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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N 144. 찬나를 위한 가르침 경(channovādasuttaṃ)

실론섬 2016. 6. 20. 15:14

MN 144. 찬나를 위한 가르침 경(channovādasuttaṃ)

 

389.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사리뿟따 존자와 마하쭌다 존자와 찬나 존자는 독수리봉 산에 머물렀다. 그 무렵 찬나 존자가 중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자 사리뿟다 존자는 해거름에 홀로 머묾에서 일어나서 마하쭌다 존자에게 다가갔다. 다가가서는 마하쭌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쭌다여, 찬나 존자에게 병문안을 갑시다."

"그럽시다, 도반이여."라고 마하쭌다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대답했다.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와 마하쭌다 존자는 찬나 존자에게 갔다. 가서는 찬나 존자와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서로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아서 사리뿟따 존자는 찬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찬나여, 그대는 참을만합니까? 회복될 것 같습니까? 괴로운 느낌이 더 커지지 않고 진정됩니까? 더 심해지지 않고 낫고 있다고 알겠습니까?"라고.  

"도반 사리뿟따여, 나는 참을만하지 않고 회복될 것 같지 않습니다. 나에게 아주 괴로운 느낌이 진정되지 않고 더 커집니다. 낫지 않고 더 심해지는 것을 알겠습니다. 예를 들면 도반 사리뿟따여, 마치 힘센 사람이 시퍼런 칼로 머리를 쪼갤 것입니다. 이처럼, 도반 사리뿟따여, 나에게 거센 바람이 제 머리를 흔듭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나는 참을만하지 않고 회복될 것 같지 않습니다. 나에게 아주 괴로운 느낌이 진정되지 않고 더 커집니다. 낫지 않고 더 심해지는 것을 알겠습니다. 예를 들면 도반 사리뿟따여, 힘센 사람이 튼튼한 가죽끈으로 머리를 감아쥘 것입니다. 이처럼, 도반 사리뿟따여, 나에게 극심한 두통이 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나는 참을만하지 않고 회복될 것 같지 않습니다. 나에게 아주 괴로운 느낌이 진정되지 않고 더 커집니다. 낫지 않고 더 심해지는 것을 알겠습니다. 예를 들면, 도반 사리뿟따여, 능숙한 백정이나 그의 제자가 예리한 도살용 칼로 배를 가를 것입니다. 이처럼, 도반 사리뿟따여, 나에게 거센 엄청난 바람이 배를 휘젓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나는 참을만하지 않고 회복될 것 같지 않습니다. 나에게 아주 괴로운 느낌이 진정되지 않고 더 커집니다. 낫지 않고 더 심해지는 것을 알겠습니다. 예를 들면 도반 사리뿟따여, 힘센 두 사람이 약한 사람의 양팔을 붙잡고 숯불 구덩이에서 그대로 태울 것이고 뜨겁게 할 것입니다. 이처럼, 도반 사리뿟따여, 나에게 몸에서 엄청난 열이 납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나는 참을만하지 않고 회복될 것 같지 않습니다. 나에게 아주 괴로운 느낌이 진정되지 않고 더 커집니다. 낫지 않고 더 심해지는 것을 알겠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나는 칼을 사용하여 자살하려 합니다. 나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나는 생명을 바라지 않습니다)."

 

390. "찬나 존자는 칼을 사용하여 자살하지 마십시오. 찬나 존자는 회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찬나 존자가 회복하기를 원합니다만일 찬나 존자에게 적당한 음식이 없다면 내가 찬나 존자를 위해 적당한 음식을 찾아드리겠습니다. 만일 찬나 존자에게 적당한 약이 없다면 내가 찬나 존자를 위해 적절한 약을 찾아드리겠습니다. 만일 찬나 존자에게 적당한 간병인이 없다면 내가 찬나 존자를 간병하겠습니다. 찬나 존자는 칼을 사용하여 자살하지 마십시오. 찬나 존자는 회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찬나 존자가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나에게 적당한 음식이 없지 않습니다. 나에게 적당한 약이 없지 않습니다. 나에게 적당한 간병인이 없지 않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나는 오랜 세월 기쁘게 스승님을 모셨습니다. 기쁘지 않게 모신 것이 아닙니다. '찬나 비구는 비난받을 일 없이 칼을 사용하여 자살을 할 것이다.'라고 이렇게, 도반 사리뿟따여, 받아들여 주십시오." 

”만약 찬나 존자가 우리의 질문에 대답해 주실 수 있다면, 우리는 찬나 존자에게 어떤 주제에 대해 물어보겠습니다.”

“물어보십시오, 도반 사리뿟따여, 들으면 내가 알 것입니다.”

 

391. "도반 찬나여, 눈과 눈의 의식 그리고 눈의 의식에 의해 알 수 있는 법들을(눈의 의식으로 인식해야 하는 법들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깁니까? 도반 찬나여, 귀와 귀의 의식 ··· 도반 찬나여, 코와 코의 의식 ··· 도반 찬나여, 혀와 혀의 의식 ··· 도반 찬나여, 몸과 몸의 의식 ··· 도반 찬나여, 마음과 마음의 의식(마음에 의한 식별) 그리고 마음의 의식에 의해 알 수 있는 법들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깁니까?" 

"도반 사리뿟따여, 눈과 눈의 의식 그리고 눈의 의식에 의해 알 수 있는 법들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깁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귀와 귀의 의식 ··· 도반 사리뿟따여, 코와 코의 의식 ··· 도반 사리뿟따여, 혀와 혀의 의식 ··· 도반 사리뿟따여, 몸과 몸의 의식 ··· 도반 사리뿟따여, 마음과 마음의 의식 그리고 마음의 의식에 의해 알 수 있는 법들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깁니다." 

 

392. "도반 찬나여, 눈과 눈의 의식 그리고 눈의 의식에 의해 알 수 있는 법들에 대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있는 그대로 알았기에 눈과 눈의 의식 그리고 눈의 의식에 의해 알 수 있는 법들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깁니까? 도반 찬나여, 귀와 귀의 의식 ··· 도반 찬나여, 코와 코의 의식 ··· 도반 찬나여, 혀와 혀의 의식 ··· 도반 찬나여, 몸과 몸의 의식 ··· 도반 찬나여, 마음과 마음의 의식그리고 마음의 의식에 의해 알 수 있는 법들에 대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있는 그대로 알았기에 마음과 마음의 의식 그리고 마음의 의식에 의해 알 수 있는 법들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깁니까?" 

"도반 사리뿟따여, 눈과 눈의 의식 그리고 눈의 의식에 의해 알 수 있는 법들에 대해 멸을 보고 소멸을 있는 그대로 알았기에 눈과 눈의 의식 그리고 눈의 의식에 의해 알 수 있는 법들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깁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귀와 귀의 의식 ··· 도반 사리뿟따여, 코와 코의 의식 ··· 도반 사리뿟따여, 혀와 혀의 의식 ··· 도반 사리뿟따여, 몸과 몸의 의식 ··· 도반 사리뿟따여, 마음과 마음의 의식 그리고 마음의 의식에 의해 알 수 있는 법들에 대해 소멸을 보고 소멸을 있는 그대로 알았기에  마음과 마음의 의식 그리고 마음의 의식에 의해 알 수 있는 법들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깁니다."

 

393. 이렇게 말했을 때, 마하쭌다 존자가 찬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도반 찬나여, 이것도 그분 세존의 가르침이라고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의지하는 자에게 동요가 있고, 의지하지 않는 자에게 동요가 없다. 동요가 없을 때 진정이 있고(편안함이 있고), 진정이 있을 때 치우침(성향)이 없다. 치우침이 없을 때 오고 감이 없고, 오고 감이 없을 때 죽고 태어 남이 없다. 죽고 태어남이 없을 때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없고 그 둘의 중간도 없다. 이것이 괴로움의 끝이다.'라고."

사리뿟따 존자와 마하쭌다 존자는 찬나 존자에게 이런 도움말을 주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갔다.

 

*'의지하는 자(nissita)'란 갈애와 사견으로 의지하는 자를 말한다.(MA.v.82)
*'동요한다(calita)'는 것은 흔들린다는 뜻이다. 즉 찬나 존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느낌을 견디지도 못하고, 나는 느낀다.'라거나, '나의 느낌'이라는 생각을 제거하지도 못하고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는 말이다.(SA.ii.372)
*'진정(편안함)'이란 것은 몸과 마음이 진정되다, 오염원으로부터 진정되다는 뜻이다.(MA.v.83)
*'치우침(성향.nati)'이란 갈애에 의한 치우침을 뜻한다. 이것은 존재를 위한 집착, 강박관념을 말한다. 이것이 없을 때 재생연결에 의한 '다시 돌아 옴'이라는 것도 없고 죽음에 의한 '가는 것'이라는 것도 없다.(MA.v.83)
*'그 둘의 중간도 없다'라는 말을 취해서 중유를 인정하려는 사람들의 주장은 아무 쓸모가 없다. 중유라는 존재는 아비담마(초기불교/상좌부불교)에서 거부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간도'라는 단어는 다른 것을 상정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이 둘 다가 아닌 다른 것을 상정함도 없다는 뜻이 된다.(SA.ii.372-373)

 

394. 찬나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와 마하쭌다 존자가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칼을 사용하여 자살을 했다. 그러자 사리뿟따 존자는 세존께 다가갔다. 다가가서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아서 사리뿟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찬나 존자가 칼을 사용하여 자살을 했습니다. 그가 간 곳은 어디입니까? 어디에 태어났습니까?"

"사리뿟따여, 찬나 비구가 그대의 면전에서 비난받을 일이 없음을(결점 없음을) 말하지 않았는가?"

"세존이시여, 뽑바지라라는 왓지족의 마을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찬나 존자와 친하고 우호적이지만 비난받는 가문이 있습니다."

"사리뿟따여, 찬나 비구와 친하고 우호적이지만 비난받는 가문이 있다. 사리뿟따여, 나는 그것을 가지고 그가 비난받아야 한다고(결점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리뿟따여, 이 몸을 내려놓고 다른 몸을 붙잡는 사람을 나는 '비난받아 마땅한 자(결점이 있는자)'라고 말한다. 찬나 비구에게는 그러한 것이 없다. '비난받을 일 없는 찬나 비구가 칼을 사용하여 자살했다.'라고, 사리뿟따여, 이렇게 받아들여라." 

 

*"그 순간 그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marana-bhaya)이 엄습해왔다. 그에게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이 생겨나자 그는 곧바로 자신이 범부의 상태임(puthujjana-bhava)을 알고 마음에 급박함(samvigga-citta)이 생겨 위빳사나를 확립하여 형성된 것들을 파악하면서(parigganhanta) 아라한과를 얻었다. 그는 사마시시(samasisi)가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MA.v.83)  
사마시시란 아라한과를 얻음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을 말한다.  

*"'그대의 면전에서 비난받지 않음을 설명하지 않았는가(sammukhayeva anupavajjata byakata)?'라고 하셨다. 비록 찬나 존자가 자신에 대해 비난 받을 일이 없음을 설명한 것은 아직은 범부일 때에 한 것이지만 이 말을 한 뒤 곧바로 완전한 열반에 들었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이 말을 취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MA.v.83)  
즉 세존께서는 그가 무학이었을 때 선언한 것으로 여기시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비난받는 가문(upavajja-kulani)'이란 자기를 시중들어주는 남녀 신도를 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비구가 세존의 가르침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 드리는 것이다. 재가자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도닦음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에 이렇게 질문한 것이다. 이에 세존께서는 그가 신도들과 어울려 지내지 않았다(kulesu samagga-abhavam)는 것을 보이시기 위해 '사리뿟따여, 찬나 비구의 친구 가족들과 그에게 친숙한 가족들이 있어 그에게 호의적인 가족들이라 하더라도'라고 말씀하셨다. 이 점에 이르러 찬나 존자는 재가자들과 섞여 지내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MA.v.84)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리뿟따 존자는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 

 

 

찬나를 위한 가르침 경(M144)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