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세상은 인식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닦는 자의 것이다

실론섬 2014. 5. 27. 12:29

부처의 눈과 돼지의 눈

한지붕아래 살고 있는 사람과 개가 다른 것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고 세상을 다르게 인식하기 때문이다...그것은 세상을 인식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래서 세상은 인식하는 자의 것이라고 한다.[연꽃님의 글]


왜 부처의 눈에는 부처로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로 보일까? 즉 예쁜 여자를 보더라도 아라한들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지만 범부들은 마음이 흔들린다. 아라한이나 범부나 저것이 여자라다고 인식(지각)하는 것은 같다. 만약에 세상은 인식하는 자의 것이라면 아라한이나 범부나 여자라는 것을 같이 인식하니 똑같은 생각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왜 ? 그건 여자라고 대상을 인식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여자라고 인식된 대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원효와 의상대사가 물을 먹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해골 속의 물이었다. 물이라고 맛있게 마신 것은 물이라는 것을 인식한 것의 문제인가 아니면 맛있게 마신 마음의 마음의 문제인가?  


졸지에 인식에서 마음으로 넘어왔다. 인식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마음은 그 대상에 대해서 갈애를 일으키는 것이다. 저 앞에 보석이 있다고 알아채는 것은 인식이다. 하지만 그 보석을 갖고 싶다고 갈애를 일으키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라고 한다. 이 작자는 가장 기본적인 찟따(citta)와 윈냐나(vinnāṇa), 마노(mano)그리고 인식(想, sannā) 라고 하는 것에 대한 기본개념조차 정립이 안되어 있다. 


세상의 존재들은 각자 자신의 지각능력대로 세상을 느끼고 살아간다. 사람도 어둠이나 밝음을 알고 냄새도 맡고 소리도 듣는다. 개도 돼지도 우리들처럼 듣고 맛보고 느낀다. 즉 인식하며 사는 것이다.  

 

유치원생이 보는 대학원 철학서 - 유식론

마음이 이 세상을 만들고 마음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하였다. 세상은 마음이 이끌고 마음에 의해서 끌려 다닌다. 이는 세상을 인식론적으로 보기 때문이다.[연꽃님 글]


불교에서는 예전부터 마음의 작용 (sabbacittasādhāraṇa-cetasika)에 대해서 깊이있게 연구하고 수행하여 왔다. 우리가 눈으로 귀로 코로 혀로 몸으로 느끼고 인식하는 것에 대해서 불교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식작용은 불교가 아닌 타종교에서도 얼마든지 논의되고 있다. 개가 박둑아! 라고 부를때 귀의 인식능력으로 자신을 부르는줄 알고 꼬리를 흔들면서 쫓아오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다. 불교는 인식의 대상을 넘어서 마음을 이야기하는 종교이다.  


유식론은 인식론을 이야기하는 교리가 아니다. 우리의 마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래서 '유가파의 인식론'이라고 하지 않고 '유가파의 유식론'이라고 이야기한다. 인식과 유식은 180도 다른 것이다. 유식론이 무엇인지 굳이 여기서 설명하지는 않겠다.

 

경전은 왜 부정법으로 설법을 하는가?

불교는 무엇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불교는 무엇이 아니다라고 부정적 언표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할 것이다. 긍정적 언표로  말하면 한정되어 버리지만 부정적 언표로 말하면 포괄하기 때문이다. [연꽃님 글]


경전은 대부분 부정법으로 표현이 되어 있다. 이건 위 연꽃님의 헛된 망발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불교의 교리는 점진적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 하나씩 단계를 밝아 올라가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과 같다. 또한 양파껍질을 벗기들 하나 하나 벗겨내서 그 진리를 밝히고자 하는게 붓다의 설법방법이다. 즉 긍정을 위한 부정을 하는 것이지 부정을 위한 부정을 하는게 아니다. 예를 들어서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괴로운 것입니다. ..." 라는 식으로 양파껍질 벗기듯이 벗겨낸다. 다시말하자면 아(我)를 부정하다보면 마침내 무아에 이른다. 즉 이게 자아인가 아닌가? 이게 항상한가 아닌가? 라고 끝임없이 부정하여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자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게 되면 비로소 무아라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과 같다.


이런 불교의 부정문으로 결과적으로 긍정적이고 점진적이고 단계적 설법이며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인 것이다. 그게 불교의 방법이다. 선가에서 흔히 말하듯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친다는 의미도 바로 이러한 역설을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열반에 대한 헛소리를 보면서

"열반세계의 존재유무" 라는 글과 그밖의 글에서 열반에 대해서 다양하게 설명을 했다. 그리고 나는 연꽃에게 공개적으로 해탈과 열반이 같은가 다른가 그리고 무엇인지 물었다. 그랬더니만 버스웰 교수의 강의를 들고 나와서 열반을 부정적 언표를 사용하여 설명했다고 장황하게 망발을 늘어 놓고 있다. 버스웰 교수도 이야기 해지만 열반은 어디도 아닙니다. 열반은 어디도 아닌 것이 아닌 어디 입니다 즉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상상이나 언어의 경계를 넘어 있는 것이다. 부정적인 언표의 설명이니 긍정이니 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열반이 아닌것이다.


불교계 최고의 학자였던 웨드워즈 콘즈 교수는 열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일갈 하였다. 그 이유는 주변에서 열반이 이러니 저러니 하도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을 공박하기 위해서 였다. 


"열반이 어떤 것이라고 설명할 적절한 관념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열반은 생각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열반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들이 없으며누구나 그것을 개인적으로 스스로 경험해야만 하며 세상에는 미미하게나마 열반과 비슷한 것이 전혀 없으며 추리로 그것에 가깝게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열반에 대한 모든 개념은 착각이다." Edward Conze 교수


불교가 인식론이라고 - 이건 외도의 주장이다.

10무기 중에서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하지 않는가?등등의 10가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서 붓다는 침묵한다. 왜냐하면 이미 그 질문 자체가 있다 없다 아니다 맞다라는 것을 전제로 물었기 때문에 있다고 하면 상주론에 빠지고 없다고 하면 단멸론에 빠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불교가 인식론이냐 존재론이냐를 묻는 것은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 불교의 진리는 팔정도라는 올바른(중도) 길로 찾아 가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불교 스승이나 학자도 불교가 존재론이다 인식론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에 대해서는 1587번 글에서 충분하게 설명을 했지만 불교는 연기법 위에 있다.모든 것은 조건따라 발생하고 조건따라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론이다 인식론이다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정말 말하고 싶다면 불교는 연기법이다. 라고 말하면 된다.


존재론이든 인식론이든 절대적인 자아를 상정해야만 이러한 이론이 성립이 된다. 존재론이라면 절대적인 실재하는 자아가 있어야 하고 인식론이라면 인식을 하는 절대적인 자아가 필요하디. 따라서 존재론이든 인식론이든 이런 논리는 유신견(有身見)에 바탕을 둔 외도의 주장일 뿐이다. 도대체 누가 존재하며 누가 인식을 하는가? 그런 이야기를 할려면 고정된 존재를 상정해야 한다. 하지만 불교는 항상하고 고정된 존재는 없다고 한다. 무아를 주장하는 것이다. 무아의 불교에서 인식론이든 존재론이든 그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것이다.


불교의 몇가지 교리들을 꼭 알아두자. 그래야 개념을 세우고 불교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다.


상온(想蘊, sannā-kkhandha) - 인식의 무더기

인식으로 번역되는 산냐(sannā)는 saṃ(함께)+√jnā(알다)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어원적으로 보면 ‘함께 아는 것’이라는 뜻이다. 개념적인 지각이나 파악을 뜻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다시 말해서 대상을 받아들여 개념작용을 일으키고 이름 붙이는 마음의 작용이다. 예를 들어 여기에 꽃이 있다면 그것을 그냥 꽃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또는 어린이가 “이 분은 너의 아버지이고 이 분은 너의 어머니이다.”라는 말을 들으면 ‘아빠’, ‘엄마’라고 머릿속에 기억하고, 비행기를 보면 이것은 비행기이고 이것들은 날개이고 이것은 동체 등이라고 인식하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산냐가 없으면 우리는 자신의 이름, 부모, 가족, 집 등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모든 마음에 공통되는 7가지 마음의 작용(sabbacittasādhāraṇa-cetasika) 중의 하나에 속하고 있다. 그리고 외적인 대상의 지향에 따라, 형상에 대한 인식, 소리에 대한 인식, 냄새에 대한 인식, 맛에 대한 인식, 감촉에 대한 인식, 마음의 대상에 대한 인식의 6가지로 구분된다. 즉 느낌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인식도 감각의 육문(六門)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다. 중국에서 상(想)이라 번역했다.


초기불교에서의 마음이란 용어

초기불교에서는 ‘마음’이라 번역되는 찟따(citta)와 ‘식(識)’이라 번역되는 윈냐나(vinnāṇa)를 동의어로 간주하며 사실상 아무런 구분 없이 쓰고 있다. 굳이 구분한다면 찟따(citta)는 마음이나 식 등을 뜻하는 가장 보편적인 의미로 쓰고, 윈냐나는 6개 감각기관(六根, indriya)과 6개 감각대상(六境, visaya)이 있는 곳에서 따라 일어나는 아는 마음이라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 아비담마에서 표현되는 우리의 마음과 마음의 작용에 관련된 용어를 간단히 정리해본다.

 

(1) 찟따(citta)는 √cit(생각하다)에서 온 술어로 경에서는 주로 우리의 생각이나 사고 일반을 나타내는 술어로 나타난다. 그리고 아비담마에 의하면 이 찟따는 마노(mano)와 윈냐나(vinnāṇa)를 다 아우르는 개념으로 쓰인다. 한역은 심(心)이라 했다.

 

(2) 마노(mano)는 √man(생각하다)에서 온 술어로 오직 우리의 생각을 관장하는 감각기능(根, indriya)이거나 감각장소(處, āyatana)의 개념으로서만 등장한다. 한역은 의(意)라 한다.

 

(3) 윈냐나(vinnāṇa)는 vi(분리하여)+√jnāṇa(알다)로 분해되는 술어로 여섯 감각기능(六根, indriya) 혹은 여섯 감각장소(六處, āyatana)가 그 각각의 감각대상(六境, visaya)과 부딪칠 때 일어난, 아는 마음이다. 그래서 윈냐나는 모두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6가지가 있다. 한역은 식(識)이라 한다.

 

(4) 쩨따시카(cetasika)는 마음(citta)과 함께 결합되어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이며 전체 인식 행위에 있어서 마음이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돕는 것이다. 마음의 작용은 마음이 없으면 일어나지 못하며 마음도 마음의 작용과 완전히 분리되어서 단독으로 일어날 수 없다. 역할로 보면 이 둘이 상호 의존적이지만 마음을 근본적인 것이라고 간주한다. 마음의 작용은 마음에 의지하여 대상을 인식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한역은 심소(心所)라 한다.

 

(5) 나마(nāma)는 문자적으로 ‘이름’을 뜻하는 말이지만 오온에서 물질(色)을 제외한 느낌(受), 표상(想), 행(行), 식(識)의 4가지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즉 정신을 지칭한다. 한역은 명(名)이라 한다.

 

이렇게 찟따와 마노는 엄밀히 따지면 그 사용처가 분명 다르긴 하지만, 후대 주석서들과 아비담마에서는 찟따, 마노, 윈냐나를 같은 것이라 정의하고 있다.(Dhs.10; Vbh.87 등) 그래서 전체적으로 볼 때 찟따는 마노와 윈냐나를 포함한 마음 일반을 나타내는 용어라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우선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감각장소(處, āyatana)와 감각기능(根, indriya)과 문(門, dvāra)이다. 중생은 매 찰나 대상과의 연기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데, 이 가운데 물질적인 대상과의 관계는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을 통해서 하게 된다. 그러므로 눈, 귀, 코, 혀, 몸은 각각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이라는 대상을 만나는 문이 된다. 그리고 이처럼 서로 대(對)가 되어 만남이 일어나는 곳을 감각장소(處, āyatana)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장소는 눈에 보이는 기능이 있고 귀에 듣는 기능이 있듯이 각각에 고유한 기능 혹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감각기능(根, indriya)이라고 한다. 그래서 설법하는 상황에 따라서, 예를 들면 눈의 문(眼門, cakkhu-dvāra)이라고도 하고 눈의 감각장소(眼處, cakkhu-āyatana)라고도 하고, 눈의 감각기능(眼根, cakkhu-indriya)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정신적인 영역을 관장하는 문/감각장소/감각기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을 마음(意, mano)이라고 명명한다. 


그래서 설법하는 문맥에 따라 마음의 문(意門, mano-dvāra)이라고도 하고, 마음의 감각장소(意處, mano-āyatana)라고도 하고, 마음의 감각기능(意根, mano-indriya)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대상이 되는 정신적인 영역을 법(法, dhamma)이라고 부른다.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의 대상인 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미세한 물질, 마음의 작용, 열반을 들고 있다.


7가지 마음작용

아비담마에 따르면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7가지 마음의 작용들이 있어야 한다. 이를 모든 마음에 공통되는 마음의 작용(sabbacittasādhāraṇa-cetasika)이라고 한다.

 

(1) 감각접촉(觸, phassa)

(2) 느낌(受, vedanā)

(3) 인식(想, sannā)

(4) 의도(思, cetanā)

(5) 집중(心一境, ekaggatā)

(6) 생명기능(命根, jīvitindriya)

(7) 주의 기울임(作意, manasikāra)

 

이러한 7가지 마음의 작용들은 마음이 일어나는 그 순간에 반드시 같이 일어난다. 첫째,마음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감각접촉이 같이 일어난다.

 

이 감각접촉의 기능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과 맞닥뜨릴 수 없다. 둘째,느낌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을 경험할 수 없다. 셋째, 인식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을 인식할 수 없다. 넷째, 의도가 없다면 마음은 대상을 알려는 어떤 행위도 행할 수가 없다. 다섯째,집중이 없으면 그 대상에 마음을 고정시키지 못한다. 여섯째,생명기능 즉 생명이 없으면 마음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일곱째,주의 기울임이 없으면 마음은 역시 대상을 알아차릴 수 없다. 그래서 ‘아는’ 기능뿐인 마음은 이러한 7가지 마음의 작용들의 도움을 받아서 감각의 육문에 나타나는 ‘대상을 아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불교를 철학적으로 굳이 정의하자면 

서양의 철학들은 존재론이니 인식론이니 하면서 왔다갔다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서 존재론이니 인식론이니 하는 것은 존재의 구조적 측면에서 파고 드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에서 굳이 철학적 제목을 붙이지만

[불교의 심리학]이라고 해야한다. 마음이라는 그 본질을 규명하고 마음작용을 규명하는 것이지 이것이 존재론이니 인식론이니 하면서 존재를 어디에 갔다 붙이느냐하는 것과는 거리가 한참 떨어져 있다. 


마음이란 심리학적 측면에서 보면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의도적" 행위이다. 이것이 업을 쌓고 윤회를 하게 합니다. 모든 선과 악의 갈림길을 만드는 것 또한 의도된 행위이다. 그래서 법구경 1번 게송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여! 세상은 마음(생각)에 의해 인도(引導)되고, 마음이 세상을 이끌고 있으며, 모든 것이 마음이란 한 가지 법(法)의 지배하에 있느니라. (Manopubbangama dhamma manosettha manomaya...)"


그 어느 귀절에 sanna 라는 단어가 나오는가? 세상은 인식에 의해서 인도되고 인식이 세상을 이끌며...라고 되어 있나? 절대로 아니다.  인식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mano 와 sanna 가 어떻게 다른지조차 모르면서 인식을 이야기하면서 옮겨온 경전이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옮겨오는 이 엉터리같은 작자를 어떻게 해야할까? 


결론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기서 복잡한 아비담마적 설명을 길게 펼칠 이유는 없을 듯 하다. 12연기를 보년 촉(삼사화합)- 느낌 - 갈애 - 취착... 순이다. 즉 조건에 의하여 인식하고 그 대상에 대해서 번뇌를 일으킨다. 그 인식기관을 갖고 있는 존재는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온은 색수상행식이 중연화합하여 뭉쳐있는 것이다. 저것이 된장인지 밥인지는 개도 돼지도 안다. 아라한도 범부도 안다. 즉 인식한다. 하지만 인식된 대상에 대해서 마음작용이 세상을 만들고 마음따라 세상이 움직이는 것이지 인식따라 세상을 만들고 인식따라 세상이 움직이지 않는다.


불교에서 마음공부를 강조하는 것은 인식한 실체를 똑바로 꿰뚫어 알아차려서 그 실상인 무상함을 알아 그 대상에 대해서 번뇌를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