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맛지마 니까야

M122. 공에 대한 큰(긴) 경(Mahāsuññatasuttaṃ)

실론섬 2016. 6. 7. 12:26

공(空)에 대한 큰(긴) 경 

Mn122 MAJJHIMA NIKâYA III III. 3. 2. Mahàsu¤¤atasuttaü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게서는 삭까의 까삘라왓투에 있는 니그로다 숲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시고 깟빌라왓투로 탁발을 가셨다. 깟빌라왓투에서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 낮 동안 홀로 머물기 위해 삭까 사람 깔라케마까가 건립한 승원으로 가셨다. 삭까 사람 깔라케마까가 건립한 승원에는 거처가 많이 마련되어 있었다. 세존께서는 삭까 사람 깔라케마까가 건립한 승원에 거처가 많이 마련되어 있는 것을 보시고 이런 생각이 드셨다.

'삭까 사람 깔라케마까가 건립한 승원에는 많은 거처가 마련되어 있다. 참으로 여기에는 많은 비구들이 머무는가?'라고.

 

*'깔라케마카(Kala-khemaka)는 삭까족 출신이며 그의 이름은 케마까(Khemaka)이다. 그의 피부가 검었기 때문에 '검다'는 뜻의 칼라(kala)라는 단어와 함께 칼라케마까라고 한다. 깔라케마까의 승원은 깔라케마카가 니그로다 숲의 한쪽에 지은 것으로 그곳에 침상, 의자, 방석, 베개, 짚으로 만든 깔개, 나뭇잎으로 만든 깔개 등이 정리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마치 비구 대중들의 처소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래서 '거처가 많이 마련되어 있다'고 한 것이다.(MA.iv.155)

 

2. 그때 아난다 존자가 많은 비구들과 함께 삭까의 가따 승원에서 가사를 만들고 있었다. 세존께서는 해거름에 낮 동안의 홀로 머묾에서 일어나셔서 삭까의 가따 승원으로 가셨다. 가서는 준비된 자리에 앉으셨다. 자리에 앉은 뒤 세존께서는 아난다 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삭까 사람 깔라케마까가 건립한 승원에는 많은 거처가 마련되어 있다. 거기에 많은 비구가 머무는가?"라고.

"세존이시여, 삭까 사람 깔라케마까가 건립한 승원에는 많은 거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많은 비구가 머뭅니다. 세존이시여, 저희가 가사를 만드는 때입니다." 

 

*비구들이 무리를 이루어 사는 것을 좋아하고 즐기면 적절하지 못한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공에 대한 법문을 시작하신 것이다.(MA.iv.156)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서 이 비구들이 일을 좋아해서 모여 머무는 것이 아니고 가사를 만들기 위해 이렇게 모여 머문다고 말씀드리는 것이다.(MA.iv.157)

 

"아난다여, 교제하기를 즐기고, 교제하기를 좋아하고, 교제하는 기쁨에 묶이고, 무리 짓기를 즐기고, 무리 짓기를 좋아하고, 무리 짓기를 기뻐하는 비구는 빛나지 않는다. 참으로, 아난다여, 교제하기를 즐기고, 교제하기를 좋아하고, 교제하는 기쁨에 묶이고, 무리 짓기를 즐기고, 무리 짓기를 좋아하고, 무리 짓기를 기뻐하는 비구가 출리의 즐거움, 떠남의 즐거움, 고요함의 즐거움, 깨달음의 즐거움을 원하는 대로 어렵지 않고 괴롭지 않게 얻을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아난다여, 무리를 가까이 하지 않고 머무는 어떤 비구가 출리의 즐거움, 떠남의 즐거움, 고요함의 즐거움, 깨달음의 즐거움을 원하는 대로 어렵지 않고 괴롭지 않게 얻는 것을 바란다면, 그런 경우는 있다.

 

참으로, 아난다여, 교제하기를 즐기고, 교제하기를 좋아하고, 교제하는 기쁨에 묶이고, 무리 짓기를 즐기고, 무리 짓기를 좋아하고, 무리 짓기를기뻐하는 비구가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이나 일시적이지 않는 흔들리지 않은 마음의 해탈을 성취하여 머물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아난다여, 무리를 가까이 하지 않고 머무는 어떤 비구가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이나 일시적이지 않는 흔들리지 않은 마음의 해탈을 성취하여 머물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아난다여, 어디서든 좋아하고 어떻게든 즐거워하는 물질(색.色)이 변하여 다른 것이 될 때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지 않을 어떤 물질도 나는 보지 못한다."

 

3. "아난다여, 모든 표상(상.相)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안으로 공을 구족하여 머무는 여래가 깨달은 머묾이 있다. 만약에. 아난다여,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여래에게 비구나 비구니나 청신사나 청신녀나 왕이나 대신이나 외도나 외도의 제자들이 찾아오면, 그때 마음이 멀리 떠남으로 향하고 멀리 떠남으로 기울고 멀리 떠남으로 이끌리고 출리를 기뻐하고 번뇌의 원인이 되는 법들로부터 완전히 떠난 여래는 묶이지 않기를 확실히 권유하는 말을 한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만약에 비구가 '안으로 공을 구족하여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한다면, 아난다여, 그 비구는 마음을 안으로 진정시키고 가라앉게 하고 집중되게 하여 삼매에 들어야 한다."

 

4. 그러면, 아난다여, 어떻게 비구는 마음을 안으로 진정시키고 가라앉게 하고 집중되게 하여 삼매에 드는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와 미세한 사유(지속적 고찰)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희열)과 즐거움(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 고찰.伺)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기쁨이 떠나 평정(평온)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제3선(三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을 지닌 제4선(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렇게, 아난다여, 비구는 마음을 안으로 진정시키고 가라앉게 하고 집중되게 하여 삼매에 든다. 그는 안으로 공()을 사고한다. 안으로 공에 마음을 기울이는 그에게 마음은 공으로 다가가지 않고 유연해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고 해탈하지 않는다아난다여, 이런때 그 비구는 '안으로 공에 마음을 기울이는 나에게 마음은 공으로 다가가지 않고 유연해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고 해탈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그는 밖으로 공을 사고한다. ··· 안팎으로 공을 사고한다. ···그는 흔들리지 않음을 사고한다. 안으로 흔들리지 않음에 마음을 기울이는 그에게 마음은 흔들리지 않음에 다가가지 않고 유연해지지 않고 해탈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이런때 그 비구는 '안으로 흔들리지 않음에 마음을 기울이는 나에게 마음은 흔들리지 않음으로 다가가지 않고 유연해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고 해탈하지 않는다.' 라고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그로 인해, 아난다여, 비구는 그 이전의 삼매의 표상에 마음을 안으로 진정시키고 가라앉게 하고 집중되게 하고 삼매에 들어야 한다. 그는 안으로 공을 사고한다. 안으로 공에 마음을 기울이는 그에게 마음은 공으로 다가가고 유연해지고 안정되고 해탈한다. 아난다여, 이런때 그 비구는 '안으로 공에 마음을 기울이는 나에게 마음은 공으로 다가가고 유연해지고 안정되고 해탈한다.'라고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그는 밖으로 공을 사고한다. ··· 그는 안팎으로 공을 사고한다. ··· 는 흔들림 않음을 사고한다. 안으로 흔들리지 않음에 마음을 기울이는 그에게 마음은  흔들리지 않음으로 다가가고 유연해지고 안정되고 해탈한다아난다여, 이런때 그 비구는 '안으로 흔들리지 않음에 마음을 기울이는 나에게 마음은  흔들리지 않음으로 다가가고 유연해지고 안정되고 해탈한다.'라고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5. "아난다여, 만약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의 마음이 경행(輕行)으로 기울면, 그는 '이렇게 경행하는 나에게 간탐과 고뇌와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흘러들지 않을 것이다.'라며 경행한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아난다여, 만약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의 마음이 서 있음으로 기울면, 그는 '이렇게 서 있는 나에게 간탐과 고뇌와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흘러들지 않을 것이다.'라며 서 있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아난다여, 만약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의 마음이 앉음으로 기울면, 그는 '이렇게 앉아있는 나에게 간탐과 고뇌와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흘러들지 않을 것이다.'라며 앉아 있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아난다여, 만약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의 마음이 누움으로 기울면, 그는 '이렇게 누워있는 나에게 간탐과 고뇌와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흘러들지 않을 것이다.'라며 누워있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아난다여, 만약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의 마음이 이야기로 기울면, 그는 '왕에 대한 이야기, 도둑에 대한 이야기, 대신들에 대한 이야기, 군대에 대한 이야기, 공포에 대한 이야기, 전쟁에 대한 이야기, 음식에 대한 이야기, 음료에 대한 이야기, 의복에 대한 이야기, 침상에 대한 이야기, 화환에 대한 이야기, 향료에 대한 이야기, 친족에 대한 이야기, 탈것에 대한 이야기, 마을에 대한 이야기, 도읍에 대한 이야기, 도시에 대한 이야기, 지방에 대한 이야기, 여자에 대한 이야기, 영웅에 대한 이야기, 거리에 대한 이야기, 우물에 대한 이야기, 전에 죽은 자에 대한 이야기, 잡다한 이야기, 세상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 바다에 대한 이야기, 이렇다거나 이렇지 않다는 이야기 등 하천하고, 비천하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으로 이끌지 못하고, 염오로 이끌지 못하고, 탐냄의 떠남으로 이끌지 못하고, 소멸로 이끌지 못하고, 평안으로 이끌지 못하고, 철저한 앎으로 이끌지 못하고, 완전한 깨달음으로 이끌지 못하고, 열반으로 이끌지 못하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아난다여, 그는 '원하는 것이 적음에 대한 이야기, 만족에 대한 이야기, 떠님에 대한 이야기, 교제하지 않음에 대한 이야기, 정진에 대한 이야기, 계에 대한 이야기, 삼매에 대한 이야기, 지혜에 대한 이야기, 해탈에 대한 이야기, 해탈지견에 대한 이야기 등 더 높은 삶에 대한 것이고, 마음의 장애에서 벗어남에 적합한 것이고, 염오(싫어하여 떠남)로, 탐냄의 떠남으로, 소멸로, 평안으로, 철저한 앎으로, 완전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끄는 이런 이야기를 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그대 바른 앎이 있다.

 

만약에, 아난다여,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의 마음이 사유로 기울면, 그는 '감각적 쾌락의 사유, 분노의 사유, 해코지의 사유 등 하천하고, 비천하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며, 염오로 이끌지 못하고, 탐냄의 떠남으로 이끌지 못하고, 소멸로 이끌지 못하고, 평안으로 이끌지 못하고, 철저한 앎으로 이끌지 못하고, 완전한 깨달음으로 이끌지 못하고, 열반으로 이끌지 인도하지 못하는 이런 사유를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아난다여, '출리의 사유, 분노 않음의 사유, 해코지 않음의 사유 등 성스러운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고, 그것을 닦는 자를 바르게 괴로움의 부서짐으로 이끄는 이런 사유들을 나를 떠오르게 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6. "아난다여, 이런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탐욕에 묶인 것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자극하고 매혹적인,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 ···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 ··· 혀로 인식되는 맛들,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자극하고 매혹적인,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 아난다여, 이런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이 탐욕에 묶인 것이 있다.

아난다여, 비구는 언제든지 '이런저런 경우에 이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탐욕에 묶인 것에 대한 마음의 행위가 나에게 일어나는가?'라고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살펴보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마음을 돌이켜 살펴보는 비구가 '이런저런 경우에 이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탐욕에 묶인 것에 대한 마음의 행위가 일어난다.'라고 알아 차리면, 아난다여, 이렇게 있는 그 비구는 '이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탐욕에 묶인 것에 대한 갈애가 나에게서 버려지지 않았다.'라고 알아차린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다시, 아난다여, 만약 마음을 돌이켜 살펴보는 비구가 '이런저런 경우에 이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탐욕에 묶인 것에 대한 마음의 행위가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알아 차리면, 아난다, 이렇게 있는 그 비구는 '이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탐욕에 묶인 것에 대한 갈애가 나에게서 버려졌다.'라고 알아 차린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7. 아난다여,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五取蘊]이 있다. 비구는 언제든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면서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물질(色)이다.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으낌(受)이다.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인식(想이다. 이것이 인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인식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형성(行)이다. 이것이 형성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형성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의식(識)이다. 이것이 의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의식의 사라짐이다.'라고. 이런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에 대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면서 머무는 비구에게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에 대해 '내가 있다.'라는 자만이 버려진다. 아난다여, 이렇게 있는 그 비구는 '이런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에 대해 '내가 있다'라는 자만는 버려졌다.'라고 알아 차린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아난다여, 이런 그 법들은 전적으로 유익하고, 유익함에 토대한 것이고, 성스럽고, 세상을 넘어선 것이고, 사악한 마라가 근접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난다여, 어떤 이유를 볼 때, 비록 스승이 내치더라도 제자는 스승을 따라야 하는가?"
"세존이시여, 참으로 법은 세존을 근원(뿌리)으로 하며, 세존에 의해 이끌어 지는 것이며, 세존을 귀의처로 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그 뜻을 친히 설명해주시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세존의 말씀을 잘 듣고 비구들은 마음에 새겨 지닐 것입니다." 

 

8. "제자가 스승을 따르는 것은 경이나 응송(應誦)이나 수기(授記) 때문에 스승을 따라서는 안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참으로, 아난다여, 오랫동안 듣고 만족하고 말에 의해 익숙해지고 마음으로 숙고하고 견해로써 잘 통찰한 그 법들이 있다. 비록 내치더라도, 아난다여, 제자가 스승을 따르는 것은 '바램이 적음에 대한 이야기, 만족에 대한 이야기, 떠남에 대한 이야기, 교제하지 않음에 대한 이야기, 정진에 대한 이야기, 계에 대한 이야기, 삼매에 대한 이야기, 지혜에 대한 이야기, 해탈에 대한 이야기, 해탈지견에 대한 이야기 등 더 높은 삶에 대한 것이고, 마음의 장애에서 벗어남에 적합한 것이고, 염오로, 탐냄의 떠남으로, 소멸로, 평안으로철저한 앎으로, 완전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끄는 이런 이야기를 위해서 제자는 설령 스승이 내치더라도 스승을 따라야 한다.

 

이런 때에, 아난다여, 스승의 불행이 있다. 이런 때에 제자의 불행이 있다. 이런 때에 범행(梵行)을 닦는 자의 불행이 있다."

 

9. "그러면, 아난다여, 어떻게 스승의 불행이 있는가?

여기, 아난다여, 어떤 스승은 숲 속이나 나무 아래나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숲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 이처럼 홀로 머무는 그에게 성읍이나 지방에 있는 바라문이나 장자들이 찾아온다. 그는 성읍이나 지방에 있는 바라문이나 장자들이 찾아왔을 때 미혹에 빠져 갈망하고 탐욕에 몰입하고 풍족한 삶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아난다여, 스승의 불행이라고 불린다. 스승이 불행에 처했을 때 그에게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며, 번민을 가져다주고, 괴로운 과보를 초래하며, 미래에 태어나고 늙고 죽음으로 이끄는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있다. 이렇게, 아난다여, 스승의 불행이 있다."

 

10. "그러면, 아난다여, 어떻게 제자의 불행이 있는가?

다시, 아난다여, 그 스승의 홀로 머묾을 본받아 그 스승의 제자는 숲 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숲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 이처럼 홀로 머무는 그에게 성읍이나 지방에 있는 바라문이나 장자들이 찾아온다. 그는 성읍이나 지방에 있는 바라문이나 장자들이 찾아왔을 때 미혹에 빠져 갈망하고 탐욕에 몰입하고 풍족한 삶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아난다여, 제자의 불행이라고 불린다. 제자가 불행에 처했을 때 그에게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며, 번민을 가져다주고, 괴로운 과보를 초래하며, 미래에 태어나고 늙고 죽음으로 이끄는 악하고 해로운 법들이 있다. 이렇게, 아난다여, 제자의 불행이 있다.

 

11. "그러면, 아난다여, 어떻게 범행을 닦는 자의 불행이 있는가?

여기, 아난다여, 아라한[araham]이시며, 모든 법을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분(samma sambuddho)이시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vijjacaranasampanna)이시며, 열반으로 잘 가신 분(sugato)이시며, 중생들의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lokavidu)이시며, 위 없으신 분(anuttaro)이시며, 어리석은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purisadhammasarathi)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satthadevamanusam)이시며, 깨달은 분(buddho)이시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세존)(bahgava)인 여래가 세상에 출현한다. 그는 숲 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숲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 그가 이처럼 홀로 머물 때에 성읍이나 지방에 있는 바라문이나 장자들이 찾아온다. 그는 성읍이나 지방에 있는 바라문이나 장자들이 찾아왔을 때 미혹에 빠져 갈망하지 않고 탐욕에 몰입하지 않고 풍족한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난다여, 그 스승의 홀로 머묾을 본받아 숲 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숲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 이처럼 홀로 머무는 그에게 성읍이나 지방에 있는 바라문이나 장자들이 찾아온다. 그는 성읍이나 지방에 있는 바라문이나 장자들이  찾아왔을 때 미혹에 빠져 갈망하고 탐욕에 몰입하고 풍족한 삶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아난다여, 범행을 닦는 자의 불행이라고 불린다. 범행을 닦는 자가 불행에 처했을 때 그에게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며, 번민을 가져다주고, 괴로운 과보를 초래하며, 미래에 태어나고 늙고 죽음으로 이끄는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있다. 이렇게, 아난다여, 범행을 닦는 자의 불행이 있다.  

 

거기서, 아난다여, 이런 스승의 불행, 이런 제자의 불행보다 이런 범행을 닦는 자의 불행이 과보가 더 괴롭고, 과보가 더 혹독하고, 심지어 악처로 이끈다."

 

12. "그러므로 아난다여, 나를 종교적 삶의 친구로 삼아라. 종교적 삶의 적으로 삼지 말라. 그러면 그대들에게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이 될 것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제자들은 어떻게 스승을 적으로 삼고 친구로 삼지 않는가?

여기, 아난다여, 동정하고 그들의 이익을 바라는 스승은 연민을 일으켜 제자들을 위해 법을 설한다. '이것은 그대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이것은 그대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라고. 그의 제자들은 들으려 하지 않고 귀를 기울이지 않고 궁극의 앎을 위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들은 스승의 교법에서 벗어나서 살아간다. 이렇게, 아난다여, 제자들은 스승을 적으로 삼고 친구로 삼지 않는다.

 

그러면 아난다여, 제자들은 어떻게 스승을 친구로 삼고, 적으로 삼지 않는가?

여기, 아난다여, 동정하고 그들의 이익을 바라는 스승은 연민을 일으켜 제자들을 위해 법을 설한다. '이것은 그대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이것은 그대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라고. 그의 제자들은 들으려 하고 귀를 기울이고 궁극의 앎을 위한 마음을 일으킨다. 그들은 스승의 교법에서 벗어나지 않고 살아간다. 이렇게, 아난다여, 제자들은 스승을 친구로 삼고, 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나를 종교적 삶의 친구로 삼아라. 종교적 삶의 적으로 삼지 말라. 그러면 그대들은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이 될 것이다. 아난다여, 나는 도공이 굽지 않은 도자기를 조심스럽게 다루듯이 그대들에게 애쓰지 않을 것이다. 아난다여, 나는 거듭 지적하면서 말할 것이다. 아난다여, 나는 거듭해서 거듭해서 말할 것이다. 근기가 수승한 자는 머물 것이다." 

 

13,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아난다 존자는 기뻐하며 세존께서 설하신 것을 찬탄하였다.

 

 

Mahāsuññatasuttaṃ niṭṭhitaṃ dutiyaṃ.

공(空)에 대한 긴 경(M122)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