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상윳따 니까야

제22상윳따 - 제5장 자신을 섬으로 삼음 품(Attadipa vagga. SN22:43-SN22:52)

실론섬 2014. 5. 9. 18:54

제5장 자신을 섬으로 삼음 품
Attadīpa-vagga (SN 22.43-52)

 

attadīpasuttaṃ (SN 22.43-자신을 섬으로 삼음 경)

43, 사왓티에서 설해짐. “비구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비구들이여, 스스로 섬이 되어 머물고 스스로 의지처가 되어 머물고 남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하여 머물고 법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고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말라). 비구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 자들은 근원을(조건을)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은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에서 발생하는가?’라고.

 

비구들이여,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은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에서 발생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거룩한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룩한 가르침(법)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가르침을 배우지 못한 범부가 있다. 그는 훌륭한 스승을 알아보지 못하고, 훌륭한스승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지 못해,
물질적 요소를 나(我)로 간주한다거나, 나를 물질적 요소를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물질적 요소가, 혹은 물질적 요소에 내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런 그의 물질적 요소는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 물질적 요소가 변화하고 달라진 것 때문에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고 생긴다. 감수작용을 나(我)로 간주한다거나, 나를 감수작용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감수작용이, 혹은 감수작용에 내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런 그의 감수작용은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 감수작용이 변화하고 달라진 것 때문에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생긴다. 지각작용(想)을 나(我)로 간주한다거나 ··· 형성작용(行)을 나(我)로 간주한다거나 ··· 식별작용(識)을 나(我)로 간주한다거나, 나를 식별작용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식별작용이, 혹은 식별작용에 내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런 그의 식별작용은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 식별작용이 변화하고 달라진 것 때문에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생긴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물질적 요소의 무상함과 변화와 사라짐과 소멸을 알아서 과거의 물질적 요소도 현재의 물질적 요소도 모두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이라고 이렇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에게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버려진다. 그것들을 버림으로부터 동요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자는 행복하게 머문다. 비구들이여, 행복하게 머무는 자는 '그 요소만큼 꺼진 자(열반으로 향한 사람)'라고 불린다.

 

*'그 요소만큼 꺼진 자'는 tadanga-nibbuto를 옮긴 것이다. '꺼진'으로 옮긴 nibbuta는 열반을 증득한 자를 표현하는 단어로 쓰인다. tad-anga는  '그 요소만큼(그 측면)'으로 직역할 수 있는데 아래 주석서의 설명을 참조하면 여기서는 위빳사나 측면에서 열반을 증득한 자라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물론 모든 면에서 완전한 열반을 증득한 것이 아니라 어떤 한 요소만큼을(어떤 한 측면을) 통해서 그것에 근접하는 경지를 얻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문구는 '어떤 요소만큼(어떤 측면에서) 열반을 얻은 자'로 해석할 수 있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런 위빳사나의 측면에서 오염원들이 꺼졌기 때문에 tadanga-nibbuta라 한다. 본경에서는 위빳사나만을 설하셨다."(SA.ii.268)  
다시 말하면 오온의 통찰을 통해서 삼독의 불이 꺼지게 되면 이런 수행은 위빳사나에만 적용될 뿐 삼매나 사마타를 통한 증득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청정도론에서 말하는 마른 위빳사나를 닦은 자나 순수 위빳사나를 닦은 자와 관계가 있다.(청정도론 XVIII.8)  

 

비구들이여, 감수작용의 무상함과 변화와 사라짐과 소멸을 알아서 과거의 감수작용도 현재의 감수작용도 모두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이라고 이렇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에게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버려진다. 그것들을 버림으로부터 동요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자는 행복하게 머문다. 비구들이여, 행복하게 머무는 자는 '그 요소만큼 꺼진 자(열반으로 향한 사람)'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지각작용의 무상함과 변화와 사라짐과 소멸을 알아서 과거의 지각작용도 현재의 지각작용도 모두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이라고 이렇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에게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버려진다. 그것들을 버림으로부터 동요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자는 행복하게 머문다. 비구들이여, 행복하게 머무는 자는 '그 요소만큼 꺼진 자(열반으로 향한 사람)'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형성작용의 무상함과 변화와 사라짐과 소멸을 알아서 과거의 형성작용도 현재의 형성작용도 모두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이라고 이렇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에게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버려진다. 그것들을 버림으로부터 동요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자는 행복하게 머문다. 비구들이여, 행복하게 머무는 자는 '그 요소만큼 꺼진 자(열반으로 향한 사람)'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식별작용의 무상함과 변화와 사라짐과 소멸을 알아서 과거의 식별작용도 현재의 식별작용도 모두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이라고 이렇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에게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버려진다. 그것들을 버림으로부터 동요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자는 행복하게 머문다. 비구들이여, 행복하게 머무는 자는 '그 요소만큼 꺼진 자(열반으로 향한 사람)'라고 불린다." 

 

*물질(色) = 물질적 요소,  느낌(受) = 감수작용, 인식(想) = 지각작용, 형성(行) = 형성작용, 의식(識) = 식별작용

 

paṭipadāsuttaṃ (SN 22.44-닦음(실천) 경)
44. 사왓티에서 설해짐.
 “비구들이여, 자기 존재[有身]의 일어남으로 이끄는 닦음과 자기 존재의 소멸로 이끄는 닦음을 설할 것이다. 그것을 들어라. 비구들이여, 무엇이 자기 존재의 일어남으로 이끄는 닦음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거룩한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룩한 가르침(법)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가르침을 배우지 못한 범부가 있다. 그는 훌륭한 스승을 알아보지 못하고, 훌륭한스승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지 못해,
물질적 요소를 나(我)로 간주한다거나, 나를 물질적 요소를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물질적 요소가, 혹은 물질적 요소에 내가 있다고 여긴다. 감수작용을 ··· 지각작용을 ··· 형성작용을 ··· 식별작용을 나(我)로 간주한다거나, 나를 식별작용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식별작용이, 혹은 식별작용에 내가 있다고 여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자기 존재[有身]의 일어남으로 이끄는 닦음, 자기 존재의 일어남으로 이끄는 닦음'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으로 이끄는 관찰'이라고 불린다. 여기에 이런 의미가 있다(비구들이여, 여기서 자기 존재의 일어남으로 이끄는 닦음이란 괴로움의 일어남으로 이끄는 닦음에 대한 관찰이라는 것이 그 뜻이다).

 

*'괴로움의 일어남으로 이끄는 관찰(dukkha-samudaya-gamini-samanupassana)'에서 자기 존재(sakkaya)가 바로 괴로움이기 때문에 괴로움의 일어남이란 자기 존재의 일어남이다. 그러므로 [네 가지 방법으로] 물질을 자아라고 관찰하는 것이 바로 자기 존재(괴로움)의 일어남으로 이끄는 관찰이다. 여기서는 견해(ditthi,사견)를 관찰이라고 하셨다.(SA.ii.268)

비구들이여, 무엇이 자기 존재의 소멸로 이끄는 닦음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거룩한 이를 알아보고, 거룩한 가르침(법)을 알고, 거룩한 가르침을 배운 제자가 있다. 그는 훌륭한 스승을 알아보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알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배워서, 물질적 요소를 나(我)로 간주하지 않고, 나를 물질적 요소를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물질적 요소가혹은 물질적 요소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감수작용을 나(我)로 간주하지 않고 ··· 지각작용을 ··· 형성작용을 ··· 식별작용을 나(我)로 간주하지 않고, 나를 식별작용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식별작용이, 혹은 식별작용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자기 존재의 소멸로 이끄는 닦음, 자기 존재의 소멸로 이끄는 닦음'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관찰'이라고 불린다. 여기에 이런 의미가 있다(비구들이여, 여기서 자기 존재의 소멸로 이끄는 닦음이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닦음에 대한 관찰이라는 것이 그 뜻이다).”

 

aniccasuttaṃ (SN 22.45-무상(無常) 경)
45. 사왓티에서 설해짐. “비구들이여, 물질적 요소는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 괴로움인 것은 무아다. 무아인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의 마음은 마음은 탐욕이 사라지고 집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해탈한다(벗어난다).
감수작용은 무상하다 ··· 지각작용은 ··· 형성작용은 ··· 식별작용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 괴로움인 것은 무아다. 무아인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의 마음은 마음은 탐욕이 사라지고 집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해탈한다. 비구들이여, 만약 물질적 요소로부터 비구의 마음이 탐욕이 사라지고 집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해탈하면, 감수작용으로부터 ··· 지각작용으로부터 ··· 형성작용으로부터 ··· 식별작용으로부터 비구의 마음이 탐욕이 사라지고 집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해탈하면 평정 머물고, 평정에 머물기 때문에 행복하고, 행복하기 때문에 갈애가 없고, 갈애가 없으면 스스로 완전히 열반에 든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가 되지 않는다.’라고 안다.”

 

dutiyāniccasuttaṃ (SN 22.46-무상(無常) 경2)
46. 사왓티에서 설해짐. “비구들이여, 물질적 요소는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 괴로움인 것은 무아다. 무아인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철저히) 보아야 한다. 감수작용은 무상하다. ···
지각작용은 ··· 형성작용은 ··· 식별작용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 괴로움인 것은 무아다. 무아인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그것을 바른 지혜로 보는 자에게 과거에 대한 견해를 가지지 않게 된다. 과거에 대한 견해가 없을 때 미래에 대한 견해도 가지지 않게 된다. 미래에 대한 견해가 없을 때 강하게 집착하지 않는다. 강하게 집착하지 않을 때 물질적 요소에 대해 ··· 감수작용에 대해 ··· 지각작용에 대해 ··· 형성작용에 대해 ··· 식별작용에 대해 마음은 탐욕이 사라지고 집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해탈한다. 해탈하면 평정에 머물고, 평정에 머물기 때문에 행복하고, 행복하기 때문에 갈애가 없고, 갈애가 없으면 스스로 완전히 열반에 든다. 그는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가 되지 않는다.’라고 안다.”   

 

samanupassanāsuttam (SN 22.47-관찰 경)
47. 사왓티에서 설해짐.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들이든 바라문들이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아를 관찰하는 자들은 모두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五取蘊.오취온]를 자아로 관찰하는 것이지 그외 다른 것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거룩한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룩한 가르침(법)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가르침을 배우지 못한 범부가 있다. 그는 훌륭한 스승을 알아보지 못하고, 훌륭한스승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지 못해,
그는 물질적 요소를 나로 간주한다거나, 나를 물질적 요소를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물질적 요소가, 혹은 물질적 요소에 내가 있다고 여긴다. 감수작용을 ··· 지각작용을 ··· 형성작용을 ··· 식별작용을 나로 간주한다거나, 나를 식별작용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식별작용이, 혹은 식별작용에 내가 있다고 여긴다. 이와 같이 하여 잘못된 견해(사견)를 통한 관찰과 ‘나는 있다.’는 갈망(분별)이 그에게서 사라지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나는 있다.’라는 잘못된 견해에 의한 집착이 생기면 눈의 감각기능(근), 귀의 감각기능, 코의 감각기능, 혀의 감각기능, 몸의 감각기능이라는 다섯 가지 감각기능(근)들이 출현한다. 비구들이여, 거기에는 마음이 있고 마음의 대상인 법(마음현상)들이 있고 무명의 요소가 있다. 무명과 함께 하는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에 닿은 배우지 못한 보통사람(범부)는 ‘나는 있다.’라고도 생각하고, ‘나는 이것이다.’라고도 생각하고, ‘나는 있을 것이다.’라고도 생각하고, ‘나는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도 생각하고, ‘나는 물질적 요소를(色.색)을 가지게 될 것이다.’라고도 생각하고, ‘나는 물질적 요소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라고도 생각하고, ‘나는 의식(識.식)을 가질 것이다.’라고도 생각하고, ‘나는 의식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라고도 생각하고, ‘나는 의식을 가지지도 않고 의식을 가지지 않지도 않을 것이다.’라고도 생각한다.

 

비구들이여, 비록 다섯 가지 감각기능들이 바로 거기에 남아있지만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에게는 이들에 대한 무명을 제거하고 명지(明知)가 일어난다. 그에게 무명이 제거되고 명지가 일어나기 때문에 ‘나는 있다.’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나는 이것이다.’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나는 있을 것이다.’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나는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나는 물질적 요소를 가지게 될 것이다.’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나는 물질적 요소를가지지 않을 것이다.’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나는 의식을 가질 것이다.’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나는 의식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나는 의식을 가지지도 않고 의식을 가지지 않지도 않을 것이다.’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khandhasuttaṃ (SN 22.48-온(蘊) 경)
48. 시왓티에서 설해짐.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온[五蘊]과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五取蘊]를 설할 것이다. 그것을 들어라.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다섯 가지 온[五蘊.오온]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이 어떠한 물질적 요소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부의, 혹은 거칠거나 미세한, 혹은 열등하거나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무엇이든지 이와 같은 것을 물질적 요소의 온[色蘊.색온]이라고 불린다. ··· 그것이 어떠한 감수작용이건 간에 ··· 그것이 어떠한 지각작용이건 간에 ··· 그것이 어떠한 형성작용이건 간에 ··· 그것이 어떠한 식별작용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부의, 혹은 거칠거나 미세한, 혹은 열등하거나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무엇이든지 이와 같은 것을 식별작용의 온[識蘊.식온]이라고 불린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온이라고 불린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다섯가지 집착에 의한 온[五取蘊.오취온]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이 어떠한 물질적 요소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부의, 혹은 거칠거나 미세한, 혹은 열등하거나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번뇌와 함께 하고 집착되기 마련인 것을 일러 물질적 요소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이라고 불린다. 그것이 어떠한 감수작용이건 간에 ··· 그것이 어떠한  지각작용이건 간에 ··· 그것이 어떠한 형성작용이건 간에 ··· 그것이 어떠한 식별작용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부의, 혹은 거칠거나 미세한, 혹은 열등하거나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번뇌와 함께 하고 집착되기 마련인 것을 일러 식별작용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이라고 불린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이라고 불린다.”

 

soṇasuttam (SN 22.49-소나 경)  
49.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웰루와나(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장자의 아들 소나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장자의 아들 소나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나여, 어떤 사문들이든 바라문이든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는 법을 지닌 물질적 요소를 두고 ‘나는 뛰어나다.’라고 여긴다거나 ‘나는 동등하다.’라고 여긴다거나, ‘나는 열등하다.’라고 여기는 자들은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자들 외에 그 무엇이겠는가?
소나여, 어떤 사문들이든 바라문이든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는 법을 지닌 감수작용을 두고 ··· 지각작용을 두고 ··· 형성작용을 두고 ··· 식별작용을 두고 ‘나는 뛰어나다.’라고 여긴다거나 ‘나는 동등하다.’라고 여긴다거나, ‘나는 열등하다.’라고 여기는 자들은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자들 외에 그 무엇이겠는가?

 

소나여,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물질적 요소를 두고 ‘나는 뛰어나다.’라고도 여기지 않고, ‘나는 동등하다.’라고도 여기지 않고, ‘나는 열등하다.’라고도 여기지 않는 자들은 있는 그대로 보는 자들 외에 그 무엇이겠는가? 소나여,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감수작용을 ··· 지각작용을 두고 ··· 형성작용을 두고 ··· 식별작용을 두고 ‘나는 뛰어나다.’라고도 여기지 않고, ‘나는 동등하다.’라고도 여기지 않고, ‘나는 열등하다.’라고도 여기지 않는 자들은 있는 그대로 보는 자들 외에 그 무엇이겠는가?  

소나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적 요소는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운 것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감수작용은 ···
지각작용은 ··· 형성작용은 ··· 식별작용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운 것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소나여, 그것이 어떠한 물질적 요소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부의, 혹은 거칠거나 미세한, 혹은 열등하거나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 그것이 어떠한 감수작용이건 간에 ···그것이 어떠한 지각작용이건 간에 ··· 그것이 어떠한 형성작용이건 간에 ··· 그것이 어떠한 식별작용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부의, 혹은 거칠거나 미세한, 혹은 열등하거나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소나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적 요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감수작용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 지각작용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형성작용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식별작용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여 떠나서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가 되지 않는다.’라고 안다.”     

 

dutiyasonasuttam (SN 22.50-소나 경2)  
50.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의 웰루와나에서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장자의 아들 소나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장자의 아들 소나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나여,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물질적 요소를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물질적 요소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물질적 요소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물질적 요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면, 그러한 사문이나 바라문은 사문 중에서 사문답지 못하고 바라문 중에서 바라문답지 못하다. 또한 그들은 존경할만 이들도 아니며 사문됨과 바라문됨을 현재의 법 안에서 스스로 철저히 알았거나 겪어 알아 갖추어 머무는 것도 아니다. ··· 감수작용을 ··· 지각작용을 ··· 형성작용의 ··· 식별작용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식별작용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식별작용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식별작용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면, 그러한 사문이나 바라문은 사문 중에서 사문답지 못하고 바라문 중에서 바라문답지 못하다. 또한 그들은 존경할만 이들도 아니며 사문됨과 바라문됨을 현재의 법 안에서 스스로 철저히 알았거나 겪어 알아 갖추어 머무는 것도 아니다.

 

소나여,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물질적 요소를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물질적 요소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물질적 요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면, 그러한 사문이나 바라문은 사문중에서 사문답고 바라문중에서 바라문 답다. 또한 그들은 존경할만한 이들이며 사문됨과 바라문됨을 현재의 법 안에서 스스로 철저히 알았거나 겪어 알아 갖추어 머문다. ··· 감수작용을 ··· 지각작용을 ··· 형성작용을 ···

식별작용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식별작용의 일어남을 있은 그대로 철저히 알고, 식별작용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식별작용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면, 그러한 사문이나 바라문은 사문중에서 사문답고 바라문중에서 바라문 답다. 또한 그들은 존경할만한 이들이며 사문됨과 바라문됨을 현재의 법 안에서 스스로 철저히 알았거나 겪어 알아 갖추어 머문다."  

 

nandikkhayasuttaṃ (SN 22.51-소망(所望)의 부서짐 경)
51. 사왓티에서 설해짐. “비구들이여, 비구는 무상한 물질적 요소를 무상하다고 본다. 그것이 바른 견해이다. 바르게 보는 자는 염오한다. 소망(즐김)의 부서짐(소멸)으로부터 탐욕의 부서짐이 있고, 탐욕의 부서짐으로부터 소망의 부서짐이 있다. 소망과 탐욕의 부서짐으로부터 해탈된 마음을 원만하게 잘 해탈된 것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무상한 감수작용을 무상하다고 본다. 그것이 바른 견해이다. 바르게 보는 자는 염오한다. 소망(즐김)의 부서짐(소멸)으로부터 탐욕의 부서짐이 있고, 탐욕의 부서짐으로부터 소망의 부서짐이 있다. 소망과 탐욕의 부서짐으로부터 해탈된 마음을 원만하게 잘 해탈된 것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무상한 지각작용을 무상하다고 본다. 그것이 바른 견해이다. 바르게 보는 자는 염오한다. 소망(즐김)의 부서짐(소멸)으로부터 탐욕의 부서짐이 있고, 탐욕의 부서짐으로부터 소망의 부서짐이 있다. 소망과 탐욕의 부서짐으로부터 해탈된 마음을 원만하게 잘 해탈된 것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무상한 형성작용을 무상하다고 본다. 그것이 바른 견해이다. 바르게 보는 자는 염오한다. 소망(즐김)의 부서짐(소멸)으로부터 탐욕의 부서짐이 있고, 탐욕의 부서짐으로부터 소망의 부서짐이 있다. 소망과 탐욕의 부서짐으로부터 해탈된 마음을 원만하게 잘 해탈된 것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무상한 식별작용을 무상하다고 본다. 그것이 바른 견해이다. 바르게 보는 자는 염오한다. 소망(즐김)의 부서짐(소멸)으로부터 탐욕의 부서짐이 있고, 탐욕의 부서짐으로부터 소망의 부서짐이 있다. 소망과 탐욕의 부서짐으로부터 해탈된 마음을 원만하게 잘 해탈된 것이라고 불린다."   

 

dutiyanandikkhayasuttaṃ (SN 22.52-소망의 부서짐 경2)
52. 사왓티에서 설해짐.
“비구들이여, 물질적 요소에 대해서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고 물질적 요소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한다(철저히 알아차려야 한다). 물질적 요소에 대해서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고, 물질적 요소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자는 물질적 요소에 대해 염오한다. 소망(즐김)의 부서짐(소멸)으로부터 탐욕의 부서짐이 있고, 탐욕의 부서짐으로부터 소망의 부서짐이 있다. 소망과 탐욕의 부서짐으로부터 해탈된 마음을 원만하게 잘 해탈된 것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감수작용에 대해서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고 감수작용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한다(철저히 알아차려야 한다). 감수작용에 대해서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고, 감수작용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자는 감수작용에 대해 염오한다. 소망(즐김)의 부서짐(소멸)으로부터 탐욕의 부서짐이 있고, 탐욕의 부서짐으로부터 소망의 부서짐이 있다. 소망과 탐욕의 부서짐으로부터 해탈된 마음을 원만하게 잘 해탈된 것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지각작용에 대해서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고 지각작용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한다(철저히 알아차려야 한다). 지각작용에 대해서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고, 지각작용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자는 지각작용에 대해 염오한다. 소망(즐김)의 부서짐(소멸)으로부터 탐욕의 부서짐이 있고, 탐욕의 부서짐으로부터 소망의 부서짐이 있다. 소망과 탐욕의 부서짐으로부터 해탈된 마음을 원만하게 잘 해탈된 것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형성작용에 대해서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고 형성작용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한다(철저히 알아차려야 한다). 형성작용에 대해서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고, 형성작용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자는 형성작용에 대해 염오한다. 소망(즐김)의 부서짐(소멸)으로부터 탐욕의 부서짐이 있고, 탐욕의 부서짐으로부터 소망의 부서짐이 있다. 소망과 탐욕의 부서짐으로부터 해탈된 마음을 원만하게 잘 해탈된 것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식별작용에 대해서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고 식별작용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한다(철저히 알아차려야 한다). 식별작용에 대해서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고, 식별작용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자는 식별작용에 대해 염오한다. 소망(즐김)의 부서짐(소멸)으로부터 탐욕의 부서짐이 있고, 탐욕의 부서짐으로부터 소망의 부서짐이 있다. 소망과 탐욕의 부서짐으로부터 해탈된 마음을 원만하게 잘 해탈된 것이라고 불린다."

 

 

제5장 자신을 섬으로 삼음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