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맛지마 니까야

MN 76. 산다까 경(sandakasuttaṃ)

실론섬 2016. 4. 26. 13:06

MN 76. 산다까 경(sandakasuttaṃ)

 

223.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꼬삼비에서 고시따 숲에 머물고 있었다. 그 무렵 산다까 유행승은 오백 명이나 되는 많은 유행승 대중과 함께 삘락카 동굴에 머물고 있었다. 아난다 존자는 해거름에 낮 동안의 홀로 머묾에서 일어나 비구들을 불러 말했다.

"도반들이여. 동굴을 보러 데와까따 호수로 갑시다."

"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그 비구들은 아난다 존자에게 대답했다. 그래서 아난다 존자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데와까따 호수로 갔다. 그때 산다까 유행승은 많은 유행승의 대중과 함께 시끄럽게 큰 소리로 떠들썩하게, 예를 들면, 즉 왕에 대한 이야기, 도둑에 대한 이야기, 대신에 대한 이야기, 군대에 대한 이야기, 공포에 대한 이야기, 전쟁에 대한 이야기, 음식에 대한 이야기, 음료에 대한 이야기, 의복에 대한 이야기, 침상에 대한 이야기, 화환에 대한 이야기, 향료에 대한 이야기, 친척에 대한 이야기, 탈것에 대한수레 이야기, 마을에 대한 이야기, 성읍에 대한 이야기, 도시에 대한 이야기, 지방에 대한 이야기, 여자에 대한 이야기, 영웅에 대한 이야기, 거리에 대한 이야기, 우물에 대한 이야기, 전에 죽은 자에 대한 이야기, 잡다한 이야기, 세상에 대한 이야기, 바다에 대한 이야기, 이렇다거나 이렇지 않다는 이야기 등 여러 가지 하챦은 이야기를 하면서 앉아있었다. 산다까 유행승은 멀리서 오고 있는 아난다 존자를 보았다. 본 뒤에 자기의 모임을 정돈하며 조용히 하도록 했다.

"존자들은 조용히 하시오. 존자들은 소리를 내지 마시오. 사문 고따마의 제자인 사문 아난다가 오고 있습니다. 사문 고따마의 제자들이 꼬삼비에 머물고 있는데, 이 사문 아난다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오. 그 존자들은 조용함을 좋아하고, 조용함으로 길들여져 있고, 조용함을 칭송합니다. 만약 우리 대중이 조용한 것을 알면 그가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대중은 침묵하였다. 

 

*'이렇다거나 이렇지 않다는 이야기(iti-bhava-katha)'에서 이렇다(bhava)는 것은 영속에 관한 이야기이고, 이렇지 않다(abhava)는 것은 단멸에 관한 것이다. 이렇다는 것은 증장에 관한 것이고, 이렇지 않다는 것은 쇠퇴에 관한 것이다. 이렇다는 것은 감각적 쾌락에 관한 것이고, 이렇지 않다는 것은 자기학대에 관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여섯 종류의 이렇다거나 이렇지 않다는 이야기와 함께 서른 두가지 하챦은(쓸모없는) 이야기가 있다.(MA.iii.223-224).  청정도론에는 여기서 언급되는 27가지에다가 5가지를 더하여 32가지 하챦은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다. 그 5가지는 산, 강, 섬에 대한 이야기와 천상과 해탈에 대한 것도 하챦은 이야기에 포함시켜서 모두 32가지라고 설명하고 있다.  

 

224. 그때 아난다 존자는 산다까 유행승에게 다가갔다. 산다까 유행승은 아난다 존자께 이렇게 말했다.

"오십시오, 아난다 존자여. 아난다 존자께서는 잘 오셨습니다. 아난다 존자께서는 여기에 오랫만에 오셨습니다. 아난다 존자께서는 준비된 이 자리에 앉으십시오."라고.

아난다 존자는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산다까 유행승도 역시 다른 낮은 자리를 잡아서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산다까 유행승에게 아난다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산다까여, 무슨 이야기를 위해 지금 여기에 함께 모여 앉았습니까? 그대들 간에 끝내지 못한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아난다 존자여, 저희들이 지금 앉아서 하던 이야기에 대해서는 그냥 두십시오. 그 이야기는 아난다 존자께서 나중에라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아난다 존자가 존자의 스승의 가르침을 분명히 말해 주시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산다까여, 듣고 잘 사고하십시오. 나는 말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존자여."라고 산다까 유행승은 아난다 존자에게 대답했다. 아난다 존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산다까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이런 네 가지 범행이 아닌 삶과 네 가지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할 것이고(범행을 행할 수 없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아난다 존자시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이런 네 가지 범행이 아닌 삶과 네 가지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은 무엇이기에,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하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합니까?"

 

225. "여기, 산다까여, 어떤 스승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보시란 없습니다. 제물이란 없습니다. 헌공이란 없습니다.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결실도 없고 과보도 없습니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습니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습니다. 화생하는 중생은 없습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철저히 알았고 겪어 알아 그것을 알려주는 바르게 행하고 바르게 들어간 사문과 바라문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이 인간이란 것은 사대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목숨이 다하고 죽으면 땅은 땅의 무리로(세계로) 들어가고, 되돌아 갑니다. 물은 물의 무리로 들어가고, 되돌아 갑니다. 불은 불의 무리로 들어가고, 되돌아 갑니다. 바람은 바람의 무리로 들어가고, 되돌아 갑니다. 감각의 근들은 허공으로 옮겨 갑니다. 관을 다섯 번째로 하는 (네) 사람이 시체를 나릅니다. 화장터에 도착할 때까지 추도가를 읊습니다. 뼈는 잿빛으로 변합니다. 공물은 공물로써 끝날 뿐입니다. 보시는 어리석은 자의 가르침입니다. 사후의 존재를 말하는 사람들의 말은 오로지 공허한 거짓말일 뿐입니다. 어리석은 자들도 현명한 자들도 몸이 무너져 죽으면 단멸하고 파괴됩니다. 죽음 그 후는 없습니다.'라고.  

 

*관을 다섯 번째로 하는 네 사람이 시체를 나른다(asandi-pancama purisa matam adaya gacchanti)'는 네 사람과 관이 다섯 번째가 되어, 이 다섯이 시체를 실어 나른다는 말이다.(MA.iii.227)
*추도가(padani)'란 이 사람은 이러한 계행을 실천했고 이러한 나쁜 계행을 실천했다는 방법으로 공덕을 기리는 노래이다. 혹은 이 단어는 여기서 오직 몸(sarira)을 말한 것으로 묘지에 도착할 때 까지 몸을 나른다는 말이다.(MA.iii.227)

 

거기서, 산다까여,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이분, 스승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다. 보시란 없습니다. 제물이란 없습니다. 헌공이란 없습니다.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결실도 없고 과보도 없습니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습니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습니다. 화생하는 중생이 없습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철저히 알았고 겪어 알아 그것을 알려주는 바르게 행하고 바르게 들어간 사문과 바라문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이 인간이란 것은 사대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목숨이 다하고 죽으면 땅은 땅의 세계로 되돌아가고, 물은 물의 세계로 되돌아가고, 불은 불의 세계로 되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세계로 되돌아가고, 감각의 근들은 허공으로 되돌아 갑니다. 관을 다섯 번째로 하는 네 사람이 시체를 나릅니다. 화장터에 도착할 때까지 추도가를 읊습니다. 뼈는 잿빛으로 변합니다. 공물은 공물로써 끝날 뿐입니다. 보시는 어리석은 자의 가르침입니다. 사후의 존재를 말하는 사람들의 말은 오로지 공허한 거짓말일 뿐입니다. 어리석은 자들도 현명한 자들도 몸이 무너져 죽으면 단멸하고 파괴됩니다. 죽음 그 후는 없습니다.'라고.  

만일 이분, 스승이 진실을 말한 것이라면, 여기서 나는 행하지 않고도 행한 것이고, 여기서 나는 완성하지 않고도 완성한 것이다. 우리 둘도 여기서 차별없이 동일한 경지를 성취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둘 다 몸이 무너져 죽으면 단멸하고 파괴됩니다. 죽음 그 이후는 없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분, 스승은 나체로 다니고, 머리를 깎고, 웅크리는 노력을 하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는 것은 필요 없는 짓이다. 나는 자식들로 북적거리는 집에서 살고 까시에서 산출된 전단향을 사용하고 꽃과 향과 화장품을 지니고 금.은이 허용된 자인데, 미래에 다시 태어남에 있어, 이분, 스승과 갈 곳의 차별이 없을 것이다. 이 스승 아래서 범행을 실천하는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볼 것인가?'라고.  

 

그는 '이것은 청정범행의 삶이 아니다.'라고 안 뒤에 그 범행을 싫어하여 떠납니다. 이것이, 산다까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첫 번째 범행 아닌 삶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할 것이도(행할 수 없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둘도 여기서 동일한 경지를 성취한 것이다'는 것은 스승과 나는 동일한 공덕에 의해 동일하고 동일한 상태를 얻는다는 말이다.(MA.iii.228)

 

226. 다시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행하는 자와 행하게 하는 자, 절단하는 자와 절단하게 하는 자, 고문하는 자와 고문하게 하는 자, 슬퍼지는 자와 슬퍼하게 하는 자, 억압하는 자와 억압하게 하는 자, 두려운 자와 두렵게 하는 자, 생명을 죽이게 하는 자,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자, 집을 부수는 자, 약탈하는 자, 도둑질을 하는 자, 노상강도질을 하는 자, 남의 아내를 범하는 자, 거짓을 말하는 자등 행하는 자에게 죄악은 지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예리한 칼이 가장자리에 달린 바퀴로 이 땅의 생명을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으깨고 하나의 살점으로 만들지라도 그로 인한 어떤 죄악도 없고 죄악의 결과도(과보도) 없습니다. 만약 강가 강의 남쪽 기슭에 가서 죽이고, 살육하고, 절단하고 절단하게 하고, 고문하고 고문하게 한다고 해도 그로 인한 어떤 죄악도 없고, 죄악의 결과도 없습니다. 강가 강의 북쪽 기슭에 가서 보시하고, 보시하게 하고, 제사를 지내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자에게 그로 인한 어떤 공덕도 없고, 공덕의 결과도 없습니다. 보시를 하고, 자신을 길들이고, 제어하고, 진실을 말하더라도 공덕이 없고, 공덕의 결과도 없습니다.'라고.  

 

거기서, 산다까여,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이분, 스승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다. '행하는 자와 행하게 하는 자, 절단하는 자와 절단하게 하는 자, 고문하는 자와 고문하게 하는 자, 슬퍼지는 자와 슬퍼하게 하는 자, 억압하는 자와 억압하게 하는 자, 두려운 자와 두렵게 하는 자, 생명을 죽이게 하는 자,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자, 집을 부수는 자, 약탈하는 자, 도둑질을 하는 자, 노상강도질을 하는 자, 남의 아내를 범하는 자, 거짓을 말하는 자등 행하는 자에게 죄악은 지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예리한 칼이 가장자리에 달린 바퀴로 이 땅의 생명을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으깨고 하나의 살점으로 만들지라도 그로 인한 어떤 죄악도 없고 죄악의 결과도(과보도) 없습니다. 만약 강가 강의 남쪽 기슭에 가서 죽이고, 살육하고, 절단하고 절단하게 하고, 고문하고 고문하게 한다고 해도 그로 인한 어떤 죄악도 없고, 죄악의 결과도 없습니다. 강가 강의 북쪽 기슭에 가서 보시하고, 보시하게 하고, 제사를 지내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자에게 그로 인한 어떤 공덕도 없고, 공덕의 결과도 없습니다. 보시를 하고, 자신을 길들이고, 제어하고, 진실을 말하더라도 공덕이 없고, 공덕의 결과도 없습니다.'라고.  

만일 이분, 스승이 진실을 말한 것이라면, 여기서 나는 행하지 않고도 행한 것이고, 여기서 나는 완성하지 않고도 완성한 것이다. 우리 둘도 여기서 차별없이 동일한 경지를 성취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둘 다 몸이 무너져 죽으면 단멸하고 파괴됩니다. 죽음 그 이후는 없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분, 스승은 나체로 다니고, 머리를 깎고, 웅크리는 노력을 하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는 것은 필요 없는 짓이다. 나는 자식들로 북적거리는 집에서 살고 까시에서 산출된 전단향을 사용하고 꽃과 향과 화장품을 지니고 금.은이 허용된 자인데, 미래에 다시 태어남에 있어, 이분, 스승과 갈 곳의 차별이 없을 것이다. 이 스승 아래서 범행을 실천하는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볼 것인가?'라고.  

그는 '이것은 청정범행의 삶이 아니다.'라고 안 뒤에 그 범행을 싫어하여 떠납니다. 이것이, 산다까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두 번째 범행 아닌 삶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할 것이도,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227. 다시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중생들의 오염을 위한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습니다.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중생들은 오염될 것입니다.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습니다다.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중생들은 청정해질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도 없고, 남의 행위도 없고, 인간의 행위도 없습니다. 힘도 없고, 정진도 없고, 남자다운 힘도 없고, 남자다운 노력도 없습니다. 모든 중생과 모든 생명과 모든 존재와 모든 생명은 권한이 없고, 힘이 없고, 정진도 없이 운명과 결합과 상태의 성숙을 원인으로 여섯 종류의 태어남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합니다.'라고.  

 

거기서, 산다까여,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이분,  스승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다. '중생들의 오염을 위한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습니다.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중생들은 오염될 것입니다.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습니다다.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중생들은 청정해질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도 없고, 남의 행위도 없고, 인간의 행위도 없습니다. 힘도 없고, 정진도 없고, 남자다운 힘도 없고, 남자다운 노력도 없습니다. 모든 중생과 모든 생명과 모든 존재와 모든 생명은 권한이 없고, 힘이 없고, 정진도 없이 운명과 결합과 상태의 성숙을 원인으로 여섯 종류의 태어남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합니다.'라고.   

만일 이분, 스승이 진실을 말한 것이라면, 여기서 나는 행하지 않고도 행한 것이고, 여기서 나는 완성하지 않고도 완성한 것이다. 우리 둘도 여기서 차별없이 동일한 경지를 성취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둘 다 몸이 무너져 죽으면 단멸하고 파괴됩니다. 죽음 그 이후는 없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분, 스승은 나체로 다니고, 머리를 깎고, 웅크리는 노력을 하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는 것은 필요 없는 짓이다. 나는 자식들로 북적거리는 집에서 살고 까시에서 산출된 전단향을 사용하고 꽃과 향과 화장품을 지니고 금.은이 허용된 자인데, 미래에 다시 태어남에 있어, 이분, 스승과 갈 곳의 차별이 없을 것이다. 이 스승 아래서 범행을 실천하는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볼 것인가?'라고.  

그는 '이것은 청정범행의 삶이 아니다.'라고 안 뒤에 그 범행을 싫어하여 떠납니다. 이것이, 산다까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세 번째 범행 아닌 삶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할 것이도,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228. 다시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상태가 아니고, 창조된 것이 아니고, 창조자가 아니며,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이고, 산 봉우리처럼 서 있고, 서 있는 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 일곱 가지 이런 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고 서로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즐거움도 괴로움도 그 둘 모두를 줄 수 없습니다. 어떤 일곱니까? 땅의 몸, 물의 몸, 불의 몸, 바람의 몸, 즐거움, 괴로움, 그리고 일곱 번째로 생명 - 이것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상태가 아니고, 창조된 것이 아니고, 창조자가 아니며,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이고, 산 봉우리처럼 서 있고, 서 있는 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 일곱 가지 몸입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고 서로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즐거움도 괴로움도 그 둘 모두를 줄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죽이는 자도 없고, 죽이게 하는 자도 없고, 듣는 자도 없고, 말하는 자도 없고, 아는 자도 없고 알게하는 자도 없습니다.  날카로운 칼로 머리를 자른다 해도 누구도 누구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칼이 이 일곱 가지 몸들의 사이에 의해 갈라진 틈을 칼이 지나간 것입니다. 140만 가지의 주요한 모태가 있고, 다시 6600가지 모태가 있습니다. 500가지의 업이 있고, 다섯 가지, 세 가지 업이 있고, 완전한 업이 있고, 절반의 업이 있습니다. 62가지 실천이 있고, 62가지 중간 겁이 있습니다. 여섯 부류의 태생이 있고, 여덟 가지 인간의 영역이 있고, 4900의 생명체가 있고, 4900의 유행승이 있고, 4900의 용이 있습니다. 2000의 감각기관이 있고, 3000의 지옥이 있고, 36가지 티끌이 쌓이는 곳이 있고, 일곱 가지 인식이 있는 모태와 일곱 가지 인식이 없는 모태가 있고, 일곱 가지 니간타의 모태가 있고, 일곱 가지 신, 일곱 가지 인간, 일곱 가지 유령, 일곱 가지 호수, 일곱 가지 매듭, 700가지 매듭, 일곱 가지 갈라진 틈, 700가지 갈라진 틈, 일곱 가지 꿈, 700가지 꿈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도 현명한 자도 유전하고 윤회한 뒤에 괴로움을 끝내는 840만 대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나는 계나 서계나 고행이나 청정범행에 의해 익지 않은 업을 익게하겠다거나 이미 익은 업을 경험할 때 그것을 없애겠다.'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의 크기가 정해져 있는 이 윤회에서는 줄이거나 늘일 수 없으며, 아무것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킬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감긴 실타래를 던지면 실이 다 풀릴 때까지 굴러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자도 현명한 자도 유전하고 윤회한 뒤에 괴로움을 끝냅니다.'라고.  

 

거기서, 산다까여,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이분, 스승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다.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상태가 아니고, 창조된 것이 아니고, 창조자가 아니며,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이고, 산 봉우리처럼 서 있고, 서 있는 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 일곱 가지 이런 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고 서로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즐거움도 괴로움도 그 둘 모두를 줄 수 없습니다. 어떤 일곱니까? 땅의 몸, 물의 몸, 불의 몸, 바람의 몸, 즐거움, 괴로움, 그리고 일곱 번째로 생명 - 이것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상태가 아니고, 창조된 것이 아니고, 창조자가 아니며,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이고, 산 봉우리처럼 서 있고, 서 있는 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 일곱 가지 몸입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고 서로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즐거움도 괴로움도 그 둘 모두를 줄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죽이는 자도 없고, 죽이게 하는 자도 없고, 듣는 자도 없고, 말하는 자도 없고, 아는 자도 없고 알게하는 자도 없습니다.  날카로운 칼로 머리를 자른다 해도 누구도 누구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칼이 이 일곱 가지 몸들의 사이에 의해 갈라진 틈을 칼이 지나간 것입니다. 140만 가지의 주요한 모태가 있고, 다시 6600가지 모태가 있습니다. 500가지의 업이 있고, 다섯 가지, 세 가지 업이 있고, 완전한 업이 있고, 절반의 업이 있습니다. 62가지 실천이 있고, 62가지 중간 겁이 있습니다. 여섯 부류의 태생이 있고, 여덟 가지 인간의 영역이 있고, 4900의 생명체가 있고, 4900의 유행승이 있고, 4900의 용이 있습니다. 2000의 감각기관이 있고, 3000의 지옥이 있고, 36가지 티끌이 쌓이는 곳이 있고, 일곱 가지 인식이 있는 모태와 일곱 가지 인식이 없는 모태가 있고, 일곱 가지 니간타의 모태가 있고, 일곱 가지 신, 일곱 가지 인간, 일곱 가지 유령, 일곱 가지 호수, 일곱 가지 매듭, 700가지 매듭, 일곱 가지 갈라진 틈, 700가지 갈라진 틈, 일곱 가지 꿈, 700가지 꿈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도 현명한 자도 유전하고 윤회한 뒤에 괴로움을 끝내는 840만 대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나는 계나 서계나 고행이나 청정범행에 의해 익지 않은 업을 익게하겠다거나 이미 익은 업을 경험할 때 그것을 없애겠다.'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의 크기가 정해져 있는 이 윤회에서는 줄이거나 늘일 수 없으며, 아무것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킬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감긴 실타래를 던지면 실이 다 풀릴 때까지 굴러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자도 현명한 자도 유전하고 윤회한 뒤에 괴로움을 끝냅니다.'라고.

만일 이분, 스승이 진실을 말한 것이라면, 여기서 나는 행하지 않고도 행한 것이고, 여기서 나는 완성하지 않고도 완성한 것이다. 우리 둘도 여기서 차별없이 동일한 경지를 성취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둘 다 몸이 무너져 죽으면 단멸하고 파괴됩니다. 죽음 그 이후는 없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분, 스승은 나체로 다니고, 머리를 깎고, 웅크리는 노력을 하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는 것은 필요 없는 짓이다. 나는 자식들로 북적거리는 집에서 살고 까시에서 산출된 전단향을 사용하고 꽃과 향과 화장품을 지니고 금.은이 허용된 자인데, 미래에 다시 태어남에 있어, 이분, 스승과 갈 곳의 차별이 없을 것이다. 이 스승 아래서 범행을 실천하는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볼 것인가?'라고. 

그는 '이것은 청정범행의 삶이 아니다.'라고 안 뒤에 그 범행을 싫어하여 떠납니다. 이것이, 산다까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네 번째 범행 아닌 삶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할 것이도,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산다까여, 이것이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네 가지 범행 아닌 삶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더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할 것이고(결코 범행을 행할 수 없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경이롭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놀랍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이만큼이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네 가지 범행 아닌 삶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더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할 것이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아난다 존자시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설하신 네 가지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은 무엇이어서,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하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합니까?"

 

229. "여기, 산다까여, 어떤 스승이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는 자라면서 '나는 걸어갈 때에도 잠잘 때에도 깨어 있을 때에도 언제나 항상 한결같이 앎과 봄이 확립되어 있다.'라고 완전한 앎과 봄을 선언합니다. 그는 빈집에 들어가기도 하고, 탁발 음식을 얻지 못하기도 하고, 개가 물기도 하고, 사나운 코끼리를 만나기도 하고, 사나운 말을 만나기도 하고, 사나운 황소를 만나기도 하고, 여자나 남자의 이름이나 성을 묻기도 하고, 마을이나 성읍의 이름과 길을 묻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 받은 그는 '내가 빈집에 들어가게끔 정해져 있었다. 그것 때문에 들어갔다.' '탁발 음식을 얻지 못하게끔 정해져 있었다. 그것 때문에 얻지 못했다.' '개가 물게끔 정해져 있었다. 그것 때문에 물렸다. 사나운 코끼리를 만나게끔 정해져 있었다. 그것 때문에 만났다. 사나운 말을 만나게끔 정해져 있었다. 그것 때문에 만났다. 사나운 황소를 만나게끔 정해져 있었다. 그것 때문에 만났다.' '여자나 남자의 이름이나 성을 굳게끔 정해져 있었다. 그것 때문에 물었다. 마을이나 성읍의 이름과 길을 묻게끔 정해져 있었다. 그것 때문에 물었다.'라고 대답합니다.

 

거기서, 산다까여,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이 스승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는 자라면서 '나는 걸어갈 때에도 잠잘 때에도 깨어 있을 때에도 언제나 한결같이 앎과 봄이 확립되어 있다.'라고 완전한 앎과 봄을 선언한다. ··· 마을이나 성읍의 이름과 길을 묻게끔 정해져 있었다. 그것 때문에 물었다.'라고 대답한다. 그는 '이것은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이다.'라고 안 뒤에 그런 범행을 싫어하여 떠납니다.

 

이것이, 산다까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첫 번째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하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230. 다시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이 있습니다. 그는 전승에서 배우고, 전승을 진실이라고 여깁니다. 그는 전승, 이러저러하다고 계승된 것, 성전의 자료에 의해 법을 설합니다. 그러나 산다까여, 전승에서 배우고 전승을 진실이라고 여기는 스승에게는 잘 배운 것도 있고, 잘못 배운 것도 있고, 사실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거기서, 산다까여,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이 스승은 전승에서 배우고, 전승을 진실이라 여긴다. 그는 전승, 이러저러하다고 계승된 것, 성전의 자료에 의해 법을 설한다. 그러나 전승에서 배우고 전승을 진실이라고 여기는 스승에게는 잘 배운 것도 있고, 잘못 배운 것도 있고, 사실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그는 '이것은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이다.'라고 안 뒤에 그런 범행을 싫어하여  떠납니다.

 

이것이, 산다까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두 번째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하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231. 다시.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이 있습니다. 그는 논리가요 관찰자입니다. 그는 논리에 의해 추론되었고 관찰을 거듭하여 스스로가 이해한 법을 설합니다. 산다까여, 그러나 논리가요 관찰자인 스승에게는 논리를 바르게 전개한 것도 있고 논리를 잘못 전개한 것도 있고 사실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거기서, 산다까여,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이 스승은 논리가요 관찰자이다. 그는 논리에 의해 추론되었고 관찰을 거듭하여 스스로가 이해한 법을 설한다. 그러나 논리가요 탐구자인 스승에게는 논리를 바르게 전개한 것도 있고 논리를 잘못 전개한 것도 있고, 사실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그는 '이것은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이다.'라고 안 뒤에 그런 범행을 싫어하여 떠납니다.

 

이것이, 산다까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세 번째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하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232. 다시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이 있습니다. 그는 나태하고(우둔하고) 어리석습니다. 그는 나태함과 어리석음 때문에 여기저기서 질문을 받으면 '이렇다'라는 생각도 나에게 없고, '그렇다'라는 생각도 나에게 없고, '다르다'라는 생각도 나에게 없고, '아니다'라는 생각도 나에게 없고, '아니지 않다'라는 생각도 나에게 없습니다.'라고 혼란스럽게 말하고, 교묘하게 빠져나갑니다.

 

거기서, 산다까여,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이 스승은 나태하고 어리석다. 그는 나태하고 어리석음 때문에 여기저기서 질문을 받으면 '이렇다'라는 생각도 나에게 없고, '그렇다'라는 생각도 나에게 없고, '다르다'라는 생각도 나에게 없고, '아니다'라는 생각도 나에게 없고, '아니지 않다'라는 생각도 나에게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말이 혼란스럽고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그는 '이것은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이다.'라고 안 뒤에 그런 범행을 싫어하여 떠납니다.

 

이것이, 산다까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네 번째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하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산다까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네 가지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하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경이롭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놀랍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이만큼이 아시는 분, 보시는,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네 가지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하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아난다 존자시여, 그분, 스승은 무엇을 주장하고, 무엇을 가르치는 분이이서, 거기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이 확실히 범행으로 살고, 범행으로 사는 자는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습니까?"

 

233. "여기, 산다까여, 아라한[araham]이시며, 모든 법을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분(samma sambuddho)이시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vijjacaranasampanna)이시며, 열반으로 잘 가신 분(sugato)이시며, 중생들의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lokavidu)이시며, 위 없으신 분(anuttaro)이시며, 어리석은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purisadhammasarathi)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satthadevamanusam)이시며, 깨달은 분(buddho)이시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세존)(bahgava)이 세상에 출현합니다. 그는 이 세간의 모든 중생들, 즉 마라들, 범천들, 축생들, 사문들, 바라문들, 천신및 인간들에게, 스스로 철저히 알았고, 겪어 알아, 갖추신 것을 널리 알립니다. 그는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고, 의미와 표현이 일치하는 가르침을 설하고, 완전히 원만하고 청정한 거룩한 삶을 드러냅니다.


이런 법을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나 다른 가문에 태어난 자가 듣습니다. 그는 이 법을 듣고서 여래에게 믿음을 가집니다. 그는 이런 믿음을 갖추고 이렇게 숙고합니다. ‘재가의 삶이란 갇혀 있고 때가 낀 길이지만 출가의 삶은 열린 허공과 같다. 재가에 살면서 완전무결하고 청정무구한 잘 닦여진 자개껍질과 같은 청정한 범행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나는 이제 머리와 수염을 깎고 노란 옷을 입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해야겠다.’라고. 그는 얼마 뒤에 재산이 많이 있거나 적거나 간에 모두 버리고, 일가친척 또한 다 버리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노란 옷을 입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합니다.

 

이렇게 출가하여 비구들의 학습계목을 받아 지녀 그것과 더불어 생활합니다. 그는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생명을 해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납니다. 몽둥이를 내려놓고 칼을 내려놓는다. 모든 살아있는 중생들을 향하여 관대하고 자비한 마음을 가지고 머뭅니다. 그는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납니다. 준 것만을 받고 준 것만을 받는 자이고, 준 것만을 바라는 자, 스스로 훔치지 않는 청정한 존재로 머뭅니다. 그는 금욕적이지 못한 삶을 버렸기 때문에 범행을 닦습니다. 독신자가 되어 저속한 성행위를 멀리 떠납니다. 그는 거짓을 말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거짓을 말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납니다. 진실을 말하는 자여서 믿을만하고, 신뢰할 수 있고, 기대할 수 있고, 세상을 위해 진실을 말합니다. 그는 이간하는 말을 버렸기 때문에 이간하는 말을 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납니다. 여기서 듣고서 이들을 이간하려고 저기서 말하지 않습니다. 저기서 듣고서 저들을 이간하려고 여기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와 같이 이간된 자들을 합치고 우정을 장려하며 화합을 좋아하고 화합을 기뻐하고 화합을 즐기며 화합하게 하는 말을 합니다. 그는 거친 말(욕설)을 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거친 말을 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납니다. 그는 유순하고 귀에 즐겁고 사랑스럽고 가슴에 와 닿고 예의바르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그런 말을 합니다. 그는 꾸며대는 말을 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꾸며대는 말을 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납니다. 그는 적절한 때에 말하는 자이고, 사실을 말하는 자이고, 이익되게 말하는 자이고, 법에 맞게 말하는 자이고, 율에 맞게 말하는 자여서 적절한 때에, 근거를 갖춘, 절제된, 이익되는 말을 합니다.


그는 씨앗류와 초목류을 손상시키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하루 한끼만 먹습니다. 그는 밤에 먹은 것을 떠나고 때 아닌때에 먹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춤, 노래, 음악, 연극을 관람하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화환을 두르고 향과 화장품을 바르고 장신구로 꾸미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높고 큰 침상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금과 은을 받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요리하지 않은 날곡식을 받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생고기를 받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여인이나 어린 소녀를 받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하인과 하녀를 받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염소와 양을 받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닭과 돼지를 받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코끼리, 소, 말 암말을 받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농토나 토지를 받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심부름꾼이나 전령으로 가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사고파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저울을 속이고 돈을 속이고 도량을 속이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뇌물을 주고 속이고 사기치고 어떠한 종류의 정직하지 않은 행위로부터 멀리 떠납니다. 그는 남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죽이거나 또는 누군가를 강제하고 구속하여 폭력을 행하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몸을 보호할 정도의 옷과 위장을 지탱할 정도의 음식으로 만족합니다. 그는 어디를 가더라도 그의 자구(資具)[*필수품]을 몸에 지니고 갑니다. 예를 들면 새가 어디를 날아가더라도 자기 양 날개만으로 날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비구는 몸을 보호할 정도의 옷과 몸을 지탱할 정도의 음식으로 만족합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그의 자구를 몸에 지니고 갑니다. 그는 이러한 성스러운 계의 조목을 구족하여 안으로 비난받을 일이 없는 행복을 경험합니다.

 

그는 눈으로 형상을 보면서 그 표상을 붙잡지 않으며, 뒤따르는 (세세한) 느낌(受)도 붙잡지 않습니다. 만약 그의 눈의 근(眼根)이 보호되지 않은 채 머무르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삿되고 선하지 않은 형상들의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눈의 근을 제어하기 위해서, 길들이기 위해서,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닦습니다. ···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 코로 냄새를 맡으면서 ··· 혀로 맛을 보면서 ··· 몸으로 감촉을 느끼면서 ··· 마음으로 법(마음현상)을 인식하면서(지각) 그 표상을 붙잡지 않으며, 뒤따르는 느낌도 붙잡지 않습니다. 만약 그의 마음의 근(意根)이 보호되지 않은 채 머무르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의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마음의 근을 제어하기 위해서, 길들이기 위해서,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닦습니다. 그는 이러한 성스러운 근의 보호를 구족하여 안으로 더럽혀지지 않는 행복을 경험합니다.

 

그는 나아갈때도 물러날 때도 [자신의 거동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正知] 행합니다. 앞을 볼 때도 돌아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구부릴 때도 펼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가사.발우, 의복을 지닐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먹을 때도 마실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대소변을 볼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걸으면서 서면서 앉으면서 잠들면서 잠을 깨면서 말하면서 침묵하면서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그는 이러한 성스러운 계의 조목을 잘 갖추고, 이러한 성스러운 감각의 근의 보호를 갖추고, 이러한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잘 갖추어 숲 속이나 나무 아래나 비어 있는 곳을 의지합니다. 그는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돌아와서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습니다. 그는 세상에 대한 욕심을 제거하여 욕심을 버린 마음으로 머뭅니다. 욕심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악의의 오점[악의와 성냄]을 제거하여 악의가 없는 마음으로 머뭅니다. 모든 생명의 이익을 위하여 연민하여 악의의 오점[악의와 성냄]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해태와 혼침을 제거하여 해태와 혼침이 없이 머뭅니다. 광명상(光明想)을 가져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正念‧正知]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들뜸과 후회를 제거하여 들뜨지 않고 머뭅니다. 안으로 고요히 가라앉은 마음으로 들뜸과 후회를 제거하여 들뜨지 않고 머뭅니다. 안으로 고요히 가라앉은 마음으로 들뜸과 후회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의심을 제거하여 의심을 건너서 머뭅니다. 선한 법들에 아무런 의문이 없어서 의심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산다까여, 그는 지혜를 무력화 시키는 마음의 오염원인 이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한 뒤에,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뭅니다. 산다까여, 이런 스승에게서 제자는 이런 고귀함을 얻습니다. 거기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확실한 범행을 살 것이고, 범행을 사는 자는 방법이 되는 유익한 법을 얻을 것입니다.

 

산다까여, 그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뭅니다. 산다까여, 이런 스승에게서 제자는 이런 고귀함을 얻습니다. 거기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확실한 범행을 살 것이고, 범행을 사는 자는 방법이 되는 유익한 법을 얻을 것입니다.

 

산다까여, 그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뭅니다. 산다까여, 이런 스승에게서 제자는 이런 고귀함을 얻습니다. 거기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확실한 범행을 살 것이고, 범행을 사는 자는 방법이 되는 유익한 법을 얻을 것입니다.

 

산다까여, 그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 머뭅니다. 산다까여, 이런 스승에게서 제자는 이런 고귀함을 얻습니다. 거기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확실한 범행을 살 것이고, 범행을 사는 자는 방법이 되는 유익한 법을 얻을 것입니다.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를 닦아,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없고,  유연케 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써,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여러 전생을 기억합니다.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백 천생, 수많은 무너지는 겁(세상), 수많은 이루어지는 겁, 수많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에 대해 기억합니다. '거기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거기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합니다.[宿命通] 산다까여, 이런 스승에게서 제자는 이런 고귀함을 얻습니다. 거기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확실한 범행을 살 것이고, 범행을 사는 자는 방법이 되는 유익한 법을 얻을 것입니다.

 

그는 이와 같이마음이 삼매를 닦아,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없고, 유연케 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써,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보는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인간을 뛰어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봅니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립니다. '참으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녀 삿된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혹은 다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녀 바른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좋은 곳에 나아가 하늘세계에 태어난다'라고. 이와 같이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봅니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립니다.[天眼通] 산다까여, 이런 스승에게서 제자는 이런 고귀함을 얻습니다. 거기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확실한 범행을 살 것이고, 범행을 사는 자는 방법이 되는 유익한 법을 얻을 것입니다.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를 닦아,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없고, 유연케 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써,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합니다. '이것이 괴뢰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번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그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볼 때 그는 감각적 쾌락의 번뇌로부터도 마음이 해탈합니다. 존재의 번뇌로부터도 마음이 해탈합니다. 무명의 번뇌로 부터도 마음이 해탈합니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깁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압니다. 산다까여, 이런 스승에게서 제자는 이런 고귀함을 얻습니다. 거기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확실한 범행을 살 것이고, 범행을 사는 자는 방법이 되는 유익한 법을 얻을 것입니다."

 

234. "아난다 존자시여, 비구가 모든 번뇌를 부수었고, 청정한 삶을 성취하고,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 윤회의 결박을 끊어 버리고, 올바른 궁극의 지혜에 의해서 해탈한 아라한이 되어도 감각적 쾌락을 즐깁니까?"

"산다까여, 비구가 모든 번뇌를 부수었고, 청정한 삶을 성취하고,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 운회의 결박을 끊어 버리고, 올바른 궁극의 지혜에 의해서 해탈한 아라한이 되면 다섯 가지 경우들을 범할 수 없습니다. 번뇌가 다한 비구는 살아있는 생명을 죽일 수 없습니다. 번뇌가 다한 비구는 주지 않은 것을 가질 수 없습니다. 번뇌가 다한 비구는 성행위를 할 수가 없습니다. 번뇌가 다한 비구는 거짓을 말할 수 없습니다. 번뇌가 다한 비구는 예전에 재가자였을 때처럼 소유물을 쌓아놓고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산다까여, 비구가 모든 번뇌를 부수었고, 청정한 삶을 성취하고,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 운회의 결박을 끊어 버리고, 올바른 궁극의 지혜에 의해서 해탈한 아라한이 되면 그는 이런 다섯 가지 경우들을 범할 수 없습니다." 

 

235. "아난다 존자시여, 비구가 모든 번뇌를 부수었고, 청정한 삶을 성취하고,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 운회의 결박을 끊어 버리고, 올바른 궁극의 지혜에 의해서 해탈한 아라한이 되면, 걸어 갈 때에도, 서 있을 때에도, 잠잘 때에도, 깨어 있을 때에도, 언제나 한결같이 '나의 번뇌는 다했다.'라는 앎과 봄이 현전합니까?"

"그렇다면 산다까여, 그대에게 비유를 들겠습니다. 비유에 의해서도 어떤 현명한 사람들은 말의 의미를 압니다. 예를 들면, 산다까여, 어떤 사람이 팔과 다리가 잘렸습니다. 그는 걸어갈 때도, 서 있을 때도, 잠잘 때도, 깨어 있을 때도, 언제나 한결같이 '나는 팔과 다리가 잘렸다'라고 알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을 되돌아 볼 때 '나는 팔과 다리가 잘렸다'라고 알겠습니까?"

아난다 존자시여, 그는 언제나 한결같이 '나는 팔과 다리가 잘렸다.'라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것을 되돌아 관찰할 때 '나는 팔과 다리가 잘렸다.'라고 압니다."  

"이처럼, 산다까여, 비구가 모든 번뇌를 부수었고, 청정한 삶을 성취하고,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 운회의 결박을 끊어 버리고, 올바른 궁극의 지혜에 의해서 해탈한 아라한이 되면 걸어 갈 때에도 서 있을 때에도 잠잘 때에도 깨어 있을 때에도 언제나 한결같이 '나의 번뇌는 다했다.'라는 앎과 봄이 현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되돌아 관찰할 때 '나의 번뇌는 다했다.'라고 압니다." 

 

236. "그런데, 아난다 존자시여, 이 법과 율에는 구원된 자(해탈한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산다까여, 단지 백 명도 아니고, 이백 명도 아니고, 삼백 명도 아니고, 사백 명도 아니고, 오백 명도 아닙니다. 이 법과 율에서 구원된 자(해탈한 자)는 훨씬 더 많습니다."

"경이롭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놀랍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참으로 자신의 법을 칭찬하지 않고, 남의 법을 비난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영역 안에서(교설의 토대 위에서) 법을 설하여 그렇게 많은 구원된 자를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죽은 자의 아들인 이 아지와까들은 자신들은 칭찬하고 남들을 비난하지만, 난다 왓차, 끼사 상낏짜, 막칼리 고살라 등 세 사람의 구원된 자만을 선언합니다."

 

*아들이 죽은 자의 아들(ime ajivika putta mataya putta)'에 대해서 주석서는 이 '아들이 죽은 자(putta-mata)'를 어머니(mata)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주석서는 '산다까는 이 법문을 듣고 아지와까(사명외도)는 죽었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말했다. 즉 아지와까는 죽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어머니는 죽은 아들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MA.iii.235)

 

그리고 산다까 유행승은 자신의 대중에게 말했다.

'존자들은 사문 고따마 아래서 범행을 닦으십시오. 지금 우리에게서 이득과 존경과 명성를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오.'라고.

이렇게 산다까 유행승은 자신의 대중에게 세존 아래서 범행을 닦을 것을 권유했다. 

 

 

산다까 경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