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상윳따 니까야

제22상윳따 - 온의 요소 상윳따(Khandha samyutta) - 제1장 나꿀라삐따 품(Nakulapita vagga. SN22:1-SN22:11)

실론섬 2014. 5. 8. 15:07

상윳따니까야 제3권 오온을 위주로 한 가르침
Khandha-vagga

제22주제 온[蘊]의 요소 상윳따 Khandha-saṁyutta


I. 처음 50개 경들의 묶음 제1장 나꿀라삐따 품Nakulapitā-vagga

nakulapitusuttaṃ (SN 22.1-나꿀라삐따 경)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박가에서 숨수마라기리의 베사깔라 숲에 있는 미가다야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나꿀라삐따 장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나꿀라삐따 장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박가(Bhagga)는 종족 이름이면서 나라 이름이기도 하다. 이 나라는 꼬삼비에 예속되어 있었던 듯하며 왓지(Vajji) 공화국의 일원이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DPPN) 그래서 당시 인도 중원의 16국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박가웨살리와 사왓티 사이에 놓여 있었고 수도는 숨수마라기리(Sumsumaragiri, 악어산)였으며 그곳에 있는 숲이 베사깔라 숲(Bhesakalavana)이다. 세존께서는 이곳에서 8번째 안거를 보내셨다고 한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늙고 나이 들고 노쇠하고 연로하고 삶의 완숙기에 이르렀습니다. 몸은 병이 들었고 저는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과 마음에 새겨야 하는 고귀한 비구들을 거의 친견하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저에게 교훈을 주십시오. 그러면 제게 오래도록 이익과 행복이 될 것입니다.”   

 

*'마음에 새겨야 할 [고귀한] 비구들'은 mano-bhavaniya bhikkhu를 옮긴 것이다. 여기서 mano-bhavaniya는 '마음을 닦는'이나 '마음을 닦아야 하는'으로 옮길 수도 있지만 '마음에 존재하게 해야 할'로 직역되는 단어이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마음에 새겨야 할 [고귀한] 자들(mano-bhavaniya)'이란 마음을 향상하게 하는 자들(mana-vaddhaka)이란 뜻이다. 그들을 친견하면 유익함을 통해서 마음이 향상하기 때문이다. 사리뿟따나 목갈라나 등의 대장로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고귀한 자들이다."(SA.ii.249-250)   

 

“참으로 그러하다, 장자여. 참으로 그러하다, 장자여. 그대의 몸은 병으로 허약하고 쭈글쭈글한 피부로 덮여 있다. 장자여, 이런 몸을 끌고 다니면서 잠시라도 건강하다고 만족해한다면 어리석은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므로 장자여, 그대는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

‘나의 몸은 병들었지만 마음은 병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장자여, 그대는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

 

그러자 나꿀리삐따 장자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공경의 의미로 오른쪽으로 돌아 사리뿟따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나꿀라삐따 장자에게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장자여, 그대의 감각기관들은 참으로 고요하고 안색은 아주 맑고 빛납니다. 오늘 그대는 세존의 곁에서 법문을 들었습니까?”

 

“존자이시여, 어찌 아니겠습니까? 존자이시여, 여기 저는 세존의 법문에 의해 불사(不死)의 목욕을 하였습니다."

“장자여, 그대는 어떻게 세존의 법문에 의해 불사의 목욕을 하였습니까?”
“존자이시여, 여기 저는 세존께 다가갔습니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습니다. 한 쪽에 앉은 저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늙고 나이 들고 노쇠하고 연로하고 삶의 완숙기에 이르렀습니다. 몸은 병이 들었고 저는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과 마음에 새겨야 하는 고귀한 비구들을 거의 친견하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저에게 교훈을 주십시오. 그러면 제게 오래도록 이익과 행복이 될 것입니다.'라고.   

 

*'불사의 목욕을 한'으로 의역한 원어는 abhisitta이다. abhisitta는 abhi+vsic에서 파생된 과거분사로 문자 그대로 머리에 물을 뿌리는 관정(灌頂)의식이 거행된 것을 뜻한다. 이것의 명사 아비세까(abhiseka)는 관정의식 혹은 관정식을 뜻한다. 물을 신성시 하는 인도에서 제왕이나 태자의 책봉 때 거행하는 의식이며 관정식을 마친 왕이라야 진정한 왕으로 인정된다.   
장자는 세존의 법문을 들은 것이 바로 물로 머리에 관정식을 거행한 것과 같이 신성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존자이시여, 이렇게 말씀드리자 세존께서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그러하다, 장자여. 참으로 그러하다, 장자여. 그대의 몸은 병으로 허약하고 쭈글쭈글한 피부로 덮여 있다. 장자여, 이런 몸을 끌고 다니면서 잠시라도 건강하다고 만족해한다면 어리석은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므로 장자여, 그대는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 ‘나의 몸은 병들었지만 마음은 병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장자여, 그대는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라고. 존자이시여, 이렇게 저는 세존의 법문에 의해 불사의 목욕을 하였습니다.”

 

“장자여, 그런데 그대는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떤 것이 몸도 병들고 마음도 병든 것입니까? 그리고 어떤 것이 몸은 병들었지만 마음은 병들지 않은 것입니까?’라고 세존께 더 질문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습니까?”
“존자이시여, 이 말씀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저희들은 멀리서라도 사리뿟따 존자의 곁으로 와야 합니다. 그러니 사리뿟따 존자께서 이 말씀의 뜻을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장자여, 그렇다면 듣고 잘 사고하십시오. 나는 말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존자시여."라고 나꿀라삐다 장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대답했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장자여, 그러면 어떤 것이 몸도 병들어 괴롭고 마음도 병들어 괴로운 것입니까?

장자여, 여기에 거룩한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룩한 가르침(法.법)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가르침을 배우지 못한 범부가 있습니다. 그는 훌륭한 스승을 알아보지 못하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지 못해, 그는 물질적 요소(色.색)을 나(我)라고 간주한다거나, 나를 물질적 요소를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물질적 요소가, 혹은 물질적 요소에 내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는 ‘나는 물질적 요소이다. 물질적 요소는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어 지냅니다. 그러나 이처럼 ‘나는 물질적 요소이다. 물질적 요소는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인 사람의 물질적 요소는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달라지기 때문에)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이 일어납니다.   

 

*주석서와 복주석서들은 배우지 못한 범부(assutava puthujjana)와 선한 범부(kalyana-puthujjana)를 구분하고 있다. 이 둘은 아직 예류도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범부지만 전자는 온.처.계.연 등의 법에 대한 이론적인 지혜(교학)도 없고 마음챙김의 확립 등의 수행도 하지 않은 자이다. 후자는 이 둘을 다 갖추어 예류도에 도달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자이다.(SAT.ii.200)    

 

그는 감수작용(느낌.受)을 나(我)라고 간주한다거나, 나를 감수작용(느낌.受)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감수작용(느낌.受)이, 혹은 감수작용(느낌.受)에 내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는 ‘나는 감수작용이다. 감수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어 지냅니다. 그러나 이처럼 ‘나는 감수작용이다. 감수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인 사람의 감수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달라지기 때문에)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이 일어납니다. 

 

그는 지각작용(인식.想)을 나(我)라고 간주한다거나, 나를 지각작용(인식.想)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지각작용(인식.想)이, 혹은 지각작용(인식.想)에 내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는 ‘나는 지각작용이다. 지각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어 지냅니다. 그러나 이처럼 ‘나는 지각작용이다. 지각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인 사람의 지각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달라지기 때문에)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이 일어납니다.   

 

그는 형성작용(형성력.行)을 나(我)라고 간주한다거나, 나를 형성작용(형성력.行)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형성작용(형성력.行)이, 혹은 형성작용(형성력.行)에 내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는 ‘나는 형성작용이다. 형성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어 지냅니다. 그러나 이처럼 ‘나는 형성작용이다. 형성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인 사람의 형성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달라지기 때문에)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이 일어납니다.   

  

그는 식별작용(의식.識)을 나라고 간주한다거나, 나를 식별작용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식별작용이, 혹은 식별작용에 내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는 ‘나는 식별작용이다. 식별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어 지냅니다. 그러나 이처럼 ‘나는 식별작용이다. 식별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인 사람의 식별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납니다.
장자여, 이렇게 몸도 병들고 마음도 병듭니다.

 

장자여, 그러면 어떻게 몸은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지 않습니까?

장자여, 여기에 거룩한 이를 알아보고 거룩한 가르침을 알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배운(배우는)제자가 있습니다. 그는 훌륭한 스승을 알아보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알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배워서, 그는 물질적 요소를 나라고 간주하지 않고, 나를 물질적 요소를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물질적 요소가, 혹은 물질적 요소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물질적 요소이다. 물질적 요소는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어 지내지 않습니다. 이처럼 ‘나는 물질적 요소이다. 물질적 요소는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의 물질적 요소는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가지만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감수작용을 나라고 간주하지 않고, 나를 감수작용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감수작용이, 혹은 감수작용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감수작용이다. 감수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어 지내지 않습니다. 이처럼 ‘나는 감수작용이다. 감수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의 감수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가지만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지각작용을 나라고 간주하지 않고, 나를 지각작용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지각작용이, 혹은 지각작용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지각작용이다. 지각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어 지내지 않습니다. 이처럼 ‘나는 지각작용이다. 지각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의 지각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가지만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형성작용을 나라고 간주하지 않고, 나를 형성작용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형성작용이, 혹은 형성작용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형성작용이다. 형성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어 지내지 않습니다. 이처럼 ‘나는 형성작용이다. 형성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의 형성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가지만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식별작용을 나라고 간주하지 않고, 나를 식별작용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식별작용이,혹은 식별작용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식별작용이다. 식별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어 지내지 않습니다. 이처럼 ‘나는 식별작용이다. 식별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의 식별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지만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장자여, 이렇게 몸은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지 않습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꿀라삐따 장자는 기뻐하며 사리뿟따 존자가 설한 것을 찬탄하였다.

 

*물질적 요소 = 色.색, 감수작용 = 느낌.受, 지각작용 = 인식.想, 형성작용 = 형성력.行, 식별작용 = 의식.識

 

devadahasuttaṃ (SN 22.2-데와다하 경)
2.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삭까의 데와다하라는 삭까족들의 성읍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서쪽 지방으로 가고자 하는 많은 비구들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서쪽 지방으로 가서 서쪽 지방에서 머물고자 합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사리뿟따와 의논하였는가?”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사리뿟따 존자와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비구들이여, 사리뿟따와 의논하도록 하여라. 비구들이여, 사리뿟따는 현자이다. 그는 청정범행을 닦는 비구들을 도와주는 사람이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삭까(Sakka)들의 성읍인 데와다하(Devadaha)는 세존의 외갓집이 있는 곳이다. 세존의 어머니인 마야(maya)왕비와 양어머니이자 마야 왕비의 동생인 빠자빠띠 고따미(Pajapati Gotami)가 데와다하의 숩빠붓다(Suppa-buddha)의 딸들이기 때문이다.(AA.i.340)    

 

그때 사리뿟따 존자는 세존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어떤 계수나무 숲에 앉아 있었다. 그 비구들은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공경의 의미로 세존의 오른쪽으로 돈 뒤에 사리뿟따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비구들은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사리뿟따여, 우리는 서쪽 지방으로 가서 서쪽 지방에서 머물고자 합니다. 우리는 스승님께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도반들이여, 비구가 다른 지방으로 가면, 끄샤뜨리야의 현자들과 바라문의 현자들과 장자의 현자들과 사문의 현자들 등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도반들이여, 현명한 사람들은 ‘존자들의 스승은 무엇을 말하는 분이며 무엇을 가르치는 분입니까? 그대 존자들의 법은 잘 배워서 잘 수용하고, 잘 사고하여 잘 결론 내리고, 지혜로써 잘 꿰뚫는 것입니까? 그와 관련하여 존자들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고, 사실 아닌 것으로(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세존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고, (세존께서 설했다고 전해진 이것을 반복하더라도) 어떤 사람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겠습니까(법에 맞게 질책하여 말하는 어떤 사람에게도 비난받지 않겠습니까)?'라고 검증합니다.”   “도반이여, 이 말씀의 뜻을 알기 위해 저희들은 먼 곳에서 사리뿟따의 존자를 찾아 왔습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 이 말씀의 뜻을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도반들이여, 그렇다면 듣고 잘 사고하십시오. 나는 말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비구들은 사리뿟따 존자에게 대답했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비구가 다른 지방으로 가면, 끄샤뜨리야의 현자들과 바라문의 현자들과 장자의 현자들과 사문의 현자들 등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도반들이여, 현명한 사람들은 '존자들의 스승은 무엇을 말하는 분이며 무엇을 가르치는 분입니까?'라고 검증합니다. 도반들이여, 이렇게 질문받은 그대들은 이렇게 설명해야 합니다.     

‘도반들이여, 우리의 스승께서는 욕탐의 길들임을 가르칩니다.'라고. 

 

도반들이여, 이렇게 설명하면 끄샤뜨리야의 현자들과 바라문의 현자들과 장자의 현자들과 사문의 현자들 등 이어지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도반들이여, 현명한 사람들은 ‘존자들의 스승은 무엇에 대한 욕탐의 길들임을 가르칩니까?’라고 검증합니다. 도반들이여, 이렇게 질문받은 그대들은 이렇게 설명해야 합니다.

‘도반들이여, 스승께서는 물질적 요소(색.色)에 대한 욕탐의 길들임을 가르칩니다. 감수작용(수.受)에 대한 ··· 지각작용(상.想)에 대한 ··· 형성작용(행.行)에 대한 ··· 식별작용(식.識)에 대한 욕탐의 길들임을 가르칩니다.’라고.

 

“도반들이여, 이렇게 설명하면 끄샤뜨리야의 현자들과 바라문의 현자들과 장자의 현자들과 사문의 현자들 등 이어지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도반들이여, 현명한 사람들은 ‘존자들의 스승은 어떤 위험(잘못됨)을 보기에 물질적 요소에 대한 욕탐의 길들임을 가르칩니까, 감수작용에 대한 ··· 지각작용에 대한 ··· 형성작용에 대한 ··· 식별작용에 대한 욕탐의 길들임을 가르칩니까?’라고 검증합니다. 도반들이여, 이렇게 질문받은 그대들은 이렇게 설명해야 합니다. 

‘도반들이여, 물질적 요소에 대한 탐욕이 있고(벗어나지 못하고), 욕구가 있고(관심이 있고), 애정이 있고, 갈증이 있고, 열기가 있고, 갈애가 있으면 그 물질적 요소가 변하여 다른 것(상태)이 될 때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납니다. 감수작용에 대한 ··· 지각작용에 대한 ··· 형성작용에 대한 ··· 식별작용에 대한 탐욕이 있고(벗어나지 못하고), 욕구가 있고(관심이 있고), 애정이 있고, 갈증이 있고, 열기가 있고, 갈애가 있으면 그 물질적 요소가 변하여 다른 것(상태)이 될 때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납니다. 도반들이여, 우리의 스승께서는 이런 위험을 보기에 물질적 요소에 대한 욕탐의 길들임을 가르칩니다. 감수작용에 대한 ··· 지각작용에 대한 ··· 형성작용에 대한 ··· 식별작용에 대한 욕탐의 길들임(제어)을 가르칩니다.'라고.  

 

*주석서는 여기에 나타나는 탐욕(raga), 욕구(chanda), 애정(pema), 갈증(pipasa), 열기(parilaha)는 모두 갈애(tanha)와 동의어라고 설명하고 있다.(SA.ii.258)   

 

도반들이여, 이렇게 설명하면 끄샤뜨리야의 현자들과 바라문의 현자들과 장자의 현자들과 사문의 현자들 등 이어지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도반들이여, 현명한 사람들은 ‘존자들의 스승은 어떤 이익을 보기에 물질적 요소에 대한 욕탐의 길들임을 가르칩니까,  ··· 감수작용에 대한 ··· 지각작용에 대한 ··· 형성작용에 대한 ··· 식별작용에 대한 욕탐의 길들임을 가르칩니까?’라고 검증합니다. 도반들이여, 이렇게 질문을 받으면 그대들은 이렇게 설명해야 합니다.
‘도반들이여, 물질적 요소에 대한 탐욕이 없고(벗어나고), 욕구가 없고, 애정이 없고, 갈증이 없고, 열기가 없고, 갈애가 없으면 그 물질적
요소가 변하고 다른 상태가 될 때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감수작용에 대한 ··· 지각작용에 대한 ··· 형성작용에 대한 ··· 식별작용에 대한 탐욕이 없고, 욕구가 없고, 애정이 없고, 갈증이 없고, 열기가 없고, 갈애가 없으면 그 식별작용이 변하여 다른 것이 될 때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우리의 스승께서는 이런 이익을 보기에 물질적 요소에 대한 욕탐의 길들임을 가르칩니다. 감수작용에 대한 ··· 지각작용에 대한 ··· 형성작용에 대한 ··· 식별작용에 대한 욕탐의 길들임을 가르칩니다.’라고.  

 

도반들이여, 불선법(不善法)들을 갖추어 머무는 자가 만일 지금·여기에서(현세에서) 즐겁고(속상함이 없고) 절망이 없고 열기가 없이 행복하게 머물고, 몸이 무너져 죽은 다음에는 좋은 곳[善處]에 태어날 것이 예상된다면 세존께서는 불선법들의 버림을 칭찬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그러나 불선법들을 갖추어 머무는 자는 지금·여기에서 속상하고 절망하고 열기가 있어서 괴롭게 머물고, 몸이 무너져 죽은 다음에는 나쁜 곳에  태어날 것이 예상됩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불선법들의 버림을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선법(善法)들을 갖추어 머무는 자가 만일 지금·여기에서 속상하고 절망하고 열기가 있어서 괴롭게 머물고, 몸이 무너져 죽은 다음에는 나쁜 곳에 태어날 것이 예상된다면 세존께서는 선법들의 갖춤을 칭찬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그러나 선법들을 갖추어 머무는 자는 지금·여기에서 속상함이 없고 절망이 없고 열기가 없이 행복하게 머물고, 몸이 무너져 죽은 다음에는 좋은 곳에 태어날 것이 예상됩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선법들의 갖춤을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 비구들은 기뻐하며 사리뿟따 존자의 말씀을 찬탄하였다.

 

hāliddikānisuttaṃ (SN 22.3-할릿디까니 경)
3.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마하깟짜나 존자는 아완띠의 꾸라라가라에 있는 빠빠타 산에 머물고 있었다. 그 무렵 할릿디까니 장자가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할릿디까니 장자는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하깟짜나(Maha-Kaccana) 혹은 마하깟짜야나(Maha-Kacayana) 존자는 이곳 아완띠(Avanti. 옛 인도 중원의 16국 가운데 하나)의 수도인 웃제니(Ujjeni, 지금 인도 맛댜쁘라데쉬의 우자인 지방)의 짠다빳조따(Candappajjota)왕의 궁중제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바라문 가문 출신이다. 깟짜나는 그의 족성이다. 그는 베다에 능통했으며 그의 부친이 죽은 뒤 대를 이어 궁중제관이 되었다. 그는 짠다빳조따 왕의 명으로 일곱 명의 친구들과 함께 세존을 웃제니로 초대하기 위해서 세존께 갔다가 설법을 듣고 출가하여 무애해를 갖춘 아라한이 되었다.(AA.i.206)   

 

“존자시여, 『숫따니빠따』「앗타까 품」의「마간디야의 질문 경」에서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처를 버림으로써 머무는 곳 없이 유행하며

마을에서 (아무와도) 친교하지 않는 성자는

감각적 쾌락을 버리고 어떤 바램도 없으며

사람들과 다투면서 말하지 않는다.’


존자이시여, 세존께서 간략하게 설하신 이 말씀에 대해 어떻게 상세한 의미를 보아야 합니까?”

 

“장자여, 물질의 요소는 의식의 거처입니다. 탐욕 때문에 물질의 요소에 묶여있는 의식을 '거처에서 유행(遊行)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장자여, 느낌의 요소는 의식의 거처입니다. 탐욕 때문에 느낌의 요소에 묶여있는 의식을 '거처에서 유행(遊行)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장자여, 인식의 요소는 의식의 거처입니다. 탐욕 때문에 인식의 요소에 묶여있는 의식을 '거처에서 유행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장자여, 형성의 요소는 의식의 거처입니다. 탐욕 때문에 형성의 요소에 묶여있는 의식을 '거처에서 유행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장자여, 거처에서 유행하는 자가 됩니다.

 

*'여기서 '물질의 요소(色界,rupa-dhatu)'는 물질의 무더기(色蘊,rupa-kkhandha)를 뜻한다. '의식'이란 업을 짓는 의식(kamma-vinnana)를 뜻한다. 여기서 '거처에서 유행하는 것(oka-sari)이란 가정에서 유행하는 것(geha-sari), 집에서 유행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거처(oka.집)'이란 조건(緣.연)의 뜻에서 말한 것이다.(SA.ii.258-259)   
여기서는 오온 가운데서도 식온이 특별 취급되고 있다. 색.수.상.행.식의 오온은 모두 무상.고.무아의 세 가지 특상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식온은 찰나생.찰나멸을 거듭하면서 한 개인이 윤회를 거듭할 때 그 영속성을 연결해 주는 실과 같은 역활을 하고 있다. 나머지 네 가지 무더기들(온)은 의식의 거주처(vinnana-tthitiyo)의 역활을 한다. 그리고 의식은 자아로 간주되는 실체는 아니지만 인식의 과정에서 연기적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이기도 하다.   
*여기서 의식은 '의식의 거처'라고 언급되고 있지 않은 이유는 거처는 조건의 뜻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생긴 업을 짓는 의식은 나중에 생긴 업을 짓는 의식과 나중의 과보로 나타난 의식 둘 모두에게 조건이 된다. 그리고 먼저 생긴 과보로 나타난 의식은 나중에 생긴 과보로 나타난 의식과 나중에 생긴 업을 짓는 의식에게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의식을 포함시키면 '어떤 의식이 여기서 뜻하는 의식인가?'하는 혼란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이런 혼란을 없애기 위해서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나머지 네 가지 무더기들은 의식의 대상(혹은 토대)이 되어 업을 짓는 의식의 거주처들이라 불린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기서 의식은 언급되지 않은 것이다.(SA.ii.259)   


그러면 장자여, 어떻게 거처 없이 유행하는 자가 됩니까?

장자여, 물질의 요소에 대한 탐욕, 소망(욕구), 갈애, 집착으로 이끄는 마음의 결정.경향.잠재성향들은 세존에게서 버려졌고 뿌리 뽑혔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었고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미래에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장자여, 느낌의 요소에 대한 ··· 장자여, 인식의 요소에 대한 ···  장자여, 형성의 요소에 대한 ··· 장자여, 의식의 요소에 대한 탐욕, 소망, 갈애, 집착으로 이끄는 마음의 결정.경향.잠재성향들을 세존에게서 버려졌고 뿌리 뽑혔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었고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미래에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래는 '거처 없이 유행하는 자'라고 불립니다. 이렇게, 장자여, 거처없이 유행하는 자가 됩니다.

 

*'의식'은 왜 여기서 언급되었는가? 오염원들이 제거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오염원들은 다른 네 가지 무더기들만을 통해서는 다 제거되지 않고 오온 전체를 통해서만 제거되기 때문이다.(SA.ii.259)   

 

그러면 장자여, 어떻게 머무는 곳에서 유행하는 자가 됩니까? 
장자여, 형색의 표상이라는 머무는 곳에서 배회하고 묶이면 '머무는 곳에서 유행하는 자'라고 불립니다. ···
소리의 표상 ··· 냄새의 표상 ··· 맛의 표상 ··· 감촉의 표상 ··· 장자여, 법의 표상이라는 머무는 곳에서 배회하고 묶이면 '머무는 곳에서 유행하는 자'라고 불립니다. 이렇게, 장자여, 머무는 곳에서 유행하는 자가 됩니다.    

 

*'표상'은 nimitta를 옮긴 것이다. 초기경전이 주석서에서 주로 쓰이는 표상이라는 의미는 영상, 잔영, 표상(영어의 image)의 뜻으로 쓰인다. 
*'형색의 표상이라는 거처에서 배회하고 묶이는 것'은 nupa-nimitta-niketa-visara-vinibandha라는 긴 합성어를 풀어서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형색(rupa)' 그 자체는 오염원들의 조건이 된다는 뜻에서 '표상(nimitta)'이다. 그리고 이것은 의식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의식이 거주하는 곳이라는 뜻에 의해서 '거처(niketa)'라고 한다. 그래서 형색의 표상이라는 거처가 된다. 그리고 visara-vinibandha는 '배회함(visara)'과 '묶임(vinibandha)'으로 분석된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형색의 표상이라는 거처에서 배회하고 묶이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것은 형색의 표상이라는 거처에서 생겨난 오염원의 배회와 오염원의 묶임이라는 뜻이다.(SA.ii.259-260)   

 

그러면 장자여, 어떻게 머무는 곳 없이 유행하는 자가 됩니까?
장자여, 형색의 표상이라는 머무는 곳에서 배회하고 묶임은 세존에게서 버려졌고 뿌리 뽑혔고 윗부분이 짤린 야자나무처럼 되었고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미래에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래는 '머무는 곳 없이 유행하는 자'라고 불립니다. ··· 소리의 표상 ··· 
냄새의 표상 ··· 맛의 표상 ··· 감촉의 표상 ··· 장자여, 법의 표상이라는 머무는 곳에서 배회하고 묶임은 세존에게서 버려졌고 뿌리 뽑혔고 윗부분이 짤린 야자나무처럼 되었고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미래에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래는 '머무는 곳 없이 유행하는 자'라고 불립니다. 이렇게, 장자여, 머무는 곳 없이 유행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면 장자여, 어떻게 마을에서 친교를 맺습니까?
장자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재가자들과 교제하며 머뭅니다. 함께 기뻐하는 자이고, 슬픔을 함께 나누는 자입니다. 행복한 곳에서 행복해하고, 괴로운 곳에서 괴로워합니다. 해야 하는 역활이 생길 때 자신이 그것들을 실천합니다. 이렇게,
장자여, 마을에서 친교를 맺습니다.


그러면 장자여, 어떻게 마을에서 친교를 맺지 않습니까?

여기, 장자여, 비구는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고 머뭅니다. 함께 기뻐하는 자가 아니고, 슬픔을 함께 나누는 자가 아닙니다. 행복한 곳에서 행복해하지 않고, 괴로운 곳에서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해야 하는 역활이 생길 때 자신이 그것들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장자여, 마을에서 친교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면 장자여, 어떻게 감각적 쾌락들을 버리지 않습니까?  

장자여, 여기 어떤 사람은 감각적 쾌락들에 대한 탐욕을 떠나지 못하고, 욕구를 떠나지 못하고, 애정을 떠나지 못하고, 갈증을 떠나지 못하고, 열기를 떠나지 못하고, 갈애를 떠나지 못합니다. 이렇게, 장자여, 감각적 쾌락들을 없애지 못합니다.

 

그러면 장자여, 어떻게 감각적 쾌락들을 버립니까?

장자여, 여기 어떤 사람은 감각적 쾌락들에 대한 탐욕을 떠나고, 욕구를 떠나고, 애정을 떠나고, 갈증을 떠나고, 열기를 떠나고, 갈애를 떠납니다. 이렇게, 장자여, 감각적 쾌락들을 버립니다.

 

그러면 장자여, 어떻게 기대합니까(바람이 생깁니까)?

여기, 장자여,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미래에 이러한 물질적 요소(색.色)가 있기를, 미래에 이러한 감수작용(수.受)이 있기를, 미래에 이러한 지각작용(상.想)이 있기를, 미래에 이러한 형성작용(행.行)이 있기를, 미래에 이러한 식별작용(식.識)이 있기를.’이라고.

장자여, 이렇게 기대합니다.

 

그러면 장자여, 어떻게 기대하지 않습니까?

장자여, 여기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이러한 물질적 요소가 있기를. 미래에 이러한 감수작용이 있기를, 미래에 이러한 지각작용이 있기를, 미래에 이러한 형성작용이 있기를, 미래에 이러한 식별작용이 있기를.’이라고.
이렇게, 장자여,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장자여, 어떻게 사람들과 다투면서 말합니까?

장자여, 여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는 이 법과 율을 알지 못한다. 나는 이 법과 율을 안다.’, ‘그대가 이 법과 율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대는 잘못된 길을 닦는 자이고 나는 바른 길을 닦는 자이다(그대는 잘못 실천하는 자이고 나는 바르게 실천하는 자이다).’, ‘나는 일관 되지만 그대는 일관되지 않다.’, ‘그대는 앞에 말해야 하는 것을 뒤에 말하고 뒤에 말해야 하는 것을 앞에 말한다.’, ‘그대가 성취한 것은 파기되었다.’, ‘그대가 준비한 말은 비난되었다. 말을 취소하라. 아니면 할 수 있다면 설해 보라.’라고.

이렇게, 장자여, 사람들과 다투면서 말합니다.


그러면 장자여, 어떻게 사람들과 다투면서 말하지 않습니까?

장자여, 여기 어떤 사람은 이러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대는 이 법과 율을 알지 못한다. 나는 이 법과 율을 안다.’, ‘그대가 이 법과 율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대는 잘못된 길을 닦는 자이고 나는 바른 길을 닦는 자이다(그대는 잘못 실천하는 자이고 나는 바르게 실천하는 자이다).’, ‘나는 일관 되지만 그대는 일관되지 않다.’, ‘그대는 앞에 말해야 하는 것을 뒤에 말하고 뒤에 말해야 하는 것을 앞에 말한다.’, ‘그대가 성취한 것은 파기되었다.’, ‘그대가 준비한 말은 비난되었다. 말을 취소하라. 아니면 할 수 있다면 설해 보라.’라고.    
이렇게, 장자여, 사람들과 다투면서 말하지 않습니다.

장자여, 『숫따니빠따』「앗타까 품」의 「마간디야의 질문 경」에서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처를 버림으로써 머무는 곳 없이 유행하며  

마을에서 친교하지 않는 성자는

감각적 쾌락들을 버리고 기대하지 않으며

사람들과 다투면서 말하지 않는다.’라고.


장자여, 세존께서 간략하게 설하신 뜻을 이와 같이 자세하게 알고 보아야 합니다.”

 

dutiyahāliddikānisuttaṃ (SN 22.4-할릿디까니 경2)   
4.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마하깟짜나 존자가 아완띠의 꾸라라가라에 있는 빠빠타 산에 머물고 있었다.
그 무렵 할릿디까니 장자가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할릿디까니 장자는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시여, 『디가니까야』「제석문경」(D21)에서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갈애를 부수어 해탈한 사문∙바라문들만이 

구경의 완성을 이루고 구경의 열반을 얻고 

구경의 청정범행을 닦고 구경의 목적을 얻으며 

신과 인간들 가운데서 뛰어나다.’라고.

 

존자이시여, 세존께서 간략하게 설하신 이 말씀에 대해 어떻게 상세한 의미를 보아야 합니까?”

 

“장자여, 물질의 요소에 대한 탐욕, 소망, 갈애, 집착으로 이끄는 마음의 결정.경향.잠재성향들을 부수고 사라지게하고 소멸하고 놓아 버리기 때문에 마음이 원만하게 해탈했다고 합니다. ··· 느낌의 요소 ··· 인식의 요소 ··· 형성의 요소 ··· 의식의 요소에 대한 대한 탐욕, 소망, 갈애, 집착으로 이끄는 마음의 결정.경향.잠재성향들을 부수고 사라지게하고 소멸하고 놓아 버리기 때문에 마음이 원만하게 해탈했다고 합니다.    


장자여, 『디가니까야』「제석문경」(D21)에서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갈애를 부수어 해탈한 사문∙바라문들만이

구경의 완성을 이루고 구경의 열반을 얻고

구경의 청정범행을 닦고 구경의 목적을 얻으며

신과 인간들 가운데서 뛰어나다.’라고.


장자여, 세존께서 간략하게 설하신 뜻을 이와 같이 자세하게 알고 보아야 합니다.”   

 

samādhisuttaṃ (SN 22.5-삼매 경)
5.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밧티의 제따바나(제타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
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존귀하신)이시여" 라고.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삼매를 닦아라. 비구들이여, 삼매를 닦는 비구는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린다. 그러면 무엇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는가? 물질적 요소(色.색)의 일어남과 사라짐, 감수작용(受.수)의 일어남과 사라짐, 지각작용(想.상)의 일어남과 사라짐, 형성작용(行.행)의 일어남과 사라짐, 식별작용(識.식)의 일어남과 사라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물질적 요소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감수작용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지각작용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형성작용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식별작용의 일어남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즐거워하고 환영하고 묶여 머문다. 

 

그러면 무엇을 즐거워하고 환영하고 묶여 머무는가?

물질적 요소를 즐거워하고 환영하고 묶여 머문다. 물질적 요소를 즐거워하고 환영하고 묶여 머무는 그에게 소망(所望)이 일어난다. 물질적 요소에 대한 소망이 있는 그에게 집착이 있다. 그에게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苦集.고집)가 발생한다.  

 

그는 감수작용을 즐거워하고 ··· 지각작용을 즐거워하고 ··· 형성작용을 즐거워하고 ··· 식별작용을 즐거워하고 환영하고 묶여 머문다. 식별작용을 즐거워하고 환영하고 묶여 머무는 그에게 소망(所望)이 일어난다. 물질적 요소에 대한 소망이 있는 그에게 집착이 있다. 그에게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苦集.고집)가 발생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물질적 요소의 일어남이고, 이것이 감수작용의 일어남이고, 이것이 지각작용의일어남이고, 이것이 형성작용의 일어남이고, 이것이 식별작용의 일어남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물질적 요소의 사라짐(소멸)이고, 무엇이 감수작용의 사라짐이고, 무엇이 지각작용의 사라짐이고, 무엇이 형성작용의 사라짐이고, 무엇이 식별작용의 소멸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즐거워하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을 즐거워하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는가?

물질적 요소를 즐거워하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는다. 물질적 요소를 즐거워하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는 그에게 물질적 요소에 대한 소망이 사라진다. 그에게 소망이 사라질 때 집착이 사라진다. 집착이 사라질 때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할 때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할 때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소멸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

 

감수작용을 즈럭워하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는다. 감수작용을 즐거워하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는 그에게 감수작용에  대한 소망이 사라진다. 그에게 소망이 사라질 때 집착이 사라진다. 집착이 사라질 때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할 때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할 때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소멸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

 

지각작용을 즐거워하지 않고 ··· 형성작용을 환영하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는다. 형성작용을 즐거워하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는 그에게 형성작용에  대한 소망이 사라진다. 그에게 소망이 사라질 때 집착이 사라진다. 집착이 사라질 때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할 때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할 때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소멸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

 

식별작용을 즐거워하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는다. 식별작용을 즐거워하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는 그에게 형성작용에 대한 소망이 사라진다. 그에게 소망이 사라질 때 집착이 사라진다. 집착의 사라질 때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할 때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의 소멸할 때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소멸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물질적 요소의 소멸이고, 이것이 감수작용의 소멸이고, 이것이 지각작용의소멸이고, 이것이 형성작용의 소멸이고, 이것이 식별작용의 소멸이다.”

 

paṭisallāṇasuttaṃ (SN 22.6-홀로 머묾 경)
6. 사왓티에서 설해짐. “비구들이여, 홀로 머묾에 집중하는 닦음을 행하라. 
비구들이여, 홀로 머묾에 집중하는 비구는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린다. 그러면 무엇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는가? 물질적 요소의 일어남과 사라짐(소멸), 감수작용의 일어남과 사라짐, 지각작용의 일어남과 사라짐, 형성작용의 일어남과 사라짐, 식별작용의 일어남과 사라짐이다." (앞의 SN22.5-삼매 경처럼 펼쳐져야 함)

 

upādāparitassanāsuttaṃ (SN 22.7-집착에 의한 동요 경)
7. 사왓티에서 설해짐.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집착에 의한 동요(초조함)와 집착하지 않음에 의한 동요하지 않음을 설할 것이다. 그것을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말하겠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집착에 의한 동요가 있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거룩한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룩한 가르침(법)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가르침을 배우지 못한 범부가 있다. 그는 훌륭한 스승을 알아보지 못하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알지 못하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지 못해,
물질적 요소를 나(我)로 간주한다거나, 나를 물질적 요소를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물질적 요소가, 혹은 물질적 요소에 내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런 그의 물질적 요소는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그의 물질적 요소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의 의식은 ‘물질적 요소는 변화한다.’는 생각에 휩싸인다. 그에게 ‘물질적 요소는 변화한다.’는 생각에 휩싸여서 생긴 동요와 해로운 법의 일어남이 마음을 사로잡아 머문다. 마음이 사로잡혔기 때문에 두려움과 곤혹스러움과 갈망이 있고, 집착하여 동요한다.  

 

감수작용을 나로 간주한다거나, 나를 감수작용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감수작용이, 혹은 감수작용에 내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런 그의 감수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그의 감수작용이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의 의식은 ‘감수작용은 변화한다.’는 생각에 휩싸인다. 그에게 ‘감수작용은 변화한다.’는 생각에 휩싸여서 생긴 동요와 해로운 법의 일어남이 마음을 사로잡아 머문다. 마음이 사로잡혔기 때문에 두려움과 곤혹스러움과 갈망이 있고, 집착하여 동요한다.  

 

지각작용을 나로 간주한다거나, ··· 형성작용을 나로 간주한다거나, 나를 형성작용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형성작용이, 혹은 형성작용에 내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런 그의 형성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그의 형성작용이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의 의식은 ‘형성작용은 변화한다.’는 생각에 휩싸인다. 그에게 ‘형성작용은 변화한다.’는 생각에 휩싸여서 생긴 동요와 해로운 법의 일어남이 마음을 사로잡아 머문다. 마음이 사로잡혔기 때문에 두려움과 곤혹스러움과 갈망이 있고, 집착하여 동요한다.  

 

식별작용을 나로 간주한다거나, 나를 식별작용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식별작용이, 혹은 식별작용에 내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런 그의 식별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그의 식별작용이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의 의식은 ‘식별작용은 변화한다.’는 생각에 휩싸인다. 그러면 ‘식별작용은 변화한다.’는 생각에 휩싸여서 생긴 동요와 해로운 법의 일어남이 마음을 사로잡아 머문다. 마음이 사로잡혔기 때문에 두려움과 곤혹스러움과 갈망이 있고, 집착하여 동요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집착에 의한 동요가 있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집착하지 않음에 의한 동요하지 않음이 있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거룩한 이를 알아보고 거룩한 가르침(법)을 알고 거룩한 가르침을 배운 제자가 있다. 그는 훌륭한 스승을 알아보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알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배워서, 물질적 요소를 나로 간주하지 않고, 나를 물질적 요소를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물질적 요소가, 혹은 물질적 요소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런 그의 물질적 요소는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그의 물질적 요소는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지만 그의 의식은 ‘물질적 요소는 변화한다.’는 생각에 휩싸이지 않는다. 그에게 ‘물질적 요소는 변화한다.’는 생각에 휩싸여서 생긴 동요와 해로운 법의 일어남이 마음을 사로잡아 머물지 않는다.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움과 곤혹스러움과 갈망이 없고, 집착하여 동요하지 않는다.

 

감수작용을 나로 간주하지 않고, 나를 감수작용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감수작용이, 혹은 감수작용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런 그의 감수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그의 감수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지만 그의 의식은 ‘감수작용은 변화한다.’는 생각에 휩싸이지 않는다. 그에게 ‘감수작용은 변화한다.’는 생각에 휩싸여서 생긴 동요와 해로운 법의 일어남이 마음을 사로잡아 머물지 않는다.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움과 곤혹스러움과 갈망이 없고, 집착하여 동요하지 않는다.

 

지각작용을 나로 간주하지 않고 ··· 형성작용을 나로 간주하지 않고, 나를 형성작용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형성작용이, 혹은 형성작용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런 그의 형성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그의 형성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지만 그의 의식은 ‘형성작용은 변화한다.’는 생각에 휩싸이지 않는다. 그에게 ‘형성작용은 변화한다.’는 생각에 휩싸여서 생긴 동요와 해로운 법의 일어남이 마음을 사로잡아 머물지 않는다.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움과 곤혹스러움과 갈망이 없고, 집착하여 동요하지 않는다.

 

식별작용을 나로 간주하지 않고, 나를 식별작용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식별작용이, 혹은 식별작용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런 그의 식별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그의 식별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지만 그의 의식은 ‘식별작용은 변화한다.’는 생각에 휩싸이지 않는다. 그에게 ‘식별작용은 변화한다.’는 생각에 휩싸여서 생긴 동요와 해로운 법의 일어남이 마음을 사로잡아 머물지 않는다.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움과 곤혹스러움과 갈망이 없고, 집착하여 동요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집착하지 않음에 의한 동요하지 않음이 있다.

 

dutiyaupādāparitassanāsuttaṃ (SN 22.8-집착에 의한 동요 경2)
8. 사왓티에서 설해짐.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집착에 의한 동요(초조함)와 집착하지 않음에 의한 동요하지 않음을 설할 것이다. 그것을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말하겠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해서 집착에 의한 동요가 있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물질적 요소를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관찰한다). 그러나 그런 그의 물질적 요소는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그의 물질적 요소는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근심.탄식.정신적 고통.육체적 고통.절망)이 일어난다.

 

*앞의 경이 전적으로 유신견을 골격으로 하고 있다면, 본경은 세가지 움켜쥠(gaha)를 뼈대로 하고 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이것은 나의 것이다(etam mama)'라는 것은 갈애에 의한 움켜쥠(tanha-gaha)이다. '이것은 나다(esohasmi)'라는 것은 자만에 의한 움켜쥠(mana-gaha)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eso me atta)'라는 것은 견해에 의한 움켜쥠(ditthi-gaha)이다.   
그리고 앞의 경에서 동요(paritassana)는 갈애와 두려움의 동요이지만, 본경에서 동요는 근신과 탄식 등의 동요이다.   

 

비구들이여,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감수작용을 ··· 지각작용을 ··· 형성작용을 ··· 식별작용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관찰한다). 그러나 그런 그의 식별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그의 식별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근심.탄식.정신적 고통.육체적 고통.절망)이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해서 집착에 의한 동요가 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해서 집착하지 않음에 의한 동요하지 않음이 있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적 요소를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지 않는다(관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그의 물질적 요소는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그의 물질적 요소는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지만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근심.탄식.정신적 고통.육체적 고통.절망)이 일어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여기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감수작용을 ··· 지각작용을 ··· 형성작용을 나 ··· 식별작용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지 않는다(관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그의 식별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그의 식별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지만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근심.탄식.정신적 고통.육체적 고통.절망)이 일어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해서 집착하지 않음에 의한 동요하지 않음이 있다.”

 

kālattayāniccasuttaṃ (SN 22.9-세 가지 시점의 무상(無常) 경)
9. 사왓티에서 설해짐.
“비구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물질적 요소는 무상하다. 현재의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제자는 과거의 물질적 요소에 대해 원하지 않는다. 미래의 물질적 요소를 즐거워하지 않는다. 현재의 물질적 요소의 염오(싫어하여 떠남)와 탐욕의 사라짐과 소멸을 위해 닦는다. 감수작용은 무상하다. ··· 지각작용은 무상하다. 미래의 형성작용은 무상하다. 현재의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과거의 형성작용에 대해 원하지 않는다. 미래의 형성작용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현재의 형성작용의 염오와 탐욕의 사라짐과 소멸을 위해 닦는다. 과거와 미래의 식별작용은 무상하다. 현재의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과거의 식별작용에 대해 원하지 않는다. 미래의 식별작용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현재의 식별작용의 염오와 탐욕의 사라짐과 소멸을 위해 닦는다.

 

kālattayadukkhasuttaṃ (SN 22.10-세 가지 시점의 괴로움 경)
10. 사왓티에서 설해짐. “비구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물질적 요소는 괴로움이다. 현재의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과거의 물질적 요소에 대해 원하지 않는다. 미래의 물질적 요소를 즐거워하지 않는다. 현재의 물질적 요소의 염오와 탐욕의 사라짐과 소멸을 위해 닦는다감수작용은 괴로움이다. ··· 인식작용은 괴로움이다. ··· 형성작용은 괴로움이다. ··· 과거와 미래의 식별작용은 괴로움이다. 현재의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과거의 식별작용에 대해 원하지 않는다. 미래의 식별작용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현재의 식별작용의 염오와 탐욕의 사라짐과 소멸을 위해 닦는다."

 

kālattayānattasuttaṃ (SN 22.11-세 가지 시점의 무아 경)
11. 사왓티에서 설해짐. “비구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물질적 요소는 무아다. 현재의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과거의 물질적 요소에 대해 원하지 않는다. 미래의 물질적 요소를 즐거워하지 않는다. 현재의 물질적 요소의 염오와 탐욕의 사라짐과 소멸을 위해 닦는다. 감수작용은 무아다. ··· 지각작용은 무아다. ··· 형성작용은 무아다. ··· 형성작용은 무아다. ··· 과거와 미래의 식별작용은 무아다. 현재의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과거의 식별작용에 대해 원하지 않는다. 미래의 식별작용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현재의 식별작용의 염오와 탐욕의 사라짐과 소멸을 위해 닦는다."

 

 

제1장 나꿀라삐따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