊]를 갖추었다. 그가 미래에 생길 논쟁의 쟁점을 예견하지 못한다거나 현재에 통용되는 다른 사람의 교설을 이치에 맞게 논파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라고 나의 최상의 지혜 때문에 나를 존경합니다. 우다이여,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나의 제자들이 내가 말하는 도중에 끼어들어 방해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리고, 우다이여, 나는 제자들에 대해 가르침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제자들은 나에게서 가르침을 기대합니다. 우다이여, 나의 제자들이 '사문 고따마는 지혜로운 자여서 최상의 지혜의 무더기를 갖추었다. 그가 미래에 생길 논쟁의 쟁점을 예견하지 못한다거나 현재에 통용되는 다른 사람의 교설을 이치에 맞게 논파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라고 최상의 지혜 때문에 존경하는 것이, 우다이여,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나의 제자들이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게 하는 세 번째 법입니다.
246. 다시 우다이여, 어떤 괴로움에 의해 괴로움에 짓눌리고 괴로움에 시달리는 나의 제자들은 나에게 와서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질문합니다. 질문받은 나는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설명합니다. 질문에 관해 설명함으로써 나는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그들은 나에게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를 ···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를 ···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를 질문합니다. 질문받은 나는 그들에게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를 설명합니다. 질문에 관해 설명함으로써 나는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어떤 괴로움에 의해 괴로움에 짓눌리고 괴로움에 시달리는 나의 제자들은 나에게 와서 괴로움 성스러운 진리를 질문합니다. 질문받은 나는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설명합니다. 질문에 관해 설명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그들은 나에게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를 ···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를 ···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를 질문합니다. 질문받은 나는 그들에게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를 설명합니다. 질문에 관해 설명함으로써 나는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라는 이것이, 우다이여,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나의 제자들이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물게 하는 네 번째 법입니다.
247. 다시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닦음이 있습니다. 닦음의 방법에 따라 나의 제자들은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사념처.四念處]을 닦습니다.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이어 보면서) 보면서 머뭅니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뭅니다. 비구는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머뭅니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뭅니다. 비구는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머뭅니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뭅니다. 비구는 법에서 법을 따라가며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뭅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의 많은 제자들은 완전한 지혜의 완성과 성취를 이루어 머뭅니다.
다시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닦음이 있습니다. 닦음의 방법에 따라 나의 제자들은 네 가지 바른 노력[사정근.四正勤]를 닦습니다.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을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바램을 일으키고 노력하며 정진을 행합니다. 마음을 잡아 힘씁니다. 비구는 이미 생겨난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을 끊기 위하여 바램을 일으키고 노력하며 정진을 행합니다. 마음을 잡아 힘씁니다. 비구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한 법을 생겨나게 하기 위하여 바램을 일으키고 노력하며 정진을 행합니다. 마음을 잡아 힘씁니다. 비구는 이미 생겨난 선한 법을 바로 세우고, 혼란스럽지 않게 하며, 증장하고, 풍성케 하며, 닦고,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 바램을 일으키고 노력하며 정진을 행합니다. 마음을 잡아 힘씁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의 많은 제자들은 완전한 지혜의 완성과 성취를 이루어 머뭅니다.
다시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실천이 있습니다. 닦음의 방법에 따라 나의 제자들은 네 가지 신통의 요소[사여의족.四如意足]를 닦습니다.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바램에 의한 삼매와 노력을 통해 형성되는 신통의 요소(성취수단)을 닦습니다. 비구는 정진에 의한 삼매와 노력을 노력을 통해 형성되는 신통의 요소를 닦습니다. 비구는 마음의 삼매와 노력을 노력을 통해 형성되는 신통의 요소를 닦습니다. 비구는 관찰에 의한 삼매와 노력을 노력을 통해 형성되는 신통의 요소를 닦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의 많은 제자들은 완전한 지혜의 완성과 성취를 이루어 머뭅니다.
다시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닦음이 있습니다. 닦음의 방법에 따라 나의 제자들은 다섯 가지 근(기능)[오근.五根]을 닦습니다.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믿음의 근을 닦습니다. 비구는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정진의 근을 닦습니다. 비구는고요함으로 인도하고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마음챙김의 근을 닦습니다. 비구는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삼매의 근을 닦습니다. 비구는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지혜의 근을 닦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의 많은 제자들은 완전한 지혜의 완성과 성취를 이루어 머뭅니다.
다시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닦음이 있습니다. 닦음의 방법에 따라 나의 제자들은 다섯 가지 힘[오력.五力]을 닦습니다.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믿음의 힘을 닦습니다. 비구는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정진의 힘을 닦습니다. 비구는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마음챙김의 힘을 닦습니다. 비구는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삼매의 힘을 닦습니다. 비구는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지혜의 힘을 닦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의 많은 제자들은 완전한 지혜의 완성과 성취를 이루어 머뭅니다.
*본경에서처럼 경전 여러 곳에서는 다섯 가지 기능(panca indriya)과 다섯 가지 힘(panca bala)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구성요소는 같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상윳따 니까야」 제5권 「사께따 경」(S48.43)에서는 "다섯 가지 기능이 다섯 가지 힘이 되고 다섯 가지 힘이 다섯 가지 기능이 된다."고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말씀은 기능과 힘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주석서는 이 둘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확신(adhimokkha)을 특징으로 하는 것에 대해서 통제를 한다는 뜻에서 '믿음의 기능'이라 하고, 불신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믿음의 힘'이라 한다. 나머지들은 각각 분발(paggaha)과 확립(upatthana)과 산란하지 않음(avikkhepa)과 꿰뚫어 앎(pajanana)을 특징으로 하는 것에 대해서 통제를 한다는 뜻에서 '기능'이 되고, 각각 게으름(kosajja)과 마음챙김을 놓아버림(muttha-sacca)과 산란함(vikkhepa)과 무명(avijja)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힘'이 된다고 알아야 한다."(SA.iii.247)
다시 정리해 보면, 믿음은 확신 등의 측면에서 보면 믿음의 기능이 되고 불신에 흔들리지 않는 측면에서 보면 믿음의 힘이 된다. 정진은 분발하는 측면에서 보면 정진의 기능이 되고 게으름에 흔들리지 않는 측면에서 보면 정진의 힘이 된다. 마찬가지로 마음챙김을 놓아 버림에 흔들리지 않는 측면에서 각각 마음챙김의 기능과 마음챙김의 힘이 되고, 산란하지 않음과 산란함에 흔들리지 않는 측면에서 각각 삼매의 기능과 삼매의 힘이 되고, 꿰뚫어 앎과 무명에 흔들리지 않는 측면에서 지혜의 기능과 지혜의 힘이 된다. 이렇게 기능과 힘을 구분하는 것이 아비담마의 정설이다.
그래서 「아비담마 길라잡이」에서는 "기능들은 그 각각의 영역에서 지배하는 요소들이고 힘들은 반대되는 것들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고 이들과 함께하는 법들을 강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닦음이 있습니다. 닦음의 방법에 따라 나의 제자들은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七覺支]를 닦습니다.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분리됨에 의지하고 탐욕의 떠남에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내놓음)으로 기우는 마음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念覺支.염각지]를 닦습니다. ··· 법의 간택으로(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擇法覺支.택법각지]를 ···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精進覺支]를 ···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喜覺支.희각지]를 ··· 고요함(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輕安覺支.경안각지]소를 ···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定覺支.정각지]를 ··· 비구는 분리됨에 의지하고 탐욕의 떠남에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捨覺支.사각지]를 닦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의 많은 제자들은 완전한 지혜의 완성과 성취를 이루어 머뭅니다.
다시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닦음이 있습니다. 닦음의 방법에 따라 나의 제자들은 성스러운 팔정도(八正道)를 닦습니다.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바른 견해[正見]을 닦습니다. 바른 사유를 닦습니다. 바른 말을 닦습니다. 바른 행위를 닦습니다. 바른 생계를 닦습니다. 바른 정진을 닦습니다. 바른 마음챙김을 닦습니다. 바른 삼매를 닦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의 많은 제자들은 완전한 지혜의 완성과 성취를 이루어 머뭅니다.
*이상 본경에 나타나는 ①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사념처.四念處) ②네 가지 바른 노력(사정근.四正勤) ③네 가지 신통의 요소(사여의족.四如意足) ④다섯 가지 기능(오근.五根) ⑤다섯 가지 힘(오력.五力) ⑥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칠각지.七覺支) ⑦성스러운 팔정도(팔정도.八正道)의 일곱 가지 주제는 37가지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菩提分法.보리분법.bodhipakkhiya dhamma)로 불린다. 이것은 우리에게 37보리분법이나 37조도품(助道品)으로 잘 알려진 것이다. 이 일곱 가지 주제에 포함된 법들을 다 합하면 37가지가 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이를 37보리분법이라 불렸다.
248. 다시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닦음이 있습니다. 닦음의 방법에 따라 나의 제자들은 여덟 가지 해탈[八解脫]을 닦습니다.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빛깔(의 영상을) 지니고서 빛깔을 봅니다. 이것이 첫 번째 해탈입니다. 비구는 안으로 빛깔에 대한 지각(인식)을 지니지 않은 상태에서 밖으로 빛깔을 봅니다. 이것이 두 번째 해탈입니다. 비구는 지극히 깨끗하다(청정하다)고 확신합니다. 이것이 세 번째 해탈입니다. 비구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 머뭅니다. 이것이 네 번째 해탈입니다. 비구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뭅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 해탈입니다. 비구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뭅니다. 이것이 여섯 번째 해탈입니다. 비구는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 머뭅니다. 이것이 일곱 번째 해탈입니다. 비구는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머뭅니다. 이것이 여덟 번째 해탈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의 많은 제자들은 완전한 지혜의 완성과 성취를 이루어 머뭅니다.
*"'빛깔의 영상을 지니고서 빛깔을 봅니다(색계의 존재로써 형색을 본다. rupi rupani passati)'고 하셨다. 여기서 자신의 머리털 등에서 파란색 까시나 등을 통해 일어난 색계선(rupa-jjhana)을 'rupa(색)'라 부르고, 그것을 가진 자를 'rupi(색을 가진 자)'라고 한다. 밖으로도 파란 까시나 등의 물질을 禪의 눈으로 본다. 이것은 안과 밖의 대상인 까시나에 대해 禪이 일어난 사람의 색계 4종(cattari rupa-avaccara-jjhanani)을 설하신 것이다."(AA.iv.146)
*"해탈(vimokkha)은 무슨 뜻에서 해탈이라 하는가? 벗어남(adhimuccana)의 뜻에서 해탈이라 한다. 그러면 이 '벗어남의 뜻'이란 무엇인가? 반대되는 법들로부터 잘 버서난다는 뜻이며 대상을 즐기는 것을 잘 벗어난다는 뜻이다. 아버지의 무릎에서 사지를 늘어뜨리고 잠든 어린아이처럼 거머쥐고 있지 않은 상태로 어떠한 의심도 없이 대상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설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뜻은 맨 마지막의 여덟 번째 해탈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처음 일곱 가지에만 있다."(DA.ii.512-13)
"벗어남의 뜻은 상수멸이라는 이 마지막 여덟 번째 해탈에는 없다. 이 여덟 번째 해탈에는 다만 해탈했음의 뜻(vimuttattha)만이 적용된다."(DAT.ii.153)
즉 상수멸은 마음과 마음부수 모두가 소멸된 경지이므로 반대되는 법들이니 대상이니 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남이라는 해탈의 뜻은 적용되지 않고 오직 해탈했음이라는 근본적인 뜻만이 적용된다는 말이다.
*안으로 빛깔에 대한 인식이 없다(ajjhattam arupa-sanni)'는 것은 자신의 머리털 등에서 색계선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밖에서 준비를 하여 오직 밖에서 선이 일어난 사람의 색계선을 설하신 것이다."(AA.iv.146)
*"'깨끗하다고 확신한다(subhantveva adhimutto hoti)'는 것은 이런 아주 청정한 푸른색 등의 색깔의 까시나들에 대한 禪들을 보이신 것이다. 비록 본 삼매 안에서는 깨끗하다는 생각이 없지만 청정하고 깨끗한 까시나를 대상으로 삼아 머무는 자에게는 깨끗하다고 확신한다는 설명이 적용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무애해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떻게 개끗하다고 확신한다고 해서 해탈인가? 여기 비구는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문다. ··· 자애를 닦았기 때문에 중생들이 혐오스럽지 않다. 연민이 함께한 마음으로 ··· 기뻐함이 함께한 마음으로 ··· 평정이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문다. 평정을 닦았기 때문에 중생들이 혐오스럽지 않다. 이와 같이 깨끗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해탈이다."라고.(MA.iii.256)
한편 「무애해도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깨끗하다'라고 대상에 대해서 확신한다. 비록 본삼매 안에서는 깨끗하다는 생각이 없지만 혐오스러움이 없는 특징으로 중생이라는 대상을 확장하면서 머무는 자는 깨끗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PsA.iii.552)
249. 다시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닦음이 있습니다. 닦음의 방법에 따라 나의 제자들은 여덟 가지 지배의 경지[팔승처.八勝處]를 닦습니다. 어떤 자는 안으로 형색[色]을 인식하면서, 밖으로 형색들을 봅니다. 그 형색들은 제한된 것이고 곱거나 혹은 흉한 것이다. 이들을 지배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고 이렇게 인식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지배의 경지입니다.
어떤 자는 안으로 형색을 인식하면서 밖으로 형색들을 봅니다. 그 형색들은 무량한 것이고 곱거나 혹은 흉한 것입니다. 이것들을 지배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고 이렇게 인식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지배의 경지입니다.
어떤 자는 안으로 형색을 인식하지 않으면서, 밖으로 형색들을 봅니다. 그 형색들은 제한된 것이고 곱거나 혹은 흉한 것입니다. 이들을 지배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고 이렇게 인식합니다. 이것이 세 번째 지배의 경지입니다.
어떤 자는 안으로 형색을 인식하지 않으면서, 밖으로 형색들을 봅니다. 그 형색들은 무량한 것이고 곱거나 혹은 흉한 것입니다. 이것들을 지배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고 이렇게 인식합니다. 이것이 네 번째 지배의 경지입니다.
어떤 자는 안으로 형색을 인식하지 않으면서, 밖으로 형색들을 봅니다. 그것은 푸르고 푸른색이며 푸르게 보이고, 푸른빛을 발합니다. 마치 아마 꽃이 푸르고 푸른색이며 푸르게 보이고, 푸른빛을 발하는 것처럼, 마치 양면이 모두 부드러운 바라나시 옷감이 푸르고 푸른색이며 푸르게 보이고, 푸른빛을 발하는 것처럼 어떤 자는 안으로 형색을 인식하지 않으면서, 밖으로 형색들을 봅니다. 그것은 푸르고 푸른색이며 푸르게 보이고, 푸른빛을 발한다. 이것들을 지배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고 이렇게 인식합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 지배의 경지입니다.
어떤 자는 안으로 형색을 인식하지 않으면서, 밖으로 형색들을 봅니다. 그것은 노랗고 노란색이며, 노랗게 보이고, 노란빛을 발합니다. 마치 깐니까라 꽃이 노랗고 노란색이며, 노랗게 보이고, 노란빛을 발하는 것처럼, 마치 양면이 모두 부드러운 바라나시 옷감이 노랗고 노란색이며, 노랗게 보이고, 노란빛을 발하는 것처럼 어떤 자는 안으로 형색을 인식하지 않으면서, 밖으로 형색들을 봅니다. 그것은 노랗고 노란색이며, 노랗게 보이고, 노란빛을 발한다. 이것들을 지배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고 이렇게 인식합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지배의 경지입니다.
어떤 자는 안으로 형색을 인식하지 않으면서, 밖으로 형색들을 봅니다. 그것은 빨갛고 빨간색이며 빨갛게 보이고, 빨간빛을 발합니다. 마치 월계화가 빨갛고 빨간색이며 빨갛게 보이고, 빨간빛을 발하는 것처럼, 마치 양면이 모두 부드러운 바라나시 옷감이 빨갛고 빨간색이며 빨갛게 보이고, 빨간빛을 발하는 처럼 어떤 자는 안으로 형색을 인식하지 않으면서, 밖으로 형색들을 봅니다. 그것은 빨갛고 빨간색이며 빨갛게 보이고, 빨간빛을 발한다. 이것들을 지배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고 이렇게 인식합니다. 이것이 일곱 번째 지배의 경지입니다.
어떤 자는 안으로 형색을 인식하지 않으면서, 밖으로 형색들을 봅니다. 그것은 희고 흰색이며 희게 보이고, 흰빛을 발합니다. 마치 샛별이 희고 흰색이며 희게 보이고, 흰빛을 발하는 것처럼, 마치 양면이 모두 부드러운 바라나시 옷감이 희고 흰색이며 희게 보이고, 흰빛을 발하는 것처럼 어떤 자는 안으로 형색을 인식하지 않으면서, 밖으로 형색들을 봅니다. 그것은 희고 흰색이며 희게 보이고, 흰빛을 발합니다. 이것들을 지배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고 이렇게 인식합니다. 이것이 여덟 번째 지배의 경지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의 많은 제자들은 완전한 지혜의 완성과 성취를 이루어 머뭅니다.
*"'지배의 경지(abhibhayatana)'라 하셨는데, 무엇을 지배하는가? 반대되는 법들(paccanika-dhamma)과 대상(arammana)들을 지배한다. 반대되는 법들은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방법으로써, 대상들은 사람의 더 높은 지혜로써 지배한다."(MA.iii.257)
250. 다시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닦음이 있습니다. 닦음의 방법에 따라 나의 제자들은 열 가지 까시나의 장소를 닦습니다. 어떤 자는 위로 아래로 옆으로 둘이 아니며 제한이 없는 땅의 까시나를 인식합니다. 어떤 자는 위로 아래로 옆으로 둘이 아니며 제한이 없는 물의 까시나를 인식합니다. 어떤 자는 위로 아래로 옆으로 둘이 아니며 제한이 없는 바람의 까시나를 인식합니다. 어떤 자는 위로 아래로 옆으로 둘이 아니며 제한이 없는 푸른색의 까시나를 인식합니다. 어떤 자는 위로 아래로 옆으로 둘이 아니며 제한이 없는 노란색의 까시나를 인식합니다. 어떤 자는 위로 아래로 옆으로 둘이 아니며 제한이 없는 빨간색의 까시나를 인식합니다. 어떤 자는 위로 아래로 옆으로 둘이 아니며 제한이 없는 흰색의 까시나를 인식합니다. 어떤 자는 위로 아래로 옆으로 둘이 아니며 제한이 없는 허공의 까시나를 인식합니다. 어떤 자는 위로 아래로 옆으로 둘이 아니며 제한이 없는 의식의 까시나를 인식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의 많은 제자들은 완전한 지혜의 완성과 성취를 이루어 머뭅니다.
*"'둘이 아니라는 것(advaya)'은 땅의 까시나 등 여러 까시나 가운데서 하나가 다른 상태로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물에 들어간 사람에게 사방이 모두 물뿐이요 다른 것은 없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오직 땅의 까시나만 있을 뿐이지 다른 까시나가 섞이지 못한다. 이것은 다른 까시나에도 다 적용된다."(AA.v.20)
*"'제한이 없음(appamana)'이란 그 까시나를 확장함에 제한이 없음을 말한다. 마음으로 그것을 확장할 때 전체적으로 하는 것이지 '이것은 처음이고 이것은 중간이다'라고 한계를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AA.v.20) 덧붙여 복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음으로 확장한다(cetasa pharanta)는 것은 닦은 마음으로 대상을 확장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닦은 마음은 까시나가 제한적이건 광대하건 전체적으로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지, 일부분만 집중하지 않기 때문이다."(AAT.iii.321)
251. 다시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닦음이 있습니다. 닦음의 방법에 따라 나의 제자들은 네 가지 선(禪)을 닦습니다.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뭅니다. 그는 분리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 몸을 충만하게 하고 흘러 넘치게 하고 가득차게 하고 고루 미치게 합니다. 온 몸 어디라도 분리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우다이여, 목욕을 하고자 하는 자가 청동판에 비누 분말을 흩어놓고 물을 반복해서 뿌려가면서 반죽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비누 분말에 물기가 흡수되고 스며들어 안팎으로 물기가 미치고 흘러 보내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우다이여, 비구는 분리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 몸을 충만하게 하고 흘러 넘치게 하고 가득차게 하고 고루 미치게 합니다. 온 몸 어디라도 분리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뭅니다. 그는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 몸을 충만하게 하고 흘러 넘치게 하고 가득차게 하고 고루 미치게 합니다. 온 몸 어디라도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우다이여, 밑바닥에서 물이 샘솟는 호수가 있습니다. 그 호수에는 동쪽에서 흘러 들어오는 물도 없고, 서쪽에서 흘러들어오는 물도 없고, 북쪽에서 흘러들어오는 물도 없고, 남쪽에서 흘러들어오는 물도 없으며, 또 하늘에서 때때로 비도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호수 밑바닥에서 차가운 물이 솟아올라 그 호수를 차가운 물로 충만하게 하고 흘러 넘치게 하고 가득차게 하고 고루 미치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다이여, 비구는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 몸을 충만하게 하고 흘러 넘치게 하고 가득차게 하고 고루 미치게 한다. 온 몸 어디라도 분리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뭅니다. 그는 기쁨이 사라진 즐거움으로 이 몸을 충만하게 하고 흘러 넘치게 하고 가득차게 하고 고루 미치게 합니다. 온 몸 어디라도 기쁨이 사라진 즐거움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우다이여,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이 피어 있는 호수에 어떤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들이 물속에서 생기고 자라서 물 밖으로 나오지 않고 물속에 잠긴 채 무성하게 어우러져 있는데, 차가운 물들이 그 꽃들을 꼭대기에서 뿌리까지 충만하게 하고 흘러넘치게 하고 가득차게 하고 고루 미치게 합니다. 그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의 전체 어디라도 차가운 물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이렇게, 우다이여, 비구는 기쁨이 사라진 즐거움으로 이 몸을 충만하게 하고 흘러 넘치게 하고 가득차게 하고 고루 미치게 합니다. 온 몸 어디라도 기쁨이 사라진 즐거움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여기, 우다이여,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 머뭅니다. 그는 이 몸을 청정하고 아주 깨끗한 마음으로 미치게 하고서 앉아 있습니다. 온 몸 어디라도 청정하고 아주 깨끗한 마음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우다이여, 사람이 머리까지 온몸에 하얀 천을 덮어쓰고 앉아 있다면 그의 몸 어느 부분도 하얀 천으로 덮이지 않은 곳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다이여, 비구는 이 몸을 청정하고 아주 깨끗한 마음으로 미치게 하고서 앉아 있습니다. 온 몸 어디라도 청정하고 아주 깨끗한 마음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의 많은 제자들은 완전한 지혜의 완성과 성취를 이루어 머뭅니다.
252. 다시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닦음이 있습니다. 닦음의 방법에 따라 나의 제자들은 이렇게 철저히 압니다. '나의 이 몸은 물질로 된 것이고, 사대로 이루어진 것이며, 부모에 속한 것에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성장했으며, 무상하고 달라지는 것이고 견고하지 않은 것이고 영원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 의식은 여기에 의지하여 여기에 묶여있다.'라고. 예를 들면, 우다이여, 깨끗하고 빛나고 팔각형으로 잘 가공된 에메랄드가 순수하고 빛나고 흠이 없고 완전한 품질을 갖추었습니다. 거기에 푸른색이나 노란색이나 흰색이나 갈색 실이 묶고 있습니다. 그것을 눈 있는 사람이 손에 올려놓고 생각합니다. '이 깨끗하고 빛나고 팔각형으로 잘 가공된 에메랄드는 순수하고 빛나고 흠이 없고 완전한 품질을 갖추었다. 거기에 푸른색이나 노란색이나 흰색이나 갈색 실이 묶고 있다.'라고. 이처럼,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실천이 있습니다. 실천의 방법에 따라 나의 제자들은 이렇게 철저히 압니다. '나의 이 몸은 물질로 된 것이고, 사대로 이루어진 것이며, 부모에 속한 것에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성장했으며, 무상하고 달라지는 것이고 견고하지 않은 것이고 영원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 의식은 여기에 의지하여 여기에 묶여있다.'라고. 그리고 거기서 나의 많은 제자들은 완전한 지혜의 완성과 성취를 이루어 머뭅니다.
*"이 비유의 적용은 다음과 같다. '에메랄드(mani)'는 이 육체(karaja-kaya)와 같고, '묶은 실(avuta-sutta)'은 위빳사나의 지혜와 같고, '눈 있는 사람(cakkhuma purisa)'은 위빳사나를 얻은 비구와 같다. 손에 올려놓고 반조하여(paccavekkhato) '이것은 에메랄드이다.'라고 에메랄드가 명확해지는 때(avibhuta-kala)는 위빳사나의 지혜로 마음을 기울이면서 앉아있는 비구에게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몸이 명확해지는 때와 같다.
'거기에 이 실이 꿰어져 있구나.'라고 실(sutta)이 명확해지는 때는 위빳사나의 지혜로 마음을 기울이면서 앉아있는 비구에게 그 대상인 감각접촉을 다섯 번째로 하는 [정신]이나 혹은 일체의 마음과 마음 부수들(sabba-citta-cetasika)이나 혹은 위빳사나의 지혜가 명확해지는 때와 같다."(MA.iii.262)
253. 다시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닦음이 있습니다. 닦음의 방법에 따라서 나의 제자들은, 이 몸으로부터 다른 몸을 만듭니다. 모습을 지닌, 마음으로 이루어진, 일체의 수족과 뼈마디를 갖춘 온전한 감관을 만듭니다. 예를 들면, 우다이여, 어떤 사람이 문자 풀에서 갈대를 뽑아 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곧 이러합니다. '이것은 문자 풀이고 이것은 갈대이다. 문자 풀과 갈대는 다르다. 그러나 문자 풀에서 갈대를 뽑아냈다.'라고. 다시 비유하자면, 우다이여, 어떤 사람이 칼을 칼집으로부터 뽑아 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곧 이러합니다. '이것은 칼이고 이것은 칼집이다. 칼과 칼집은 다르다. 그러나 칼집으로부터 칼을 뽑아냈다.'라고. 다시 비유하자면, 우다이여, 어떤 사람이 뱀을 뱀의 껍질로부터 벗겨 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곧 이러합니다. '이것은 뱀이고 이것은 껍질이다. 뱀과 껍질은 다르다. 그러나 껍질로부터 뱀을 벗겨냈다.'라고. 이처럼,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닦음이 있습니다. 닦음의 방법에 따라서 나의 제자들은, 이 몸으로부터 다른 몸을 만듭니다. 모습을 지닌, 마음으로 이루어진, 일체의 수족과 뼈마디를 갖춘 온전한 감관을 만듭니다. 그리고 많은 나의 제자들은 완전한 지혜의 성취를 이루어 머뭅니다.
254. 다시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닦음이 있습니다. 닦음의 방법에 따라서 나의 제자들은, 여러 가지 신통변화를 실행합니다. 즉 하나가 된 후 여럿이 됩니다. 여럿이 된 후 하나가 됩니다. 나타나고 사라짐에 담장이나 성벽이나 산에 걸림없이 넘나드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와 같습니다. 땅 속에서 걸림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마치 물 속에서와 같습니다. 물 위를 거침없이 가는 것이 마치 땅 위에서와 같습니다. 공중에서 가부좌를 행하고 날개달린 새처럼 갑니다. 대신변과 대위덕을 지닌 달과 태양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쓰다 듬습니다. 브라흐마(범천)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몸으로써 위력을 미칩니다. 예를 들면, 우다이여, 노련한 도공이나 도공의 제자가 잘 준비된 진흙으로 그가 원하는 그릇이 어떤 것이건, 그것을 그대로 만들고 빚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예를 들면, 우다이여, 숙련된 상아 세공인이나 그의 제자가 잘 준비된 상아로 그가 원하는 상아 세공품이 어떤 것이건, 그것을 그대로 만들고 생산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예를 들면, 우다이여, 숙련된 금 세공인이나 그의 제자가 잘 준비된 금으로 그가 원하는 금 세공품이 어떤 것이건, 그것을 그대로 만들고 생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닦음이 있습니다. 닦음의 방법에 따라서 나의 제자들은 여러 가지 신통변화를 실행합니다. 즉 하나가 된 후 여럿이 됩니다. 여럿이 된 후 하나가 됩니다. 나타나고 사라짐에 담장이나 성벽이나 산에 걸림없이 넘나드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와 같습니다. 땅 속에서 걸림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마치 물 속에서와 같습니다. 물 위를 거침없이 가는 것이 마치 땅 위에서와 같습니다. 공중에서 가부좌를 행하는 것이 마치 (날개달린) 새와 같습니다. 대신변과 대위덕을 지닌 달과 태양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쓰다 듬습니다. 브라흐마(범천)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몸으로써 위력을 미칩니다. 그리고 많은 나의 제자들은 완전한 지혜의 성취를 이루어 머뭅니다.
255. 다시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닦음이 있습니다. 닦음의 방법에 따라 나의 제자들은,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과 같은 귀의 계[天耳界]를 통해 멀거나 가까운 하늘과 사람의 소리를 듣습니다. 예를 들면, 우다이여, 먼 길을 걷는 사람이 북소리, 무딩가 소리, 소라고동 소리, 심벌즈 소리, 작은 북소리들을 들을 것입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떠오를 것입니다. '이것은 북소리다. 이것은 무딩가 소리이다. 이것은 소라고둥 소리이다. 이것은 심벌즈 소리이다. 이것은 작은 북소리이다.'라고. 이처럼,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닦음이 있습니다. 닦음의 방법에 따라 나의 제자들은,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과 같은 귀의 계를 통해 멀거나 가까운 하늘과 사람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많은 나의 제자들은 완전한 지혜의 성취를 이루어 머뭅니다.
256. 다시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닦음이 있습니다. 닦음의 방법에 따라 나의 제자들은, 다른 중생, 다른 사람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 차립니다. 탐냄을 지닌 마음을 탐냄을 지닌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탐냄을 떠난 마음을 탐냄을 떠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성냄을 지닌 마음을 성냄을 지닌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성냄을 떠난 마음을 성냄을 떠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어리석음을 지닌 마음을 어리석음을 지닌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어리석음을 떠난 마음을 어리석음을 떠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집중된 마음을 집중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산란한 마음(집중되지 않은 마음)을 산란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광대한 마음을 광대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광대하지 못한 마음을 광대하지 못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위가 있는 마음을 위가 있는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위가 없는 마음을 위가 없는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삼매를 얻은 마음으로 삼매를 얻은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삼매를 얻지 못한 마음을 삼매를 얻지 못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해탈하지 못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예를 들면, 우다이여, 장식을 좋아하는 젊은 여자나 남자가 깨끗하고 흠 없는 거울이나 물에 비친 자신을 영상을 살펴보면서, 점이 있으면 점이 있다고 알고 점이 없으면 점이 없다고 아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실천이 있습니다. 실천의 방법에 따라 나의 제자들은, 다른 중생, 다른 사람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 차립니다. 탐냄을 지닌 마음을 탐냄을 지닌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탐냄을 떠난 마음을 탐냄을 떠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성냄을 지닌 마음을 성냄을 지닌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성냄을 떠난 마음을 성냄을 떠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어리석음을 지닌 마음을 어리석음을 지닌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어리석음을 떠난 마음을 어리석음을 떠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집중된 마음을 집중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산란한 마음(집중되지 않은 마음)을 산란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광대한 마음을 광대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광대하지 못한 마음을 광대하지 못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위가 있는 마음을 위가 있는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위가 없는 마음을 위가 없는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삼매를 얻은 마음으로 삼매를 얻은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삼매를 얻지 못한 마음을 삼매를 얻지 못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해탈하지 못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많은 나의 제자들은 완전한 지혜의 성취를 이루어 머뭅니다.
257. 다시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닦음이 있습니다. 닦음의 방법에 따라 나의 제자들은, 여러 전생을 기억합니다.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백 천생, 수많은 무너지는 겁(세상), 수많은 이루어지는 겁, 수많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에 대해 기억합니다. '거기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거기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합니다. 예를 들면, 우다이여, 어떤 사람이 자기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갑니다. 그 마을에서 또 다른 마을로 갑니다. 그곳에서 자기 마을로 되돌아 옵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나는 우리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갔다. 그곳에서 이와 같이 서 있었고 이와 같이 앉아 있었고 이와 같이 말했고 이와 같이 침묵했다. 나는 그 마을에서 다시 다른 마을로 갔다. 그곳에서 이와 같이 서 있었고 이와 같이 앉아 있었고 이와 같이 말했고 이와 같이 침묵했다. 그리고 그 마을에서 다시 우리 마을로 되돌아 왔다.'라고. 이처럼,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실천이 있습니다. 실천의 방법에 따라 나의 제자들은, 여러 전생을 기억합니다.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백 천생, 수많은 무너지는 겁(세상), 수많은 이루어지는 겁, 수많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에 대해 기억합니다. '거기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거기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많은 나의 제자들은 완전한 지혜의 성취를 이루어 머뭅니다.
258. 다시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닦음이 있습니다. 닦음의 방법에 따라 나의 제자들은, 인간을 뛰어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봅니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립니다. '참으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녀 삿된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혹은 다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녀 바른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좋은 곳에 나아가 하늘세계에 태어난다'라고. 이와 같이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봅니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립니다. 예를 들면, 우다이여, 사거리의 가운데에 높은 누각이 있는데 눈 밝은 사람이 거기에 서서 집을 들어가거나 나가거나 마차를 끌거나 길을 가거나 길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볼 것입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집에 들어간다. 이 사람들은 집에서 나온다. 이 사람들은 마차를 끌고 간다. 이 사람들은 길을 가고 있다. 이 사람들은 길 가에 앉아 있다.'라고. 이처럼,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닦음이 있습니다. 닦음의 방법에 따라 나의 제자들은, 인간을 뛰어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봅니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립니다. '참으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녀 삿된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혹은 다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녀 바른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좋은 곳에 나아가 하늘세계에 태어난다'라고. 이와 같이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봅니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많은 나의 제자들은 완전한 지혜의 성취를 이루어 머뭅니다.
259. 다시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닦음이 있습니다. 닦음의 방법에 따라 나의 제자들은,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지혜를 의한 해탈[慧解脫]을 지녀,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뭅니다. 예를 들면, 우다이여, 산 속 깊은 곳에 맑고 투명하고 깨끗한 호수가 있어, 눈 있는 어떤 사람이 그곳 호숫가에 서서 서서 조개껍데기, 자갈, 조약돌, 움직이거나 가만히 서 있는 물고기 떼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 호수는 참 맑고 투명하고 깨끗하구나. 여기 이런 조개껍데기가 있고, 자갈이 있고, 조약돌도 있고, 물고기 떼도 있어 움직이기도 하고 가만히 서 있기도 하는구나.'라고. 이처럼, 우다이여, 내가 제자들에게 선언한 닦음 있습니다. 닦음의 방법에 따라 나의 제자들은,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지녀,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리고 많은 나의 제자들은 완전한 지혜의 성취를 이루어 머뭅니다. 우다이여, 이것이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항하고 예배하는 나의 제자들이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무는 다섯 번째 법입니다.
우다이여, 이런 다섯 가지 법들이 있습니다.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나의 제자들은 이런 다섯 가지 법들에 의해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머뭅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사꿀루다이 유행승은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였다.
사꿀루다이 긴 경(M77)이 끝났다.
'빠알리어 경전 > 맛지마 니까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MN 79. 사꿀루다이 짧은(작은) 경(cūḷasakuludāyisuttaṃ) (0) | 2016.04.28 |
---|---|
MN 78. 사문 문디까 경(samaṇamuṇḍikasuttaṃ) (0) | 2016.04.27 |
MN 76. 산다까 경(sandakasuttaṃ) (0) | 2016.04.26 |
MN 75. 마간디야 경(māgaṇḍiyasuttaṃ) (0) | 2016.04.25 |
MN 74. 디가나카 경(dīghanakhasuttaṃ) (0) | 2016.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