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에서 부파불교를 거치면서 불교의 가르침은 철학적 심리학적으로 깊이와 넓이를
더하고 더우기 대승불교와 경전은 불교 문학사적으로나 세계 사상사적으로 불교의 지평을
더없이 넓게 펼쳤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특히 중국으로 건너 온 불교는
기존의 도교와 유교등의 사상과 대립하고 뒤섞이면서 독특한 중국불교식으로 발전해
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비록 지금은 초기불교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초기불교 신봉자이긴 하지만 내
스스로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늘 대승불교의 흔적들이 남아있고 또한 대승불교의
주장과 사상등에서 청량감을 느끼는 경우도 전혀 없다고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점에서 나에게는 대승불교는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더욱더
잘 깨닫고 받아 들일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감초와도 같은 역활이고 또한 사고의
지평을 넓히는데 분명히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젊을때 명동성당을 열심히 다니고(세례를 받기 직전에 그만두었다)
또한 교회도 열심히 다녔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불교를 더욱더 확고하게 믿기 위해서
였다. 천주교나 기독교를 다니면서 그들의 교리를 공부할 수록 나는 역설적으로 불교에
대한 믿음과 신앙을 더욱더 다질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초기불교의 관점에서 대승불교를 바라보고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초기불교를
바라 볼 수만 있다면 붓다의 가르침에 더욱더 한걸음 다가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아라한과 보살사상을 공부하고 출가불교와 재가불교를 생각하고 대승불교의 여러
사상들을 공부하면서 나는 초기불교를 더욱더 이해하게 되었고 신봉하게 되었다.
대승불교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간단하다. 대승불교는 비록 붓다의 원음에서 멀어진
부분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붓다의 원음을 잘못되게 이해하고 왜곡하여 온 부파불교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바로잡기 위해서 노력한 점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옮겨오다 보면 copy 하기에 급급하여 문맥 하나하나를 제대로 읽어 볼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고 또한 저작권등의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도 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몇일씩 또는 몇시간에 걸쳐서 논문이나 책등을 옮겨오는 과정에서
다시한번 경전을 공부하는 시간이 되는 것은 틀림없다. 그래서 드래그로 copy 가
되는 부분이라면 저작권등의 위험성을 무릅쓰고 일일이 copy 하여 옮겨온다.
이것이 내가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옮겨오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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