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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의 모음 - 13. 꾸시나라 품(Kusināra-vagga. AN3.124-133)

실론섬 2014. 6. 16. 00:59

제13장 꾸시나라 품 Kusināra-vagga(AN3.124-133)

 

kusinārasuttaṃ (AN 3.124-꾸시나라 경)

124. 한 때에 세존께서는 꾸시나라에서 발리하라나 숲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가 어떤 마을이나 성읍을 의지하여 머문다. 그에게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찾아와서 다음날 공양을 올리겠다고 초청을 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원할 때, 받아들인다. 그는 그 밤이 지나난 뒤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그 장자나 장자의 아들의 집으로 간다. 가서는 지정된 자리에 앉는다. 그에게 장자나 장자의 아들은 맛있고 먹기 좋은 음식을 직접 손으로 만족하게 하고, 받아들이게 한다. 그에게 ‘나에게 이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맛있고 먹기 좋은 음식을 직접 손으로 만족하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니 참으로 좋다.’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나중에도 나에게 이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이런 맛있고 먹기 좋은 음식을 직접 손으로 만족하고, 받아들이게 하기를!'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는 욕심내고 마음이 집착하고 음식에 묶여서 위험을 보지 못하고 벗어남을 위한 지혜가 없는 자로서 그 탁발 음식을 먹는다. 거기서 그에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떠오르고, 분노의 생각이 떠오르고, 해코지의 생각이 떠오른다. 비구들이여, 이런 비구에게 보시한 것은 큰 결실이 없다고 나는 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방일하게 머문다.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가 어떤 마을이나 성읍을 의지하여 머문다. 그에게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찾아와서 다음날 공양을 올리겠다고 초청을 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원할 때, 받아들인다. 그는 그 밤이 지나난 뒤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그 장자나 장자의 아들의 집으로 간다. 가서는 지정된 자리에 앉는다. 그에게 장자나 장자의 아들은 맛있고 먹기 좋은 음식을 직접 손으로 만족하게 하고, 받아들이게 한다. 그에게 ‘나에게 이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맛있고 먹기 좋은 음식을 직접 손으로 만족하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니 참으로 좋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중에도 나에게 이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이런 맛있고 먹기 좋은 음식을 직접 손으로 만족하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기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는 욕심내지 않고 마음이 집착하지 않고 음식에 묶이지 않아서 위험을 보고 벗어남을 위한 지혜를 가진 자로서 그 탁발 음식을 먹는다. 거기서 그에게 출리의 생각이 떠오르고, 분노하지 않는 생각이 떠오르고, 해코지하지 않음의 생각이 떠오른다. 비구들이여, 이런 비구에게 보시한 것은 큰 결실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불방일(不放逸)로 머문다.”

 

bhaṇḍanasuttaṃ (AN 3.125-다툼 경)

125. “비구들이여, 어떤 방향에서 비구들이 다툼을 일으키고, 논쟁을 일으키고, 갈등을 빚고, 서로 간에 입의 칼로 찌르며 머문다. 그곳에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방향을 사고하는 것도 나에게는 불편이 있다. 여기에 대해 나는 ‘참으로 그 존자들은 세 가지 법을 버렸고, 세 가지 법을 많이 행했다. 어떤 세 가지 법을 버렸는가? 출리에 대한 사유와 성냄 없음에 대한 사유와 해코지 않음에 대한 사유이다. 그들은 이러한 세 가지 법을 버렸다. 그리고 어떤 세 가지 법을 많이 행했는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사유와 성냄에 대한 사유와 해코지에 대한 사유이다. 그들은 이러한 세 가지 법을 많이 행했다.' 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비구들이여, 어떤 방향에서 비구들이 다툼을 일으키고, 논쟁을 일으키고, 갈등을 빚고, 서로 간에 입의 칼로 찌르며 머문다. 그곳에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방향을 사고하는 것도 나에게는 불편이 있다. 여기에 대해 나는 '참으로 그 비구들은 이런 세 가지 법을 버렸고, 이런 세 가지 법을 많이 행했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비구들이여, 어떤 방향에서 비구들이 단합하고, 뜻이 맞고, 논쟁에 빠지지 않고, 우유와 물이 섞인 것 같고, 서로 간에 우정어린 눈으로 보면서 머문다. 그곳에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방향으로 사고하는 것도 나에게는 불편이 없다. 여기에 대해서 나는 ‘참으로 그 존자들은 세 가지 법을 버렸고, 세 가지 법을 많이 행했다. 어떤 세 가지 법을 버렸는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사유와 성냄에 대한 사유와, 해코지에 대한 사유이다. 이런 세 가지 법을 버렸다. 그리고 어떤 세 가지 법을 많이 행했는가? 출리에 대한 사유와 분노하지 않음에 대한 사유와 해코지 않음에 대한 사유이다. 이런 세 가지 법을 많이 행했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비구들이여, 어떤 방향에서 비구들이 단합하고, 뜻이 맞고, 논쟁에 빠지지 않고, 우유와 물이 섞인 것 같고, 서로 간에 우정어린 눈으로 보면서 머문다. 그곳에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방향으로 사고하는 것도 나에게는 불편이 없다. 여기에 대해서 나는 ‘참으로 그 존자들은 세 가지 법을 버렸고, 세 가지 법을 많이 행했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gotamakacetiyasuttaṃ (AN 3.126-고따마까 탑 경)

126. 한 때에 세존께서는 웨살리에서 고따마까 탑묘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나는 완전한 지혜로 모든 법을 안 뒤에 법을 설한다. 완전한 지혜로 알지 못하고 설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나는 인연(원인)과 함께 법을 설한다. 인연없이 법을 설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나는 가르침의 기적을 갖추어 법을 설한다. 가르침의 기적을 갖추지 않고 법을 설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완전한 지혜로 모든 법을 알지 못하면서 법을 설한 것이 아니 완전한 지혜로 모든 법을 알면서 법을 설하고, 인연없이 법을 설한 것이 아니라 인연과 함께 법을 설하고, 가르침의 기적을 갖추지 않고 법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의 기적을 갖추어 법을 설한 나의 이런 법은 권장되해야 하고, 가르침의 근본으로 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만족해도 좋고, 기뻐해도 좋고, 즐거워해도 좋다. '세존은 정등각이고,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으며, 승가는 잘 법을 닦는다.라고.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비구들은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 이 상세한 설명[授記]이 설해졌을 때 1000의 세계가 진동했다."

 

bharaṇḍukālāmasuttaṃ (AN 3.127-바란두 깔라마 경)

127. 한 때에 세존께서는 꼬살라에서 유행을 하시다가 까삘라왓투에 도착하셨다. 삭까 사람 마하나마는 "참으로 세존께서 까삘라왓투에 도착하셨다."라고 들었다. 삭까 사람 마하나마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되에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선 삭까 사람 마하나마에게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마하나마여, 가서 오늘 밤 우리가 머물 적당한 거처를 알아 보라.”라고.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삭까 사람 마하나마는 세존께 대답한 뒤 까삘라왓투에 들어가서 까삘라왓투의 거의 전부를 돌아다녔지만 까삘라왓투에서 세존께서 하룻밤 머물 적당한 거처를 찾지 못했다. 그러자 삭까 사람 마하나마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까삘라왓투에 세존께서 하룻밤을 머물 적당한 거처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바란두 깔라마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전에 세존과 함께 범행을 닦았던 자입니다. 세존께서는 오늘 그의 거처에서 하룻밤을 머무십시오.”라고.

“마하나마여, 그러면 그곳에 가서 자리를 만들어라.”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삭까 사람 마하나마는 세존께 대답한 뒤 바란두 깔라마의 거처로 갔다. 가서는 자리를 만들고 발 씻을 물을 마련한 뒤 세존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자리를 펴고 발 씻을 물을 마련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제 적당한 시간을 생각하십시오."라고.

 

세존께서는 바란두 깔라마의 거처(은둔처)로 가셨다. 가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앉아서는 발을 씻으셨다. 그떼 삭까 사람 마하나마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은 더이상 세존을 섬기기에 적당한 시간이 아니다. 세존께서는 피곤하시다. 이제 나는 내일 세존께 다시 시중을 들어야겠다.’라고. 

삭까 사람은 마하나마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공경의 의미로 오른쪽으로 돌아 물러갔다.

 

삭까 사람 마하나마는 그 밤이 지나자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삭까 사람 마하나마에게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마하나마여, 세상에는 이런 세 부류의 스승이 있다. 무엇이 셋인가?

여기, 마하나마여, 어떤 스승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천명하지만, 물질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천명하지 못하고, 느낌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천명하지 못한다. 

여기, 마하나마여, 어떤 스승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천명하고, 물질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천명하지만, 느낌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천명하지 못한다. 

여기, 마하나마여, 어떤 스승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천명하고, 물질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천명하고, 느낌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천명한다. 

마하나마여, 세상에는 이런 세 부류의 스승이 있다. 마하나마여, 이런 세 부류의 스승들에게 궁극적인 경지는 같은가 아니면 궁극적인 경지는 제각각인가?”

 

이렇게 말씀하시자 바란두 깔라마는 삭까 사람 마하나마에게 “마하나마여, 같다고 말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자 세존께서는 삭까 사람 마하나마에게 “마하나마여, 다르다고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두 번째도 바란두 깔라마는 삭까족 마하나마에게 “마하나마여, 같다고 말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두 번째도 세존께서는 삭까 사람 마하나마에게 “마하나마여, 다르다고 말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세 번째도 바란두 깔라마는 삭까 사람 마하나마에게 “마하나마여, 같다고 말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세 번째도 세존께서는 삭까 사람 마하나마에게 “마하나마여, 다르다고 말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바란두 깔라마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참으로 큰 힘을 가진 삭까 사람 마하나마의 면전에서 사문 고따마는 세 번이나 나를 업신여겼다. 나는 까삘라왓투를 떠나야겠다.’라고. 

그리고 바란두 깔라마는 까삘라왓투를 떠났다. 그렇게 까삘라왓투를 떠난 그는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hatthakasuttaṃ (AN 3.128-핫타까 경)

128.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카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신의 아들 핫타까가 밤이 아주 깊었을 때 아름다운모습으로 제따 숲을 거의 전부를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나는 세존의 앞에 설 것이다.’라면서도 단지 땅 속으로 가라앉고 스며들어서 서 있을 수 없었다. 예를 들면, 버터와 기름을 모래에 부으면 단지 모래 속으로 가라앉고 스며들어서 서 있을 수 없다. 이처럼 신의 아들 핫타까는 ‘나는 세존의 앞에 설 것이다.’라면서도 단지 가라앉고 스며들어서 바로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신의 아들 핫타까에게 “핫타까여, 그대의 거친 몸을 만들어라.”라고 말씀하셨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신의 아들 핫타까는 세존께 대답한 뒤 자신의 거친 몸을 만든 뒤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선 신의 아들 핫타까에게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핫타까여, 그대가 인간이었을 때에 그대에게 나타났던 그 법들이 지금도 나타나는가?”

“세존이시여, 제가 인간이었을 때에 제게 나타났던 그 법들이 지금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었을 때에 제게 나타나지 않았던 법들도 지금 제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지금 비구들과 비구니들과 청신사들과 청신녀들과 왕들과 대신들과 외도들과 외도의 제자들에 둘러싸여서 머무시는 것처럼 저도 신의 아들들에 둘러싸여서 지냅니다. 세존이시여, 신의 아들들은 멀리서도 ‘신의 아들 핫타까의 곁에서 법을 들으리라.’고 하면서 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 가지 법을 충족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무엇이 셋입니까?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을 친견하는 것을 충족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정법을 듣는 것을 충족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승가를 시중드는 것을 충족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러한 세 가지 법을 충족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저는 세존을 친견하기, 정법을 듣기, 승가를 섬기기에서

언제라도 충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세 가지 법을 충족하지 못한 핫타까는 무번천(無煩天, Avihā)에 태어났습니다."

 

kaṭuviyasuttaṃ (AN 3.129-더러움 경)

129. 한 때에 세존께서는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미가디야(사슴동산)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시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탁발을 위해서 바라나시로 들어가셨다. 세존께서는 고요가삘락카에서 헛된 것에서 선의 행복은 없고 밖의 감각적 쾌락의 행복에 빠져서 마음챙김을 놓아 버리고 바른 앎이 없고 삼매를 닦지 않고 마음이 산란하고 감각기능이 단속되지 않은 어떤 비구가 탁발을 위해 돌아다니는 것을 보셨다. 보고서 그 비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여, 비구여. 그대는 자신을 더럽히는 행위를 하지 말라, 참으로, 비구여, 자신을 더럽히는 그 행위에서 해충에 뒤덮인 지독한 냄새가 흘러나올 때 파리가 달려들지 않고 몰려들지 않을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라고.

 

그리고 세존께서는 바라나시에서 탁발을 하여 공양을 마치시고 탁발에서 돌아온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여기,비구들이여, 나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탁발을 위해서 바라나시로 들어갔다. 나는 고요가삘락카에서 선의 행복은 없고 밖의 감각적 쾌락의 행복에 빠져서 마음 챙김을 놓아버리고 바른 앎이 없고 삼매를 닦지 않고 마음이 산란하고 감각기능이 단속되지 않은 어떤 비구가 탁발을 위해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보고서 그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비구여, 그대는 자신을 더럽히는 행위를 하지 말라. 참으로 비구여, 자신을 더럽히는 그 행위에서 해충에 뒤덮인 지독한 냄새가 흘러나올 때 파리가 달려들지 않고 몰려들지 않을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라고. 그러자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나의 가르침으로 경각심을 일으켰다.”라고.

이렇게 말씀하시자 어떤 비구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더러움이고, 무엇이 지독한 냄새고, 무엇이 파리입니까?”라고.

“비구여, 간탐이 더러움이고, 성냄이 지독한 냄새고, 악한 불선의 사유가 파리이다. 참으로 비구여, 자신을 그 행위에서 해충에 뒤덮인 지독한 냄새가 흘러나올 때 파리가 달려들지 않고 몰려들지 않을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눈과 귀에서 보호하지 않고, 감각기능들을 단속하지 않을 때 

탐욕을 의지하는 악한 사유라는 파리가 달려들 것이다.

 

더러운 행위를 하고 지독한 냄새가 흘러 나오는 비구는

괴로움이 함께하고 열반에서 멀다.

 

집에서든 숲에서든 어리석고 현명하지 못한 자는

자신의 마음의 고요함을 얻지 못하고 파리들만 앞세운다.

 

그러나 계를 갖추고 지혜와 고요함을 좋아하는 자  

고요한 자는 파리를 없애고 행복하게 잠잔다.'

 

paṭhamānuruddhasuttaṃ (AN 3.130-아누룻다 경1)

130. 그 무렵 아누룻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누룻다 존자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여기, 세존이시여, 저는 인간을 넘어선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天眼]으로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나는 여인을 봅니다. 세존이시여, 몇 가지 법들을 갖춘 여인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납니까?”

“아누룻다여, 세 가지 법을 갖춘 여인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어떤 세 가지인가? 여기, 아누룻다여, 여인은 오전에는 인색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집에 머문다. 낮에는 질투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집에 머문다. 저녁에는 탐욕에 오염된 마음으로 집에 머문다. 아누룻다여, 이런 세 가지 법을 가진 여인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dutiyānuruddhasuttaṃ (AN 3.131-아누룻다 경2)

그 무렵 아누룻다 존자가 사리뿟따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누룻다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다.

 

“여기, 도반 사리뿟따여, 나는 인간을 넘어선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天眼]으로 천의 세계를 살펴봅니다. 또한 나에게 정진은 확고하여 게으르지 않았고, 준비된 마음 챙김은 잊히지 않았고, 몸은 편안하여 동요가 없었고, 삼매를 닦는 마음은 고요해졌습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집착하지 않음을 원인으로 번뇌에서 해탈하지는 못했습니다.”라고.
“도반 아누룻다여, 그대가 ‘나는 인간을 넘어선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천의 세계를 살펴본다.'라는 것은 그대의 그대의 자만(māna)에 대한 것입니다. 또한, 도반 아누룻다여, 그대가 ‘나에게 정진은 확고하여 게으르지 않았고, 준비된 마음 챙김은 잊히지 않았고, 몸은 편안하여 동요가 없었고, 삼매를 닦는 마음은 고요해졌다.’라는 것은 그대의 들뜸(uddhacca)에 대한 것입니다. 다시,도반 아누룻다여, 그대가 ‘나의 마음은 집착하지 않음을 원인으로 번뇌에서 해탈하지는 못하였다.'라는 것은 그대의 후회(Kukkucca)에 대한 것입니다. 참으로 아누룻다 존자는 이 세 가지 법을 버리고, 이 세 가지 법을 사고하지 말고,  불사(不死. 열반)의 계(界)로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누룻다 존자는 나중에 이 세 가지 법을 버리고, 이 세 가지 법을 사고하지 않고, 불사(不死)의 계(경지)로 마음을 집중하였다. 그리고 혼자 은둔하여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로써 머문 아누룻다 존자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인 위없는 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완전한 지혜로 알았다. 아누룻다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paṭicchannasuttaṃ (AN 3.132-숨겨짐 경)

132. “비구들이여, 세 가지는 비밀리에 행한다. 드러내지 않는다. 무엇이 셋인가?

비구들이여, 여인은 비밀리에 행한다. 드러내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바라문들의 주문(만뜨라)은 비밀리에 행한다. 드러내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삿된 견해는 비밀리에 행한다. 드러내지 않는다. 

이러한, 비구들이여, 세 가지는 비밀리에 행한다. 드러내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세 가지는 사방으로 드러내어 비춘다. 숨기지 않는다. 무엇이 셋인가?

비구들이여, 둥근 달은 사방으로 드러내어 비춘다. 숨기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둥근 태양은 사방으로 드러내어 비춘다. 숨기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여래가 설한 법과 율은 사방으로 드러내어 비춘다. 숨기지 않는다.

이러한, 비구들이여, 세 가지는 사방으로 드러내어 비춘다. 숨기지 않는다.”

 

lekhasuttaṃ (AN 3.133-글씨 경)

133.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런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어떤 세 가지인가?

돌에 새긴 글씨에 비유되는 사람, 땅에 쓴 글씨에 비유되는 사람, 물에 쓴 글씨에 비유되는 사람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누가 돌에 새긴 글씨에 비유되는 비유되는 사람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자주 화를 낸다. 그 화는 오랫동안 잠재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돌에 새긴 글씨는 바람이나 물에 의해 빠르게 지워지지 않고, 오래 유지된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자주 화를 낸다. 그 화는 오랫동안 잠재한다. 이 사람이, 비구들이여, 돌에 새긴 글씨에 비유되는 사람이라고 불린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누가 땅에 쓴 글씨에 비유되는 사람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자주 화를 낸다. 그 화는 오랫동안 잠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땅에 쓴 글씨는 바람이나 물에 의해서 빠르게 지워지고,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자주 화를 낸다. 그 화는 오랫동안 잠재하지 않는다. 이 사람이, 비구들이여, 땅에 쓴 글씨에 비유되는 사람이라고 불린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누가 물에 쓴 글씨에 비유되는 사람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격한 말을 듣고, 거친 말을 듣고, 마음에 들지 않은 말을 들으면서도 단지 화합하고 어울리고 호응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물에 쓴 글씨는 빠르게 지워지고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격한 말을 듣고, 거친 말을 듣고, 마음에 들지 않은 말을 들으면서도 단지 화합하고 어울리고 호응한다. 이 사람이, 비구들이여, 물 에 쓴 글씨에 비유되는 사람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런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꾸시나라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