虛白堂詩集 허백당시집(明照 명조)
山居 산에 살며
山河天地月 산과 강과 하늘과 땅, 그리고 달
彼此兩無心 이것과 저것 서로가 무심하구나.
又得春消息 또한 봄소식을 얻으니
楊花到處陰 버들꽃이 도처에 흐드러졌구나.
次鄭同知韵 정(鄭) 동지(同知)1)에게 답하는 시
1) 동지(同知) : 조선시대 지사(知事)의 보좌역을 맡은 종2품 관직.
坐斷凡聖情 범부(凡夫)니 성인(聖人)이니 하는 생각 다 끊고
迷雲且掃滅 미혹의 구름 또한 쓸어 없앴네.
心光透徹明 마음의 빛이 밝아 투명하게 궤뚫으니
沙界摠無物 온 우주에 아무 것도 없구나.
登佛頂臺 불정대(佛頂臺)2)에 올라
2) 불정대(佛頂臺) : 금강산에 있다.
雲水飄然衲 구름처럼 물처럼 자유로운 납자가
扶笻上高臺 지팡이 짚고 높은 대에 올랐네.
眼前無一物 눈 앞에 한 물건조차 없으니
滄海小於杯 푸른 바다가 찻잔보다 작구나.
共坐山影樓示巡使
산영루(山影樓)에 함께 앉아 순사(巡使)3)에게 보임
3) 순사(巡使) : 조선 시대에, 병란(兵亂)이 있을 때 왕명으로 지방의 군무(軍務)를
순찰하던 임시 벼슬.
樓外䨥溪水 소낙비 내려 누각 너머 시냇물
聲聲洗客心 소리 소리 나그네 마음 씻어주네.
談玄開一笑 깊은 이치 논하며 한바탕 웃노라니
山月照楓林 산 위의 달이 단풍 숲을 비추네.
佛影臺 불영대(佛影臺)4)
4) 불영대(佛影臺) : 묘향산 보현사에 딸린 암자로, 경치가 아름다워 묘향산 8경의
하나로 꼽힌다. 특히 월출의 광경이 아름답다 한다.
萬里秋光晩 만 리에 가을 빛 저물고
千山葉正飛 천 산에 낙엽 날리는 때
虛閑無一物 텅 비고 한가로와 한 물건조차 없구나.
看盡暮雲歸 저무는 하늘 떠가는 구름 한없이 바라본다.
示凜師 름(凜) 스님에게
相見無言處 서로 만나 말이 없는 곳
山禽已了啼 산새가 이미 울어버렸다.
若能重漏洩 만약 다시 누설한다면
他日恨噬臍 훗날에 몹시 후회할거야.5)
5) 원문에는 ‘서제(噬臍)’라고 하였다. 배꼽을 물어뜯으려 하여도 입이 닿지 않는다
는 뜻으로,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의미이다.
臨終偈 임종게
刼盡燒三界 시간이 다하고 온 우주도 다 타버릴 때
靈心萬古明 신령한 마음이 만고에 밝으리니
泥牛耕月色 진흙소는 달빛을 갈고
木馬掣風光 나무말은 풍광을 끌고 가리라.
千佛千塔懷古 천불천탑(千佛千塔)6)에서 회고함
6) 천불천탑(千佛千塔) : 전라남도 화순에 있는 운주사(雲住寺, 혹은 運舟寺)를 가리
키는 듯하다. 운주사는 신라시대 도선이 세웠다는 등의 여러 전설이 있으나, 정확
한 건립 연대는 알 수가 없다. 여기에 천 좌의 불상과 천 기의 탑이 있었다고 해서
‘천불천탑’의 사찰이라고 하나, 후대에 파괴와 도난이 심하여 지금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불상과 탑이 전통적인 양식과는 현격하게 다른 특이한 사찰이다.
此是人間眞佛國 이것이 인간의 진정한 부처님 나라이니
千重鴈塔卓雲林 천 겹의 줄지은 탑들이 구름낀 숲에 우뚝하구나.
啼鳥開花誰與和 우는 새 피는 꽃에 누가 화답할 것인가?
松風蕭瑟㝎知音 소나무에 스쳐 우는 바람이야말로 그 마음 알아주는 벗이로다.
拾栗 밤을 주우며
不忍飢膓似電鳴 우레 울리는 듯한 주린 창자 견딜 수 없어
經行拾栗入雲扃 밤을 주우며 걷다가 구름 속까지 들어갔네.
夕陽山色如紅錦 석양녘 산색은 붉은 비단과도 같은데
秋雨霏霏落葉聲 추적추적 가을비에 젖는 낙엽 소리.
行俊求語 행준(行俊) 스님이 한 마디 청하기에
萬疑都就一疑看 만 가지 의심을 한 가지 의심으로 모아서
疑去疑來疑自看 의심하고 의심하여 의심하는 스스로를 보소서.
動地驚天俱打了 하늘과 땅이 놀라도록 모조리 타파하면은
大千沙界眼前看 삼천대천세계가 눈 앞에 보이리라
待友 벗을 기다리며
登樓悵望故人形 누각에 올라 친한 벗의 모습을 애타게 기다리건만
軒外無聞杖策聲 난간 너머 지팡이 소리 들려오질 않는구나.
何日禪窓親覿面 어느 날에 참선하는 창문 가에 얼굴 보며 앉아서
終霄剪燭洩深情 밤새도록 촛불 심지 자르며 깊은 정을 펼쳐나 볼까.
紅菊 붉은 국화
千林黃葉霜風落 천 그루 숲이 누렇게 물들어 서릿 바람에 떨어지나
唯有菊紅獨耐寒 오직 붉은 국화만이 추위를 견디어 내는구나.
家國興亡都不管 나라의 흥망에는 아랑곳 하질 않고
破顏開笑向人閑 인간 향해 활짝 웃으며 한가롭구나.
咏懷 생각을 읊음
久住香爐樂自多 오랫동안 향로봉에 있으면서 아주 즐거웠었지.
金剛移入樂尤多 금강산으로 옮겨와서는 더욱 즐거웠었고.
樂來樂去非塵樂 즐거움이 오고 가는 건 세속의 즐거움이 아니요
共樂無生樂亦多 그 즐거움 무생(無生)과 함께 하니 더더욱 즐거웁고야
幻智 헛 그림자의 지식
幻去幻來俱是幻 환상이 오고 가는 것 그 모두가 환상이라네
誰知幻法本無根 환상의 법이란 본래 뿌리가 없는 것을 누가 알리오?
縱然識得皆爲幻 그 모두가 환상이란 것 안다고 해도
滅智方登涅槃門 안다는 것조차 사라져야 비로소 열반의 문에 오르리.
警世 세상을 일깨움
世上功名如草芥 세상의 공명이란 지푸라기와 같은 것
人間浮命似溪流 인간의 뜬 목숨이 흘러가는 시냇물 같네.
今生若不須懃做 금생에 만약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으면
未識將何得自由 장차 어느 때에 자유를 얻을지 모르겠네.
山居吟 산에 사는 노래
石逕嵯峨行且危 아스라한 돌오솔길 위태로운데
人寰逈絕徃來稀 사람 사는 세상과는 멀어서 왕래도 드물어.
月中香桂庭前落 달빛 속에 향기로운 계수나무 잎 뜰 앞에 떨어지고
雲外歸鴻天際飛 구름 바깥에 돌아오는 기러기는 하늘 끝으로 날아가네.
瑟瑟秋風侵踈屋 스산한 가을 바람은 엉성한 집으로 불어닥치고
蕭蕭楓葉撲班衣 쓸쓸한 단풍잎은 누더기옷에 날아와 부딪치네.
而今永別紅塵世 이젠 홍진(紅塵)의 세상 영원히 이별하여
願作明心救庶期 밝은 마음 이루어 수많은 사람 구제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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