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상현 법사의 금강경 강의를 들어 봤다. 솔직히 처음부터 별로 기대를 하지도 않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서 별로 감흥이 없었다. 그냥 한국불교의 틀안에서 개인적인 깨달음(?)을 말하는 그야말로
한국불교식의 금강경 강의에 불과했다는것이 솔직한 개인적인 생각이다. 6강까지 듣고 그만
들었다. 또다른 강의인 법화경은 시간이 아까울 것 같아서 들을 마음을 아예 내지 않았다.
1)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유위법(조건지워진 법)이면 있는(有) 것이다.
무위법(조건지워지지 않은 법)이며 없는(無) 것이다.
제법은 조건따라 생겨나고 조건따라 소멸한다.
조건이 있으면 있는 것이여 조건이 없으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있다 없다라고 말할 수 없다.
2) 무아란 무엇인가
무아란 고정되고 항상하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심찰나처럼 생멸을 거듭하며
흘러가는 하나의 흐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찰나보다 더 빠른 시간인 심찰나처럼 죽고 태어남을
거듭하며 흘러가는 하나의 존재에게 고정되고 항상하고 실체가 어디에 있겠는가?
또한 다섯가지 집착(색수상행식)에 의해 이루어진 온(蘊)의 무더기는 조건따라 생겨나고 조건따라
소멸하는 것인데 그 어디에 항상하고 고정된 실체가 있겠는가?
무아를 체득하고 구족하면 아라한이요, 그러지 못하면 중생인 즉 자아이다.
우리는 무아인데 밥먹고 화장실에 가서 똥싸는 우리는 무아인가 유아(자아)인가?
무아인 붓다가 쿠시나가라에서 80세에 열반에 드시고 8섬에 이르는 사리를 남긴 붓다는
무아인가 유아인가?
무아를 체득하고 구족한 붓다가 8만 4천 법문을 남긴 붓다는 무아인가 유아인가?
유아인 중생에게 있다 없다가 어디에 있는가?
붓다가 아프시고 밥먹고 똥싼 붓다는 유아인가 무아인가?
우리는 아라한이 되기전까지는 그냥 밥과 죽으로 연명하며 살아가는 유위법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존재일 뿐이다.
3) 붓다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
오탁악세를 살아가는 중생들의 삶은 한마디로 그 자체가 수행이고 정진이다. 하고 싶은 것
못하고 먹고 싶은 것 못먹고, 부부와 싸우고, 부모님 모시고, 회사에서 짤리지 않기 위해서
새벽깥이 일어나 출근하고, 부모님 봉양하고, 자식들 먹여 살릴려고 바둥거리는 그 자체가
인욕이고 보시이고 지혜이고 정진이다. 육바라밀이 별도로 있는게 아니다.
그런 육바라밀의 삶을 살다가 죽을 때 "짐승같은 놈, 그놈 잘 죽었다," 라는 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그는 웬간한 고승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에 나아가 천상세계에 태어나고 그리고 마침내 열반의 길에 이른다.
붓다는 이런 중생들을 위한 법을 설했을 뿐이다.
4) 경전을 대하는 자세
불교는 사부대중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출가자와 재가자의 신분이나 처해 있는 환경이
180도 다른다. 따라서 경전을 크게 출가자를 위한 가르침과 재가자를 위한 가르침으로
나뉘어져 있다. 출가자가 재가자처럼 행동하고 살아가도 안되지만 재가자가 출가자처럼
행동하고 살아가는 것도 안된다는 것이다.
붓다께서는 재가자들이 세간의 삶을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경전 곳곳에서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오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재가자들이 마치 출가자보다 더 출가자 다운 말과 행동을 한다면 그야말로 돼지가
비단옷을 입은 우스운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같은 사부대중에게서 불교학자들이 있다. 출가자이면서 학자이기도 한 분도 있고 재가자이면서
학자의 길을 걷는 분들도 있다. 특히 재가자이면서 학자의 길을 걷고 연구하고 논문을 발표하는
분들의 위치는 매우 독특하고 또한 이분들은 나름대로 불교의 지평을 넓히는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5)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성상현 법사는 재가자이면서 불교학자로 생각하고 싶다.
초기불교에 대한 거의 무지한 상태에서 금강경과 법화경들을 강설하는 모습이 내게는
너무 생경하다. 6개의 강의를 들었지만 경전 문구 해설 이외에 99% 정도가 무집착과
공에 대해서 강설을 하는 것 같은데 ... 초기경전의 상윳따 니까야에는 이를 37조도품으로
잘 정리하여 설법하고 있다. 이분이 37조도품을 먼저 공부하고 나서 금강경이나 법화경을
설했더라면 좀더 좋았을 것 같다.
굳이 대승경전을 강설하는 분이니 내가 초기경전 입장에서 왈가불가할 위치는 아닌 것
같아서 더이상 언급은 무의미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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