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통사상/공안집 II

1222칙 파릉낙정 巴陵落井

실론섬 2026. 4. 23. 11:04

1222칙 파릉낙정 巴陵落井

​[본칙]

 

파릉에게 어떤 학인이 물었다.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눈 밝은 사람이 우물에 빠진다.”
巴陵因僧問, “如何是道?” 師云, “明眼人落井.”

​[설화]

​눈 밝은 사람이 우물에 빠진다:눈 밝은 사람이 어찌 우물에 빠지겠는가? 그러나 분명하게 ‘우물에 빠진다’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빠진다는 것인가, 빠지지 않는다는 것인가?1) 
明眼人落井者, 明眼人何曾落井? 然, 灼然落井, 則落耶不落耶?
1) 빠진다고 말은 했지만 그 속셈은 ‘눈 밝은 사람이 어떻게 우물에 빠진단 말인가?’라는 의문을 촉발시키는 
   데 있다는 해설이다. ‘빠진다’는 말이 화두인 이상 빠지거나 빠지지 않거나 양단의 어느 편도 아니고, 
   동시에 어느 편에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빠진다’라는 것과 맞닿아 있는 모든 관념이 의문으로 변화할 때 
   이 말은 비로소 활구(活句)가 된다.

​천복본일(薦福本逸)의 송

눈 밝은 바로 그 사람 우물에 빠진다 하니,
총림에서 분별하는 말들 언제나 그칠까?
마음을 닦아 무심의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갖가지 모양새로 번뇌의 물결 따라가리라.
〈파릉의 어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어떤 학인이 파릉에게 물었다’라는 구절에서 시작하여 ‘우물에 빠진다’라는 구절에 이르고, 이어서 그 학인이 절을 하고 물러났다. 수좌가 그 학인을 대신하여 ‘눈 밝은 사람은 우물에 빠지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는데, 파릉이 ‘그대가 알았구나, 그대가 알았어’2)라고 말했다.>  
薦福逸頌, “好个明眼人落井, 叢林話會幾時休? 修心未到無心地, 萬種千般逐水流.” 〈此師錄, 僧問巴陵至落井, 僧禮拜退, 
首座代僧, 進語云, ‘明眼人不落井.’ 陵云, ‘你會也, 你會也.’〉
2) 이것이 수좌의 대답을 인정한 말이라고 단정하면 안 되며, 수좌가 그 말을 듣고 기뻐했다면 지옥에 떨어질 
   일이다. 반대로 ‘그대도 틀렸다’라고 했더라도 일방적으로 수좌의 대답을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 수좌가 
   ‘눈밝은 사람은 우물에 빠지지 않습니다’라고 한 말 자체가 하나의 단정이 아니라 스승을 화두의 기틀로 
   유인하는 말이었고, ‘그대가 알았구나’라고 한 말도 그 의중을 간파하고 칼날을 거꾸로 겨눈 것이다. 수좌가 
   보인 것과 같은 수단을 호랑이를 함정에 빠뜨리는 기틀[陷虎之機]이라 할만하다.

​[설화]

​앞의 두 구절은 두 가지 견해3)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뒤의 두 구절은 눈 밝은 사람은 우물에 빠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상의 내용과 다른 뜻은 더 이상 없음을 나타낸다. 
薦福:上二句, 二見未離故也. 下二句, 明眼人不落井也. 然則更無第二也.
3) 빠진다거나 빠지지 않는다거나 하는 대립된 견해. 이것을 놓고 분별하며 설명하려는 시도에 속박되어 있다.

해인초신(海印超信)의 송

​눈 밝은 사람 우물에 빠지니,
서쪽에 동쪽 마루가 있노라.
만두로 알고 손에 잡았는데,
손바닥 펴 보니 호떡이었네.4)
海印信頌, “明眼人落井, 西方正東嶺. 捉得个饅頭, 開拳是餬餠.”
4) ‘빠진다’는 기틀에 현혹되면, ‘빠지지 않는다’는 말로 변하여 그 착각을 일깨운다.이경우‘빠지지않는다’는 
   말이 진실이 아닌 또 하나의 기틀이 된다. 어떤 구절이 되었건 단정하고 포착하는 순간 이미 그것이 
   아니다. 이것이 화두라는 언어가 가지는 효와( 訛)의 속성이다.

​보령인용(保寧仁勇)의 송

​가을밤 맑은 하늘5)에 달이 매우 밝은데,
별 모양 올려보니 삼경가량 되었구나.
한 길로 뻗은 대로 손바닥처럼 평탄하니,
돌아가는 길, 밤새워 간들 방해될 것이 무엇이랴!
保寧勇頌, “秋夜霜天月正明, 仰觀星像約三更. 一條大路平如掌, 歸去何妨徹曉行!”
5) 상천(霜天). 깊은 가을 하늘. ‘霜’은 ‘서리’ 자체가 아니라 마치 순백색의 서리와 같이 높고 깨끗한 가을 
   하늘을 형용하는 말이다.

취암가진(翠嵓可眞)의 거

이 공안과 더불어 다음의 두 문답을 제기했다. 어떤 학인이 보응(寶應)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오봉루6) 앞에 있다.’ 이번에는 수산(首山)에게 ‘어떤 것이 도입니까?’라고 묻자 수산은 ‘다리 아래 석 자 깊이의 구덩이가 있다’라고 대답했다. 취암이 말했다. “도를 드러내는 이 세 가지 말7) 중 한 구절은 천 길의 절벽이 우뚝 솟은 듯하고,8) 다른 한 구절은 배로 육지를 가는 격이며, 마지막 한 구절은 손님과 주인이 뒤섞인 것과 같다. 대중 가운데 가려내어 짝을 지어볼 사람 있는가? 나와 보라. 없다면 아라한의 자비를 행하여 번뇌의 도적을 물리치고, 보살의 자비를 행하여 중생을 안락하게 하며, 여래의 자비를 행하여 진여의 실상을 얻게할 것이다.” 
翠嵓眞, 擧此話, 連擧僧問寶應, ‘如何是道?’ 師云, ‘五鳳樓前.’ 又問首山, ‘如何是道?’ 云, ‘脚下深三尺.’ 師云, “此三轉語, 
一句壁立千仞, 一句陸地行船, 一句賓主交參. 衆中莫有揀得者麽? 出來看! 如無, 且行羅漢慈, 破結賊故, 行菩薩慈.
安衆生故, 行如來慈, 得如相故.”
6) 五鳳樓.당나라 때 낙양(洛陽)에 건축한 누각.
7) 전어(轉語).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전환하는[轉] 말. 또는 상황과 조건에 적절하게 본분의 기틀을 
   ‘자유자재로 드러내는’ [轉]말을 가리킨다.
8) 벽립천인(壁立千仞). 험준하여 올라가기 어렵다는 뜻. 언어와 사유의 수단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경계를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은산철벽(銀山鐵壁)과 같은 뜻이다.

​[설화]

​다리 아래 석 자 깊이의 구덩이:구덩이의 깊이가 석 자라는 뜻이다.
‘천 길의 절벽이 우뚝 솟았다’ 이하의 세 구절은 차례대로 배합한 것은 아니다.
‘아라한의 자비를 행하여’라 운운한 말은 ‘천 길의 절벽이 우뚝 솟은 것’에 상응하고, ‘보살의 자비를 행하여’라 운운한 말은 ‘배로 육지를 간다’는 구절에 상응하며, ‘여래의 자비를 행하여’라 운운한 말은 ‘손님과 주인이 뒤섞인 것’이라는 구절에 상응한다.  
翠巖:脚下深三尺者, 坑深三尺也. 壁立千仞等三句, 非次第配合也. 行羅漢慈云云者, 壁立千仞也. 行菩薩慈云云者, 
陸地行舡也. 行如來慈云云者, 賓主交參也.

원오극근(圜悟克勤)의 거

이 공안과 더불어 다음의 두 가지 문답을 제기했다. 어떤 학인이 석두(石頭)에게 ‘어떤 것이 도입니까?’라고 묻자 석두가 ‘목두(木頭)9)이다’라고 대답했다. 학인이 이번에는 덕소(德韶)국사에게 ‘어떤 것이 도입니까?’라고 묻자 국사가 ‘사생(四生)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라고 대답했다. 장산이 이 세 문답을 평가했다. “종사들이 학인에게 준 가르침에는 각각 속박을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 만일 어느 곳으로나 막힘없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들려주자마자 곧바로 알아차리겠지만, 만일 모르겠다면 자세히 해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의 동일한 질문에 대하여 세 종사가 그렇게 다른 대답을 내놓은 것을 보자. 말해 보라! 그중 어떤 한 구절이 도에 빈틈없이 딱 들어맞을까? 잘 알겠는가? 한 발의 화살로 세 관문을 무너뜨리니, 화살 날아간 자취가 분명하도다.10)”   
蔣山勤, 擧此話, 連擧僧問石頭, ‘如何是道?’ 云, ‘木頭.’ 僧又問韶國師, ‘如何是道?’ 國師云, ‘四生浩浩.’ 師云, “宗師家爲人, 
各有出身處. 若是通方之土, 一擧便知, 苟未相諳, 不免指注. 祗如一个問頭, 三人恁麽答. 且道! 是那一句親切? 還委悉麽?
一鏃破三關, 分明箭後路.”
9) ‘나무’라는 말. 자신의 호인 석두와 호응하여 대답했다.
10) 본서1則 주석59) 참조.

[설화]

‘목두’라는 말은 ‘사생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라는 구절과 좌우로 대칭을 이룬다.
蔣山:木頭者, 四生浩浩, 爲對左右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