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상윳따 니까야

제41상윳따 - 찟따 상윳따(SN41:1-SN41:10. Citta-saṁyutta)

실론섬 2014. 6. 21. 12:40

제41주제(S41) 찟따 상윳따

Citta-saṁyutta

 

saṃyojanasuttaṃ (SN 41.1-족쇄 경)

343. 한 때에 많은 장로 비구들이 맛치까산다의 망고 숲에 머물고 있었다. 그 무렵 많은 장로 비구들은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서 원형천막에 함께 모여 앉아 이런 대화를 하고 있었다.

“도반들이여, 족쇄라거나 족쇄에 묶이는 법이라는 이런 법들은 의미도 다르고 표현도 다릅니까 아니면 의미는 하나인데 표현만 다릅니까?”라고.

거기서 어떤 장로 비구는 이렇게 설명했다.

“도반들이여, 족쇄라거나 족쇄에 묶이는 법이라는 이런 법들은 의미도 다르고 표현도 다릅니다."라고.

다른 장로 비구는 이렇게 설명했다.

“도반들이여, 족쇄라거나 족쇄에 묶이는 법이라는 이런 법들은 의미는 하나인데 표현만 다릅니다.”라고.

 

*찟따 장자(Citta gahapati)는 마가다에 있는 맛치가산다라는 도시의 상이었다. 그가 태어나는 날 여러 가지 꽃비가 흩날렸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 한다. 그는 다섯 비구 가운데 한 분인 마하나마 장로를 친견하고 자신의 망고 숲에 승원을 짓고 머물게 하였으며 마하나마 장로로부터 법을 듣고 불환과를 얻었다. 그 후 많은 비구들이 망고 숲을 방문하여 그의 환대를 받았다.(AA.i.385-386)  
「앙굿따라 니까야」 「하나의 모음」에서 세존께서는 찟따 장자를 "법을 설하는 재가자들 가운데서 으뜸"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한편 찟따 장자가 어떤 일 때문에 미가빠타까에 도착했다. 그리고 오후에 탁발에서 돌아 온 많은 장로 비구들이 원형천막에 함께 모여 앉아 이런 대화를 하고 있다고 찟따 장자는 들었다.

'도반들이여, 족쇄라거나 족쇄에 묶이는 법이라는 이런 법들은 의미도 다르고 표현도 다릅니까 아니면 의미는 하나인데 표현만 다릅니까?'라고. 거기서 어떤 장로 비구는 이렇게 설명했다. “도반들이여, 족쇄라거나 족쇄에 묶이는 법이라는 이런 법들은 의미도 다르고 표현도 다릅니다."라고. 다른 장로 비구는 이렇게 설명했다. “도반들이여, 족쇄라거나 족쇄에 묶이는 법이라는 이런 법들은 의미는 하나인데 표현만 다릅니다.”라고.

 

'*주석서에 의하면 미가빠타까(Migapathaka)는 망고 숲 뒤에 있는 찟따 장자 소유의 마을이라고 한다.(SA.iii.91)

 

그러자 찟따 장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장로 비구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찟따 장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들이시여,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오후에 탁발에서 돌아 온 많은 장로 비구들이 원형천막에 함께 모여 앉아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도반들이여, 족쇄라거나 족쇄에 묶이는 법이라는 이런 법들은 의미도 다르고 표현도 다릅니까 아니면 의미는 하나인데 표현만 다릅니까?'라고. 거기서 어떤 장로 비구는 이렇게 설명했다. “도반들이여, 족쇄라거나 족쇄에 묶이는 법이라는 이런 법들은 의미도 다르고 표현도 다릅니다."라고. 다른 장로 비구는 이렇게 설명했다. “도반들이여, 족쇄라거나 족쇄에 묶이는 법이라는 이런 법들은 의미는 하나인데 표현만 다릅니다.”라고.   

“그렇습니다, 장자여.”

 

“존자들이여, 족쇄라거나 족쇄에 묶이는 법이라는 이런 법들은 의미도 다르고 표현도 다릅니다. 그와 관련해서 제가 존자들에게 비유를 말하겠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여기서 어떤 현명한 사람들은 제가 하려는 말의 뜻을 잘 이해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존자들이시여, 검은 황소와 흰 황소가 하나의 줄이나 매듭에 의해 묶여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검은 황소는 흰 황소의 족쇄고, 흰 황소는 검은 황소의 족쇄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말하고 있는 그사람은  바르게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장자여. 장자여, 검은 황소는 흰 황소의 족쇄가 아니고, 흰 황소는 검은 황소의 족쇄가 아닙니다. 하나의 줄이나 매듭에 의한 묶임 그것이 거기서 족쇄입니다.”

“이처럼, 존자들이시여, 눈이 형색들에게 족쇄가 아니고, 형색들이 눈에게 족쇄가 아닙니다. 이 둘을 연(緣)하여 일어나는 욕탐이 거기서 족쇄입니다. 귀가 소리들에게 ··· 코가 냄새들에게 ··· 혀가 맛들에게 ··· 몸이 감촉들에게 ··· 마음이 법(마음현상)들에게 족쇄가 아니고, 법들이 마음에게 족쇄가 아닙니다. 이 둘을 연하여 일어나는 욕탐이 거기서 족쇄입니다.”    

“장자여, 심오한 세존의 가르참에서 지혜의 눈(혜안.慧眼)을 얻었으니 그대에게 이득입니다. 장자여, 그대에게 큰 이득입니다.”

 

pathamaisidattasuttam (SN 41.2-이시닷따 경1)  

344. 한 때 많은 장로 비구들이 맛치까산다의 망고 숲에 머물고 있었다.그 무렵 찟따 장자가 장로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장로 비구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찟따 장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들이시여, 장로들께서는 내일 저의 공양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장로 비구들은 침묵으로 허락하였다. 그러자 찟따 장자는 장로 비구들이 허락한 것을 알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장로 비구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공경의 의미로 오른쪽으로 돌아 물러갔다. 장로 비구들은 그 밤이 지나자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찟따 장자의 거처로 갔다. 가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찟따 장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장로 비구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찟따 장자는 그 장로 존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로 존자들이시여, ‘요소(界)들의 다양함, 요소들의 다양함’이라고들 합니다. 도대체 어떤 것이 요소들의 다양함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까?”

 

이렇게 말했을 때 장로 존자들은 침묵했다.

두 번째도 ··· 세 번째도 찟따 장자는 장로 존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로 존자시여, ‘요소들의 다양함, 요소들의 다양함’이라고들 합니다. 도대체 어떤 것이 요소들의 다양함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까?”

세 번째에도 장로 존자들은 침묵했다.

 

그런데 그때 그 비구 승가에 가장 신참인 이시닷따 존자가 있었다. 이시닷따 존자가 장로 존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로 존자들이시여, 제가 찟따 장자의 이 질문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도반 이시닷따여, 찟따 장자의 이 질문에 그대가 설명하시오.”

“장자여, 그대는 ‘장로 존자들이시여, ‘요소들의 다양함, 요소들의 다양함’이라고들 합니다. 도대체 어떤 것이 요소들의 다양함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까?’라고 질문을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시닷따 존자시여.”

“장자여, 세존께서는 요소들의 다양함에 대해서 ‘눈의 요소, 형색의 요소, 눈의 의식의 요소, 귀의 요소, 소리의 요소, 귀의 의식의 요소, 혀의 요소, 맛의 요소, 혀의 의식의 요소, 몸의 요소, 감촉의 요소, 몸의 의식의 요소, 마노의 요소, 법의 요소, 마음의 의식의  요소’로 말씀하셨습니다.

장자여, 세존께서는 이렇게 요소들의 다양함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시닷따 존자(ayasma Isidatta)의 게송이 장로게(Thag.17)으로 전해 온다. 장로게 주석서(Thag A.i.248)에 의하면 찟따 장자는 그대 아직 재가자였으며 서로 만나 보지는 못한 도반이었던 이시닷따 청신사에게 불.법.승을 칭송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시닷따는 삼보에 청정한 믿음이 생겨서 마하깟짜나(Mahakaccana) 존자 문하에 출가를 하였으며, 오래지 않아서 육신통을 구족한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찟따 장자는 이시닷따 존자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장로 비구들에게 딱딱하고 부드러운 여러 맛난 음식들을 손수 대접하고 드시게 했다. 식사를 마치고 발우에서 손을 뗀 장로 비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갔다. 어떤 장로 존자가 이시닷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훌륭합니다, 도반 이시닷따여, 그대에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떠올랐습니다. 나에게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도반 이시닷따여, 다른 때에 이런 질문을 받게 되면 그대가 그것을 대답하시오.”라고 말했다.

 

dutiyaisidattasuttaṃ (SN 41.3-이시닷따 경2)

345. 한 때에 많은 장로 비구들이 맛치까산다의 망고 숲에 머물고 있었다.그 무렵 찟따 장자가 장로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장로 비구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찟따 장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들이시여, 장로들께서는 내일 저의 공양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장로 비구들은 침묵으로 허락하였다. 그러자 찟따 장자는 장로 비구들이 허락한 것을 알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장로 비구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공경의 의미로 오른쪽으로 돌아 물러갔다. 장로 비구들은 그 밤이 지나자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찟따 장자의 거처로 갔다. 가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찟따 장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장로 비구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찟따 장자는 그 장로 존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로 존자들이시여, 세상에 일어나는 ‘세상은 영원하다.’라거나,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라거나, ‘세상은 유한하다.’라거나, ‘세상은 무한하다.’라거나, ‘생명과 몸은 같은 것이다.’라거나, ‘생명과 몸은 다른 것이다.’라거나,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이런 다양한 견해 또는 「범망경」(D1)에서 말하는 62가지 편향된 견해들은, 존자들이시여, 무엇이 있을 때 일어나고, 무엇이 없을 때 일어나지 않습니까?”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장로 존자들은 침묵했다.

두 번째도 찟따 장자는 ··· 세 번째도 찟따 장자는 그 장로 존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로 존자들이시여, 이 세상에는 ‘세상은 영원하다.’라거나,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라거나, ‘세상은 유한하다.’라거나, ‘세상은 무한하다.’라거나, ‘생명과 몸은 같은 것이다.’라거나, ‘생명과 몸은 다른 것이다.’라거나,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생깁니다. 장로 존자시여, 이러한 견해 또는 「범망경」(D1)에서 말하는 62가지 편향된 견해들은, 존자들이시여, 무엇이 있을 때 일어나고, 무엇이 없을 때 일어나지 않습니까?”라고.

세 번째도 장로 존자들은 침묵했다.

 

그런데 그때 그 비구 승가에 가장 신참인 이시닷따 존자가 있었다. 이시닷따 존자가 장로 존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로 존자들이시여, 제가 찟따 장자의 이 질문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도반 이시닷따여, 찟따 장자의 이 질문에 그대가 설명하시오.”

“장자여, 그대는 ‘장로 존자들시여, 세상에 일어나는 ‘세상은 영원하다.’라거나,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라거나, ‘세상은 유한하다.’라거나, ‘세상은 무한하다.’라거나, ‘생명과 몸은 같은 것이다.’라거나, ‘생명과 몸은 다른 것이다.’라거나,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생깁니다. 장로 존자시여, 이러한 견해 또는 「범망경」(D1)에서 말하는 62가지 편향된 견해들은, 존자들이시여, 무엇이 있을 때 일어나고 무엇이 없을 때 일어나지 않습니까?” 라고 질문 하였습니까?"

“그렇습니다, 존자시여.”

“장자여, 이 세상에는 ‘세상은 영원하다.’라거나,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라거나, ‘세상은 유한하다.’라거나, ‘세상은 무한하다.’라거나, ‘생명과 몸은 같은 것이다.’라거나, ‘생명과 몸은 다른 것이다.’라거나,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이런 다양한 견해 또는 「범망경」(D1)에서 말하는 62가지 편향된 견해는, 장자여, 불변하는 자아를 주장하는 견해(유신견.有身見)가 있을 때 일어나고, 불변하는 자아를 주장하는 견해가 없을 때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존자이시여, 불변하는 자아를 주장하는 견해는 어떻게 해서 일어납니까?”

“장자여, 여기에 거룩한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룩한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가르침을 배우지 못한 무지한 범부가 있습니다. 그는 훌륭한 스승을 알아보지 못하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지 못해, 물질적 요소(色)를 나(我)로 간주한다거나, 나를 물질적 요소를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물질적 요소가, 혹은 물질적 요소에 내가 있다고 여깁니다. 감수작용(受.느낌) 나로 간주한다거나 ···  지각작용(想.인식)을 나로 간주한다거나 ··· 형성작용(行.형성)을 나로 간주한다거나 ··· 식별작용(識.의식)을 나로 간주한다거나, 나를 식별작용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식별작용이, 혹은 식별작용에 내가 있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장자여, 불변하는 자아를 주장하는 견해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존자이시여, 불변하는 자아를 주장하는 견해는 어떻게 해서 일어나지 않습니까?”

“장자여, 여기 거룩한 이를 알아보고 거룩한 가르침을 알며 거룩한 가르침을 배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훌륭한 스승을 알아보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알며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배워서, 물질적 요소를 나로 간주하지 않고, 나를 물질적 요소를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물질적 요소가, 혹은 물질적 요소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 감수작용을 나로 간주하지 않고··· 지각작용을 나로 간주하지 않고 ··· 형성작용을 나로 간주하지 않고 ··· 식별작용을 나로 간주하지 않고, 나를 식별작용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식별작용이, 혹은 식별작용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이렇게, 장자여, 불변하는 자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존자이시여, 이시닷따 존자시여, 이시닷따 존자께서는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장자여, 나는 아완띠에서 왔습니다.”

“존자이시여, 아완띠에는 이시닷따라는 좋은 가문의 아들이 있는데, 그를 아직 만나보질 못했지만 이미 출가했다고 합니다. 그 존자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장자여.”

“존자이시여, 그러면 지금 그 존자께서는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이렇게 말했을 때 이시닷따 존자는 침묵했다.

“존자이시여, 존자께서 바로 그 이시닷따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장자여.”

“존자이시여, 이시닷따 존자께서는 맛치까산다의 이 멋진 망고 숲에서 기쁘게 지내십시오. 저는 이시닷따 존자께 가사와 탁발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필요한 약품을 성심을 다해 공양하겠습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 장자여.”

 

찟따 장자는 이시닷따 존자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장로 비구들에게 딱딱하고 부드러운 여러 맛난 음식들을 손수 대접하고 드시게 했다. 식사를 마치고 발우에서 손을 뗀 장로 비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갔다. 어떤 장로 존자가 이시닷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훌륭합니다, 도반 이시닷따여, 그대에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떠올랐습니다. 나에게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도반 이시닷따여, 다른 때에 이런 질문을 받게 되면 그대가 그것을 대답하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시닷따 존자는 거처를 정돈한 뒤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맛치까산다를 떠났다. 그는 맛치까산다를 떠난 뒤 다시는 거기로 돌아오지 않았다.   

 

mahakapāṭihāriyasuttam (SN 41.4-마하까의 기적 경)  

346. 한 때에 많은 장로 비구들이 맛치까산다의 망고 숲에 머물고 있었다.그 무렵 찟따 장자가 장로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장로 비구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찟따 장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들이시여, 장로들께서는 내일 저의 공양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장로 비구들은 침묵으로 허락하였다. 그러자 찟따 장자는 장로 비구들이 허락한 것을 알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장로 비구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공경의 의미로 오른쪽으로 돌아 물러갔다. 장로 비구들은 그 밤이 지나자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찟따 장자의 거처로 갔다. 가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찟따 장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버터를 넣은 우유죽을 손수 대접하고 드시게 했다. 식사를 마치고 발우에서 손을 뗀 장로 비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갔다. 그러자 찟따 장자는 집안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모두 버리시오.’라고 말한 뒤 장로 비구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날은 찌는 듯한 더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 장로 비구들은 그 더위에다 음식까지 먹었기 때문에 마치 몸이 천근만근이나 되는 듯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 당시 마하까 존자가 그 장로들 가운데서 가장 어린 나이였다. 마하까 존자는 가장 연장인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로 존자시여, 시원한 바람이 불고 구름이 덮개처럼 드리우고 이따금 비가 내리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도반 마하까여, 그렇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불고 구름이 덮개처럼 드리우고 이따금 비가 내리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그러자 마하까 존자는 시원한 바람이 불고 구름이 덮개처럼 드리우고 이따금 비가 내리는 그러한 신통을 나투었다. 그것을 본 찟따 장자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것이 이 비구 승가 가운데서 가장 나이 어린 비구의 신통의 행이구나.’

마하까 존자는 숲에 도착하자 가장 연장인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로 존자시여, 이 정도 하면 되었습니까?”

“도반 마하까여, 그 정도 했으면 충분히 되었습니다. 도반 마하까여, 그 정도 신통을 나투었으면 충분합니다.”

 

승원으로 돌아 온 장로 비구들은 거처로 들어갔고 마하까 존자도 자신의 거처로 들어갔다. 그러자 찟따 장자는 마하까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마하까 존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찟따 장자는 마하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하까 존자시여, 마하까 존자께서는 제게 인간을 능가하는 신통변화를 보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장자여, 그렇다면 그대의 윗 옷을 마루 위에다 놓고 그 위에 풀 더미를 펴놓으십시오.”

“알겠습니다, 마하까 존자시여.”라고 찟따 장자는 대답한 뒤 윗 옷을 마루 위에다 놓고 그 위에 풀 더미를 펴놓았다.

마하까 존자는 거처로 들어가서 문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신통을 나투었는데 불이 열쇠구멍과 빗장 안으로부터 나와서 풀 더미를 태웠지만

윗 옷을 태우지는 않았다. 그러자 찟따 장자는 윗 옷을 챙긴 뒤 놀라서 털이 곤두선 채로 한 곁에 서 있었다. 마하까 존자는 거처로부터 나와서 찟따 장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자여, 이 정도 하면 되었습니까?”

“마하까 존자이시여, 그 정도 했으면 충분히 되었습니다. 마하까 존자시여, 그 정도 신통을 나투었으면 충분합니다. 존자이시여, 이시닷따 존자께서는 맛치까산다의 이 멋진 망고 숲에서 기쁘게 지내십시오. 저는 이시닷따 존자께 가사와 탁발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필요한 약품을 성심을 다해 공양하겠습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 장자여.”

그러나 마하까 존자는 거처를 정돈한 뒤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맛치까산다를 떠났다. 그는 맛치까산다를 떠난 뒤 다시는 거기로 돌아오지 않았다.   

 

paṭhamakāmabhūsuttaṃ (SN 41.5-까마부 경1)

347. 한 때에 까마부 존자는 맛치까산다의 망고 숲에 머물고 있었다. 그 무렵 찟따 장자가 까마부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까마부 존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찟따 장자에게 까마부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장자여, 이런 말이 있습니다.

 

‘흠집 없는 바퀴와 흰 차양을 덮었고 바퀴 살이 하나인 마차가 구른다.

흐름을 끊었고 묶이지 않고 괴로움 없이 오는 자를 보라.’라고.

 

*본 게송은 「쿳다까 니까야」의 「자설경」에서 아라한인 라꾼따까 밧디야(Lakuntaka Bhaddiya)존자에 관해서 설하신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게송에 나타나는 모든 술어는 문자적으로는 마차에 해당하지만 비유적으로는 아라한에 해당한다. 자세한 설명은 「자설경 주석서」(UdA.370-371)에 나타나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흠집(ela)이란 결점(dosa)을 뜻한다. 결점이 없는 것이 '흠짐 없음(nela)이다. 마차는 '흠집 없는 바퀴(nelanga)'에 비유되는데 마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그것의 바튀가 흠집이 없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아라한과의 계(sila)를 뜻한다. '차양(pachada)'은 마차 위에 펼쳐진 양털 옷감인데 '흰 차양(seta-pachada)'은 지극히 청정한 아라한과의 해탈을 뜻한다. '괴로움(근심) 없음(anigha)'이란 번뇌의 동요가 없음을 뜻하는데 그 마차는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다. '흐름을 끊음(chinna-sota)'이라고 한 것은, 보통 마차는 굴대와 바퀴통에 계속해서 기름이 흐르지만 이 마차는 36가지 갈애의 흐름이 완전히 제거되었기 때문에 그런 흐름이 끊어진 것이다. '묶이지 않음(속박 없음)(abandhana)'이라는 것은, 보통의 마차는 차축 등에 의해서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많은 묶음들을 가지고 있지만 이 마차에는 모든묶임들 즉 족쇄(samyojana)들이 완전히 제거되었다. 그래서 묶이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장자여, 이렇게 간략하게 말씀하신 상세한 의미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존자이시여, 이 말씀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장자여.”

“그렇다면 존자이시여, 제가 의미를 숙고할 수 있도록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그리고 찟따 장자는 잠시 침묵한 뒤 까마부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이시여, '흠집이 없다'라는 것은 계행을 두고 한 말입니다. 존자이시여, '흰 차양을 덮었다'라는 것은 해탈을 두고 한 말입니다. 존자이시여, '바퀴살이 하나'라는 것은 마음 챙김을 두고 한 말입니다. 존자이시여, '구른다'라는 것은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존자이시여, '마차'라는 것은 네 가지 근본물질을[四大]로 이루어졌으며, 부모에게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집적된 것이고,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고 영원하지 않고 달라지기 마련인 이 몸을 두고 한 말입니다.

 

존자이시여, 탐욕은 괴로움이고, 성냄은 괴로움이고, 어리석음은 괴로움입니다. 번뇌 다한 비구에게 이것들을 제거되고 뿌리 뽑히고 윗부분이 짤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번뇌 다한 비구가 '괴로움이 없는 자'라고 불립니다. 존자이시여, '오는 자'라는 것은 아라한을 두고 한 말입니다. 존자이시여, '흐름'이라는 것은 갈애를 두고 한 말입니다. 번뇌 다한 비구에게 이것들을 제거되고 뿌리 뽑히고 윗부분이 짤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번뇌 다한 비구가 '흐름을 끊은 자'라고 불립니다. 존자이시여, 탐욕은 묶임이고, 성냄은 묶임이고, 어리석음은 묶임입니다. 번뇌 다한 비구에게 이것들을 제거되고 뿌리 뽑히고 윗부분이 짤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번뇌 다한 비구가 '묶이지 않는 자'라고 불립니다. 존자이시여,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흠집 없는 바퀴와 흰 차양을 덮었고 바퀴 살이 하나인 마차가 구른다.
흐름을 끊었고 묶이지 않고 괴로움 없이 오는 자를 보라.’라는,

 

세존께서 이렇게 간략하게 말씀하신 의미를, 존자이시여,  저는 이렇게 압니다.”

"장자여, 심오한 세존의 가르침에서 지혜의 눈을 얻었으니 그대에게 이득입니다. 장자여, 그대에게 큰 이득입니다.”

 

dutiyakāmabhūsuttaṃ (SN 41.6-까마부 경2)

348.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까마부 존자는 맛치까산다의 망고 숲에 머물고 있었다. 그 무렵 찟따 장자가 까마부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까마부 존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찟따 장자는 까마부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이시여, 몇 개의 행(行)들이 있습니까?”

“장자여, 세 가지 현상이 있습니다. 몸의 작용(신행.身行), 말의 작용(구행.口行), 마음의 작용(심행.心行)입니다.”

“감사합니다, 존자이시여.”라고 찟따 장자는 까마부 존자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까마부 존자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하였다.

“존자이시여, 무엇이 몸의 작용이고, 무엇이 말의 작용이고, 무엇이 마음의 작용입니까?”라고.

“장자여, 들숨과 날숨은 몸의 작용이고,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도 말의 작용이고, 느낌(受)과 지각(想)은 마음의 작용입니다.”라고.

 

*주석서에 의하면 찟따 장자는 불환자의 소멸의 경지(nirodha)에 머물곤 하였기 때문에 그는 까마부 존자에게 소멸의 토대가 되는 행위들(nirodha-padaka snakhara)에 대해서 질문하였다고 한다.(SA.iii.93)  
*몸의 작용, 말의 작용, 마음의 작용은 각각 kaya-sankhara, vaci-sankhara, citta-sankhara를 옮긴 것인데 이것은 연기의 정형구의 두 번째인 의도적 행위(행)의 내용이기도 하다. 몸의 작용과 마음의 작용은 수동의 의미를 내표하고 있는데 몸의 해서 형성된(sankhariyati) 작용과 마음에 의해서 형성된 작용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말의 작용은 능동의 의미로 말을 형성하는(sankharoti) 작용이라는 의미이다.  

 

“감사합니다, 존자이시여.”라고 찟따 장자는 까마부 존자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까마부 존자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하였다.

“존자이시여, 왜 들숨과 날숨은 몸의 작용이고, 왜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는 말의 작용이고, 왜 느낌과 지각은 마음의 작용입니까?”라고.

“장자여, 들숨과 날숨은 몸에 속하는 것들이고, 그 법들은 몸이 의존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들숨과 날숨은 몸의 작용입니다. 장자여, 먼저 생각을 일으키고 계속적으로 고찰하고 뒤에 말을 합니다. 그래서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는 말의 작용입니다. 느낌과 지각은 마음에 속하는 것들이고, 그 법들은 마음이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낌과 지각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감사합니다, 존자이시여.” 라고 찟따 장자는 까마부 존자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까마부 존자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하였다.

“존자이시여, 어떻게 상수멸(想受滅, 지각과 느낌의 그침)의 증득이 있습니까?”

“장자여, 상수멸을 증득하는 비구에게 ‘나는 상수멸을 증득할 것이다.’라거나, ‘나는 상수멸을 증득한다.’라거나, ‘나는 상수멸을 증득했다.’라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다만, 이전에게(상수멸에 들기 전에) 그렇게 마음을 닦은 그것이 그를 그런 상태로 이끕니다.”라고.

 

“감사합니다, 까마부 존자시여.” 라고 찟따 장자는 까마부 존자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까마부 존자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하였다.

“존자이시여, 상수멸을 증득하는 비구에게 어떤 법들 첫 번째로 소멸합니까? 몸의 작용입니까? 아니면 말의 작용입니까? 아니면 마음의 작용입니까?”

“장자여, 상수멸을 증득하는 비구에게 말의 작용이 첫 번째로 소멸합니다. 다음이 몸의 작용이, 그 다음에 마음의 작용이 소멸합니다.”

 

“감사합니다, 까마부 존자시여.” 라고 찟따 장자는 까마부 존자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까마부 존자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하였다.

“존자시여, 죽어 임종한 자와 상수멸을 증득한 비구, 이들에게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장자여, 죽어 임종한 자에게 몸의 작용이 그치고 가라앉습니다. 말의 작용이 그치고 가라앉습니다. 마음의 작용이 그치고 가라앉습니다. 생명력(목숨)은 다하고, 체온도 식고, 감각기능들은 부서집니다. 상수멸을 증득한 비구에게 몸의 작용은 그치고 가라앉습니다. 말의 작용은 그치고 가라앉습니다. 마음의 작용은 그치고 가라앉습니다. 생명력은 다하지 않고, 체온은 식지 않고, 감각기능들은 맑고 깨끗합니다. 장자여, 죽어 임종한 자와 상수멸을 증득한 비구, 이들에게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까마부 존자시여.” 라고 찟따 장자는 까마부 존자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까마부 존자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하였다.

“존자이시여, 어떻게 상수멸의 증득으로부터 나옴(출정.깨어남)이 있습니까?”

“장자여, 상수멸의 증득으로부터 나오는 비구에게 ‘나는 상수멸의 증득으로부터 나올 것이다.’라거나, ‘나는 상수멸의 증득으로부터 나온다.’라거나, ‘나는 상수멸의 증득으로부터 나왔다.’라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다만, 이전에게(상수멸에 들기 전에) 그렇게 마음을 닦은 그것이 그를 그런 상태로 이끕니다.”  

 

*상수멸(멸진정)에 들면 마음과 모든 심리현상들이 소멸되는데, 8단계의 삼매(초선에서 4선까지 그리고 공무변처와 비상비비상처까지)에 능통한 불환자와 아라한만이 이 경지에 들 수 있다고 한다.   
*상수멸에 들기 전에 [상수멸에 들어 있는] 기간을 한정할 때에(addhana-pariccheda-kale)'나는 이 정도의 시간동안 마음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기간을 한정하는 마음(addhana-pariccheda-citta)을 닦는 것을 말한다.(SA.iii.94)  

 

“감사합니다, 까마부 존자시여.”라고 찟따 장자는 까마부 존자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까마부 존자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하였다.

“존자이시여, 상수멸의 증득으로부터 나오는 비구에게 어떤 법들이 첫 번째로 일어납니까? 몸의 작용입니까? 아니면 말의 작용입니까? 아니면 마음의 작용입니까?”

“장자여, 상수멸의 증득으로부터 나오는 비구에게 마음의 작용이 첫 번째로 일어납니다. 다음이 몸의 작용이, 그 다음이 말의 작용이 일어납니다.”

 

“감사합니다, 까마부 존자시여.” 라고 찟따 장자는 까마부 존자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까마부 존자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하였다.

“존자이시여, 상수멸의 증득으로부터 나온 비구에게 몇 가지 감각접촉[觸]들이 닿습니까?”

“장자여, 상수멸의 증득으로부터 나온 비구에게 세 가지 감각접촉들이 닿습니다. 그것은 공한 감각접촉, 표상 없는 감각접촉, 바램 없는(원함 없는) 감각접촉입니다." 

 

*여기서 '공한 감각접촉'과 '표상 없는 감각접촉'과 '바램 없는 감각접촉'은 각각 sunnata-phassa와 animitta-phassa와 appanihita-phassa를 옮긴 것이다. 이 셋은 공한 해탈과 표상 없는 해탈과 원함 없는 해탈과 관계가 있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세 가지 감각접촉은 자신의 공덕과 대상에 따라서 설명해야 한다.
①자신의 공덕에 따라서: 과의 증득(phala-samapatti)은 공함(sunnata)이라 불린다.그래서 함께 생긴 감각접촉도 공한 감각접촉이라 불린다. 표상 없음과 바램 없음도 같은 방법으로 설명한다. ②대상에 따라서: 열반은 탐욕 등이 공하기 때문에 공함이라 불리고, 탐욕의 표상이 없기 때문에 표상 없음이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바램 없음이라 불린다. 공한 열반을 대상으로 삼아서 일어난 과의 증득과 함께하는 감각접촉도 공함이라 불린다. 표상 없음과 원함 없음도 같은 방법으로 설명된다."(SA.iii.97)  
여기서 말하는 과의 증득이란 마음이 열반이라는 궁극적 행복을 직접 경험하는 특별한 삼매의 체득을 뜻한다. 이것은 예류, 일래, 불환, 아라한의 네 경지에 상응하여 네 가지이다.  

 

“감사합니다, 까마부 존자시여.” 라고 찟따 장자는 까마부 존자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까마부 존자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하였다.

“존자이시여, 상수멸의 증득으로부터 나온 비구에게 마음은 무엇으로 기울어져 있고 무엇에 의지하고 있고 무엇으로 향합니까(이끌립니까)?”

“장자여, 상수멸의 증득으로부터 나온 비구에게 마음은 멀리 여읨(떨침)으로 기울어져 있고 여읨에 의지하고 있고 멀리 여읨을 향합니다.”

 

“감사합니다. 까마부 존자시여.”라고 찟따 장자는 까마부 존자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까마부 존자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하였다.

“존자이시여, 상수멸을 증득하기 위해 큰 도움이 되는 법들은 몇 가지입니까?”

“장자여, 참으로 그대는 처음에 질문했어야 할 것을 뒤에 질문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설명하겠습니다. 장자여, 상수멸을 증득하기 위해 큰 도움이 되는 두 가지 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마타와 위빳사나입니다.”

 

*상수멸은 먼저 사마타를 통해서 색계 삼매(초선부터 4선까지)와 무색계삼매(공무변처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에 들어야 하고, 그 뒤에 위빳사나를 통해서 이러한 경지가 무상.고.무아임을 통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청정도론 XXIII.31-43에 잘 설명되어 있다.    

 

godattasuttaṃ (SN 41.7-고닷따 경)

349. 한 때에 고닷따 존자는 맛치까산다의 망고 숲에 머물고 있었다. 그 무렵 찟따 장자가 고닷따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고닷따 존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찟따 장자에게 고닷따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장자여, 무량한 마음의 해탈과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과 공한 마음의 해탈과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이라는 이러한 법들은 의미도 다르고 표현(문자)도 다릅니까? 아니면 의미는 같고(하나이고) 표현만 다릅니까?”

“존자이시여, 여기에 하나의 방법이 있어서 이 방법에 의하면 이 법들은 의미도 다르고 표현도 다릅니다. 또한, 존자이시여, 그리고 다른 방법이 있어서 이 방법에 의하면 이 법들은 의미는 같고 표현만 다릅니다.”

 

*본경에 해당하는 주석서와 북주석서에는 고닷따 존자(ayasma Godatta)에 대한 설명이 나타나지 않는다. 「장로게」(Thag.659-672)에 고닷따 존자의 게송이 나타나는데 본경의 고닷따 존자와 같은 존자로 보고 있다. 「장로게 주석서」에 의하면 고닷따 존자는 사왓티의 상인의 집안에 태어났는데 아버지의 뒤를 이어 500대의 수레로 짐을 날라다 주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소가 사람소리로 말하는 것을 듣고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ThagA.ii.276) 

*여기서 문자가 서로 다른 것은 분명하다. 뜻(의미)으로 보면, '무량한 마음의 해탈(appamana cetovimutti)은 경지로는 고귀한 색계에 속하고 대상으로는 중생과 개념을 대상으로 가진다. 
'무소유(akincanna)의 마음의 해탈'은 경지로는 고귀한 무색계에 속하고 대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대상으로 가진다. '공한(sunnata) 마음의 해탈'은 경지로는 욕계에 속하고 대상으로는 형성된 것을 대상으로 가진다. 여기서 공함은 위빳사나와 동의어이다. '표상 없는(animitta) 마음의 해탈'은 경지로는 출세간에 속하고 대상으로는 열반을 대상으로 가진다.(SA.iii.98)   

 

“장자여, 그러면 어떤 방법이 있어서 그 방법에 의하면 이 법들은 의미도 다르고 표현도 다릅니까?”

"여기, 존자이시여, 비구는 자애를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뭅니다.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없고 해치고자 함이 없는 자애를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뭅니다. ··· 연민을 수반하는 마음을 ··· 기뻐함을  수반하는 마음을 ··· 평정을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뭅니다.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없고 해치고자 함이 없는 평정을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뭅니다. 존자이시여, 이것이 무량한 마음의 해탈이라고 불립니다.”

 

*'무량한 마음의 해탈(appamana cetovimutti)'에는 12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사무량심)과 네 가지 도(magga)와 네 가지 과(phala)이다. 이 가운데 거룩한 마음가짐은 [일체 중생을 향해서] 퍼녀나가는 것이 무량하기 때문에 무량하고, 도와 과는 양을 재게 하는 원인이 되는 오염원들이 존재하지 않음에 의해서 무량하기 때문에 무량하다.(SA.ii.98)   

 

"장자여, 그러면 무엇이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입니까?”

"여기, 존자이시여, 비구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식무변처의 경지를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얻어 머뭅니다. 존자이시여, 이것이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이라고 불립니다.”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akincanna-cetovimutti)'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무소유처와 [네 가지] 도와 [네 가지] 과이다. 이 가운데 무소유처는 어떤 것도 대상으로 가지지 않기 대문에 무소유라 불린다. 도와 과는 어떠한 괴롭히고 방해하는 오염원들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소유이며, 열반도 무소유이기 때문이다.(SA.ii.99)   

 

"장자여, 그러면 무엇이 공한 마음의 해탈입니까?”

"여기, 존자이시여, 비구는 숲으로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거나 빈집으로 가서 이렇게 숙고합니다. ‘이것은 자아에 의해서도 자아에 속하는 것에 의해서도 공하다.’라고. 존자이시여, 이것이 공한 마음의 해탈이라고 불립니다.”

 

"장자여, 그러면 무엇이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입니까?”

"여기, 존자이시여, 비구는 모든 표상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를 얻어 머뭅니다. 존자이시여, 이것이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이라고 불립니다.

존자이시여, 이런 방법이 있어서 이 방법에 의하면 이 법들은 의미도 다르고 표현도 다릅니다.”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animitta cetovimutti)'에는 18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한 가지 위빳사나와 네 가지 무색의 증득과 네 가지 도와 네 가지 과이다. 이 가운데 위빳사나는 영원하다는 표상과 행복하다는 표상과 자아라는 표상을 제거하기 때문에 표상 없음이라 부른다. 네 가지 무색의 증득은 물질의 표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표상 없음이라 부른다. 도와 과는 표상의 원인이 되는 오염원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표상 없음이며 열반도 표상 없음이다.(SA.iii.99)  

 

"장자여, 그러면 어떤 방법이 있어서 그 방법에 의하면 이 법들은 의미도 하나이고 표현만 다릅니까?”

“존자이시여, 탐욕도 한계를 만들고, 성냄도 한계를 만들고, 어리석음도 한계를 만듭니다. 번뇌 다한 비구에게 이것들을 제거되고 뿌리 뽑히고 윗부분이 짤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존자이시여, 어떠한 무량한 마음의 해탈이 있더라도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이 그 가운데서 으뜸이라고 선언됩니다. 또한, 이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은 탐욕이 공하고 성냄이 공하고 어리석음이 공합니다.

 

*'탐욕은 한계를 만들고(raga pamana-karana)'라는 등으로 말했다. 예를 들면 산기슭에 썩은 나뭇잎들이 쌓여 있는 물이 있는데  검은 색으로 변해 있어서 쳐다보면 100길이나 도는 깊은 곳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나무 막대기나 밧줄로 제어 보면 등짝 정도에만 차는 저오 밖에는 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탐욕 등이 생겨나지 않을 때까지는 그 사람이 예류자인지 일래자인지 불환자인지 그의 경지를 알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일단 그 사람에게서 탐욕 등이 생겨나면 그때는 그가 탐하는지 성내는지 어리석은지를 알아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아무개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그 사람에 대한 양을 재어서 보여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탐욕은 한계를 만드는 것'이라 한 것이다.(SA.iii.98)    
*'확고한 마음의 해탈(akuppa cetovimutti)'이란 아라한과의 마음의 해탈이다. 이것은 모든 해탈 가운데 가장 수승하기 때문에 '으뜸이라고 불린다'라고 한 것이다.(SA.iii.98)  

 

존자이시여, 탐욕도 [무엇이] 있는 것이고, 성냄도 있는 것이고, 어리석음도 있는 것입니다. 번뇌 다한 비구에게 이것들을 제거되고 뿌리 뽑히고 윗부분이 짤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존자이시여, 어떠한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이 있더라도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이 그 가운데서 으뜸이라고 선언됩니다. 또한, 이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은 탐욕이 공하고 성냄이 공하고 어리석음이 공합니다.

 

*'무엇이 있는 것'은 kincana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이것을 동사 kincati에서 파생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뭉개다와 방해하다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kincana를 막고 뭉개는 방해물로 해석하고 있다.(SA.iii.99) kincana는 단순히 '그 무엇을' 뜻한다. 빠알리에서 이 단어는 방해가 되는 그 무엇이라는 뜻이다.   

 

존자이시여, 탐욕도 표상을 만들고, 성냄도 표상을 만들고, 어리석음도 표상을 만듭니다. 번뇌 다한 비구에게 이것들을 제거되고 뿌리 뽑히고 윗부분이 짤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존자이시여, 어떠한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이 있더라도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이 그 가운데서 으뜸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런데 이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은 탐욕이 공하고 성냄이 공하고 어리석음이 공합니다.

 

*탐욕이 일어날 때 '이 사람은 탐욕을 가졌다.'라고 인식하게 하는 표상(sanjanana-nimitta)을 만들면서 생기기 때문에 '표상을 만드는 것(nimitta karana)'이라 불리운다. 성냄과 어리석음도 마찬가지이다.(SA.iii.99) 한편 탐욕은 아름다운 표상을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성냄의 적의의 표상을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어리석음은 영원함과 줄거움과 자아에 대한 표상의 원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존자이시여, 이러한 방법이 있어서 이 방법에 의하면 이 법들은 의미는 하나이고 표현만 다릅니다.”

“장자여, 심오한 세존의 가르침에서 지혜의 눈을 얻었으니 그대에게 이득입니다. 장자여, 그대에게 큰 이득입니다.”

 

nigaṇṭhanāṭaputtasuttaṃ (SN 41.8-니간타 나따뿟따 경)
350. 그 무렵 니간타 나따뿟따가 많은 니간타 대중과 함께 맛치까산다에 도착했다. 찟따 장자는 니간타 나따뿟따가 많은 니간타 대중과 함께 맛치까산다에 도착했다고 들었다. 찟따 장자는 많은 재가신도들과 함께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니간타 나따뿟따와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에
한 쪽에 앉은 찟따 장자에게 니간타 나따뿟따는 이렇게 말했다.

“장자여, 그대는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가 없는 삼매가 있다.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의 소멸은 있다.’라는 사문 고따만의 말을 믿습니까?”

 

*니간타 나따뿟따(Nigantha Nataputta)는 자아니교의 창시자인 마하위라(Mahavira)와 동일인이다. 그는 빠알리 삼장의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그가 세존과 직접 만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의 제자들은 니간타(Nigantha,매듭을 푼 자)들로 불려지고 있다.  

 

“존자이시여, 나는 ‘거친 사유와 마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가 있다.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의 소멸은 있다.’라고 하신 것을 믿음으로 세존께 다가가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니간타 나따뿟따는 자신의 대중을 둘러본 뒤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이것을 보시오. 찟따 장자의 이렇게나 올곧고, 찟따 장자는 이렇게나 정직하고, 찟따 장자는 이렇게나 남을 현혹시키지 않습니다.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을 소멸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치 그물로 바람을 잡으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를 소멸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강가 강의 흐름을 자신의 주먹으로 막으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믿음으로 다가가지 않습니다'는 na saddhaya gacchami를 옮긴 것이다. 다음 문구에서 보듯이 찟따 장자는 이러한 삼매의 경지를 단지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체득하여 알고 본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니간따 나타뿟따는 찟따 장자가 생각과 사유가 없는 삼매의 경지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 우쭐하고 있다.  

 

“존자시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혜와 믿음 가운데서 어떤 것이 더 수승합니까?”

“장자여, 믿음보다는 지혜가 더 수승합니다.”

 “존자이시여, 나는 원하기만 하면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멀어짐으로부터 생겨난 기쁨[희열.喜]과 즐거움[행복.樂]이 있는 첫 번째 선정(初禪)을 얻어 머뭅니다. 존자이시여, 나는 원하기만 하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두 번째 선정(二禪)을 얻어 머뭅니다. 존자이시여, 저는 원하기만 하면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세 번째 선정(三禪)을 얻어 머뭅니다. 존자이시여, 저는 원하기만 하면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네 번째 선정(四禪)을 얻어 머뭅니다. 존자이시여, 나는 참으로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그러므로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가 있다.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의 소멸은 있다.’라고 하는 것에 대해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믿음으로 다가가겠습니까?”

 

* 여기에서 '거친사유(vitakka)'란 'vivtark'에 기원을 둔 말로, '사유하다. 사색하다. 헤아리다'의 어원적 의미를 가진다. 보통 '철학적으로 사색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 또한 '미세한 사유(vicara)란 'vivcar'에 기원을 둔 말로, '맴돌다.사찰하다.조사하다'의 의미를 지닌다. 
이들 두 용어는 본문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첫 번째 선정에서의 심리상태를 나타낼 때 사용되며, '거친 사유의 작용'과 '미세한 사유의 작용'으로 대별된다.
"빠띠삼비다막가"의 마하박가(I.제25장 6절)에 보면 '두 번째 선정에 들어간 자에게는 거친 사유와 마세한 사유에 의한 언어적 현상(語行.어행)이 그친다(dutiyajjhanam samapannassa vitakkavicara vacfsankhara patippassadha honti...)'라는 구절이 나오는 바, 이를 통 'vitakka'와 'vicara'는

언어적 사고의 영역 안에서 진행되는 마음의 작용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PsA 에 따르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사유한다는 것은 거친 사유이며, 사유함은 거친 사유이며, 추론이라 불리우는것은 거친 사유이다. 그것에 의해 마음이 의지하는 바(對象.대상) 안에서 맴도는 것이 미세한 사유이며, 배회하는 것이 미세한 사유이며. 따라 다니는 것이라 불리우는 것이 미세한 사유이다.  
각묵스님은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라고 번역한다. 

 

이렇게 말했을 때 니간타 나따뿟따는 자신의 대중을 둘러본 뒤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이것을 보시오. 찟따 장자는 이렇게나 올곧지 못하고, 찟따 장자는 이렇게나 정직하지 못하고, 찟따 장자는 이렇게나 남을 현혹시킵니다.'라고.

 

“이제 우리는, 존자이시여, 그대의 말을 이렇게 압니다. ‘그대들은 이것을 보시오. 찟따 장자는 이렇게나 올곧고, 찟따 장자는 이렇게나 정직하고, 찟따 장자는 이렇게나 남을 현혹시키지 않습니다.’라고. 또한 존자이시여, 이제 우리는 그대의 말을 이렇게 압니다. ‘그대들은 찟따 장자는 이렇게나 올곧지 못하고, 찟따 장자는 이렇게나 정직하지 못하고, 찟따 장자는 이렇게나 남을 현혹시킵니다.’라고. 만약, 존자시여, 그대의 앞의 말이 사실이면 뒤의 말은 거짓입니다. 만약, 존자이시여, 그대의 앞의 말이 거짓이면 뒤의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존자이시여, 이런 열 가지 법다운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것의 뜻을 아신다면 니간타의 대중과 함께 나에게 대답해 주십시오. 하나로 된 질문과 하나에 대한 개요와 하나에 대한 설명이 있고, 둘로 된 질문과 둘에 대한 개요와 둘에 대한 설명이 있고, 셋으로 된 질문과 셋에 대한 개요와 셋에 대한 설명이 있고, 넷으로 된 질문과 넷에 대한 개요와 넷에 대한 설명이 있고, 다섯으로 된 질문과 다섯에 대한 개요와 다섯에 대한 설명이 있고, 여섯으로 된 질문과 여섯에 대한 개요와 여섯에 대한 설명이 있고, 일곱으로 된 질문과 일곱에 대한 개요와 일곱에 대한 설명이 있고, 여덟으로 된 질문과 여덟에 대한 개요와 여덟에 대한 설명이 있고, 아홉으로 된 질문과 아홉에 대한 개요와 아홉에 대한 설명이 있고, 열로 된 질문과 열에 대한 개요와 열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라고.
찟따 장자가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이런 열 가지 법다운 질문을 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돌아갔다.

 

acelakassapasuttaṃ (SN 41.9-나체수행자 깟사빠 경)
351. 그 무렵 재가자였을 때 찟따 장자의 친구였던 나체수행자 깟사빠가 맛치까산다에 도착했다. 찟따 장자는 재가자였을 때 찟따 장자의 친구였던 나체수행자 깟사빠가 맛치까산다에 도착했다고 들었다. 그러자 찟따 장자는 나체수행자 깟사빠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나체수행자 깟사빠와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찟따 장자는 나체수행자 깟사빠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이시여, 깟사빠께서는 출가한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장자여, 내가 출가한 지 30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존자이시여, 이 30년 동안의 출가 생활로 그대는 인간의 법을 초월하고 성자들에게 적합한(어울리는) 지(知)와 견(見)의 성취와 편히 머묾을 어떤 것이든 얻었습니까?”

“장자여, 이 30년 동안의 출가 생활 동안 나는 나체이고, 삭발하고, (청소하는) 먼지털이를 가진 것 외에 인간의 법을 초월하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성취와 편히 머묾을 어떤 것이든 얻지 못했습니다(편하게 머무르지도 못합니다)."

이렇게 말하자 찟따 장자는 나체수행자 깟사빠에게 이렇게 말했다.
“경이롭습니다, 깟사빠 존자이시여. 놀랍습니다, 존자이시여. 존자이시여, 30년의 출가 생활 동안 나체이고, 삭발하고, 먼지털이를 가진 것 외에 인간의 법을 초월하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성취와 편히 머묾을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법의 설해짐이 있다니요!”

 

“그러면 장자여, 장자는 얼마나 오랫동안 재가신도로 있었습니까?”

“존자이시여, 나도 재가신도가 된 지도 30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장자여, 이 30년 동안에 인간의 법을 초월하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서취와 편히 머묾을 어떤 것이든 얻었습니까?”

“존자이시여,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나는 존자이시여, 내가 원하는 만큼,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멀어짐으로부터 생겨난 기쁨[희열.喜]과 즐거움[행복.樂]이 있는 첫 번째 선정을 얻어 머뭅니다. 나는, 존자이시여, 내가 원하는 만큼,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두 번째 선정을 얻어 머뭅니다. 나는, 존자이시여, 내가 원하는 만큼,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세 번째 선정을 얻어 머뭅니다. 나는 존자이시여, 내가 원하는 만큼,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을 지닌, 네 번째 선정을 얻어 머뭅니다. 만약, 존자이시여, 내가 세존보다 먼저 죽는다면, 세존께서 나를 두고 ‘찟따 장자에게는 이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그런 족쇄가 남아 있지 않다.’라고 설명하시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자 나체수행자 깟사빠는 찟따 장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경이롭습니다, 장자여. 놀랍습니다, 장자여. 참으로 흰 옷을 입는 재가자가 인간의 법을 초월하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성취와 편히 머묾을 얻을 것이라는 그런 법의 잘 설해짐이 있다니요! 장자여, 나는 이 법과 율에서 출가하고자 합니다.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그러자 찟따 장자는 나체수행자 깟사빠를 데리고 장로 비구들에게로 갔다. 가서는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들이시여, 이 나체수행자 깟사빠는 재가자였을 때 저의 오랜 친구였습니다. 장로들께서는 이 사람을 출가시켜주십시오. 구족계를 주십시오. 가사와  탁발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필요한 약품을 제가 성심을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나체수행자 깟사빠는 이 법과 율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구족계를 받고 홀로 외딴 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문 깟사빠 존자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으로부터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알았다.

깟사빠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gilānadassanasuttam (SN 41.10-병문안 경)
352. 그 무렵 찟따 장자는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많은 숲의 신들과 나무의 신들과 약용식물과 고목에 거주하는 신들이 모여들어 함께 와서 찟따 장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자여, 그대는 ‘나의 미래세에 전륜성왕이 되리라.’라는 염원을 가지십시오.”

이렇게 말하자 찟따 장자는 그 숲의 신들과 나무의 신들과 약용식물과 고목에 거주하는 신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것도 역시 무상하고, 그것도 역시 견고하지 않고, 그것도 역시 버리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자 찟따 장자의 친구와 동료와 가족과 친척들은 찟따 장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찟따여, 마음 챙김을 확립하십시오.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했기에 그대들은 나에게 ‘찟따여, 마음 챙김을 확립하십시오.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는것입니까?”

“찟따여, 당신은 ‘그것도 역시 무상하고, 그것도 역시 견고하지 않고, 그것도 역시 버리고 가야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숲의 신들과 나무의 신들과 약용식물과 고목에 거주하는 신들이 ‘장자여, 그대는 ‘나는 미래세에 전륜성왕이 되리라.’라는 염원을 가지십시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도 역시 무상하고, 그것도 역시 견고하지 않고, 그것도 역시 버리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찟따여, 그러면 숲의 신들과 나무의 신들과 약용식물과 고목에 거주하는 신들은 무슨 이로움을 관찰하기 때문에 ‘장자여, 그대는 ‘나는 미래세에 전륜성왕이 되리라.’라는 염원을 가지십시오.’라고 말했습니까?”

“그 신들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찟따 장자는 계행을 구족하고 선한 성품을 가졌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나는 미래세에 전륜성왕이 되리라.’라는 염원을 가지면 그는 계행을 구족하였고 그의 마음의 염원이 청정하기 때문에 성취가 될 것이다. 그러면 정의롭고 법다운 이 왕은 법다운 공양물을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보시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원림의 신들과 숲의 신들과 나무의 신들과 약용식물과 고목에 거주하는 신들은 이러한 이로움을 관찰하기 때문에 ‘장자여, 그대는 ‘나는 미래세에 전륜성왕이 되리라.’라는 염원을 가지십시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나는 ‘그것도 역시 무상하고, 그것도 역시 견고하지 않고, 그것도 역시 버리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찟따여, 그러면 저희들에게도 훈계와 가르침을 주십시오.”

“그렇다면 그대들은 이와 같이 믿음을 가지고 실천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araham]이시며, 모든 법을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분(samma sambuddho)이시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vijjacaranasampanna)이시며, 열반으로 잘 가신 분(sugato)이시며, 중생들의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lokavidu)이시며, 위 없으신 분(anuttaro)이시며, 어리석은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purisadhammasarathi)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satthadevamanusam)이시며, 깨달은 분(buddho)이시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세존)(bahgava)이시다.’라고 세존께 분명하고 완전한 믿음을 구족한 자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법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고,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고,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잘 열반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고, 지혜 있는 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법에 분명하고 완전한 믿음을 구족한 자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는 길을 잘 걷고 있으며,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는 바르게 길을 걷고 있으며,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는 지혜로게 길을 걷고 있으며,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는 충실하게 길을 걷고 있으니, 곧 네 쌍의 분들이요 여덟 단계에 있는 분들이시다. 이러한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는 공양 올려 마땅하며, 시중들어 마땅하며, 보시하여 마땅하며, 합장드려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이시다.’라고 승가에 분명하고 완전한 믿음을 구족한 자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집안에 있는 보시할 수 있는 물건은 무엇이든 모두 혼자 두고 사용하지 않고 계행을 구족하고 선한 성품을 가진 분들과 함께 나누어가질 것입니다.’라고.

그대들은 이와 같이 믿음을 가지고 닦아야 합니다.”

찟따 장자는 친구와 동료와 가족과 친척들을 세존과 법과 승가에 청정한 믿음을 가지게 하고 보시하도록 격려한 뒤 임종하였다.

 

 

찟따 상윳따(S41)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