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여러 불교와 관련한 설법 동영상을 볼 기회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설법을 보면서 느낀 한가지 주요한 특징은 이제 한국불교도 초기불교에 대해서 많이들
언급하고 있고 나름대로 공부하신 것을 설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부 설법들은 초기불교에
대해서 공부의 깊이가 모자라고 정확한 역사적 사실과 동 떨어진 설법들이었다.
오래전에 올려놓은 몇가지 글들을 다시한번 꺼내 보고자 한다.
1. 초기불교는 무조건 백지상태에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이곳에는 초기불교를 공부하기 위해서 매년마다 많은 스님들이 유학을 오신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목적하신 공부를 달성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다.
실패하시는 분들의 공통점은 한국불교(대승불교)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초기불교를
바라보고 공부하시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엄연히 다른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대승불교의 눈으로 초기불교를 공부한다는 것이다.
유학을 오셔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시는 분들은 많은 혼란을 겪게 된다. 그동안 자신이
알아 왔던 불교와는 너무나 다른 교리와 역사를 실제로 보고 겪고 경험하기 때문이다. 또한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초기불교의 진짜 이야기와 교리들을 접하면서 그것들을 정립하기
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누구에게나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유마거사가 실존인물이고 대승경전은 부처님의 직설이라는 시각에서 니까야 경전을
바라보면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또한 인도 불교사를 연구했다고 나름대로 불교의
발전사를 이야기하면서 불교의 분열이 서양종교에서나 있음직한 동방교단이니 서방교단이니
불교가 인도의 유목문화 위에서 발전했느니 또는 인도의 유적지 발굴이 중국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에 기초 했느니 하는 정말 허황된 왜곡된 설법을 하는 것을 접하면서 소설도
이 정도면 노벨상 감이라는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2. 초기불교는 얄팍한 자신의 지식을 덧붙이는 도구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이제는 초기불교 이야기를 어느정도 아는척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어떤 분들의 설법은 대승불교 설법인지 초기불교 설법인지 짬뽕아닌 짬뽕을
하시는 분들도 있다. 그리고 불교사를 이야기하면서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만의
생각으로 창작된 소설을 마치 사실인냥 이야기 하시는 분들도 있다. 니까야 경전을
한 줄도 읽어 본 적이 없는 분들의 초기불교 설법을 접하기도 한다. 초기불교는 결코
자신의 어설픈 설법을 멋있게 포장하거나 초기불교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초기불교에 대해서 정통한 척 하기 위한 도구나 포장재가 아니다.
3. 붓다의 가르침
얼마전 댓글에서도 잠시 언급을 하였지만 최근의 초기불교의 커다란 관심은 인간의 욕망과
집착에 의한 것이 주요한 주제이다.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감정이 바로 욕망과 집착이다.
이것이 없다면 인간은 식물이나 돌맹이와 다를바가 없다. 열반을 성취하겠다는 것도
욕망이고 집착이다. 그 인간의 욕망과 집착이 선한 것이냐 아니면 선하지 않은 것이냐의
차이가 바로 불교의 교리이다.
37조도품 자체가 선한 욕망과 집착을 일으켜야 하는 가르침이고 선한 수행의 길이고
그 선한 수행의 길을 걸어가면 반드시 얻게 되는 목표이다. 그 어디에도 열반을
얻기 위해서 37조도품의 선한 욕망과 집착을 버리라는 가르침은 없다. 오히려 목숨걸고
집착하여 반드시 이루어내야 한다고 강조할 뿐이다.
4. 아래 바른 노력을 설법하신 붓다의 글 어디에 무집착을 논하고 있는가?
거기에서 바른 정진이란 무엇인가?
이 가르침 안에 한 비구가 있어,
아직 생겨나지 않은 삿되고 선하지 않는 법을 생겨나지 않기 위하여 바램을 일으키고
노력하며 정진을 행한다. 마음을 잡아 힘쓴다.
이미 생겨난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을 끊기 위하여 바램을 일으키고 노력하며 정진을 행한다.
마음을 잡아 힘쓴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한 법을 생겨나게 하기 위하여 바램을 일으키고 노력하며 정진을
행한다. 마음을 잡아 힘쓴다.
이미 생겨난 선한 법을 바로 세우고, 혼란스럽지 않게 하며, 증장하고, 풍성케 하며, 닦고,
원만하게 하기 위하여 바램을 일으키고 노력하며 정진을 행한다. 마음을 잡아 힘쓴다.
5. 언제까지 한국불교는 오탁악세의 세간사를 벗어난 청풍명월을 노래하는 설법으로 일관할
것인지 답답한 마음뿐이다.
'자유로운 야단법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상현 법사의 금강경 강의를 감상한 단상 (0) | 2019.12.01 |
---|---|
대승경전을 옮겨오는 이유 (0) | 2019.06.03 |
황교안 대표의 합장거부와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0) | 2019.05.30 |
경전에 대한 각각의 번역들에 대한 단상 (0) | 2019.05.29 |
임종게를 쓰는 삶 (0) | 2016.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