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근본불교) 이야기

佛以一言演設法 衆生隨類各得解 (불이일언연설법 중생수류각득해)

실론섬 2014. 3. 20. 20:54

佛以一言演設法 衆生隨類各得解 (불이일언연설법 중생수류각득해) 라는 말은 붓다는 언제나 같은 

말로 설법을 하시지만, 듣는 중생쪽에서는 자기 능력에 따라 각자가 다르게 받아 들인다는 뜻이다.


흔히 붓다의 설법은 상대에 따라 바뀐다 하여 이를 對機說法(대기설법)이니 또는 병에 따라 약을 투여 한다는 應病與藥(응병여약)이니 하고 부른다. 이는 [법] 즉 진실이 가지는 보편성과 機(기) 즉 진실을 받아 들이는 특수성과 상관관계를 나타낸 가장 대표적인 말이라고 해서 많은 분들의 입에 오르 내린다.

 

그러나 과연 [법]이 [기]에 의해 변화 되는 일이 있을수 있는가. 그렇게 변형되는 것을 [법]이라고
부를수 있겠는가.  
 

붓다가 설하신 [법] 자체는 일찌기 한번도 때와 장소를 따라 또는 대중의 수준 여하에 따라 변용된 
일이 없었음을 우리는 상기해야 한다. 그것은 항상 일정한 것이었으며 변화가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법]은 붓다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이므로 붓다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변용시킬 이유와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법]은 붓다의 출현 여부와 관계없이 존재한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파악한 곳에 붓다의 위대성이
있지만, 그것을 붓다의 의사에 따라 내용을 바꿀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붓다의 설법은
항상 一音(일음) 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 들이는 중생들의 능력.상황.열의등은 일정치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열가지의 
집중력과 이해력을 보일 것이나, 어떤 사람들은 다섯가지나 셋의 집중력이나 이해력밖에는 나타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붓다의 입에서 나온 가르침에도 사람들의 능력에 따라 이해에 차등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와 비슷한 의미로 水隨方圓之器(수수방원지기)라는 말이 있다. 같은 물도 그릇의 형태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세상의 理法(이법)은 일정해 있어도 받아들이는 쪽에 대소.다소의 조건이 있기 때문에 보편적인 진리인 [법]을 각자의 능력껏 받아 들이게 한다는 견해는 높이 평가 받아야 할 측면도 있다.

 

우리는 몇천 아니 몇만권에 달하는 불경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들은 후세의 불교인들이 자기 역량대로 붓다의 법을 밝히고자 한 노력의 결정체이다. 정토신앙/법화신앙/화엄신앙등등은 같은 붓다의 법이 사람들의 능력에 따라 다르게 받아 들여진 좋은 본보기이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직후 자신이 깨달은 연기의 법이 너무나 깊고 묘한 것이어서 탐진치 삼독심과
무명에 가린 중생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을 느끼고 설교를 단념하고자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법에 나서게 된 이유는 붓다의 대자비심과 중생들에 대한 연민의 정 그리고 눈 밝고 지혜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깨달은 법을 똑같이 깨달을 수 있을리라는 확신 때문 이었다.

 

위에서도 언급 하였지만 중생의 근기는 연못에 무수한 청·홍·백련이 떠 있거나 또는 잠겨 있듯이 가지가지 양상과 지적 수준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부처님은 중생들의 근기를 배려하여 그에 알맞는 
다양한 점진적 체계적인 법문을 설하셨다. 

 

붓다는 처음 대중들에게 설법을 하실 때에는 의례 베품의 덕(보시)이 얼마나 유익한가를 먼저 가르치셨다. 그들이 보시의 진가를 이해를 한 다음에라야 계행. 인과법. 출가의 공덕등의 불교의 기본적인 면을 말씀 하셨고, 그들의 마음에 이런 원리들이 깊이 새겨진 다음에야 사성제등의 보다 높은 단계의 성스러운 진리를 설법해 주셨던 것이다.

 

대상과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행해졌다 하여 이름 붙여진 ‘응병여약의 대기설법’은 이후 대승불교에서 붓다 교설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으로 홍보, 인식되어졌다. 대승경전에서 자주 언급되는 근기론에 기반을 둔 "응병여약 대기설법"은 붓다의 설법 방법이었던 "점진적 설법"의 원리를 응용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붓다의  점진적이고도 체계적인 교설을 근기나 상황에만 따른 대기설법으로 규정한 좁고 한정된 이해는 부처님 교설의 체계성(次第性 ; 차례성) 정립을 저해하는 주된 요인이 되어 왔으며, 동시에 보편성 있는 신행 생활의 체계 확립을 약화시킨 결과를 초래하였다. 

 

붓다의 위대성을 도덕적 삶과 감화력의 측면에서만 찾고, 해탈·열반의 경지를 단순한 심적 평화의 
상태로 이해하며, 심지어 경전을 경시하거나 깨달음에 대한 자의적 해석이 난무하는 등의 부정적 현상들도 기실 붓다의 교설의 성격을 대기설법의 측면에서만 이해한 귀결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연기의 진리인 붓다의 깨달음은 결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붓다 자신의 고백은 물론 제자들과의 문답 속에서도 어렵잖게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경전에 설해진 다양한 법문은 그렇듯 어려운 깨달음을 중생에게 열어 보이기 위해 마련된 ‘방편 시설’이다. 방편은 ‘가까이 가 알아내게 하다’ '가까이 다가간다' 는 뜻이므로, 그 속에는 초보적인 가르침으로부터 심심 미묘한 경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설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의 법과 율에서도 점진적인 학습과 점진적인 실천과 점진적인 방법을 설정할 수 있다.” 거나, “나는 단번에 완성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점진적인 학습과 점진적인  실천과 점진적인 방법에 의해 완성된 지혜은 획득되는 것이다.” 하면서, 그것을 불법의 첫 번째 특징으로 꼽는 부처님의 말씀도 그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실제로 초기경전 속에는 6근·12처 등 범부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5온·4제·12연기 등 성인이 깨달은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설이 정교한 짜임새로 조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교설(법문)이 선·후 관계를 이루며 점차 깊어져 가는 이러한 점진적 설법의 구조야말로 무명에 쌓이고 미혹한 중생에게 궁극적인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한 불교의 가장 큰 특징으로 주목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뛰어난 몇몇 중생은 단박에 모든것을 깨달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중생들은 초등학교-중학교... 빼기 더하기를 배우고 곱셈을 배우고 그리고 수학을 배우는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설법이 아니라면 심오하고도 어려운 불교의 최상의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즉 대기설법이란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법문의 수준에 맞춰 법을 설하는, 그리하여 그의 수준을 점차 
향상시켜 끝내는 깨달음을 이루게 하는 점진적이고도 단계적인 방식을 표현한 개념이라고 봐도 무방 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 할 수 있다면 점진적 설법과 대기설법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 상호보완작용을 하여 우리가 불법의 진리에 좀더 쉽게 다가갈 수도 있을 것이다.

 

불교는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그 역사성과 본래의 체계성을 대부분 상실, 초기불교를 배제한 대승 중심의 불교로 정착 된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초기불교 사상에 근거하여 발전·완성된 것이므로, 그에 대한 몰이해는 불교를 지나치게 신격화.직관화.신비화.형상화 하여 불교 본연의 모습을 가려 버린 결과를 초래 하였다는 것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더구나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근본 가르침인 니까야를(아함경) 소승이라 폄훼하고 무시한 결과 대중적 신행 체계를 정립할 수 있는 바탕마저 상실케 되었다. 설사 니까야를 익힌다 하더라도 그것을 단순한 금언집의 일종으로 여겨 설법의 자료 정도로 활용할 뿐, 그 속에 설해진 법문을 실제로 닦아 가고자 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든 실정이다. 
 
이처럼 붓다가 실질적이고도 직접적인 경험과  중생들의 현실에 입각하여 논리적 계성을 정립하고 있는 니까야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는 일반 불자들이 각자의 수준에서 깨달음을 추구해가는 신행 생활의 길을 애초에 차단하는 폐해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에서 전래한 불교는 처음에는 교 와 선이 상호 갈등과 조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보완적인 관계
였으나 선불교가 널리 세력을 얻게 되고 또한 한국으로 건너온 불교는 초기에는 교와 선이 상호
갈등하며 보완적이었으나 훗날 보조국사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간화선(看話禪)이 널리 알려 지고 
세월이 지나면서 어느듯 한국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면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교와 선을 마치 
상호 대립적인 관계로 인식하고 있고 더욱이 불립문자를 뛰어 넘어 '교를 버리고 선에 들어간다
(捨敎入禪)' 식으로까지 교에 대한 선의 우위성이 강조되는게 오늘의 불교의 현실이다.
 
경전은 깨달음에로의 길을 제시해 주는 근본적이고 유일한 표지이다. 그러하기에 역대의 조사치고 경전에 무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에는 경전의 내용을 그저 기껏해야 한두 달 정도 입문자가 익혀야 할 기초교리 정도로 비하시켜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더욱이 경전을 무시하는 것도 모자라서  '화두 지상 주의' '염불 지상주의' '기도 지상주의'등은 교리에 대한 단순한 접근과 왜곡된 불교의 인식을 굳히는 부작용까지 초래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일반 불자들에게 신행 생활의 지침을 제시 하고자 할 때, 방대하고 복잡하여 난해하기 그지없는 철학적 교설이나, 또는 화두참구만을 구가하는 선은 결코 적당 하지도, 용이 하지도 않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다. 그러한 교와 선에 다가서기 어려운 일반 불자의 신앙 생활은 끝내 기복적인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점진적이고 체계적이고 체험적인 초기경전에 담겨 있는 붓다의 가르침을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더욱더 필요한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