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불교의 깨달음과 그 구현 - 최근 한국불교계의 깨달음 논쟁을 중심으로 -/이찬훈

실론섬 2017. 5. 26. 19:35

동아시아불교문화27집, 2016. 9, 283~316

불교의 깨달음과 그 구현

- 최근 한국불교계의 깨달음 논쟁을 중심으로 -

이 찬 훈/인제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Ⅰ. 머리말

Ⅱ. ‘깨달음 논쟁’의 경과와 쟁점

Ⅲ. 초기불교의 근본적 가르침과 깨달음

Ⅳ.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과 깨달음에 이르는 길

Ⅴ. 대승불교의 이념과 깨달음의 구현

Ⅵ. 맺는 말

 

<국문초록>

이 글은 최근 한국불교계에서 벌어진 ‘깨달음 논쟁’의 경과와 그 과정에서

제기된 중요한 쟁점들을 정리하고, 그에 대한 검토를 통해 오늘날 불교의 깨

달음과 그 구현을 위해 한국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논하려는 것이다. 이

를 위해 이 글에서는 우선 처음에 제기된 문제와 그를 둘러싼 찬반양론에서

드러난 핵심 쟁점들을 정리하였다. 다음으로 이번 논쟁은 초기불교의 교리

와 밀접히 관련되어 진행되어 온 만큼 이 글에서는 초기경전에 대한 검토를

통해 불교의 근본적 가르침과 깨달음 개념을 분명히 밝혔다. 이어서 이러한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대승불교의 이념과 그 이념에 따른 깨달음의

올바른 구현을 위해 오늘날 한국 불교에 필요한 것들을 정리해보았다.

 

Ⅰ. 머리말

 

불교의 근본적 목적은 깨달음을 통해 괴로움(번뇌)에서 벗어나 해탈 또는

열반에 이르는 것, 그리고 다른 중생도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 또는 열반에

이르도록 돕는 것이다. 이런 이가 곧 부처이며.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목적은

나와 중생 모두가 부처를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해탈 또는 열반에 이르게 하고, 부처를 이루게 하는 깨달음이란

무엇이며, 그 깨달음은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사실 지금까지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깨달음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한국 불교계에서는 새삼스럽게 소위 ‘깨달음 논쟁’

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그것은 분명 지금까지 한국 불교에서 추구해온 깨달

음과 그를 이루기 위한 공부와 수행법이 현 시대와 사회에서 갖는 적실성이

나 한계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의 ‘깨달음 논쟁’은 조계종교육원장인 현응 스님이 조계종을 중심으로

한 한국 불교계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의 내용(의미)과 깨달음을 얻고 구현하

기 위한 방법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행한 데에서 촉발되었다. 그 후 그의 문

제 제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여러 불교 매체와 지면을 통해 찬반양론을 펼

치면서 논쟁이 벌어졌으며, 아직도 그것은 계속 진행 중이라 할 수 있다.

 

‘깨달음 논쟁’은 그 과정에서 많은 쟁점들을 부상시켰다. 초기부터 이어져

온 부처님의 근본적인 가르침과 깨달음의 내용,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방법

은 무엇인가? 초기불교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이념과 그 실현 방법은 무엇인가? 한국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추구해 온 깨달

음과 그것을 얻기 위한 수행방식은 과연 오늘날에도 부처님의 근본적 가르

침이나 대승불교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적합한 것인가? 올바른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구현해나가기 위해 오늘날 필요한 수행법은 무엇인가?

 

그동안 한국 불교는 다분히 속세와 동떨어져 오직 간화선만을 통한 단박

의 깨침에 의해 개인적인 깨달음만을 얻으려는 산중불교, 단박의 깨침을 통

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듯 환상을 퍼뜨리는 신비주의, 개인적인 행

복만을 기원하는 미신적 기복불교라는 함정에 빠져 있었다. ‘깨달음 논쟁’이 

제기한 쟁점들에 대한 제대로 된 검토와 논의는 한국 불교가 그러한 함정으

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방도에 대한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간

틀에 박힌 전통적인 수행법에만 매달리면서 절실한 중생의 삶과 고통의 해

결이라는 현실로부터 멀어져 버린 한국 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그 방도

의 재정립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 글에서는 그동안 진행되어 온 ‘깨달음 논쟁’의 경과와 그 과정에서 제기

된 중요한 쟁점들을 정리하고, 그에 대한 검토를 통해 오늘날 불교의 깨달음

과 그 구현을 위해 한국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논의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우선 현응 스님의 문제 제기와 그를 둘러싼 찬반양론에서

드러난 핵심 쟁점들을 정리해 보려 한다. 다음으로 이번 논쟁은 초기불교의

교리와 밀접히 관련되어 진행되어 온 만큼 이 글에서는 초기경전에 대한 검

토를 통해 불교의 근본적 가르침과 초기불교의 깨달음 개념을 분명히 밝히

려 한다. 이어서 이러한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대승불교의 이념과

그 이념에 따른 깨달음의 올바른 구현을 위해 오늘날 한국 불교에 필요한 것

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Ⅱ. ‘깨달음 논쟁’의 경과와 쟁점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깨달음 논쟁’은 조계종교육원장인 현응 스님이 자

신의 저서깨달음과 역사의 발간 25주년을 기념해 2015년 9월 4일에 열린

학술세미나에서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라는 글을 발표한 데서 시작되었

다. 그 글에서 현응 스님은 한국 불교계에서 추구해 온 깨달음의 내용과 깨달

음을 얻고 구현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비판적으로 논하고, 이 시대에 알맞은

올바른 깨달음의 성취와 구현을 위해 필요한 공부법과 수행법을 제안하였다.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이 현응 스님의 글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표명하면서

소위 ‘깨달음 논쟁’이 전개되었다. 여기에는 불교계의 승려들은 물론이고 학

계와 불교문화계의 여러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논쟁은 불교계의 여러 신문

이나 잡지(‘미디어붓다’, ‘법보신문’, ‘불교신문’, ‘불교닷컴’, ‘월광’, ‘불교평론’) 

등의 매체에 발표한 글이나, 깨달음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정의평화불교연

대 화쟁문화아카데미에서 2016년 1월 15일 열었던 ‘지금 여기에서 깨달음이

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학술대회)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논쟁은 현응 스님의 문제 제기에 대한 긍정적 수용이나 비판적 관점의 표

명에서 시작하였으나, 진행 과정에서 다른 사람이 제기한 견해나 그와 연관

된 또 다른 주제에 대한 논쟁으로 번져나가면서 복잡다기하게 전개되었다.

논쟁 과정에서 제기된 다양한 문제들을 이 글에서 모두 다루는 것은 불가

능할 뿐만 아니라 그리 적합한 일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애초

에 현응 스님이 제기한 핵심 문제들과 관련된 쟁점에 대해서만 다루면서, 그

것이 오늘날 우리 불교계에서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우선

이 절에서는 현응 스님의 문제 제기, 그리고 그와 연관된 쟁점들을 정리해 보

도록 한다.

 

현응 스님이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에서 표명한 견해의 핵심은 대략 다

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1)

1) 이하에서 서술하는 현응 스님의 견해에 대해서는 법보신문 (인터넷판 2015. 09. 07)에 실린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많은 글들을 불교계의 신문
   이나 잡지 등에 발표되거나 실린 글로부터 인용하였다. 매체 특성상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하
   여 인용 페이지를 명기하지 않고 인용되는 글의 제목만을 밝힌 인용문이 많다. 다만 인용의
   정확성과 참고의 편의를 위해 원래의 글에 절의 구별이 있을 경우에는 되도록 인용문이 속해
   있는 절의 제목도 표기하였다.

 

1. 한국 불교계의 조계종단에서는 깨달음을 위한 수행에 평생을 매달리지만 

   깨달았다는 사람을 보기 어렵다.2)

2. 그런 문제의 원인은 깨달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있다. 현재 한국불교

   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마음을 확실히 깨닫는 것’ ‘몸과 마음의 완성된 경지

   이자 모든 번뇌를 끊고 고매한 인격을 이룬 높은 경지’이며, 이러한 깨달음을

   ‘궁극적 깨달음’ ‘확철대오’ 등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마음과 깨달음의 의미가

   모호하고 이를 얻기 위한 노력의 방법도 불분명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3)

3. 부처님의 깨달음은 ‘연기관(緣起觀)의 이해를 확립함, 즉 연기를 잘 이해하는 

   것이며, 삶의 괴로움의 문제를 이러한 통찰과 이해로서 해결하는 것이다. 

   가장 초기의 가르침을 전하는 ?마하박가(大品律藏)?에는 이것이 분명

   하게 서술되어 있다.4)

4.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기 때문에 설법, 토론,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며, 부처님은 삼매와 선정을 통해 수련하라고 지도하지는 않았다.5)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사띠라는 것도 원래는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의

   네 가지 테마로 부처님의 설법내용을 정리해서 좀 더 요령 있게 기억하면서

   사유하는 방식이었으나 이후 특정한 주제나 내용으로 재정리하여 이것들을

   삼매(선정)와 결합한 위파사나 방식으로 성찰하는 식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

   와 비슷하게 중국 선불교도 조사스님들의 이야기와 대화를 탐구하는 본래의

   간화선에서 선정에 집중하는 선정 위주의 간화선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것

   은 깨달음이 본래의 ‘이해하는 깨달음’에서 ‘이루는 깨달음’으로 변한 것이다.6)

5. 오직 선정에만 집중함으로써 마음을 깨달아 모든 번뇌를 끊고 고매한

   인격을 이룬 높은 경지에 도달하려는 현재의 선 수행 방식은 현대에 알맞은

   방법이 아니다. 현대인들이 겪는 고통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행복

   의 문제’ ‘다툼의 문제’나 ‘자유’ ‘평등’ ‘평화’ ‘선’ ‘악’ ‘정의’ ‘공정’ 등의 다양한

   사회정치적 문제에도 연기와 공의 가르침을 적용해야 한다.7)

6. 현대인에게 필요한 깨달음 공부로는 우선 책을 열람하면서 사유함으로

   써 연기와 공의 가르침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불교개

   론서에 시작하여 초기불교경전, 그리고 반야부 경전이나 중관사상, 그리고

  『화엄경에 대한 공부를 통해 연기와 공의 가르침과 그에 대한 대승불교적

   해석 등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연기, 공, 자비 등 불교적 문제의

   식을 가지고 불교경전이 아닌 일반 자연과학이나 진화론 등 생물학과 뇌과

   학을 탐구하며 사유하는 것도 훌륭한 방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대 사

   회와 시대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의 핵심을 알기 위한 공부를 해야 한다.

   실제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는 괴로움의 원인과 그 형성과정을 살펴 현실 속

   에서 극복하는 노력을 별도로 해야 한다. 이것은 존재의 연기성(공성)을 통

   찰해 잘 이해하는 것과 별도의 사트바(현실역사) 차원의 영역의 문제이다.

   연기와 공을 잘 이해하는 깨달음을 얻어 존재들의 변화성과 관계성을 통찰

   하고 현실의 역사와 사회적 문제들의 원인과 그 해결방법을 공부하면서 이

   를 해결해 나가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보디사트바(보살)’가 되는 것이

   현대에 필요한 올바른 공부법이다.8)

2) 현응,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 법보신문 , 인터넷판 2015. 09. 07.), <다시 ‘깨달음’에 대해>
   라는 절을 참조.
3) 같은 글, 같은 곳
4) 같은 글, 같은 곳.
5) 같은 글, 같은 곳. 현응 스님은 5부 니까야 중 삼매를 통한 깨달음을 말하는 경들은 부파불교
   의 윤색이라는 학설을 따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현응, 대승불교와 조계선풍, 그 현대적 계
   승과 발현을 위해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에 대한 반론에 답변 드립니다 중, <4. 초기경전의
   가르침은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는 절을 참조. 월간「불광」에 특별기고한 글이나 여기
   서는 법보신문(인터넷판 2015. 10. 29)을 참조함.
6) 현응,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 <설법과 사띠> 및 <중국 선불교의 간화선>이라는 절을 참조.
7) 같은 글, <현대사회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은?>이라는 절을 참조.
8) 같은 글, 같은 곳 및 현응, 대승불교와 조계선풍, 그 현대적 계승과 발현을 위해 ‘깨달음과 역
   사, 그 이후’에 대한 반론에 답변 드립니다 중, <6. 대승불교와 조계선풍의 현대적 계승과 발
   현>이라는 절을 참조.

 

현응 스님의 이런 문제제기와 견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비판적 의견을

제기했는데, 가장 중요한 핵심 주장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깨달음을 설법과 토론,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해로 파악하면서 선정 

  수행을 부정한 것은 큰 잘못이다.9)

2. 율장의 ‘마하박가’가 가장 앞선 시기에 결집되었으며 거기에서는 5부 니

   까야와는 달리 깨달음을 선정 수행과 관계없는 이해라고 했다는 것은 잘못

   이다. 마하박가와 니까야 전체를 관통하는 삼학, 팔정도의 가르침은 깨달음

   에서 선정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10)

3. 깨달음은 단순한 이해의 차원을 떠난 체득과 경험에 의존하며, 진정으로 

   깨달은 아라한은 연기를 완벽히 깨달았을 뿐 아니라 탐진치 등의 미세번

   뇌들까지 완전히 타파한다.11)

4. 깨달음을 얻고 고통과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최고의 방법은 간화선이다.

   실제 선 수행을 하여 스스로 돈오(頓悟)하기 전에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마음이다. 간화선의 실참 수행을 통해 마음을 깨닫는 것이 진정으로 깨

   닫는 최고의 방법이자 한국불교의 사활이 달려 있는 일이다. 간화선을 부정

   하는 것은 간화선 수행에 실패한 낙오자들의 주장일 뿐이다.12)

5. ‘깨달음과 역사의 결합’을 주장하는 것은 멋진 말이긴 하지만 자칫 공허

   하거나 지적 자위행위에 그칠 수 있다. 이제 이런 식의 선언적 전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13)

9) 이런 비판적 관점은 김재성, 이제열, 박태원, 서재영, 허정 스님, 전국선원수좌회, 수불 스님
   등 여러 사람에 의해 공통적으로 제기된 관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글들을 참조.
   김재성,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는 한국불교에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 (법보신문, 인터
   넷판 2015. 09. 10.), 이제열, 현응 스님, 스스로 불교관에 의문 던져야 (법보신문, 인터넷
   판 2015. 09. 17.), 박태원, 깨달음은 이해인가? (법보신문, 인터넷판 2015. 09. 24.), 서
   재영, 깨달음에 대한 두 가지 해석 (해인사 백련암,「고경」, 2016, 1월호. 여기서는 불교닷
   컴 2016. 01. 07. 참조), 허정 스님, 현응 스님의 글을 읽고 (불교닷컴, 2015. 09. 10.), 전
   국선원수좌회 성명, 누가 조계의 주인인가 ,(불교닷컴 2015. 10. 13.), 수불 스님, 조계종
   지의 현대적 구현 - 현응스님의 발제문을 읽고 (미디어붓다, 2015. 12. 31.).
10) 김재성, 앞의 글 및 마성 스님, 초기불교에서 본 깨달음 (미디어붓다, 2016. 02. 17. 이 글은
  「불교평론」66집의 특집 ‘깨달음에 관한 여덟 가지 담론’에 초기불교에서 발하는 깨달음 이
    라는 글로 약간 수정되어 실려 있다.) 중 3-3절 <선정 없는 지혜는 없다> 부분 참조.
11) 이제열, 앞의 글 참조.
12) 이런 주장의 대표로는 수불 스님의 앞의 글을 들 수 있다. 이와 비슷한 관점에서 머리로 이해
    하고 따지려 하지 말고 직접 간화선을 열심히 수행해보라는 주장은 전국선원수좌회의 성명
    이나 박태원의 앞의 글, 김홍근, 홍창성 교수의 ‘초지성주의와 반지성주의’를 읽고 (미디
    어붓다, 2016. 01. 12.) 등에도 잘 드러나 있다.
13) 박태원, 앞의 글, 5절 참조.

 

다른 한편 이와는 달리 현응 스님의 문제제기를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이

를 한국불교의 전환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도 적지 않았는데, 그 핵심

적 주장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깨달음의 내용을 ‘마음을 깨닫는 것’이라는 추상적인 것에서 연기와 공에 

   대한 이해로 분명하게 하였다.14)

2. 현응 스님이 깨달음은 이해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고 해서 그것을 분별

   지에 머물러 있다고 봐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연기와 공에 대한 개념적 이해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총체적으로 바꾸고, 개념적 이해를 초

   월하는 불이법의 차원까지도 보라고 한 것이다.15)

3. 현응 스님은 깨달음과 역사(중생들의 현실적인 삶의 문제)의 뗄 수 없는

   관계를 설파하고, 한국불교가 추상적인 깨달음에만 매달리며 역사와 사회 즉

   중생들의 삶의 문제에 소홀하여 대승불교의 참뜻을 잃어버리고 있음을 질타

   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불교의 잘못된 현실을 제대로 지적한 것이다.16)

4. 중생의 현실에 대한 몰이해와 사회성을 결여하고 있는 승가의 수행과

   공부 방식의 전환을 촉구한 것은 올바른 것이다.17)

14) 홍창성, 초(超)지성주의와 반(反)지성주의: 현응스님의 발제문에 대한 수불스님의 반론문
    을 읽고 (미디어붓다, 2016. 01. 05.) 참조.
15) 홍창성, 앞의 글 참조.
16) 이것은 여러 사람의 글 속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
    음과 같은 글들을 참조. 홍창성, 앞의 글, 김재성, 앞의 글, 이도흠, 깨달음에 대한 쟁점 및
    맥락적 지향성 (정의평화불교연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세미나 발제 2. 여기서는 불교닷컴
    2016.01.21. 참조), 박병기, 깨달음의 사회화, 그 당위성과 방향 (정의평화불교연대 ‘깨달음
    이란 무엇인가’ 세미나 발제 3. 여기서는 불교닷컴 2016.01.21. 참조), 손석춘, 현응스님 주장
    에 공감하는 세 가지 이유 (법보신문, 2015.09.21.), 김왕근, 마음의 실체를 보는 일은 가능
    한가? (미디어붓다, 2016.01.18.), 법응 스님, 깨달음 논쟁의 부끄러움 그리고 기회 (미디어
    붓다, 2016. 01. 23.), 이병두, ‘깨달음 논쟁’을 지켜보면서 드는 소박한 생각 몇 가지 (미디어
    붓다, 2016. 02. 01.)
17) 법응 스님, 앞의 글 참조.

 

Ⅲ. 초기불교의 근본적 가르침과 깨달음

 

앞에서 보았듯이 현응 스님의 문제 제기와 이를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우

선적인 쟁점은 깨달음의 의미(개념)와 그것을 얻는 방법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라 할 수 있다. 불교의 깨달음은 연기와 공을 잘 이해하는 것인

가 아니면 마음을 깨닫는 것인가? (물론 둘 다 옳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

중 어느 것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현실에 더 적합한 개념인가? 깨달음은 단순

한 이해의 영역에 속하는가 아니면 이해를 넘어선 체험과 체득의 영역에 속

하는가? 깨달음은 설법, 토론, 대화를 통해 충분히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선정

과 삼매가 필수적이지 않다고 볼 수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의미와 그것을 얻기 위한 방법을 제대로 파악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초기불교의 경전들을 상세히 분석하는 것이 중요

하다. 이 문제에 관해 현응 스님은 율장의 마하박가만을 가장 앞선 시기에 결

집된 것으로 진정한 부처님의 견해를 전하는 것이며, 니까야와 같은 다른 초

기 경전들도 후세에 윤색된 것으로서 그렇지 못하다는 전제 하에 논리를 전

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고증되지 않은 하나의 학설에 의존한 편향적 견

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초기 경전들과 그 내용 중에서 어느 것이 정

말 부처님 자신의 견해이며, 어느 것이 후세의 윤색을 거친 것인가를 완전히

판가름하는 일은 아마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더구나 이처럼 어떤

하나의 경전과 특정한 견해만을 부처님 자신의 견해로 한정해 버린다면 소

중한 불교의 가르침들을 왜곡된 것으로 배제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 개념에 대해서는 니

까야를 중심으로 한 초기경전들에서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내용들을 분석하여 판단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절에서는 먼저 초기불교의 근본적 가르침을 분석하고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깨달음 개념을 분석해보고, 다음 절에서는 여러 니까야에 나

타난 깨달음 개념과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대한 가르침을 좀 더 상세히 분석

해보고자 한다.

 

초기불교의 근본적 가르침과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깨달음 개념이 무엇이

었는가를 고찰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애초에 석가모

니가 지향했던 바와 그가 부처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주지하듯이 석가모

니 부처님은 생로병사와 같은 중생의 고통을 보고 그것의 원인과 해결방안

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과 수행을 하였고, 결국 그것을 깨달아 부처가 되었

다. 석가모니가 ‘깨달은 자’인 부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이

것 즉, 중생의 고통과 그 원인, 그리고 그것을 극복한 상태와 그에 이를 수 있

는 방법인 네 가지 거룩한 진리(사성제)의 깨달음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부

처님의 초기 가르침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바로 네 가지 거룩한 진리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여러 니까야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처님은 중생이 오랜 세월 여기저기로 윤회하는 이유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18) 그와 달리 부처는 바로 네 가지 거룩

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원만히 깨닫는 까닭에 거룩한 님 즉, 부처님이

된 것이라 한다.19) 그러므로 “진리 가운데 사성제가 최상이다.”20) 그래서 부

처님은 자신이 가르치고 시설하는 확정적인 원리는 사성제라고 말한다.21)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모든 수행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배우는 까닭

또한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22) 결국 불교의

모든 진리는 궁극적으로 이 사성제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싸리뿟따는 이

것을 이렇게 말한다 : “착하고 건전한 원리라면 어떠한 것이든 모두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포섭된다.”23)

18) 전재성 역주,『쌍윳따니까야』7권,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7, p. 690 참조.
19) 같은 책, p. 693 참조.
20) 전재성 역주,『쿳다까니까야(小部阿含) 법구경-담마파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12, p.
    170.
21) 전재성 역주,『디가니까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11, p. 436 참조.
22) 전재성 역주,『쿳다까니까야(小部阿含) 숫타니파타』,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11, pp. 366~
    367.
23) 전재성 역주,『맛지마니까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9, p. 364.

 

부처님은 중생들이 보편적으로 겪는 생로병사와 슬픔, 고통, 근심, 절망,

그리고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五蘊)로 인한 고통 같은 것들을 대표적인

고통으로 들면서 그것들을 극복하여 모든 번뇌가 사라진 열반의 상태를 설

하였다. 초기불교에 나타난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러한 고통의 원인이 무엇

이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열반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를 설하는

것으로 수렴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초기불교의 여러 경전에서 부처님은 중생이 겪는 고통이 갈애와 집착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친다. 예를 들면쌍윳따니까야에서는 ‘괴로움이야말로 집

착(의 대상)을 조건, 원인, 발생, 바탕으로 하며, 집착(의 대상)은 갈애를 조건,

원인, 발생, 바탕으로 한다’24)라든가, ‘갈애를 키운 사람은 집착을 키운 것이

고, 집착을 키운 사람은 괴로움을 키운 것’25)이라고 얘기한다. 또한맛지마

니까야에서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

존재에 대한 갈애가 있는데, 이것을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거룩한 진리라고

한다’고 말한다.26)

24) 전재성 역주,『쌍윳따니까야』 2권,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6, p. 341 참조.
25) 앞의 책, p. 343.
26)『맛지마니까야』, 앞의 책, p. 1524.

 

부처님은 갈애와 집착은 존재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무명에서 생겨난다

고 가르친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자아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

대해 존재나 비존재의 어느 극단에 치우쳐, 그것이 항상 존재하거나 단지 가

상적으로만 존재할 뿐 실재하지 않는다고 간주한다.27) 그리하여 곧잘 지금

존재하는 것들이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집착하는 영원주의에 빠지거나, 지금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다 허망한 것일 뿐이라는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한

다.28) 그러나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 존재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른 존재들과의 인연 관계 속에서만 생겨나고 소멸한다. ‘이것이 있다

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나며, 이것이 없다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는 연기의 원리야말로 올바른 존재

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다른 모든 것들과의 보편적 관계 속에서

만 존재하는 일다불이(一多不二)적이고 유무불이(有無不二)적인(空한) 것이

다. 일과 다, 유와 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이러한 중도의 원리가 연기

의 원리이다.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29)

이러한 연기의 원리를 깨달으면 존재건 비존재건 모든 것에 대한 갈애와 집

착을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을 부처님은 이렇게 얘기한다 : “참으로 있는 그대

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

은 사라진다. ···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

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30)

27)『쌍윳따니까야』2권, 앞의 책, p. 125 및 p. 278 참조.
28) 앞의 책, p. 133 참조.
29) 앞의 책, p. 125.
30) 앞의 책, p. 124.

 

이처럼 모든 존재는 연기하는 것이며 공한 것임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모

든 괴로움과 번뇌의 근본 원인인 무명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그렇기 때

문에 존재의 연기성과 공성에 대한 깨달음이야말로 불교의 근본적인 깨달음

이다. 부처님은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

다’31)고 말한다. 그래서 니까야에서는 수없이 많은 곳에서 12연기의 발생과

소멸에 대해 말하면서 무명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가르치고 있으며32), 또한

여러 곳에서 연기에 따르는 모든 존재가 공한 것이기 때문에 무상하고 괴롭

고 실체가 없는 것임(삼법인)을 얘기하고 있다.33) 이런 점에서 불교의 깨달

음은 근본적으로 연기와 공을 잘 이해하는 것이라는 현응 스님의 견해는 올

바르다고 할 수 있다.

31)『맛지마니까야』, 앞의 책, p. 373.
32) 12연기설은 수없이 많은 곳에서 설해지고 있기 때문에 일일이 다 거론할 수 없지만 특히『쌍
    윳따니까야』 2권, 앞의 책 가운데 ‘제12 쌍윳따. 인연의 모음’을 참조할 것.
33) 전재성 역주,『쌍윳따니까야』3권,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7, p. 105, 전재성 역주,『앙굿따
    라니까야』3권,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7, pp. 364-365,『쿳다까니까야(小部阿含) 법
    구경-담마파다』, 앞의 책, pp. 171~172 등을 참조.

 

연기의 원리, 중도와 불이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열

반에 이르는 길은 팔정도이다. 부처님은 팔정도를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한 거룩한 진리(道聖諦)’라고 하면서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

다.34) 팔정도는 올바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

며, 계정혜(戒定慧)의 모든 영역에 걸쳐 있다. 그 중 ‘올바른 언어, 행위, 생활

은 계행의 다발에 포함되며, 올바른 정진, 새김, 집중은 삼매의 다발에 포함

되고, 올바른 견해, 사유는 지혜의 다발에 포함’35)된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

아 괴로움을 소멸시키고 열반에 이르는 길에는 계정혜 모두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34) 팔정도에 대한 얘기 역시 니까야의 수많은 곳에서 하고 있지만, 대표적으로는『맛지마니까
    야』, 앞의 책, pp. 1524~1526172 등을 참조.
35)『맛지마니까야』, 앞의 책, pp. 541~542.

 

부처님은 “계행과 삼매와 지혜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닦아서, 나는 위없

는 청정한 삶에 이르렀다”36)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부처님이 궁극적 깨달음

에 이르기 위해서는 선정과 삼매가 필수적이라고 여겼다는 것은, 니까야의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맛지마니까야에서 부처님은 단계

적인 배움과 실천에 대해 묻는 가나까 목갈라나의 질문에 대해, ‘궁극적인 지

혜로 완전히 해탈하여 번뇌를 부순 거룩한 님’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계행을

닦고, 다음에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가부좌를 하고 선정을 수

행하고 성취하여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37) 또한앙굿따라니까야의 ‘감관

의 수호에 대한 경’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 “감관의 수호가 있다

면, 감관수호의 구족으로 계행이 그 토대를 구축한다. 계행이 있다면, 계행의

구족으로 올바른 삼매가 그 토대를 구축한다. 올바른 삼매가 있다면, 올바른

삼매의 구족으로 있는 그대로 앎과 봄이 그 토대를 구축한다. 있는 그대로 앎

과 봄이 있다면, 있는 그대로 앎과 봄의 구족으로 싫어하여 떠남과 사라짐이

그 토대를 구축한다. 싫어하여 떠남과 사라짐이 있다면, 싫어하여 떠남과 사

라짐의 구족으로 해탈에 대한 앎과 봄이 그 토대를 구축한다.”38)

36) 전재성 역주,『쌍윳따니까야』1권,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6, p. 332.
37)『맛지마니까야』, 앞의 책, ‘가나까 목갈라나의 경’, pp. 1205~1208 참조.
38) 전재성 역주,『앙굿따라니까야』6권,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7, p. 175.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부처님이 깨달음에 선정과 삼매를 필수적이지 않

다고 했다는 현응 스님의 발언은 오도(誤導)적이다. 현응 스님은 다른 공부

는 도외시하고 오직 선 수행에만 매달리는 극단적 수행 풍토의 병폐를 비판

하려한 나머지 선정과 삼매를 깨달음의 필수적 요소에서 아예 배제해 버리

는 다른 극단으로 치우쳤다고 할 수 있다. 간화선 유일주의, 간화선 배타주의

에 빠져 다른 공부를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병폐를 지적하는 것은 올바르지

만, 부처님이 수없이 강조한 선정과 삼매를 깨달음의 필수적 요소에서 제외

하는 것은 공연한 혼란과 분란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현응

스님이 자신의 표현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

는 편이 앞으로의 생산적 논의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올바른 정진, 새김, 집중을 포함하는 선정과 삼매의 수행은 네 가지

새김(사념처), 일곱 가지 깨달음의 고리 등을 통해 여러 세계의 현상들(여섯

가지 내적인 감역, 여섯 가지 외적인 감역, 여섯 가지 의식, 여섯 가지 접촉,

여섯 가지 느낌, 여섯 가지 지각, 여섯 가지 의도, 갈애, 여섯 가지 요소의 세

계,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이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통찰하

는 것이다.39)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마음에 대한 관찰을 통해 그것

이 실체가 없는 공한 것이며 연기적 존재에 불과한 것으로서 나와 모든 존재

가 일다불이이며 유무불이임을 체득하는 것이다.

39) 이런 가르침 역시 니까야의 수많은 곳에서 행해지고 있지만, 특히『쌍윳따니까야』2권, 앞의 
    책 가운데 ‘제18 쌍윳따. 라훌라의 모음’을 참조할 것.

 

이 점에서 깨달음은 근원적으로 연기와 공을 깨닫는 것이라는 현응 스님

의 말은 옳다. 마음을 깨달으라든가 ‘참 나’를 찾으라고 할 때, 마음이라는 것

을 무슨 실체와 같은 ‘참 나’로 신비화시키면서 그것을 깨치기만 하면 해탈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문제이다. 온갖 마음(생각, 느낌, 욕망, 의지 등)이 일

어날 때 그것을 관찰해보면 그것이 실체가 없는 공한 것이고 연기적인 것이

고 일다불이, 유무불이적인 것임을 깨닫는 것, 온 마음으로 그것을 체득하는

것, 그것 말고 마음을 바로 아는 것이 따로 있지 않다. 이것이 곧 근본적 무명

을 깨치는 것이다. 니까야에 서술된 마음의 깨달음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

에 이와 다른 것은 없다. 이렇게 본다면 근본적으로는 연기와 공의 깨달음이

라는 것과 마음의 깨달음이란 것이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이지만, 깨달음의 개

념을 막연하고 추상적이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마음의 깨달음’보다

는 ‘연기와 공에 대한 깨달음’으로 분명히 하는 것이 깨달음의 목적과 그를 위

한 수행의 길을 설정하는 데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Ⅳ.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과 깨달음에 이르는 길

 

‘깨달음 논쟁’에서 현응 스님은 깨달음을 ‘이해하는 깨달음’과 ‘이루는 깨달

음’으로 나누고 본래 부처님이 가르친 깨달음은 ‘이해하는 깨달음’이었으나

후세에 ‘이루는 깨달음’으로 변한 것이라고 하면서 깨달음을 이해의 차원으

로 한정해야 하며 이런 깨달음을 위해서는 반드시 선정과 삼매라는 수행방

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 절에서는 니까야에 나타난 깨달

음과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관한 가르침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고찰해봄으로

써 그런 견해의 타당성을 검토해보기로 한다.

 

먼저 여기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것이 니까야에서는 주로 ‘해탈’이라는 개

념으로 논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니까야에는 여러 가지 수행 방법에 의한

해탈, 또는 해탈에 이르는 여러 가지 방법이나 단계에 대한 얘기들이 나온다.

여러 니까야에 흩어져 있는 이런 해탈 개념들은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어 있

거나 서로 완전히 합치한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때로는 서로 상이한 얘기조

차도 존재한다. 그렇지만 자구에 얽매이지 않고 큰 맥락에서 본다면 그것들

을 대체적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초기불교의 해탈 개념의 정리를 위해서 우선 단서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지마니까야의 ‘끼따기리 설법의 경’에 나오는 얘기이다. 거기에서는 해탈에

이르는 점차적인 단계와 각 단계의 성취자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완전한

해탈에 이르는 점차적인 발전 단계에 따라 부처님은 그 성취자들을 일곱 종

류로 나눈다. 그것은 ‘양면으로 해탈한 님, 지혜로 해탈한 님, 몸으로 깨우친

님, 견해를 성취한 님, 믿음으로 해탈한 님, 가르침을 따르는 님, 믿음을 따르

는 님’40)이다.

40)『맛지마니까야』, 앞의 책, p. 775.

 

‘믿음을 따르는 님’은 여래를 믿는 사람이다. 그는 ‘아직 형상과 물질에 대

한 집착에서 벗어나 고요한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지혜로써 보아

번뇌를 부수지는 못했으나, 여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충만하고 믿음, 정진,

새김, 집중, 지혜의 능력과 같은 원리를 갖춘 사람’41)이다. ‘가르침을 따르는

님’은 앞의 믿음의 단계에서 더 나아가 여래가 선언한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

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다.42) ‘믿음으로 해탈한 님’은 여래의 가르침을 이해

하고 받아들여 믿음이 확고해 지면서 어느 정도의 지혜를 얻고 번뇌도 어느

정도 벗어난 사람이다. 그는 ‘아직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지는 못하였으나 지

혜로써 보아 번뇌의 일부를 부수고 여래에 대한 믿음이 심어지고 뿌리를 내

리고 확립된 사람’43)이다. ‘견해를 성취한 님’은 앞 단계에서 더 나아가 여래

의 말씀을 잘 알고 관찰하는 사람이다.44) ‘몸으로 깨우친 님’은 모든 형상과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고요한 해탈을 자신의 몸으로 체험하고 지혜

로써 보아 번뇌의 일부를 부순 사람이다.45) ‘지혜로 해탈한 님’은 모든 형상

과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고요한 해탈을 자신의 몸으로 체험하지는

않았으나 지혜로써 보아 모든 번뇌를 부순 사람이다.46) ‘양면으로 해탈한 님’

은 모든 형상과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고요한 해탈을 자신의 몸으로

체험하고 지혜로써 보아 모든 번뇌를 부순 사람으로서 완전한 해탈을 이룬

사람이다.47)

41) 같은 책, p. 777 참조.
42) 같은 책, 같은 곳 참조.
43) 같은 책, pp. 776~777 참조.
44) 같은 책, p. 776 참조.
45) 같은 책, 같은 곳 참조.
46) 같은 책, pp. 775~776 참조.
47) 같은 책, p. 775 참조.

 

완전한 해탈에까지 이르기까지의 일곱 종류의 사람을 든 다음에 부처님은

해탈에 이르는 길에 대해 요약하면서 ‘최상의 지혜(해탈)가 단번에 성취되지

않고 점차적으로 배우고 닦고 발전한 다음에 이루어진다’48)고 말한다. 부처

님에 따르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 ‘어떤 자에게 스승에 대한 믿

음이 생기면 그는 스승에 가까이 가서, 공경하고, 그에게 귀를 기울이고, 가

르침을 듣는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가르침의 의미를 규명하며, 가

르침을 성찰하여 수용한다. 그러면 의욕이 생겨나고, 의지를 굳히고, 그것을

깊이 새기고 정진하며, 몸으로 최상의 진리를 성취하고 지혜로써 꿰뚫어 보

게 된다.’49)

48) 같은 책, p. 778.
49) 같은 책, 같은 곳.

 

부처님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대체적으로는 깨달음을 얻고 해탈에

도달하기 위한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자세

히 검토해 보면 여기에는 상당히 애매한 부분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

다.

 

우선 문제가 되는 부분은 완전한 깨달음과 해탈에 도달하기 위한 첫 출발

점인 ‘믿음을 따르는 님’이 믿음, 정진, 새김, 집중, 지혜의 능력과 같은 원리

를 갖추었다고 하는 것이다. 믿음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믿음의 능력을 갖추

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정진, 새김, 집중, 지혜의 능력은 주로 해

탈의 다음 단계로 얘기하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능력들로 보인다. 정진의

능력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악한 것을 버리고 생겨나지 않도록 하

며 착하고 건전한 것들은 지키고 생겨나도록 노력하고 그를 통해 점점 더 부

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지는 것으로서, 앞에서 말한 ‘가르침을

따르는 님’과 ‘믿음으로 해탈한 님’에 해당한다. 새김의 능력은 여래의 말씀을

새기며 옛날의 일이나 말을 기억하고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몸, 느

낌, 마음, 사실에 대해 관찰을 닦는 것으로서, 견해를 성취한 님에 해당한다.

집중의 능력은 대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마음의 통일을 이루어, 원하는 대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벗어나 선정에 드는 것으로서, 몸으로 깨우친 님에 해

당한다. 지혜의 능력은 탁월한 꿰뚫음으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아는 것으로서 지혜로 해탈한 님에 해당한다.50)

50) 여기서 말한 다섯 가지 능력에 대한 설명은 전재성 역주,『쌍윳따니까야』6권, 한국빠알리성
    전협회, 2007, pp. 257~259에 자세히 나온다.

 

이처럼 해탈의 점차적인 단계적 발전을 얘기하면서도 첫 단계에 있는 사

람이 주로 그 윗 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능력들도 어느 정도 가지

고 있어야 한다고 함으로써 해탈의 단계, 또는 해탈에 이르기 위한 수행의 방

법들은 서로 중첩되고 얽히게 된다. 사실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믿음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그에 따르기 위

해 노력하며 그것에 대해 가끔씩이라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믿

음이 정진, 새김, 집중, 지혜도 어느 정도 포함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다

른 것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

은 해탈의 단계나 각 단계에 요구되는 수행방법이나 능력이 서로 엄격히 구

분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단지 각 단계마다 주된

수행방법이나 성취하는 부분이 다르거나 여러 수행능력의 성취 정도가 다름

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다섯 가지 능력을 해탈의 모든 단계에

공통된 것으로 간주하면서도 그 성취정도에 따라 단계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하는 니까야의 다른 구절에 나오는 가르침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쌍윳따

니까야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다섯 가지 능력을 평등하고 원

만히 갖추면 거룩한 님이고 그 보다 약하면 돌아오지 않는 님이고 그 보다 약

하면 한 번 돌아오는 님이고 그 보다 약하면 흐름에 든 님이고 그 보다 약하

면 진리의 행자이고 그보다 약하면 믿음의 행자이다.”51)

51)『쌍윳따니까야』6권, 앞의 책, p. 261.

 

앞서 말한 깨달음과 해탈에 관한 가르침에서 또 하나의 복잡한 문제는 ‘몸

으로 깨우친 님’과 ‘지혜로 해탈한 님’의 관계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몸

으로 깨우친 님’은 집중 또는 선정에 의해 마음의 통일을 이룬 사람으로서 다

른 곳에서는 흔히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앞의 얘

기를 살펴보면 부처님은 한편으로는 지혜로 해탈하는 것(지혜에 의한 해탈)

을 몸으로 깨우치는 것(마음에 의한 해탈)보다 높은 단계에 있는 것으로 간주

하고 있다. 그것은 몸으로 깨우친 님(마음에 의해 해탈한 사람)은 번뇌의 일

부만을 부수었으며, 그에게는 아직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해야 할 일이 있다’

고 말하는 데 반해, 지혜로 해탈한 님에게는 더 이상 그런 일이 없다고 한다

는 데서 알 수 있다.52) 그러나 다른 한편 부처님은 지혜로 해탈한 님은 ‘형상

을 뛰어넘고 물질을 벗어나 고요한 해탈을 자신의 몸으로 체험하지는 않았

지만 지혜로 모든 번뇌를 부수었다’53)고 함으로써 지혜에 의한 해탈이 반드

시 몸으로 깨우침(마음에 의한 해탈)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얘

기한다. 이것은 몸으로 깨우침(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이 해

탈을 위한 서로 다른 수행과 해탈의 방식이지만, 지혜에 의한 해탈이 보다 뛰

어난 해탈이라는 의미에서 한 단계 더 높다고 간주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

다. 또한 부처님은 지혜에 의한 해탈은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번뇌를 부쉈다고 함으로써, 지혜에 의한 해탈이 완전한 해탈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양면으로 해탈한 님이라는 개념이 보여주듯

이 부처님은 완전한 깨달음(해탈)을 몸으로 깨우침(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

혜에 의한 해탈 모두를 갖춘 해탈이라고 얘기하고도 있다.

52)『맛지마니까야』, 앞의 책, p. 776 참조.
53) 같은 책, pp. 775~776.

 

마음에 의한 해탈은 멈춤(止) 수행에 의한 해탈을 말하며, 지혜에 의한 해

탈은 통찰(觀) 수행에 의한 해탈을 말한다. 이것을 부처님은 이렇게 설명한

다. “명지로 이끄는 두 가지 원리가 있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멈춤과 통찰이

다. ··· 멈춤이 닦여지면 어떠한 목표가 성취되는가? 마음이 닦여진다. 마

음이 닦여지면 어떠한 목표가 성취되는가? 탐욕이 있다면, 그것이 끊어져 버

린다. ··· 통찰이 닦여지면 어떠한 목표가 성취되는가? 지혜가 닦여진다.

지혜가 닦여지면 어떠한 목표가 성취되는가? 무명이 있다면 그것이 끊어져

버린다. ··· 탐욕이 사라지면, 마음에 의한 해탈이 이루어지고 무명이 사

라지면, 지혜에 의한 해탈이 이루어진다.”54)

54) 전재성 역주,『앙굿따라니까야』2권,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13 교정판, pp. 378~379.

 

그런데 니까야의 다른 글들에서 우리는 부처님이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

혜에 의한 해탈을 서로 다른 해탈의 방법으로서 각각을 통해 해탈에 도달할

수 있다고 얘기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들을 다 포함하는 양면에

의한 해탈이야말로 가장 뛰어나고 완전한 해탈이라고 하고 있다는 것을 확

인할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의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큰 경’에서 ‘왜 어떤 수행승은 마

음에 의한 해탈을 이룬 사람이 되고 어떤 수행승은 지혜에 의한 해탈을 이룬

사람이 되는가’라는 아난다의 물음에 대해 부처님은 각기 집중의 능력이나

지혜의 능력의 탁월성 즉 ‘성향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55) 또 다

른 곳에서 부처님은 심지어 믿음으로 해탈하거나, 몸(마음, 집중)으로 해탈하

거나, 지혜로 해탈하는 것은 모두 그 각각을 통해 완전한 해탈(거룩한 길을

가는 님)을 이룰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중에 어느 것이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없

다고까지 얘기하기도 한다.56) 이런 글귀들은 보면 우리는 부처님이 수행자

들은 각자의 성향이나 능력에 따라 각기 다른 수행법을 통해 해탈에 도달할

수 있음을 인정했다고 할 수 있다.

55)『맛지마니까야』, 앞의 책, p. 726 참조.
56)『앙굿따라니까야』3권, 앞의 책, pp. 65~66참조.

 

그리고 어떤 글에서는 ‘색수상행식이 무상하다는 것, 그것들은 나의 것,

나, 나의 자아가 아니라는 것, 12연기의 생성과 소멸 알고 보는 지혜에 의한

해탈’은 ‘중생들의 마음을 안다든가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기억한다

든가, 업보에 따른 중생들의 삶에 관해 안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 초월적 능력’

을 가져오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지혜에 의한 해탈의 불완전함을 얘기하기도

한다.57) 이것은 앞의 ‘끼따기리 설법의 경’과는 달리 어떤 점에서는 여러 가

지 초월적 능력을 얻을 수 있는 삼매와 선정(마음)에 의한 해탈이 지혜에 의

한 해탈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58)

57)『쌍윳따니까야』2권, 앞의 책, pp. 383~392 참조.
58)『쌍윳따니까야』7권, 앞의 책, pp. 112-115 등에서는 여러 가지 초월적 능력이 의욕, 정진, 마
    음, 탐구의 집중이라는 삼매와 선정을 위주로 하는 4가지 신통의 기초를 닦음에 의해 얻어진
    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부처님이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이라는 양면을 모

두 갖춘 해탈을 가장 뛰어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59)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어떤 점에서는 마음에 의한 해탈이나 지혜에 의한 해탈 하

나만으로는 완전한 해탈에 도달했다고 보기 어렵다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의 유혹과 위험과 여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아

는 것만으로는 흐름에 드는 것이지만, 그것을 알고 더 나아가 모든 집착을 벗

어나야 진정으로 해탈한 거룩한 님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

다.60) 이것은 다섯 가지 능력의 발생과 소멸과 유혹과 위험과 여읨에 대한 똑

같은 얘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61) 이것은 또한 깨달음의 단계에 대해

서 말하고 있는 다른 곳에서 ‘믿음, 취향, 전승이나 상태에 대한 분석, 견해에

대한 이해’나 그것을 넘어선 ‘12연기의 생성과 소멸, 그리고 존재의 소멸이 열

반이라는 것을 알고 보는 체험적 지혜’만으로는 거룩한 님이 될 수 없으며 번

뇌를 완전히 끊어야만 거룩한 님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

다.62)

59)『디가니까야』, 앞의 책, pp. 692~693 참조.
60)『쌍윳따니까야』3권, 앞의 책, pp. 403~494 참조.
61)『쌍윳따니까야』6권, 앞의 책, pp. 250~251 참조.
62)『쌍윳따니까야』2권, 앞의 책, pp. 358~375 ‘꼬쌈비의 경’ 참조.

 

이런 얘기들을 종합해 본다면, 분명한 것은 부처님이 해탈을 위해서는 믿

음, 정진, 새김, 집중, 지혜의 수행이 모두 필요하다고 했다는 것과, 마음에 의

한 해탈(선정과 삼매를 통한 깨달음, 몸으로 깨우침)과 지혜에 의한 해탈 양

자를 모두 갖춤으로써 번뇌를 완전히 버린 해탈이야말로 궁극적 해탈이라고

간주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마음에 의한 해탈(선정과 삼매 수행)과 지

혜에 의한 해탈(숙고와 관찰·통찰 수행)은 궁극적 해탈을 위해 모두 필수적

인 수행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은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

에 의한 해탈을 각자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궁극적 해탈에 이르기 위한 수행

방법으로서 인정했다고 할 수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둘 사이에 차등을 두지

않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둘 중 어느 것을 더 강조하기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전에 말한 것처럼 석가모니 부처님 자신이 계행과 삼매와 지혜를

닦아서 궁극적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것, 그리고 마음을 닦는 수행법과 지혜

를 닦는 수행법이 궁극적 해탈을 위해 모두 필수적인 수행법이며 다섯 가지

능력과 수행방법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 등을 고려할 때, 마음

에 의한 해탈(선정과 삼매라는 수행법과 그를 통한 깨달음, 몸으로 깨우침)과

지혜에 의한 해탈(숙고와 관찰·통찰 수행법과 그를 통한 깨달음)은 따로 떨

어질 수 없다. 이 양자는 각자의 특성을 가진 수행법이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키고 촉진시켜주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앞서 해탈의 단계

에 대한 가르침에서 지혜에 의한 해탈이 마음에 의한 해탈(몸으로 깨우침)과

떨어져 있는 것처럼 표현한 것은 각자의 특성을 강조한 나머지 그렇게 된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근본적 무명을 깨치고 모든 존재의 연기와 공성을 깨닫는

지혜의 길은 선정과 삼매를 통한 마음의 해탈 수행과 떨어져 있지 않다. 이미

앞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부처님은 선정과 삼매, 내 마음에 대한 관찰을 통해

그것이 실체가 없는 공한 것이며 연기적 존재에 불과한 것으로서 나와 모든

존재가 일다불이이며 유무불이임을 체득할 것을 가르쳤다.

 

이상에서 우리는 니까야에 나타난 초기불교의 깨달음(해탈) 개념과 깨달

음(해탈)의 단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미 보았듯이 부처님은 해탈이라는 개

념을 모든 번뇌를 넘어선 궁극적인 깨달음 즉, 올바로 원만히 깨달음에도 사

용하고, 그것에 이르는 수행의 여러 단계에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깨달음이란 개념을 그 중 어떤 하나에만 한정하는 것은 자의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현응스님처럼 이해의 차원으로 한정하는 것은 문

제가 될 수 있다. 

 

깨달음이라는 말이 어떤 것을 모르다가 알게(이해하게) 되었다는 인식적

요소를 가장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깨달음을 이해의 영역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그렇지만 앎이나 깨달음이라는 말은 단순한 인식

적 요소 말고도 뭔가를 실제로 할 줄 알게 되었다는 실천과 체험의 요소도 포

함할 수 있다. 자전거 타기와 같은 것을 그 예로 들어볼 수 있다. 우리가 자전

거를 타는 법에 대해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배우고 이해하면, 인식의 차원에

서 우리는 자전거를 타는 법을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자전거 타기를 시도해 보면 타는 법을 인식으로는 알고 있어도 실제로는 잘

되지 않는다. 우리는 가르침에 따라 실제로 타기를 시도하면서 그것에 대해

고민하고 집중함으로써 어느 순간 실제로 자전거를 능수능란하게 탈 줄 알

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도 마찬가지이다. 앞에서 이미 얘기했듯이 불교의

근본적 가르침은 괴로움과 번뇌의 존재와 원인, 그것을 극복한 상태와 극복

의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며, 그 핵심은 연기와 공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의 출발이자 가장 핵심적 요

소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을 단순히 지적으로 이해했다고 해서 모든

갈애와 집착을 벗어나 괴로움과 번뇌를 떨쳐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

을 위해서는 부처님이 가르친 것처럼 믿음, 정진, 새김, 집중, 지혜의 수행 같

은 것들이 모두 필요하며, 그것은 선정과 삼매와 같은 체험적 요소도 필요로

포함한다. 완전하고 궁극적인 깨달음은 이 모든 수행을 통해 번뇌로부터 완

전히 벗어나는 것이며, 부처님은 처음부터 이러한 것을 진정한 깨달음으로

가르쳤다고 할 수 있다.

 

Ⅴ. 대승불교의 이념과 깨달음의 구현

 

앞에서 우리는 깨달음 논쟁에서 문제가 된 깨달음의 의미(개념)와 깨달음

을 얻기 위한 방법에 대한 올바른 대답을 얻기 위해서 니까야에 나타난 초기

불교의 근본적 가르침과 깨달음 개념을 살펴보았다. 그를 통해 우리는 초기

불교에서는 다양한 해탈(깨달음) 개념과 다양한 해탈의 단계 및 방법을 얘기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깨달음을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공부와

이해는 물론이고 선정과 삼매 등의 여러 수행법들 모두가 깨달음을 위해 필

요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깨달음에는 여러 단계나 수준이 있지만

완전한 궁극적 깨달음이라는 개념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

실제로 모든 집착을 벗어나 번뇌를 극복하는 것이라는 것도 확인하였다.

문제는 정말로 완전한 궁극적 깨달음(해탈)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

는 것이다. 완전한 궁극적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것은 모든 번뇌를 끊고, 언제

나 팔정도를 행하며,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완전

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니까야에는 여러 수행자들이 번뇌를 부수고, 이상을 실현하고, 해야 할 일

을 마친 거룩한 님에 도달했다는 얘기가 수많은 곳에 등장한다. 심지어 깨달

음을 얻은 사람은 수많은 몸으로 나타나거나, 어떤 것에도 걸림 없이 공간을

이동하거나, 물위를 걸어 다니거나,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과 같은 초월적 능

력을 포함해 온갖 신통한 능력(六神通)도 갖게 된다고까지 얘기하는 구절도

수없이 많이 나온다. 정말로 이런 깨달음에 도달한 자라면, 그는 그야말로 전

지전능한 완전한 신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이런 것을 글자 그대

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그래서 우리도 그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그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인가?

 

우주 전체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궁극적 자리에서 본다면, 온갖 곳에 있는

수많은 존재와 물속이나 공중을 다니기도 하는 것 등이 모두 나와 다른 것이

아니니, 내가 그런 온갖 신통을 부리는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 세계에서 한 개체로 존재하면서 실제로 그런 온갖 신통을 부리

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렇게 본다면 아무래도 깨달은 자의 초

월적 능력에 대한 얘기는 깨달음의 위대함을 강조하면서 깨닫기 위한 수행

에 매진토록 독려하기 위해 설정한 방편적 얘기라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언제나 팔정도를 완전하게 실천하며, 모든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이라는 의미의 궁극적 깨달음(해탈)은 우리를 이끄는 불교의 궁극적 목

표이자 지향점이며 이념적 좌표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한 순간의 깨달음

으로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그것은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

이 아니다. 연기와 공성에 대한 깨달음, 중도의 깨달음, 불이의 깨달음을 얻

고 계, 정, 혜를 통해 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과 갈애, 무명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수행자는 모든 생활에서 그러한 깨달음을 실천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전에서 어떤 수행자가 궁극적 깨달음을 얻은 자라고

한 부처님의 선언은 그가 앞으로 모든 삶의 장면들에서 그런 깨달음을 실제

로 구현할 수 있다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깨달음을 구현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즉 그런 목표, 지향,

이념에 따라 항상 우리의 삶을 영위해나가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실제로 그

런 삶을 살았을 때 결과적으로 궁극적 깨달음(해탈)은 구현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직 간화선이라는 선 수행에만 집중함으로써 단박에 마음

을 깨달아 모든 번뇌를 끊고 고매한 인격을 이룬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는 깨달음 개념에 대한 현응 스님의 비판은 매우 타당하고 적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간화선을 통해 깨치기만 하면, 모든 번뇌와 고통에서 해방되고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언제 어디서나 항상 올바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되는가?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아직 선을 통해 진정으로 깨치

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정말 그렇다면 과연 지금까지

그런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아니 지금까지 그런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현응 스님은

깨달음이라는 것을 우선 기본적으로 부처님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인 연기

와 공의 원리를 잘 이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현실 속에서 부딪치는 모든

문제들에 그런 원리를 적용해서 올바른 대응법을 찾아내고 그것을 실천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현실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은 다양한 실제적 요소들이 얽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연기와 공의 원리로부터 그 해답을 연역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연기와 공의

원리에 적합한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문제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탐구와 숙고가 필요

하다. 개인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그러할진대, 수많은 중생들이 연관되어 있

는 역사·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중생구제를 지향하는 대승불교에서는 현실의 역사와 사회적 문제들의 원

인과 그 해결방법을 공부하고 모색하는 노력을 별도로 해야 하며, 이러한 문

제들을 연기와 공이라는 불교의 근원적 원리와 결합시켜 해결해 나가도록

해야 한다는 현응 스님의 주장은 지극히 타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승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을 가엾게 여겨 구원하

고자 하는 보살의 이념에 있다. 물론 초기불교에도 중생 구제의 이념이 당연

히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63), 대승불교에서는 중생을 위하는 보살심과 보

살행을 전면으로 부상시켰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이것은 모든 고통과 번

뇌로부터 벗어난다는 깨달음(해탈)의 이념을 사회·역사적 영역 전체로 넓

혀놓았다는 의미를 갖는다.

63) 이에 대해서 필자는 이미 이전에 발표한 논문에서 상세히 설명한 바 있다. 이찬훈,『화엄경』
    보살사상의 현대적 계승 (「철학논총」제70집 제4권, 새한철학회, 2012), <2절,『화엄경』의 보
    살 개념과 그 연원>을 참조.

 

부처와 같은 깨달음에 이르고 중생을 구제하려는 보살도와 보살행의 핵심

은 십바라밀로 얘기할 수 있다.64) 십바라밀의 내용과 구조를 분석해 보면, 보

살의 길은 먼저 보시, 지계, 인욕의 수행을 통해 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을 버

리고 중생을 위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실천에서 시작된다. 이런 실천을 해 나

가는 보살은 그 다음으로 정진, 선정, 반야바라밀이라는 좀 더 내면적이고 개

인적인 수행을 통해 부처님이 가르치신 진리를 깨우친다. 그러나 보살도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육바라밀을 통해 근원적인 깨달음에 도달한 보살은

다시 한 번 중생 구제의 실천으로 되돌아간다. 수행을 통해 불교적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방편, 원, 력, 지라는 바라밀을 통해 중생 속에서 중생을 구제하

려는 보살행을 실천해 나가지 않을 수 없다. 방편, 원, 력, 지 바라밀의 수행이

란 중생들이 어떤 처지에서 어떤 문제를 갖고 있고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으

며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알아보고, 그들의 문제와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야 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실제

로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힘을 모으고, 물러서지 않는 원력으로 중생 구제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십바라밀은 우리 모두가 고통과 번뇌로부터

벗어나고 부처에 이르는 길은 나와 내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중생을 위하

는 실천, 불법을 깨닫기 위한 간경, 염불, 참선과 같은 공부와 수행, 그리고 다

시 중생을 그 현실에 알맞은 수단을 알고 강구하여 구제하려는 사회적 실천

이라는 이 모든 것과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준다.65)

64) 필자는 앞의 논문 ?화엄경? 보살사상의 현대적 계승 에서 보살도와 보살행을 관통하는 핵
    심으로서의 십바라밀에 대해서 상세히 분석하였다. 이하의 십바라밀에 대한 설명은 주로 그
    글에서 끌어온 것이다.
65) 십바라밀에 대한 이상의 설명은 이찬훈, 앞의 글, <3절,『화엄경』보살사상의 핵심인 십바라
    밀의 개념과 구조>를 특별한 인용부호 없이 요약한 것이다.

 

십바라밀은 깨달음을 얻고 구현하는 방법에 대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십바라밀이 가르쳐 주는 것처럼 먼저 중생을 위해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놓

는 보시, 중생에게 해를 끼치거나 타인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항상 존중하고

공경하는 지계, 설령 자신에게 잘못을 했다고 해도 다른 중생에게 화를 내지

않는 인욕처럼 중생을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들을 닦아나가지 않는다면

결코 깨달음의 길은 열리지 않는다. 이런 것을 도외시하고 소위 개인적인 종

교적 수행에만 매달리는 것은 말짱 공염불일 뿐이다. 물론 정진, 선정, 지혜

바라밀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간경, 염불, 참선 등을 통해 불법을 깨치기 위

한 수행 역시 부처에 이르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반드시 염두에 두

어야 하는 것은 그러한 깨달음은 단순히 개인의 내면적 깨달음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중생 구제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되돌아간다는 사실

이다.’66)

66) 이찬훈,『화엄경』보살사상의 현대적 계승 , 앞의 글, p. 97.

 

그런데 이 가운데서도 특히 중생이 겪고 있는 문제와 그 원인, 그리고 그것

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과 방법을 알고 그를 위해 필요한 힘을 기르고

모으는 일은 참선 같은 개인적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기만 하면 자동적으

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그에 대해서는 또 다른 구체적인 공부

와 모색을 필요로 한다. 현응 스님은 이것을 ‘사트바(현실역사)’ 차원의 영역

에 속하는 문제라고 하면서, ‘연기와 공을 잘 이해하는 깨달음을 얻어 존재들

의 변화성과 관계성을 통찰하고 현실의 역사와 사회적 문제들의 원인과 그

해결방법을 공부하면서 이를 해결해 나가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보디

사트바(보살)’가 되는 것이 현대에 필요한 올바른 공부법‘이라고 강조하였

다.67) 너무나도 당연하고 올바른 얘기라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의 이념은 현

응 스님의 견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중생들의 현실

에 대해 탐구하고 동참하며 그 깨달음을 중생들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깨달음과 역사의 결합이라는 현응 스님의 주장에 대해 그것은 공허하거나

지적 자위행위에 그칠 수 있는 것이며, 한국불교의 대중과 지성들은 이미 그

런 요구 수준에 올라 있다고 하면서, 이제 그런 선언적 전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는 비판도 있었다.68) 정말 한국불교의 대중과 지성들이 깨달

음과 역사를 결합시켜야 한다는 요구 수준에 이미 올라 있다고 한다면, 현응

스님의 문제 제기는 그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67) 앞의 2절에서 요약한 현응 스님의 견해 6번 항목을 참조.
68) 박태원, 앞의 글, 5절 참조.

 

그러나 과연 한국불교의 현실이 그러한가? 한국불교의 현실은 현응 스님

이 얘기한 상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지적하였듯이 깨달음에 선정과

삼매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간화선도 그 방법 중의 하나로서 그 의미

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문제는 간화선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유

일한 길이며 그것으로써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듯이 여기는 간화선 유

일주의 간화선 절대주의이다. 사실 현응 스님이 애초에 깨달음 문제를 제기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간화선을 통한 ‘마음의 깨달음’만

을 절대화시키게 되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다른 공부 방법들을 무시하

고(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배척하기까지 하고), 중생의 사회역사적 현실에 대

한 탐구와 문제 해결 노력들도 소홀히 하기 쉽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 한국

불교가 처해 있는 작금의 현실이다. ‘간화선을 통해 단박에 깨친다면 모든 진

리를 꿰뚫어 보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버릴 수 있다는 환상, 이런 간화선 절

대주의 또는 간화선 유일주의가 한국불교로 하여금 구체적인 삶과 사회현실

의 문제를 불교적 관점에서 해명하고 해결해 가는 실천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다.’69)

69) 이찬훈,「선과 화엄사상 회통의 현대적 의미」,「대동철학」제45집, 대동철학회, 2008, p. 84.

 

현응 스님의 문제 제기에 대해 전국선원수좌회에서는 “오늘날 선이 좌선

을 위주로 하는 깨달음지상주의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 반성하면서

“선수행이 고요한 선방 안에 갇혀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고

자 한다”고 하였다.70) 그렇지만 전국선원수좌회의 성명은 전반적으로 현응

스님의 깨달음 개념을 비판하고 간화선을 통한 깨달음이야말로 진정한 깨달

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에 머물고 있다. 정작 ‘선방에만 갇혀 있는 깨달음

지상주의’의 병폐를 고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며,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에 대한 얘기는 찾기 어렵다. 그리고 이것은 현응 스님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간화선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다수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태도라

고 할 수 있다. 현응스님에 대한 많은 비판자들은 간화선이야말로 깨달음을

얻고 고통과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최고의 방법이며, 그것에 한국불교의 사활

이 달려있으며, 현응 스님의 얘기는 간화선을 제대로 실참하지 못하고 실패

했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간화선 절대주의, 간화선 유

일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에게 문제점은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당신

은 아직 깨닫지 못해서 그렇다. 간화선을 더 열심히 해 봐라’는 식으로 응답

하는 것으로서 올바른 응답이라고 할 수 없다.

70) 전국선원수좌회 성명, 앞의 글 참조.

 

진리를 깨닫고 중생을 구제하겠다(上求菩提 下化衆生)는 대승불교의 이념

만큼 고귀하고 위대한 이상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 대승불교의 이념은 개

인적인 해탈에 그치지 않고 깨달음을 온 세상에 구현하겠다는 위대한 이념

이다. 이런 이념의 계승자임을 자랑하면서도 정작 현실은 그와 멀리 동떨어

져 있는 한국불교가 제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

야 한다.

 

Ⅵ. 맺는 말

 

겉으로는 대승불교를 표방하면서도 ‘사실 한국불교는 그동안 한편으로는

현실과 동떨어진 채 단박의 깨침만을 지향하는 산중불교요, 다른 한편으로는

다분히 개인의 복을 기원하는 기복불교로서 개인적 신앙의 차원으로 떨어져

한국사회를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형성해 가는 능동적인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71)

71) 이찬훈, 선과 화엄사상 회통의 현대적 의미 , 앞의 글, p. 62.

 

절집에서는 맨날 판에 박힌 ‘참 나를 찾으라, 네 마음을 바로 보라’는 식의

동어반복과 공허한 선언 외에는 들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부처님의 가르

침에 대한 공동의 공부, 풍요로운 설법, 대화, 토론을 찾기 어렵다. 고통에 신

음하는 오늘날의 중생이 겪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불교적 관점에서 폭넓고

심도 깊게 분석하고 숙고하여 내놓은 구체적인 대안들은 찾기 어렵다. 그에

반해 소위 깨달았다는 선승은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일방적이고 고답적인

설교를 행하고, 신도들은 단박의 깨침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안고 참선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거나, 그저 여러 불보살들에게 자신과 가족의 복이나 비는

모습은 너무나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불교의 이런 현실에 대해 현응 스님은 경종을 울렸다. 조계종교육원

장으로서 현응 스님은 간화선을 통한 깨달음을 절대화시키는 한국불교의 현

실을 비판하면서 불교경전은 물론이고 다른 다양한 분야의 학문들과 현실

문제에 대한 폭넓은 공부도 함께 해 나가도록 현행 불교계의 공부 방식을 바

꿔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금이라도 간화선과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기만

하면 마치 사문난적과 같이 취급을 하는 간화선 유일주의, 간화선 절대주의

가 판치는 현실에서, 우리나라 불교계의 가장 큰 종단인 조계종의 교육을 총

괄하고 있는 교육원장이 이런 주장을 제기한 것은 매우 용기 있는 행동이었

다.

 

물론 논의 과정에서 깨달음의 개념이나 깨달음을 위한 선정 수행의 필요

성 등을 둘러싼 일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큰 맥락

을 고려한다면, 현응 스님의 문제 제기와 제안은 왜곡된 한국불교의 현실을

바로 잡고 불교가 중생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 앞장 서는 길잡이가 되기 위해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참선을 통한 단박의 깨달음이라

는 것에만 너무 매몰되지 말자.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여러 경전 공부도 열

심히 하고, 불교 이외의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중생의 현실에 대

한 공부도 함께 해 나가자. 그리하여 깨달음을 사회 전체에 구현하려는 대승

불교의 이념을 올바로 살려나가자. 승려는 물론이고 신도들에 대한 교육도

이렇게 할 수 있도록 변혁해 나가자. 본래 현응 스님의 제안은 이처럼 쉽고도

당연한 얘기였다.

 

논쟁은 자칫 지엽적인 문제에 사로잡히거나 애초의 문제와 거리가 먼 다

른 쟁점들로 번져나가기 쉽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망외의 소득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정작 애초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한 옆

으로 밀쳐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런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일부 문제를 잡고 계속해서 비난하거나 자신

은 다 깨달았다는 오만함을 가지고 상대를 내려다보며 참선이나 더 하라고

가르치려 할 것이 아니라, 불교계의 공부와 교육, 그리고 수행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꾸고 재정립해나갈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고 토론해 나가야 할 시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