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N 121. 공(空)의 작은 경(cūḷasuññatasuttaṃ)
176.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있는 동쪽 숲에 있는 미가라마뚜(녹자모 강당) 강당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아난다 존자는 해거름에 낮 동안의 홀로 머묾에서 일어나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아서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삭까에서 나가라까라는 삭까의 성읍에 머무셨습니다. 세존이시여, 거기서 저는 '아난다여, 나는 요즈음 자주 공한 머묾으로 머문다(공에 들어 머문다).'라고 이렇게 세존의 곁에서 들었고, 곁에서 받아들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그것을 바르게 듣고 바르게 받아 들이고 바르게 사고하고 바르게 생각하는 것입니까?"
"아난다여, 참으로 그러하다. 그대는 바르게 듣고 바르게 받아들이고 바르게 사고하고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아난다여, 나는 전에도 그랬고, 요즈음도 자주 공한 머묾으로 머문다. 예를 들자면, 아난다여, 이 미가라마뚜 강당이 코끼리, 소, 말, 노새들이 공하고, 금이나 은도 공하고, 남자와 여자의 모임도 공하지만 오직 이 비구 승가 하나만이 공하지 않듯이, 이처럼 비구는 마을의 인식(想)을 마음에 집중하지 않고(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사람의 인식을 마음에 집중하지 않고, 숲이라는 인식 하나만을 마음에 집중한다. 그의 마음은 숲의 인식으로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유연해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그는 이렇게 철저히 안다. '마을이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사람이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숲이라는 인식 하나만큼의 번잡함만이 있다.'라고. 그는 '이 인식은 마을이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철저히 알고, 이 인식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철저히 안다. 그는 '숲이라는 인식 하나만큼은 공하지 않다.'라고 철저히 안다. 이처럼 참으로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은 공하다고 관찰하고,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존재하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철저히 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그에게 진실되고, 전도됨이 없고, 청정한 공의 경지가 생긴다(청정한 공에 들어감이 있다).
*나가라까(Nagaraka)혹은 낭가라까(Nangaraka)는 본서 제3권 「법탑 경」(M89)에서 보듯이 메다딸룸빠(Medatalumpa) 근처에 있는 성읍이다. 「법탑 경」에 의하면 빠세나디 꼬살라 왕이 이곳에 마지막으로 세존을 친견한 곳이기도 하다. 「상윳따 니까야」 제5권 「절반 경」(S45.2)도 이곳에 설하셨다.
*'공에 들어 머묾(공한 머묾으로 머묾)'은 sunnata-vihara를 옮긴 것인데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공에 들어 머묾(sunnatavihara)이란 공한 과의 증득으로 머묾(sunnata-phala-samapatti-vihara)를 뜻한다."(MA.iv.154)
"이것은 공을 수관(隨觀)하여(sunnata-anupassana-vasena) 얻은 아라한과의 증득을 말한다."(MAT.ii437)
본경의 가르침은 '사람이라는 인식으로 마음이라는 인식을 물리치고'부터 시작해서 7단계로 점진적으로 '청정한 공의 경지(parisuddha sunnata)'를 규명해 들어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극히 청정한 구경의 위없는 공(parisuddha param-anuttara sunnata)' 즉 '공을 통한 과의 증득(sunnata-phala-samapatti, MA.iv.154))'에 도달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공에 들어 머묾이라 할 수 있다.
*"'코끼리, 소, 말, 노새들이 공하고(sunno hatthi=gava-assa-valavena)'라고 하셨다. 물론 녹자모 강당에 나무로 만들었거나 흙으로 만들었거나 그림으로 그린 말 등도 있고, 의자등에 보석이 박혀 있기도 하고, 법을 듣거나 질문을 하기 위해 오가는 여자나 남자도 있으므로 공한 것은 아니지만, 감각기능이 있고 의식을 가진 즉 살아 움직이는 말 등이라든가 원하는 순간에 향유할 수 있는 보석이라든가 그곳에 정착해서 사는 여자나 남자가 없는 것을 두고 공하다고 하셨다."(MA.iv.150-151)
*'*'오직 이 비구 승가 하나만이 공하지 않듯이'는 bhikkhusamgham paticca ekattam을 옮긴 것이다. 이것을 직역하면 '비구 승가를 조건으로 하는 하나됨'이라는 뜻이지만 '하나의 공하지 않음이 있다(ekam asunnatam atthi)'라는 아래에 인용한 주석서의 설명을 따라 이렇게 옮겼다.
"비구들은 비록 탁발을 가더라도 녹자모 강당에 가져오는 음식을 받기 위해 남아있는 비구들도 있고 또 아픈 사람과 병자를 간호하는 비구들이 남아있다. 그러므로 항상 비구들이 있기 때문에 오직 비구 승가 하나만이 공하지 않다고 했다. 여기서 '하나됨(ekatta)'이란 하나의 상태(eka-bhava) 즉 하나의 공하지 않음이 있다(ekam asunnatam atthi)는 뜻이다. 즉 하나의 공하지 않은 상태가 있다(eko asunna-bhavo atthi)고 말씀하신 것이다."(MA.iv.151)
*'마을의 인식'은 마을이라는 존재하는 것을 통해서 생겼거나 혹은 오염원을 통해서 생긴 마을이라는 인식을 말하고, '사람의 인식'도 같은 방법으로 생긴 인식을 말한다.(MA.iv.151)
복주석서는 덧붙여 설명한다.
"존재하는 것을 통해서 생긴 인식(pavattana-vasena)이란 집, 길, 광장, 네 거리 등으로 인해 마을이라고 세상에 일어난 것을 통해서 생긴 인식을 말한다. 오염원을 통해서 생긴 인식이란 지지하거나 싫어함으로써 생긴 인식이다."(MAT.ii.322)
*"'숲이라는 인식 하나만을 마음을 기울인다(arannasannam paticca manasi karoti ekattam)'라고 하셨다. 이것은 숲이고 이것은 나무이고 이것은 바위이고 이것은 검푸른 빛이고 이것은 수풀이다라고 오직 하나의 숲을 연한 숲이라는 인식에 마음을 기울인다는 뜻이다.(MA.iv.151)
복주석서는 덧붙여 설명한다.
"나무 등을 조건으로 숲이라는 인식이 있고, 거기에 바위나 수풀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비록 구분이 있지만 그것을 취하지 않고 오직 숲 하나만을 조건한 숲이라는 인식에 마음을 기울인다."(MAT.ii.322)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te idha nasanti)'라고 하셨다. 존재하는 것을 통해서 생긴 번잡함(pavatta-daratha)이건 오염원을 통해서 생긴 번잡함(kilesa-daratha)이건, 마을이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일어날 수 있는 번잡함은 여기 숲이라는 인식에는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이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일어날 수 있는 번잡함도 여기 숲이라는 인식에는 없다는 말씀이다."(MA.iv.151)
복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한다.
"결과를 통해서 생긴 번잡함(pavatta-daratha)이란 적절한 편안함(passaddhi)이 없음으로 인해 거친 법이 일어나기 쉬운 것(olanka-dhamma-ppavatti-siddha)을 말하고, 오염원을 통해 생긴 번잡함(kilesa-daratha)이란 지지함과 싫어함을 통해서 생긴 것(anunaya-patigha-sambhava)을 말한다."(MAT.ii.332)
177. 아난다여, 더 나아가 비구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마음에 집중하지 않고, 숲이라는 인식을 마음에 집중하지 않고 땅이라는 인식 하나만을 마음에 집중한다. 그의 마음은 땅이라는 인식에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예를 들면, 아난다여, 소가죽을 막대기로 백 번을 두드려 잘 펼치면 주름이 없어진다. 이처럼, 아난다여, 비구는 이 땅의 높고 낮음, 강과 골짜기, 그루터기와 가시덤불과 나무토막, 편평하지 않은 산 등 그 어떤 것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땅이라는 인식 하나만을 마음에 집중한다. 그의 마음은 땅의 인식으로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그는 이렇게 철저히 안다. '사람이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숲이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땅이라는 인식 하나만큼의 번잡함만이 있다.'라고. 그는 '이 인식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철저히 알고, 이 인식은 숲이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철저히 안다. 그는 '땅이라는 인식 하나만큼은 공하지 않다.'라고 철저히 안다. 이처럼 참으로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은 공하다고 관찰하고,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존재하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철저히 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그에게 진실되고, 전도됨이 없고, 청정한 공의 경지가 생긴다(청정한 공에 들어감이 있다).
*'사람의 인식을 마음 기울이지 않고'라고 하셨다. 여기 비구는 마을의 인식(gāma-saññā)을 취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다. 사람의 인식으로 마을의 인식을 물리치고, 숲의 인식(arañña-saññā)으로 사람의 인식을, 땅의 인식(pathavī-saññā)으로 숲의 인식을, 공무변처의 인식으로 땅의 인식을, … 비상비비상처의 인식으로 무소유처의 인식을, 위빳사나로 비상비비상처의 인식을, 도(道)로써 위빳사나를 물리치고 점차적으로 구경의 공의 경지를 보이기 위해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숲의 인식을 버리고 땅의 인식(pathavī-saññā)을 마음 기울이는가? 숲의 인식으로 특별함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비옥한 땅을 보고 '여기 벼 모내기를 하면 벼가 잘 자라서 풍성하게 수확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백 번이고 땅을 쳐다보아도 벼 등을 거둘 수 없겠지만, 만약 그 땅에 그루터기 등 장애물을 제거하고 논을 갈아 씨를 뿌리면 수확할 수 있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숲이고, 이것은 나무이고, 이것은 산이고, 이것은 바위이고, 이것은 검푸른 빛이라고 백 번씩이나 숲의 인식을 마음 기울이더라도 근접삼매(upacāra)나 본삼매(samādhi)를 얻지 못한다.
그러나 땅의 인식으로는 항상 지녀야 할 명상주제인 땅의 까시나(pathavī-kasiṇa)를 익혀서 禪(선.jhānāni)을 얻고, 禪을 토대로 한 위빳사나를 증장시켜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숲의 인식을 버리고 땅의 인식을 마음 기울인다.”(MA.iv.152~153)
*'땅의 인식 한가지를'이라고 하셨다.이것은 일반적인 땅이 아닌 오직 까시나인 땅(kasiṇa-pathaviyaṃ yeva)을 조건으로 생긴 하나의 인식을 마음 기울이는 것이다.”(MA.iv.153)
178. 아난다여, 더 나아가 비구는 숲이라는 인식을 마음에 집중하지 않고, 땅이라는 인식을 마음에 집중하지 않고 공무변처라는 인식 하나만을 마음에 집중한다. 그의 마음은 공무변처라는 인식에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그는 이렇게 철저히 안다. '숲이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땅이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공무변처라는 인식 하나만큼은 번잡함이 있다.'라고. 그는 '이 인식은 숲이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철저히 알고, '이 인식은 땅이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철저히 안다. 그는 '공무변처라는 인식 하나만큼은 공하지 않다.'라고 철저히 안다. 이처럼 참으로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은 공하다고 관찰하고,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존재하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철저히 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그에게 진실되고, 전도됨이 없고, 청정한 공의 경지가 생긴다.
179. 아난다여, 더 나아가 비구는 땅이라는 인식을 마음에 집중하지 않고, 공무변처라는 인식을 마음에 집중하지 않고 식무변처라는 인식 하나만을 마음에 집중한다. 그의 마음은 식무변처라는 인식에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그는 이렇게 철저히 안다. '땅이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공무변처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식무변처라는 인식 하나만큼은 번잡함이 있다.'라고. 그는 '이 인식은 땅이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철저히 알고, '이 인식은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철저히 안다. 그는 '식무변처라는 인식 하나만큼은 공하지 않다.'라고 철저히 안다. 이처럼 참으로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은 공하다고 관찰하고,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존재하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철저히 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그에게 진실되고, 전도됨이 없고, 청정한 공의 경지가 생긴다.
180. 아난다여, 더 나아가 비구는 공무변처라는 인식을 마음에 집중하지 않고, 식무변처라는 인식을 마음에 집중하지 않고 무소유처라는 인식을 하나만을 마음에 집중한다. 그의 마음은 무소유처라는 인식에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그는 이렇게 철저히 안다. '공무변처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식무변처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무소유처라는 인식 하나만큼은 번잡함이 있다.'라고. 그는 '이 인식은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철저히 알고, '이 인식은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철저히 안다. 그는 '무소유처라는 인식 하나만큼은 공하지 않다.'라고 철저히 안다. 이처럼 참으로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은 공하다고 관찰하고,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존재하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철저히 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그에게 진실되고, 전도됨이 없고, 청정한 공의 경지가 생긴다.
181. 아난다여, 더 나아가 비구는 식무변처라는 인식을 마음에 집중하지 않고, 무소유처라는 인식을 마음에 집중하지 않고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
하나만을 마음에 집중한다. 그의 마음은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에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그는 이렇게 철저히 안다. '식무변처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무소유처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 하나만큼은 번잡함이 있다.'라고. 그는 '이 인식은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철저히 알고, '이 인식은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철저히 안다. 그는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 하나만큼은 공하지 않다.'라고 철저히 안다. 이처럼 참으로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은 공하다고 관찰하고,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존재하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철저히 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그에게 진실되고, 전도됨이 없고, 청정한 공의 경지가 생긴다.
182. 아난다여, 더 나아가 비구는 무소유처라는 인식을 마음에 집중하지 않고,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을 마음에 집중하지 않고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 하나만을 마음에 집중한다. 그의 마음은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에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그는 이렇게 철저히 안다. '무소유처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그러나 이 만큼의 번잡함이 있으니 생명을 조건으로 하고 이 몸을 의지하는 여섯 감각장소(六處)와 관련된 번잡함이다.'라고. 그는 '이 인식은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철저히 알고, '이 인식은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철저히 안다. 그는 '생명을 조건으로 하고 이 몸을 의지하는 여섯 감각장소에 관련된 만큼은 공하지 않다.'라고 철저히 안다. 이처럼 참으로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은 공하다고 관찰하고,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존재하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철저히 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그에게 진실되고, 전도됨이 없고, 청정한 공의 경지가 생긴다.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animitta ceto=samadhi)'란 위빳사나와 함께한 마음의 삼매(vipassana-citta-samadhi)를 말한다. 그는 영원하다는 표상 등이 없기 때문에(nicca-nimittadi-virahita) 표상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MA.iv.153)
*'생명을 조건으로 하고'라고 하셨다. 명근(命根, jīvitindriya)이 살아있는 한 그 명근 때문에 생기는 번잡함 정도만이 있다고 꿰뚫어 안다는 뜻이다.”(MA.iv.153)
*여기서 '이 몸(imam eva kāyaṃ)'이란 위빳사나의 토대를 보이신 것이고,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MA.iv.153)
183. 아난다여, 더 나아가 비구는 무소유처라는 인식을 마음에 집중하지 않고,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을 마음에 집중하지 않고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 하나만을 마음에 집중한다. 그의 마음은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에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으을 가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그는 이렇게 철저히 안다. '이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도 형성된 것이고 의도된 것이다.'라고. '어떤 것이든 형성된 것이고 의도된 것은 무상하고 소멸되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그가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그에게 감각적 쾌락에 기인한 번뇌로부터도 마음이 해탈하고, 존재에 기인한 번뇌로부터도 마음이 해탈하고, 무명에서 기인한 번뇌로부터도 마음이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긴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안다.
그는 이렇게 철저히 안다. '감각적 쾌락에 기인한 번뇌를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존재에 기인한 번뇌를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무명에서 기인한 번뇌를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그러나 이 만큼의 번잡함이 있으니 생명을 조건으로 하고 이 몸을 의지하는 여섯 감각장소에 관련된 번잡함이다.'라고. 그는 '이 인식은 감각적 쾌락에 기인한 번뇌가 공하다. 이 인식은 존재에 기인한 번뇌가 공하다. 이 인식은 무명에 기인한 번뇌가 공하다.'라고 철저히 안다. 그는 '생명을 조건으로 하고 이 몸을 의지하는 여섯 감각장소에 관련된 것만큼은 공하지 않다.'라고 철저히 안다. 이처럼 참으로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은 공하다고 관찰하고,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존재하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철저히 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그에게 진실되고, 전도됨이 없고, 청정한 공의 경지가 생긴다.
*"'감각적 쾌락에 기인한 번뇌 때문에 생기는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ye assu daratha kamasavam paticca tedha nasanti).'는 것은 자신이 체득한 성스러운 도와 성스러운 과에는 그런 번잡함이 없다는 뜻이다."(MA.iv.154)
*"'이 몸을(imameva kayam)'이라고 하신 것은 집착의 자취가 남아 있는 번잡함을 보이기 위해(upadisesa-daratha-dassan-attha) 말씀하신 것이다."(MA.iv.154)
한편 복주석서는 "여기서 집착의 자취가 남아 있는 번잡함이란 오염원으로서의 재생의 근거(kiles-upadhi)는 완전히 제거되었지만 다섯 가지 무더기로서의 재생의 근거(khandhopadhi)는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그로 인한 번잡함이 존재의 근거로 인한 번잡함이다."(MAT.ii.323)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84. 아난다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과거에 청정함을 넘어선 위없는 (구경(究竟)의) 공을 성취하여 머물렀던 자들은 모두 이 청정함을 넘어선 공을 성취하여 머물렀다. 아난다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미래에 청정함을 넘어선 위없는 공을 성취하여 머물 자들은 모두 이 청정함을 넘어선 위없는 공을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 아난다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현재에 청정함을 넘어선 위없는 공을 성취하여 머무는 자들은 모두 이 청정함을 넘어선 위없는 공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우리는 청정함을 넘어선 위없는 공을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아난다여, 그대들은 이렇게 닦아야 한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 존자는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
공(空)의 작은 경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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