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칙 달마성제 達磨聖諦
[본칙]
달마대사에게 양무제1)가 물었다. “성스러운 진리의 근본적인 이치는
무엇입니까?” “막힘없이 트여 성스러움조차도 없습니다.” “짐과 마주하
고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모르겠습니다.” 무제가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하자 달마는 마침내 강을 건너 위(魏)나라로 갔다. 〈분주선소(汾州善昭)가
무제를 대신하여 말했다. “제자의 지혜가 얕습니다.”〉 무제가 이 문답을 들려주고
지공(誌公)2)에게 묻자 지공이 말했다. “폐하시여, 이 사람의 뜻을 아셨습
니까?”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은 관음대사3)로서 (폐하께) 부처님의 심
인4)을 전했던 것입니다.” 무제가 후회하며 사자를 보내어 돌아오라는 조
칙을 내리려 하자 지공이 말했다. “폐하의 조칙은 말할 것도 없고, 나라
사람들이 모두 가서 청해도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4)
達磨大師, 因梁武帝問,“ 如何是聖諦第一義?” 曰,“ 廓然無
聖.” 帝云,“ 對朕者誰?” 祖曰,“ 不識.” 帝不契, 祖遂渡江
至魏. 〈汾州昭, 代云,“ 弟子智淺.”〉 武帝, 擧問誌公, 誌公云,“ 陛
下, 還識此人不?” 帝云,“ 不識.” 誌公云,“ 此是觀音大士,
傳佛心印.” 帝悔, 當遣使詔之, 誌公云, “莫道陛下詔, 闔國
人去, 他亦不迴.”
1) 梁武帝(464~549). 남조(南朝) 양(梁)나라를 건국한 초대 황제로 502년부터 죽을
때까지 황제의 자리에서 통치했다. 불교와 도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학의 주요 전적에 대한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504년에「사도
귀불문(捨道歸佛文)」을 짓고 도교에서 불교로 귀의하였다고 한다.
2) 418~514. 남조(南朝) 때 무제의 존경을 받았던 스님. 보지(寶志·保志·保誌) 또는
보공(寶公)이라고도 한다. 무제는 지공을 신선 중의 신선으로 여기고 존숭했으
며 궁성 출입을 자유롭게 허가하였다.
3) 觀音大士.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대사’란 mahāsattva, sems-dpah-chen-po
의 한역어 중 하나. 음사어는 마하살타(摩訶薩埵)이며, 마하살(摩訶薩)이라고도
한다. 경전에서는 일반적으로 둘을 합하여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라 하고,
음사어와 한역어를 합하여 보살대사(菩薩大士)라고도 한다.
4) 心印. 불심인(佛心印)·불인(佛印)·불조심인(佛祖心印)·조사심인(祖師心印)·
법인(法印) 등이라고도 한다. 깨달은 마음을 근거로 삼아 확고하게 도장을 찍듯
이 인가하는 것. ‘인’은 인가(印可)·인증(印證)을 뜻한다. 스승이 자신의 깨달은
마음을 표준으로 하여 제자의 깨달은 마음을 인가하는 것을 이심인심(以心印
心)이라 하며, 이심전심(以心傳心)과 같은 뜻이다. 선종에서는 이것을 심인의 전
수라 하며, 그 모범적 사례는 부처님의 염화(拈花)에 가섭이 미소(微笑) 지어 답
했다는 일화이다. 이것이 문자와 교설에 의존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을 인가
하여 전수한다는 이야기로 전해진다.
[설화]
본편5)에 따르면, “달마대사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3년이 지나 남해에
도달했다. 광주6)의 자사(刺史) 소앙(蕭昻)이 주인의 예를 갖추고 맞이한
뒤 표7)를 올려 무제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무제는 올라온 공문서8)를 살
펴본 다음 사자를 파견하여 조칙을 가지고 가서 영접하도록 하였다. 대통
원년(527) 9월 21일, 마침내 달마는 금릉9)에 이르렀다. 무제가 물었다. ‘짐
은 즉위한 이래로 절을 짓고 경전을 베껴 쓰고 출가를 장려하는 등 헤아
릴 수 없이 많은 불사를 했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습니까?’ ‘전혀 공덕이
없습니다.’ ‘어째서 공덕이 없습니까?’ ‘이러한 것은 죽은 다음 인간계와
천계에 태어나는 유루10)의 원인에 불과합니다.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
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과 같아서 비록 있더라도 진실하지 않습니다.’ ‘참
된 공덕이란 어떤 것입니까?’ ‘바른 지혜는 미묘하고 원만하여 그 본체가
텅 비고 고요할 뿐입니다. 이와 같은 공덕은 세속적 힘으로는 구할 수 없
습니다.’ ‘성스러운 진리의 근본적인 이치는 무엇입니까?’ ‘막힘없이 트여
성스러움조차도 없습니다.’”라고 운운하였다. 이것은 두 번째 물음이었던
것이다.
5)『景德傳燈錄』권3「菩提達磨傳」大51 p.219a13.
6) 廣州. 중국 광동성(廣東省) 성도(省都). 주강(珠江) 삼각주(三角洲) 북쪽 끝 서강
(西江)·북강(北江)·동강(東江) 등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화남(華南) 제일
의 항구이자 무역 도시.
7) 表. 황제에게 올리는 글.
8) 주(奏).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공문서.
9) 金陵. 양나라의 수도.
10) 有漏. 번뇌와 같은 말. 인계(人界)와 천계(天界)는 여섯 가지 윤회[六道輪廻]의
형식 중 선한 업을 쌓아서 얻는 것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윤회의 굴레에 속박된
고통의 세계에 불과하므로 유루라 한다. 무제의 선행(善行)도 이 범주에 들어가
기 때문에 근본적 괴로움을 수반하는 ‘유루의 원인’이라 한 것이다.
성스러운 진리의 근본적인 이치[聖諦第一義]:성스럽다는 말[聖]은 바르다[正]
는 뜻이고, 진리[諦]는 진실[實]을 나타낸다. 곧 바르고 진실한 근본적인
이치를 말한다. 또한 성인이 진실로 증득(證得)한 이치를 ‘성스러운 진리
의 근본적인 이치’라 한다. 또한, 성인이 증득한 진리이므로 성제(聖諦)라
하고, 가장 존귀하고 더 이상의 것이 없으므로[無上] 제일(第一)이라 한다.
무제가 이렇게 물은 까닭은 무엇인가? 요진(姚秦)시대에 여러 종파의
사람들이 제일의제(第一義諦)의 의미를 밝히면서 “막힘없이 트여 텅 비고
고요하니 성인조차도 없다”라고 하자 당시 요진의 황제가 이 말을 가지고
승조(僧肇)법사에게 물었다. “이 말은 문밖 길과 뜰 사이의 거리가 너무
먼 것과 같아서 보통 사람들의 생각에는 가까이 와 닿지 않는다.11) 만약
성인조차 없다면 그렇게 없다고 아는 자는 누구인가?” 법사가 황제의 질
문12)을 받들어 답변했다. “진실로 현명한 질문 그대로 옳은 말씀입니다. 만
약 성인이 없다면 누가 도(道)와 노닐 수 있겠습니까?”13) 따라서 ‘짐을 마
주하고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14)라고 물은 말은 요진시대에 거론되었던
문답에 근거하여 (무제가) 당시의 논의에서 (달마에) 대적하기 위하여 변
론한 말이 아닐까?
11)『莊子』「逍遙遊」의 “大有逕庭, 不近人情”이라는 구절에 따른다. ‘逕’이란 문밖의
길, ‘庭’은 집 안의 뜰이다.
12) 조(詔). 여기서는 질문을 뜻하지만 본래는 황제의 명령을 나타내는 말이다. 황
제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명령과 같은 속성이 있으므로 ‘조’라 한
것으로 보인다.
13) ‘요진시대에’라는 구절부터 여기까지는『肇論』「涅槃無名論」大45 p.157b14에
나온다.
14) 원문에는 이 부분이 ‘없다고 아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되어 있지만, ‘짐을 마주
하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구절의 오식(誤植)이다. 달마가 ‘성인조차도 없
다’라고 한 말에 대하여 무제는 ‘없다고 아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요진 황제의
말을 활용하여 ‘짐과 마주하고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라고 물은 것으로 추정한
다는 뜻이다.
『벽암록』에는 이렇게 전한다.15) “무제가 가사를 입고 스스로 『방광반야
경(放光般若經)』을 강설하던 중에 하늘에서 꽃이 어지럽게 떨어지고 땅은
황금으로 변화하는 감응을 일으킨 뒤에 도교를 가려내고 불교를 받들었
다.16) 천하에 조칙을 내려 절을 세우고 출가를 장려하고 경전의 말씀에 따
라 수행하도록 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를 불심천자(佛心天子)라 불렀다. 또
한 무제는 누약법사(婁約法師)와 부대사(傅大士) 그리고 소명태자(昭明太
子) 등과 함께 진속이제(眞俗二諦)에 대하여 토론하면서, ‘진제(眞諦)로써
있지 않음[非有]을 밝히고 속제(俗諦)로써 없지 않음[非無]을 밝히니,17)
진제와 속제가 둘이 아닌 경계가 제일의제이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이 바로
교가(敎家)가 주장하는 미묘하고 깊은 궁극적 경지이니, 무제는 이렇게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궁극의 진리[極則處]’를 집어내어 달마에게 ‘성스
러운 진리의 근본적인 이치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이다.”18) 곧 당
시로서는 극치의 논의였기 때문에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막힘없이 트여
성스러움조차도 없다’라는 달마의 말은 요진시대에 논의되었던 일반적인
뜻과는 현격하게 차별되어 동일하지 않다.
15)『碧巖錄』1則「評唱」大48 p.140b6.
16) 판도봉불(辦道奉佛). 보통은 ‘도교를 버리고 불교를 받든다’는 뜻의 사도봉불(捨
道奉佛)이라 한다.『歷代編年釋氏通鑑』권5 卍131 p.834a10에 따르면, 양무제는
천감 3년(504) 4월 8일 도속 2만여 명을 이끌고 중운전(重雲殿)에서 사도봉불의
원문(願文)을 지었다고 한다.
17) 출전은『肇論』「不眞空論」大45 p.152b17이다.
18) 이상이『碧巖錄』의 인용이다.
부산법원19)이 말했다. “제일의제에 대하여 여러 교가에서는 일승(一乘)
이라 하기도 하고 삼승(三乘)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달마가 ‘막힘
없이 트여 성스러움조차도 없습니다’라고 한 말이나 ‘모르겠습니다’라고
한 말에 근거한다면, 무엇 때문에 삼승이다 일승이다 상관하면서 마음의
근원을 곧바로 가리킨다거나, 본래 그 무엇도 없다거나, 범부와 성인이 다
르지 않다거나, 옛날과 오늘에 이르기까지 단절도 없고 소멸도 없다거나
하고 말하겠는가!”20)
19) 浮山法遠(991~1067). 송나라 때 임제종 선사. 하남성(河南省) 정주(鄭州) 출신으
로 삼교지숭(三交智嵩) 문하에서 출가했다가 하남성 광교원(廣敎院)의 섭현귀
성(葉縣歸省)의 법을 계승했다.
20) 전거 미상.
또『 벽암록』21)에서 “세상의 선수행자들 그 누구도 이 말의 굴레에서 훌
쩍 벗어나지 못하자 달마가 단번에 칼을 휘둘러 두 토막을 내어주었던 것
인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다”22)라고 했다. 그러므로 달
마의 말을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1) 위의『벽암록』인용에서 이어지는 구절이다. 大48 p.140b17.
22) ‘성스러운 진리의 근본적인 이치’라는 오래 묵은 말에 집착하여 벗어나지 못하
는 수행자들을 위해서 ‘막힘없이 트여 성스러움조차도 없다’라고 하는 비수와
같은 한마디 말로써 그 굴레를 절단 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전
의 관념을 소굴로 삼아 벗어나지 못하고 달마의 말만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뜻
이다.
짐을 마주하고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만송행수(萬松行秀)가 말한다. “콧구멍
안에 이빨이 있다고 착각하는구나.”23)
23)『從容錄』2則 大48 p.228b13의「著語」. ‘認’은 오인(誤認) 또는 착각의 뜻이다.
모르겠습니다:‘막힘없이 트여 성스러움조차도 없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
다. 남을 가르치려면 철저해야 한다24)는 입장이다.
24) 상대의 수준을 고려하여 방편으로 친절하게 많은 말을 늘어놓지 말고 오로지
본분에 충실하여 곧바로 궁극의 뜻을 전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무제가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네모난 나무는 둥근 구멍에 들어가지 못
한다.25)
25) 이 또한 만송행수의「著語」이다. 위의 책 같은 곳 참조. 본분을 원만히 깨달은
달마의 마음에서 나온 말이 시대의 편견에 치우친 무제의 모난 분별에는 들어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강을 건너 위나라로 갔다:속뜻을 알아주는 벗을 만나지 못했으니 지금 이
후에는 남의 뜻을 알아 깊이 들어가더라도, 갈대꽃조차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지 않으리라〈영로(詠鷺)의 시〉.
‘나라 사람들이 모두 가서 청해도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한 지공의 말:
달마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뿐만 아니라, ‘막힘없이 트여
성스러움조차도 없다’는 말과 ‘모르겠습니다’라고 한 대답에 숨은 소식을
거듭 무제에게 나누어 일러준 것이다.
지공(418~514)은 송나라 때인 태시(太始) 초년에 태어나26) 천감 13년
(514)에 입멸하였다. 지공이 입멸한 뒤 13년이 지나27) 달마가 중국에 왔는
데 달마와 동시대에 만났다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신라(新羅) 이정대덕28)
의 비문(碑文)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지공은 양주(楊州)의 개선사(開善
寺)〈신라 소재〉에 때로는 한 달에 한 번 혹은 일 년에 한 번 와서 이정과 마
주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기록을 보자면 성인(聖人)이 출몰한 시기
는 단정하기 어렵다.
26) 태시 초년이라 하면 465년 이후 몇 년 간이라는 뜻이지만, 지공이 태어난 418년
은 의희 14년에 해당하므로 잘못 기입한 것으로 보인다.
27) 대통 원년(527) 9월 21일.
28) 利貞大德. 이정(利貞) 또는 이정(理貞)이라고도 한다. 신라 말기의 스님으로 순
응(順應)과 함께 애장왕 3년(802)에 해인사(海印寺)를 창건했다. 순응을 따라 당
나라로 갔다가 지공의『踏山記』를 구해서 돌아왔다.
本篇云,“ 達摩師泛重溟, 凡三周寒署, 達于南海. 廣州刺史蕭
昻, 具主禮迎之, 表聞武帝. 帝覽奏, 遣使賫詔迎請. 大通元
年, 九月二十一日, 初至金陵. 帝問, ‘朕, 卽位以來, 造寺寫經
度僧, 不可勝記, 有何功德?’ 曰,‘ 並無功德.’ 曰,‘ 何以無功
德?’ 曰,‘ 此是人天有漏之因, 如影隨形, 雖有非實.’29) 如何
是眞功德?’ 曰, ‘正智妙圓, 體自空寂. 如是功德, 不以世求.’
又問,‘ 如何是聖諦第一義?’ 曰,‘ 廓然無聖.’” 云云. 此是第
二問也. 聖諦第一義者, 聖者正也, 諦者實也, 則正實第一義.
又聖人之所諦證之義曰, 聖諦第一義. 又聖人所證之諦, 故曰,
聖諦. 最尊無上, 故曰, 第一. 武帝伊麽問何也? 姚秦之時, 諸
家通第一義諦云, “廓然空寂, 無有聖人.” 時, 秦皇持此語, 問
肇法師, “此語大甚徑庭, 不近人情. 若無聖人, 知無者誰?” 法
師奉詔云,“ 實如明詔聖諦.30) 若無聖人, 誰與道遊?” 知無者
誰, 則姚秦之時所論, 當時所論對辯耶? 碧巖云,“ 武帝被袈裟,
自講放光般若, 感得天花亂墜, 地變黃金, 辦道奉佛, 詔天下起
寺度僧, 依敎修行, 時人謂之佛心天子. 又帝與婁約法師·傅
大士·昭明太子, 持論眞俗二諦云,‘ 眞諦以明非有, 俗諦以明
非無, 眞俗不二處, 是第一義諦.’ 此是敎家極妙窮玄處, 帝拈
此極則處, 問達摩,‘ 如何是聖諦第一義?’” 則當時極論故問
也. 廓然無聖語, 則姚秦之時所論一般意, 則逈異不同也. 浮山
遠云,“ 第一義諦, 諸家所論, 或一或三. 若依達摩所道廓然無
聖, 又道不識, 則何關三一! 而論直指心源, 本來無物, 凡聖無
殊, 亘古亘今, 無斷無滅.” 又碧巖云, “天下衲僧跳不出, 達摩
與他一刀兩斷, 如今多少人錯會也.” 然則莫錯會好. 對朕者誰
者, 萬松云,“ 鼻孔裏認邪.31)” 不識者, 廓然無聖一般, 爲人須
爲徹. 帝不契者, 方木不入圓竅. 渡江至魏者, 不値知音, 自今
已後, 知人意深入, 蘆花不點頭〈詠鷺詩〉. 誌公云, 闔國人去, 他
亦不迴者, 非唯知他不來, 廓然無聖不識處消息, 重爲他分拆.
誌公, 生宋太始初, 入滅於天鑑十三年. 誌公滅後十三年, 達摩
始來, 達摩同時, 何也? 新羅利貞大德碑銘云,“ 誌公, 於楊州
開善寺〈在新羅〉, 或一月或一年來, 坐對利貞.” 見之則聖人出沒
難定也.
29) ‘曰’이 탈락됨.
30) ‘聖諦’라는 글자는 연문(衍文). 『肇論』에는 ‘實如明詔’라는 구절을 두 번 반복하
여 황제의 질문을 칭송한 것으로 되어 있다.
31) ‘邪’는 ‘牙’의 오식.
설두중현(雪竇重顯)의 송
성스러운 진리 막힘없이 트였으나,
어떻게 그 핵심을 가려내리오?
짐을 대하는 자 누구냐 물으니,
다시 모른다고 하였다네.
이로 인하여 남몰래 강 건너니,
무성하게 자란 가시덤불 어찌 피하랴!
나라 사람 다 뒤따라가도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천 년이고 만 년이고 부질없이 생각에 담아두겠네.
생각에 담아두지 마라!
맑은 바람 온 누리 돌아다님에 무슨 끝이 있으랴!32)
송을 마치고, 주변을 돌아보면서 “이곳에 조사(달마)가 있는가?”라고 말
한 뒤 스스로 대답했다. “저기 있구나! 그를 불러서 나의 발을 씻게 하라.”
雪竇顯頌,“ 聖諦廓然, 何當辨的? 對問33)者誰, 還云不識. 因玆
暗渡江, 豈免生深棘! 闔國人追不再來, 千古萬古空相憶. 休
相憶! 淸風匝地有何極!” 師顧視左右云, “者裏還有祖師麽?”
自云,“ 有! 喚來與老僧洗脚.”
32) 막힘없이 트여 한계가 없이 바람처럼 돌아다니는 달마대사의 면모를 나타낸 구
절이다.
33) ‘問’은 ‘朕’의 오식.
[설화]
성스러운 진리 ~ 부질없이 생각에 담아두겠네:성스러운 진리의 막힘없이 트
인 본질과 ‘모르겠습니다’라고 한 대답의 뜻까지 속속들이 밝힌 것이다.
이와 같이 맑은 바람이 부는데 무슨 끝이 있겠는가?
이곳에 조사가 있는가 ~ 발을 씻게 하라:만약 바른 안목으로 살펴본다면 달
마도 완전하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이 아래에서 운거(雲居)가 ‘오로지 양
나라 왕만이 장부다웠다’라고 한 말과 통한다.
雪竇:聖諦至相憶者, 深明聖諦廓然, 又道不識之意. 然則淸
風有何極? 這裏還有祖師麽云云者, 若也着得眼睛, 便不是了
也. 下雲居, 只有梁王是丈夫之意.
대홍보은(大洪報恩)의 송
성스러운 진리 막힘없이 트였으나,
어떻게 그것을 가려내 알아차릴꼬?
빈틈없이 척척 들어맞는구나!34)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도리를,
한 구절로 넌지시 전하고 나서,
9년 동안 공연히 면벽만 했다네.
흥미가 다 사라지자 다시 떠돌던 옛 시절 그리워,
남몰래 짚신 한 짝만 끌고서 인도로 돌아갔다네.35)
짚신을 바싹 졸라매어야 하리라.
大洪恩頌, “聖諦廓然, 如何辨識? 築著磕著! 百千萬億, 一句
謾相傳, 九年空面壁. 興盡還思舊日遊, 暗携隻履歸西國. 緊
悄36)草鞋.”
34) 마치 빈틈없이 벽돌이 쌓이거나[築著] 두 개의 돌이 빗나가지 않고 서로 정확히
부딪히는 것[磕著]과 같이 정확하게 진실에 부합하는 말이라는 뜻.
35) 달마대사가 입적한 495년(태화19) 12월 28일, 웅이산에서 장례를 치르고 정림사
에 탑을 세웠다. 3년 뒤에 위나라의 송운(宋雲)이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
오는 길에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를 만났는데, 손에 짚신 한 짝을 들고 옷자
락을 펄럭이며 홀로 가고 있었다. 송운이 ‘스님! 어디 가십니까?’라고 물으니 ‘서
천으로 갑니다’라 말하고, 다시 ‘당신의 임금[孝明帝]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습
니다’라고 하였다. 송운이 그 말을 듣고 황급하게 달마대사와 작별하고 동쪽으
로 달려와 조정에 일의 결과를 보고했을 때 효명제는 이미 죽은 다음이었고, 후
사를 이어 동혼후(東昏侯)가 즉위한 상태였다. 송운이 달마대사와 만났던 사정
을 상세히 말하자 임금이 명령하여 달마대사의 무덤을 파 확인해 보도록 했는
데, 빈 관 안에 짚신 한 짝만 남아 있었다.『景德傳燈錄』권3「菩提達磨傳」大51
p.220b4 참조. 도교 신선사상(神仙思想)의 영향도 보인다. 곧 『抱朴子』 권2 「論
仙」등에도 죽어서 관 속에 의관(衣冠)이나 죽장(竹杖) 등의 흔적만 남겨두고 시
체를 없애는 이소군(李少君)과 이의기(李意期) 등 도사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러한 신선의 경지를 시해선(屍解仙)이라 한다. 이렇게 도교의 신선사상과 달마
대사를 연결시킨 결과 때때로 달마대사가 도교 안에서도 최고의 신선 중 하나로
추앙받거나 달마대사의 이름에 의탁한 도교 전적이 창안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
이다.
36) ‘悄’는 ‘峭’의 오식.
운거요원(雲居了元)의 송
쯧쯧, 서쪽에서 온 푸른 눈의 이방인이여!
확연무성이라 하고 또 쓸데없는 시도를 하였네.
9년 동안 좌선하며 다 건져내어 보았지만,
사람 중에는 양나라 왕만이 장부다웠다네.
雲居元頌,“ 咄咄西來碧眼胡! 廓然無聖更多圖. 九年端坐撈籠
盡, 人有梁王是丈夫.”
천복본일(薦福本逸)의 송
막힘없다는 화살 한 발 하늘 멀리 날더니,
모르겠다는 송곳 거듭 바닥으로 꽂혔다네.
양무제가 달마 간 곳 몰랐던 이후로,
천년만년 동안 아무 소식도 없구나.37)
薦福逸頌,“ 廓然一鏃遼空, 不識重下錐刺. 梁帝不知何處去,
千古萬古無消息.”
37) 막힘없다거나 모르겠다는 달마의 말에 아무런 분별의 단서가 없다는 뜻을 소식
이 없다[無消息]고 했다.
법진수일(法眞守一)의 송
기틀에 맞게 눈앞에서 보여주었건만,38)
양무제는 오히려 모르고 지나쳤도다.
짚신 한 짝 신고 부질없이 돌아가니,
다시 총령39)을 넘어 서쪽으로 갔다네.
法眞一頌,“ 當機覿面提, 梁武尙猶迷. 隻履空歸去, 還從葱
嶺西.”
38) 근기와 상황에 합당하게[當機] 본분을 곧바로 눈앞에서 들어보이는 방법. 달마
가 일정한 규격에 얽매이지 않고 양무제의 말이나 그 현장의 조건에 부합하는
말을 이용하여 드러내었던 전광석화와 같은 솜씨를 말한다.
39) 주석35) 참조.
천동정각(天童正覺)의 송
막힘없이 트여 성스러움조차도 없다고 하니,
듣는 사람의 근기가 그 말과는 너무 멀었도다.40)
알았다면 코를 상하지 않고 도끼 휘두른 격이겠지만,41)
몰랐다면 돌아보지 않아도 시루는 떨어져 깨졌으리.42)
고요히 소림사에서 마음 식히고 좌선하며,43)
묵묵히 엄정한 법령 남김없이 들어보였네.
가을의 밝은 달은 서리바퀴44) 굴리고,
맑은 은하수의 북두성 밤의 국자 드리웠다.
대대로 이어 가사와 의발 후손에게 전하니,
이로부터 인계와 천계에 약과 병이 되었네.
天童覺頌,“ 廓然無聖, 來機徑廷. 得非犯鼻而揮斤, 失不迴頭
而墮甑. 寥寥冷坐小林, 黙黙全提正令. 秋淸月轉霜輪, 河淡斗
垂夜柄. 繩繩衣鉢付兒孫, 從此人天成藥病.”
40) 래기경정(來機徑廷). ‘래기’는 배우러 찾아온 사람으로 여기서는 양무제를 가리
킨다. ‘경정’은 『莊子』 「逍遙遊」의 구절. 주석11) 참조. 양무제의 편견으로는 달
마의 막힘없이 트인 선기(禪機)를 이해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는 말.
41)『莊子』「徐無鬼」에 나오는 고사. 도끼를 휘둘러 코에 묻은 흙을 떼어냈지만 코
는 다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42) 달마대사가 양무제의 무지를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린 것을 맹민(孟敏)의 고사
로 밝힌 구절이다.『後漢書』「孟敏傳」에 따르면, 한나라 때 맹민이 태원(太原)에
머물 적에 시루를 짊어지고 가다가 땅에 떨어뜨렸지만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
다. 곽임종(郭林宗)이 그 광경을 보고 까닭을 묻자 “시루가 이미 깨어졌으니 쳐
다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甑以破矣, 視之何益!)라 대답했다고 한다.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뒤돌아보아도 소용이 없다는 뜻을 비유한다.
43) 냉좌(冷坐)는 번뇌망상의 열기를 식히고 몸과 마음을 다스리며 좌선하는 것을
말한다. 정념단좌(正念端坐) 또는 정신단좌(正身端坐) 등과 같다. 소림사에서 9
년 동안 면벽좌선했다는 설에 기초한 말이다. 면벽좌선했다는 말은『歷代法寶
記』(774년)·『寶林傳』(801년)·『祖堂集』(952년) 등에는 보이지 않고, 달마
로부터약 450년을 경과한『宋高僧傳』(988년)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宋高
僧傳』권13 大50 p.789c8 참조.
44) 상륜(霜輪)은 월량(月亮)과 같은 말로 ‘달[月]’이다. 주로 밝은 빛이라는 측면에
서 ‘달’을 나타내는 말이다. 달빛이 밝지만 태양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차갑게 느
껴지는 이미지를 ‘서리[霜]’로 표현한 것이다. 결국 ‘달이 달을 굴린다’라는 말이
므로 둥근 달이 스스로 돌며 움직이는 것을 시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보령인용(保寧仁勇)의 송 45)
45) 대장장이가 망치질을 하여 금강과 같이 단단한 송곳을 만드는 그 수단을 달마
의 화두에 비유한 송이다. 그 송곳을 무제에게는 팔지 못하여 사갈 사람을 기다
리는 달마가 묘사되어 있다.
온통 붉게 달구어 망치 한 방 내리치니,
무수히 에워싼 불티가 별처럼 날린다네.
완전하고 보기 좋은 금강의 송곳이라니,
문 앞에 펼쳐놓고 누구에게 팔아넘길까?
保寧勇頌, “燒得通紅打一鎚, 周遭無數火星飛. 十成好箇金剛
鑽, 攤向門前賣與誰?”
삽계일익(霅溪日益)의 송
근본적인 이치라!
텅 비고 고요하여 상제46)도 넘어서네.
여러 해 동안 달력을 보지 않았거늘,
무슨 수로 춘분과 하지 분간하리오?
요동백학47) 승천한 뒤 종적 없는데,
삼산48)이 공연히 하늘 밖에 떨어진다.
霅溪益頌, “第一義! 廓兮寥兮超象帝. 不把多年曆日看, 爭辨
春分幷夏至? 遼東白鶴去無蹤, 三山空落靑天外.”
46) 象帝. 만물을 주재하는 조물주. 천제(天帝)와 같다.『老子』4장에 나오는 말. “나
는 도(道)가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지만, 그것은 상제보다 먼저 있었다.”(吾不知
誰之子, 象帝之先.)
47) 遼東白鶴. 신선의 경지를 얻은 다음 학이 되었다는 요동 출신 정영위(丁令威)를
가리킨다. 도잠(陶潛)의 『搜神後記』 권1에 따르면, 정영위가 영허산(靈虛山)에
서 신선술을 익히고 학이 되어 요동에 돌아왔는데, 어떤 소년이 활로 쏘려고 하
자 날아서 공중을 돌면서 “나는 고향을 떠난 지 천 년이 지나 돌아온 정영위이
다. 어찌 신선술을 배우지 못하여 성곽에는 무덤만 첩첩이 쌓였는가!”라고 말한
뒤 하늘 높이 올라갔다고 한다.
48) 三山. 신선(神仙)들이 산다는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
등 세 개의 산이다. 삼도(三島)라고도 한다. 본서 911則 주석5) 참조.
승천회의 송
남천축국 보살49)의 두 눈동자는 푸르고,
양나라 어진 왕의 남다른 눈 밝기도 하네.50)
불식과 확연이라는 말 쓸모없어진 곳에,
쓸쓸한 발자취51) 부끄럽게 남기고 서경52)을 떠나갔다네.
承天懷頌, “南天大士雙眸碧, 梁土賢王隻眼明. 不識廓然無用
處, 孤蹤過西京.”
49) 대사(大士)는 보살의 한역어. 본서 883則 주석9) 참조.
50) 푸른 눈동자[碧眼]는 달마 또는 진리를 꿰뚫어 보는 안목을 나타내고, 남다른
눈[隻眼]은 남들에게 없는 탁월한 제3의 눈을 말한다. 불식(不識)과 확연(廓然)
이라는 달마의 소식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던 양무제의 확고하지만 치우친 안
목을 남다르다고 역설적으로 표현하면서 동시에 ‘외눈박이’라는 이중적 뜻으로
쓰고 있다.
51) 고종(孤蹤). 달마의 선지(禪旨).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쓸쓸하기만 했던 선구자
의 발자취를 나타낸다.
52) 西京. 달마대사의 거처인 소림사가 이곳에 있었다. 서한(西漢)의 도읍인 장안(長
安)을 말한다. 동한(東漢) 때는 낙양(洛陽)이라 불렸다. 이에 따라 낙양을 동경
(東京)이라 하고, 장안은 서경이라 한다.
불감혜근(佛鑑慧懃)의 송
누각에서 울린 외마디 종소리 듣자마자,
따뜻한 햇볕에 창룡53)은 깊이 잠들었네.
봉황대54)에 걸린 북을 다시 쳤음에도,
한밤이라 상서로운 난새55) 날 조짐 없네.56)
황제 앉은 터 끝내 견고하여 반석 같으니,
달마의 평생 기력만 다 소모하고 말았네.
저 멀리 소림사 가리키며 되돌아가는데,
한 줄기 봄바람에 꽃잎 곳곳에 흩어진다.
佛鑑懃頌, “始聞樓閣一聲鐘, 日煖蒼龍睡正濃. 再擊鳳凰臺上
鼓, 夜半祥鸞未飛舞. 帝基永固如磐石, 胡僧費盡平生力. 遙指
小林歸去來, 春風一徑花狼藉.”
53) 蒼龍. 전설상의 상서로운 청룡(靑龍). 양무제를 비유한 말이다.
54) 鳳凰臺. 궁궐의 누대(樓臺). 양무제와 달마가 문답을 나누었던 궁궐을 가리키며,
특정한 곳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는 아니다.
55) 난(鸞). 봉황의 일종이다.
56) 여기까지는 종소리나 북소리와 같이 울린 달마의 말을 듣고도 그 본의를 깨우
치지 못해 어떤 감흥도 일으키지 못했던 양무제를 묘사한 장면이다.
혼성자의 송
막힘없이 트여 성스러움조차 없다는 말 아는 사람 드물고,
모르겠다는 거듭된 가르침에 담은 대기57)도 잃고 말았다네.
면벽 9년 동안 원통함과 괴로움 극도에 이르렀거늘,
어찌 짚신 한 짝만 신고 다시 서쪽으로 돌아갔을꼬?
混成子頌, “廓然無聖信人稀, 不識重敎失大機. 面壁九年寃苦
極, 那堪隻履又西歸?”
57) 大機. 근본 작용 또는 기미. 달마의 속뜻이 ‘모르겠다’라고 한 말에 하나의 본질
적 작용으로 드러나 있다는 뜻이다.
장산법천(蔣山法泉)의 염
“이 자가 모른다는 사실은 불 보듯 분명하구나! 말해 보라. 손님이 모르
는가, 주인이 모르는가? 설령 분명하게 가려내더라도 그대의 콧구멍은 내
손안에 쥐어져 있다.58)”
蔣山泉拈,“ 灼然, 者漢不識! 且道. 賓家不識, 主家不識? 直
饒辨得分明, 鼻孔在我手裏.”
58)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고수하겠다는 뜻. 이렇게 제기된
문제는 처음부터 결정된 해답이 없는 화두이며 분별을 모두 물리치기 위한 장
치일 뿐이다. 코에 고삐를 꿰어 소를 마음대로 몰듯이 이 질문에 대하여 무슨 대
답을 해도 모두 물리칠 수 있는 수단이라는 말이다.
[설화]
이 자가 모른다는 사실은 불 보듯 분명하구나:이 경계에 이르면 3세의 부처님
들과 역대의 조사들도 그 본질을 간파할 수 없기 때문에 달마도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는 뜻이다.
말해 보라 ~ 주인이 모르는가:손님은 무제요, 주인은 달마를 말한다. 주인
의 역량뿐만 아니라 손님의 역량에서 보아도 알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59)
설령 분명하게 ~ 쥐어져 있다:설령 이와 같은 소식을 분명하게 가려내더라
도 들어가고 싶은 곳으로 발을 옮길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콧구멍은 내 손안에 쥐어져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분명하게 아는 견해를
콧구멍이라 했다.
蔣山:灼然這漢不識者, 到這裏, 三世諸佛, 歷代祖師, 窺覰不
得故, 達摩灼然不識也. 且道至不識者, 賓家則武帝, 主家則
達摩也. 非但主家分上, 賓家分上, 亦沒分外也. 直饒辨得云云
者, 直饒分明辨得如是消息, 擡脚不起. 故云鼻孔在我手裏. 見
得分明處, 是鼻孔.
59) 몰분외(沒分外)란 자신의 본분을 벗어나는 것은 전혀 없다는 말. 곧 자신의 분수
나 역량으로 접근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황룡조심(黃龍祖心)의 거
어떤 학인에게 물었다. “분명히 바로 이것이 달마의 눈앞에 있는데, ‘모
르겠다’는 도리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 학인이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자 황룡이 불자(拂子)를 집어 들고 말했다. “달마는 이 안에 있다.”
黃龍心, 擧此話, 問僧,“ 分明有箇達磨面前, 作麽生說箇不識
底道理?” 僧曰,“ 不識.” 師拈起拂子曰,“ 達磨在者裏.”
[설화]
분명히 ~ 어떻게 설명하겠는가:만일 이 본분사가 분명히 달마의 눈앞에 있
었다면 ‘모르겠다’는 도리를 어떻게 설명하겠느냐는 뜻이다.
학인이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한 말:3세의 부처님들도 알 수 없다는 뜻
이다.
불자를 집어 들고 ‘달마는 이 안에 있다’라고 한 말:한 자루의 불자를 떠나서 별
도의 곳에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는 다만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서 찾
으려 하는 그 학인의 병통을 부수어버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60)
黃龍云云至道理者, 若是此事, 分明在達摩面前, 如何說箇不
識地道理? 僧曰不識者, 三世諸佛亦不識. 拈起拂子云云者,
不可離却一條拂子, 別有在處, 但破這僧鶩於虛遠之病.
60) 병통을 타파하기 위하여 설정한 말일 뿐, ‘하나의 티끌에 시방의 세계가 모두 들
어 있다(一微塵中含十方)’라는 것과 같은 불법의 이치를 설한 것이 아니라는 해
설이다.
오조법연(五祖法演 : 백운법연)의 상당
이 공안을 제기하고 ‘모르겠습니다’라고 한 구절과 ‘황매의 종지 ~ 불
법을 이해하지 못한다’61)라는 구절을 더불어 제기하고 말했다. “대단하구
려,62) 조사들이여! 질문한 것에 대하여 모르겠다거나 이해하지 못한다거
나 했거늘 어떻게 그 후손들이 온 누리에 두루 퍼져 있는가?” 이어서 말했
다. “한 사람은 허(虛)로 전했는데 모든 사람이 (오인하여) 실(實)이라 전
한다.”63)
白雲演, 上堂, 擧此話, 至不識, 連擧黃梅意旨, 至不會佛法,
師云,“ 大小大, 祖師! 問着底, 便是不識不會, 爲什麽却兒孫
遍地?” 乃云,“ 一人傳虛, 萬人傳實.”
61) 황매의 종지는 5조 홍인의 종지를 가리킨다. 6조가 ‘불법을 이해하지 못한다’라
고 한 대답을 달마의 ‘모르겠습니다’라고 한 말과 연결시켜 하나의 화두로 제기
한 장면이다. “어떤 학인이 혜능에게 물었다. ‘5조 홍인의 종지는 어떤 사람이
얻었습니까?’ ‘불법을 이해하는 사람이 얻었느니라.’ ‘스님께서는 얻었습니까?’
‘나는 불법을 이해하지 못한다.’”(宗寶本『壇經』大48 p.358a10. 一僧問師云,
‘黃梅意旨, 甚麽人得?’ 師云, ‘會佛法人得.’ 僧云, ‘和尙還得否?’ 師云, ‘我不會
佛法.’);“5조 홍인 회하의 499명의 학인들이 모두 불법을 이해했지만 오직 노
행자(혜능) 한 사람만이 불법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단지 도를 알았을 뿐 별
다른 일을 이해한 것이 아니었다.”(『南泉普願語要』 古尊宿語錄12 卍118 p.
297a1. 只如五祖會下, 四百九十九人, 盡會佛法, 惟有盧行者一人, 不會佛法. 只
會道, 不會別事.)
62) 대소대(大小大). 치켜세우는 듯하지만 사실은 빈정대는 말이다.
63) 달마대사나 6조가 ‘모른다’,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한 말들은 모두 사실 그대로
어떤 것에 대하여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진실한 알갱이[實]가 없는 하나의 실
험 수단으로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허(虛)이다. 그것을 오인하여 모든 사람이 실
(實) 그대로 모른다는 뜻으로 전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조사선의 상용구이다.
본서 110則 주석86)과 동일한 맥락이다.
[설화]
대단하구려, 조사들이여 ~ 두루 퍼져 있는가:묻자마자 곧바로 ‘모르겠습니다’
또는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한 대답은 전한 것도 없고 받은 것도 없는 결
과가 되는데, 어째서 후손들이 남아 있느냐는 뜻이다.
한 사람은 허로 전했는데 모든 사람이 실이라 전한다:모르겠다거나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 바로 한 사람은 허로 전했다는 구절에 해당되며, 후손들이
온 누리에 두루 퍼져 있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실이라 전했다는 구절에
상응한다. 곧 뜻을 풀이하여 말하자면 모르겠다거나 이해하지 못한다는
대답은 안다거나 이해한다고 하는 것에 대응해서 내놓은 말이다. 마치 신
령한 거북이 꼬리를 끌어 자취를 없애려다가 도리어 또 다른 흔적이 생기
는 꼴과 같다.64)
白雲:大小大祖師, 至遍地者, 旣是才問着, 便道不識不會, 則
是無傳無受, 爲什麽却有兒孫. 一人傳虛, 萬人傳實者, 不識不
會, 是一人傳虛;兒孫遍地, 是萬人傳實. 則義謂不識不會, 猶
是對識得會得云也. 如靈龜曳尾, 拂迹成痕.
64) 앎과 이해의 틀에 얽매이는 자취를 없애려고 내세웠던 ‘不識’이나 ‘不會’라는 말
이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또 하나의 흔적으로 남아 집착의 실마리가 된다는 뜻
이다. “부처가 있는 곳에는 머물지 말라고 하지만 자취를 없애려다 도리어 흔적
이 생기는 결과가 되고, 부처가 없는 곳은 급하게 지나가라고 하지만 목소리를
높이면서 메아리를 그치게 하려는 짓과 같다.”(『佛海瞎堂語錄』 卍120 p.952a9.
有佛處不得住, 拂跡成痕;無佛處急走過, 揚聲止響.)
불감혜근의 상당
달마가 무제와 처음 만났을 때 ‘무제가「성스러운 진리의 근본적인 이치
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고 ~ 지공이「이 사람은 관음대사로서 (폐하께)
부처님의 심인을 전하고, 부처님을 도와서 교화를 펼쳤던 것입니다 65)」’라
고 한 부분까지 제기하고 말했다. “그림으로 그리려 해도 완결되지 못하
고, 진흙으로 빚으려 해도 형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무제
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고 달마는 강을 건너 떠났던 것일까? 알겠는가?
무제는 달마의 범어를 이해하지 못했고, 달마는 무제의 중국어를 몰랐기
에 눈앞에서 만나고도 호나라와 월나라66) 사이의 거리처럼 멀어지게 되었
던 것이다. 지공이 비록 잘 번역했지만 우격다짐으로 양민을 억눌러 천민
으로 만들었으니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비록
그렇다고는 하지만 여러분은 어디서 달마를 만날 것인가? 만약 지금 당장
만난다면 비로소 산승이 지금 한 말이 한편은 중국어이고 다른 한편은 범
어라는 것을 알겠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흰 구름 끊어진 곳이 청산이고
나그네는 다시 청산 밖에 있으리라.”
佛鑑懃, 上堂, 擧, 達磨初見武帝, 帝問, ‘如何是聖諦第一
義?’ 至誌公云, ‘此是觀音大士, 傳佛心印, 助佛揚化.’ 師云,
“畫也畫不成, 塑也塑不就. 因何武帝不契, 達磨渡江? 會麽?
盖武帝不會達磨梵語, 達磨不曉武帝唐言, 致見覿面胡越. 誌
公雖善翻譯, 剛然壓良爲賤, 致見畫虎成狸. 雖然如是, 諸人
向什麽處見達磨? 若也當面見得, 方知道山僧如今, 一邊唐言,
一邊梵語. 如或未然, 白雲斷處是靑山, 行人更在靑山外.”
65) 뒤 구절은 본래의 공안에 없는 내용이다.
66) 호(胡)나라는 북쪽에 있고 월(越)나라는 남쪽에 있어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 또
는 적이나 대립 관계를 나타낸다.
[설화]
그림으로 그리려 해도 완결되지 못하고:달마의 입장에 속하는 말이다.
진흙으로 빚으려 해도 형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무제의 입장에 속하는 말
이다.
아래 글에서 그 뜻을 밝히고 있다. 달마의 범어는 ‘막힘없이 트여 성스
러움조차도 없다’라고 한 말이다. 이렇게 ‘막힘없이 트여 성스러움조차
도 없다’는 범어의 뜻을 모르는 것이 ‘그림으로 그리려 해도 완결되지 못
한다’라고 한 구절과 상응한다. 다만 ‘막힘없이 트여 성스러움조차도 없
다’는 (번역된) 중국어만 알았을 뿐, 달마의 범어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
이다. 무제의 중국어는 ‘짐과 마주하고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라는 말이
다. 이렇게 ‘짐과 마주하고 있는 자는 누구냐’는 중국어의 뜻을 모르는 것
이 ‘진흙으로 빚으려 해도 형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라고 한 구절과 상응
한다. 다만 ‘짐과 마주하고 있는 자는 누구냐’는 번역된 범어만 알았을 뿐,
무제의 중국어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눈앞에서 만나고
도 호나라와 월나라 사이의 거리처럼 멀다’라고 한 것이다.
지공이 비록 잘 번역했지만 ~ 고양이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관음대사로서 부처
님의 심인을 전하고, 부처님을 도와서 교화를 펼쳤던 것입니다’라고 한 것
이 달마의 ‘막힘없이 트여 성스러움조차도 없다’라는 말을 번역한 것이다.
지공이 비록 이렇게 번역하기는 했지만 달마까지 자신의 잘못에 연루시
킨 것이니 그 말을 두 갈래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말은 마치
무제가 본래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에서야 비로소 이해하도록
해주었다는 것과 같으니, 이렇게 저 무제가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결과에 도달하게 되므로 ‘양민을 억눌러 천민으로 만들었다’라고 한 것이
다. 이것이 바로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가 되었다는 뜻이다.
지금 당장 만난다면:만약 ‘짐과 마주하고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라는 말
에서 진흙으로 빚으려 해도 형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소식을 알았다
면, 어찌 반드시 ‘막힘없이 트여 성스러움조차도 없다’라는 말에서 달마의
의중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뜻이다.
산승이 지금 ~ 범어라는 것을 알겠지만:중국어는 ‘짐과 마주하고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라는 것이니 이밖에 다른 말은 없으며, 범어는 ‘막힘없이 트
여 성스러움조차도 없다’라는 것이니 이밖에 다른 말은 없다는 뜻이다. 이
와 같이 중국어와 범어 그 하나하나가 산승의 말이다. 앞에서는 먼저 범어
를 들고 뒤에 중국어를 들었지만, 뒤에서는 먼저 중국어를 들고 뒤에 범어
를 들었던 것도 타당한 점이 있다.
佛鑑:畫也畫不成者, 屬達摩也. 塑也塑不就者, 屬武帝
也. 下文明之. 達摩梵語, 卽廓然無聖. 是不知廓然無聖, 是畫
也畫不成. 只知廓然無聖, 是不曉是達摩梵語. 武帝唐言, 卽
對朕者誰. 是不知對朕者誰, 是塑也塑不就. 只知對朕者誰,
是不會是武帝唐言也. 故對面成胡越也. 誌公雖善飜譯云云
者, 觀音大士, 傳佛心印, 助佛揚化, 是飜譯達摩廓然無聖也.
誌公雖然伊麽飜譯, 累他達摩, 話作兩橛. 其言似武帝本不曉
唐言, 而今始令曉, 是達他武帝不曉唐言, 故云, 壓良爲賤也.
則此謂畫虎成狸也. 當面見得者, 若也向對朕地, 見得塑也塑
不就地消息, 何必向廓然無聖處, 見得爲達摩也. 山僧至梵語
者, 唐言卽對朕者誰, 此外無餘也, 梵語卽廓然無聖, 此外無
餘也. 然則唐言梵語, 一一是山僧也. 前頭, 則先擧梵語, 而後
擧唐言;後頭, 則先擧唐言, 而後擧梵語, 亦有攸當.
장로분의 상당
“달마는 양나라 왕에게 성스러운 진리에 대한 질문을 받고 ‘모르겠다[不
識]’고 말했을 뿐이고, 6조는 황매67)가 누구에게 가사와 발우를 전했는지
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해하지 못한다[不會]’라고 말했을 뿐이다. 세상의
노련한 화상들이 바로 이 ‘모르겠다’와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말을 가지
고 납승들을 점검했고, 세상의 납승들은 이 두 말을 가지고 눈동자를 바꾸
거나 코를 꿰었다.68) 내가 이렇게 한 말을 듣고 알았다거나 이해했다고 한
다면, 이것이 바로 눈동자가 바뀌어버린 것이고 코가 꿰여버린 것이다. 얽
매인 몸을 벗어나는 한 구절은 어떻게 말해야 할까? 명성이 높으면 딱딱
한 돌에 그 이름을 새길 필요가 없으니, 길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입이
바로 비석이기 때문이다.”
長蘆賁, 上堂云, “達磨, 見梁王問聖諦, 只道得箇不識;六祖,
見黃梅付衣鉢, 只道得箇不會. 天下老和尙, 秪將者不識不會,
勘驗衲僧;天下衲僧, 被者不識不會, 換却眼睛, 穿却鼻孔. 長
蘆伊麽道, 是識了也, 是會了也, 是被換却眼晴, 穿却鼻孔了
也. 如何道得出身一句? 名高不用鐫頑石, 路上行人口是碑.”
67) 5조 홍인. 주석61) 참조.
68) 이 두 개의 화두로 점검받고, 자신의 타고난 안목을 개발하지 못하고 남의 견해
를 자신의 눈으로 삼거나, 콧구멍에 고삐가 꿰여 주인이 끄는 대로 끌려 다니는
소와 같이 그 말에 자신의 본분이 예속당하여 자유로운 구석이 없어지게 된다
는 뜻이다.
[설화]
세상의 노련한 화상들이 ~ 납승들을 점검했고:세상의 납승들은 이러한 견해
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내가 이렇게 한 말을 ~ 코가 꿰여버린 것이다:다시 ‘모르겠다’거나 ‘이해하지
못했다’라는 말에 대한 견해를 일으킨다면 이것이 알았거나 이해한 것이
니, 그 말에 콧구멍을 꿰인 것이며 눈동자를 바꾸어버린 결과라는 뜻이다.
명성이 높으면 ~ 비석이기 때문이다:모르겠다거나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 자
체로 명성이 높은 것인데, 어찌 다시 딱딱한 돌에 이름을 새겨서 별도로
하나의 도리를 만들 필요가 있겠느냐는 뜻이다.
長蘆:天下老和尙, 至衲僧者, 天下衲僧, 不敢到此見解故. 長
蘆伊麽, 至鼻孔了也者, 又作不識不會見解, 是識了也, 會了
也, 則被它穿却鼻孔, 換却眼睛也. 名高不用云云者, 不識不會
是名高, 何必更鐫頑石, 別作箇道理.
계숭(契嵩)의 설
계숭이 교설을 밝힌「진제무성론」69)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제(眞諦)
란 무엇인가? 지극히 미묘한 절대70)의 경계를 말한다. 성인이란 무엇인
가? 신령한 지혜로 전개하는 유위(有爲)의 작용을 말한다. 유위의 작용으
로써 권(權)을 말하고, 대립의 짝이 끊어진 절대로써 실(實)에 이른다.71)
실이 있는 까닭은 마음을 온전히 하고 권의 자취를 없애기 위한 것이요,
권이 있는 까닭은 지말을 거두고 실의 근본을 따르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으니 진제가 어찌 그 사이에 분별을 허용하겠는가! 시험 삼아 말에 의
탁하여 그 깊은 뜻을 밝힐 뿐이다. 진제란 모든 중생의 본래 마음이자 모
든 성인의 진실한 경지로서 여(如)72)이고 여가 아니며 여가 아닌 것도 아
니다. 온갖 마음을 숨기지만 어둡지 않고 성인의 지혜를 나타내지만 빛나
지 않으니, 그 신령한 광명은 헤아릴 수 없고 그 정교한 계산은 궁구할 수
없다. 그러므로『반야경』에 ‘제일의 진제는 이룰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
다’73)라고 하였다. 그 본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말하자면 청정하
고 텅 비어 성인도 범부도 깨끗이 사라졌고, 그 비추는 작용으로 말하자
면 모든 존재에 두루 퍼져 북치고 춤추며 갖가지로 움직인다. 이와 같이
본체 그대로 보존되면 근본과 같고, 비추어 작용하면 지말과 흡사하다. 그
마음이 지극한 근본과 하나가 되는 순간 묵묵히 청정할 뿐 성인이 되려는
생각도 끊고 지혜에 대한 집착도 버리니,74) 이것은 또한 마땅히 그러한 것
이다. 제일의제는 막힘없이 트여 텅 비고 고요하기에 성인조차 없다 했으
니, 이 말에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진나라 사람(姚秦의 황제)은
‘문밖 길과 뜰 사이의 거리가 너무 먼 것과 같아서 보통 사람들의 생각에
는 가까이 와 닿지 않는다. 만약 성인조차 없다면 그렇게 없다고 아는 자
는 누구인가?’75)라고 생각했으나, 이 또한 아직 그 미묘한 뜻을 깨우친 말
은 아니다. 범부와 성인을 차별하는 지각과 같은 것은 진제의 그림자나 메
아리에 불과하고 망령된 마음이 대상으로 삼아 분별하는 작용일 뿐이다.
그림자나 메아리에 마음을 두면 명수76)에 막히게 되고, 대상에 대한 분별
에 집착하면 그 분별에 현혹된다. 그러므로 성인이 아니면서 성인이기에
성인이 위대한 성인인 이유이며, 앎이 없으면서 알기에 그 참된 앎이 두루
무엇이나 아는 근거가 된다. 옛날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제일의제
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그에 응답하여 ‘막힘없이 트여 성스러움조차도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질문하는 자가 ‘짐을 마주하고 있는 자는 누구입니
까?’라고 묻자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성스러움
에 어두워서 진실로 몰랐던 것은 아니며, 상대가 표현된 말로써 진제를 구
하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일 뿐이다. 질문한 사람이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
에 다시 그렇게 말했을 뿐이지만, 뱃전에 떨어진 부분을 새겨놓고 칼을 찾
으려는 격이니77) 점점 멀어지게 될 것이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경우
그 손가락의 뜻은 달에 있고, 말로써 도를 비유할 경우 그 말의 뜻은 도에
있다. 말만 돌아보고 도를 돌아보지 않으면 도를 알 수 없고, 손가락을 보
면서 달을 보지 못한다면 달을 알 수 없다.78) 그런 까닭에 지인79)은 항상
언어의 표면에서 (숨은 뜻을) 미묘하게 깨닫고, 겉모습의 외피에서 (감추
어진 진실을) 터득하는 것이다.79) 정명80)은 말없이 드러냈고 문수는 그를 훌
륭하다고 칭찬했으며,81) 공생82)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치로써 말했고,
천제(天帝)는 들을 것이 없는 이치로써 들었던 것이 바로 그러한 뜻이 아
니겠는가!83)”
嵩, 明敎, 眞諦無聖論云,“ 眞諦者何? 極妙絶對之謂也. 聖人
者何? 神智有爲之謂也. 有爲則以言乎權, 絶對則以詣乎實.
實之所以, 全心而泯迹;權之所以, 攝末而趍本. 然則眞諦也
者, 豈容擬議於其間哉! 聊試寓言, 以明其蘊耳. 夫眞諦者, 群
生之元心也, 衆聖之實際也, 如也非如也, 非非如也. 隱群心
而不昧, 現聖智而不曜, 神明不能測, 巧曆不能窮. 故般若曰,
‘第一眞諦, 無成無得.’ 言其體而存之, 則淸淨空廓, 聖凡泯
然;言其照而用之, 則彌綸萬有, 鼓舞群動. 然則體而存之, 若
其本乎;照而用之, 似其末乎. 當其心冥於至本也, 黙乎淸淨,
而絶聖棄智, 是亦宜爾. 所謂第一義諦, 廓然空寂, 無有聖人,
孰爲謬乎! 而秦人以爲,‘ 大甚徑廷, 不近人情. 若無聖人, 而
知無者誰歟?’ 是亦未諭其微旨也. 若夫凡聖知覺者, 眞諦之
影響, 妄心之攀緣耳. 存乎影響, 則凝滯於名數;以乎攀緣, 則
眩惑於分別. 是則非聖而聖, 而聖人所以大聖, 無知而知, 其
眞知所以遍知. 昔人有問於昔人曰, ‘云何是第一義諦?’ 應曰,
‘廓然無聖.’ 問者或曰,‘ 對朕者誰?’ 應曰,‘ 不識.’ 然斯人也,
非昧聖而固不識也, 盖不欲人以形言, 而求乎眞諦者也. 而問
人不悟, 乃復云云. 刻舟求劒, 遠亦遠矣. 以指摽月, 其指所以
在月;以言喩道, 其言所以在道. 顧言而不顧其道, 非知道也;
視指而不視其月, 非識月也. 所以至人, 常妙悟於言象之表, 而
獨得于形骸之外. 淨名黙示, 而文殊稱善;空生以無說而說,
天帝以無聞而聞, 不其然乎!”
69) 계숭(契嵩)의「眞諦無聖論」.『鐔津文集』권3 大52 p.664b11의 내용 전체를 그대
로 수록한 것이다.
70) 絶對. 유와 무, 선과 악 등의 모든 상대적 대립의 짝이 끊어진 것.
71) 권(權)은 실(實)에 이르기 위한 다양한 방편, 실(實)은 궁극적인 진실 자체.
72) 진실 그대로의 실상(實相) 또는 진여(眞如). 여여(如如)한 실상을 말한다.
73)『肇論』「不眞空論」 大45 p.152b11에『放光般若經』의 인용으로 나오는 구절이지
만, 경전상의 일치하는 구절은 없다. “제일의제에 근거하면 부처를 이룰 일도 없
고 열반을 얻을 일도 없다. 세속의 진리 형식[世諦]에 따라 있을 뿐이다.”(『肇論
疏』권상 大45 p.172c17. 據第一義諦, 無有成佛, 無有得涅槃. 世諦則有耳.)
74) 절성기지(絶聖棄智). 출전은『老子』19장이다.
75) 본칙 <설화> 참조.
76) 名數.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몇 가지 법들을 하나로 묶어 숫자로 나타내는 것.
법수(法數 dharma-paryāya)와 같은 말. 3계(界)나 5온(蘊) 등과 같이 동일한 범
주에 세 가지 또는 다섯 가지 대상을 묶고 그 숫자를 앞에 붙인 것.
77) 각주구검(刻舟求劍).『呂氏春秋』「察今」에 나오는 비유. ‘제일의제’에 대한 사고
의 격을 미리 정해 놓고 헤아리는 양무제를 풍자한다.
78) 교종과 선종에서 모두 문자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야 한다는 비유로 널리 쓰인
다.『楞嚴經』에 나오는 말이다. “그대들은 오히려 대상을 분별하는 마음으로 법
을 듣고 있으니, 이 법 또한 대상일 뿐이기에 법성(法性)을 얻지 못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손가락으로 가리켜 누군가에게 달을 보여주면, 그 사람은 손가락
을 따라서 달을 보아야 한다. 만약 다시 손가락을 보며 달 자체라고 여긴다면,
이 사람이 어찌 달만 놓쳤겠는가? 달 또한 그 손가락을 놓친 것이다. 왜 그런가?
손가락이 표시하며 가리킨 대상은 밝은 달이기 때문이다. 어찌 손가락만 놓쳤
겠는가? 또한 밝음과 어두움도 분간하지 못한 것이다. 왜 그런가? 곧 손가락 자
체를 달의 밝은 성질이라 여겨 밝은 성질과 어두운 성질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
한 것이기 때문이다.”(『楞嚴經』권2 大19 p.111a8. 汝等, 尚以緣心聽法. 此法,
亦緣, 非得法性. 如人, 以手指月示人, 彼人, 因指當應看月. 若復觀指以爲月體,
此人, 豈唯亡失月? 輪亦亡其指. 何以故? 以所標指爲明月故. 豈唯亡指? 亦復不
識, 明之與暗. 何以故? 卽以指體爲月明性, 明暗二性, 無所了故.)
79) 至人. 번뇌망상에서 벗어나 궁극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莊子』에서 이상적 인
간상으로 곳곳에 제시되어 있다. “지인은 자기 자신이 없다.”(「齊物論」. 至人無
己.);“오로지 지인만이 세상에서 노닐어도 편벽되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려도
자신의 근본을 잃지 않는다.”(「外物」. 唯至人, 乃能遊於世而不僻, 順人而不失己.)
80) 淨名. 유마거사(維摩居士). Vimalakīrti. 비마라힐(毘摩羅詰)·유마힐(維摩詰)
등으로 음사한다. 범어 vimalakīrti는 vimala와 kīrti로 이루어진 말로 vimala는 정
(淨) 또는 무구(無垢)로, kīrti는 명(名)이나 칭(稱)으로 한역된다. 그러므로 정명
(淨名) 또는 무구칭(無垢稱)이라 하는데, 전자는 구역이고 후자는 신역이다.
81) 다른 모든 보살이 불이법(不二法)에 대하여 언급했으나 유마거사는 초지일관
침묵으로 답했다. 문수보살이 이에 대하여 칭찬한 것이다. “훌륭하구나, 훌륭
해! 이처럼 문자와 언어가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참으로 불이의 법문을 깨달은
것이다.”(『維摩經』大14 p.551c23. 文殊師利歎曰, ‘善哉, 善哉! 乃至無有文
字語言, 是眞入不二法門.’)
82) 空生. 수보리(須菩提)의 한역어. Subhūti, Rab-hbyor. 부처님의 10대제자
중 공(空)의 이치를 가장 잘 이해하였다 하여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일컬어진
다. 선현(善現)·선실(善實)·선길(善吉)·선업(善業) 등으로도 한역하고, 소부지
(蘇部底)·수부제(須扶提) 등이라고도 음사한다.
83) 경전적 근거는 이렇다. “그때 수보리가 모든 대중에게 말했다. ‘내가 설한 반야
바라밀다는 아무도 받아들일 자가 없다. 왜 그런가? 여기에는 말로 풀어줄 법이
없으며 겉으로 드러낼 법도 없어서 분별할 대상도 없고 알 수 있는 대상도 없기
때문이다. 말하여 드러낸 것도 없고 알 것도 없으므로 반야바라밀다를 이와 같
이 말로 풀어 주었고 이처럼 듣고서 받아들인 것이다.’ 이때 제석천의 주인[天
帝]은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 존자 수보리가 이와 같이 깊고 깊은 정법을 말로
풀어 주었으니 나도 마땅히 온갖 아름다운 꽃을 만들어 그 위에 뿌려 주리라.’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곧바로 무수히 많은 아름다운 꽃을 만들어내어 존자 수
보리 위에 뿌렸다.”(『佛母出生般若經』 권2 大8 p.593b17. 爾時, 須菩提, 告諸
衆言, ‘我所說般若波羅蜜多, 無能受者. 何以故? 此中無法宣說, 無法表示, 無所分
別, 無所了知. 以無說示無了知故, 般若波羅蜜多, 如是宣說, 如是聽受.’ 是時, 帝
釋天主, 卽作是念, ‘今尊者須菩提, 宣說如是甚深正法, 我當化諸妙華, 以散其上.’
作是念已, 卽時化出無數妙華, 散於尊者須菩提上.)
『임간록(林間錄)』의 설
“오중84)의 강사85)들이 선종 조사의 전법게(傳法偈)를 제대로 해석하
는 사람이 없다고 자주 비판했는데, 선사들이 그들과 논쟁했으나 조사들
의 진실에서 빗나가 거듭 그들의 비방을 받기 알맞은 구실만 주었다. 달
관담영86)선사가 그 뜻을 이렇게 밝혔다. ‘이는 달마가 2조 혜가에게 말
한 것인데, 어째서 해석하는 사람이 필요한가? 가령 양무제가 달마를 처
음 만나서「성스러운 진리의 근본적인 이치는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달
마는「막힘없이 트여서 성스러움조차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고,「짐
을 마주하고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다시「모르겠습니다」라
고 응답한 것과 같다. 달마가 중국어에 능통하지 않았다면 어찌 그때 그
렇게 말할 수 있었겠는가?’ 강사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林間錄云, “吳中講師, 多譏諸祖傳法偈無譯人, 禪者與之辯失
其眞, 適足以重其謗. 達觀穎禪師, 諭之曰,‘ 此, 達磨爲二祖
言者也, 何須譯人耶? 如梁武帝初見之, 卽問, 「如何是聖諦第
一義?」 答曰, 「廓然無聖.」 進云, 「對朕者誰?」 又曰, 「不識.」
使達磨不通方言, 則何於是時, 便能爾耶?’ 講師不敢復有辭.”
84) 吳中. 중국 강소성(江蘇省) 오현(吳縣) 일대.
85) 講師. 경전을 강설하는 교학자. 선문헌에서는 선사(禪師)와 대칭되는 인물로 거
론하는 것이 보통이다.
86) 達觀曇穎(989~1060). 송나라 임제종 선사. 항주(杭州:浙江省) 전당(錢塘) 출신
으로 속성은 구(丘)씨이다. 13세 때 출가하여 대양경현(大陽警玄) 문하에서 조
동종(曹洞宗)의 선풍을 공부하다가 뒤에 임제종 계열의 곡은온총(谷隱蘊聰) 문
하에서 공부하여 그 법을 이었다.『禪林僧寶傳』권27 卍137 p.548b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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