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앙굿따라 니까야

넷의 모음 - 1. 반다가마 품(Bhaṇḍagāma-vagga. A4.1-10)

실론섬 2014. 6. 21. 21:35

제1장 반다가마 품 Bhaṇḍagāma-vagga(AN4.1-10)

 

anubuddhasuttaṃ (AN 4.1-깨달음 경)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왓지에서 반다가마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존귀하신) 이시여" 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법을 깨닫지 못하고 완전히 알지 못해서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이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유전하며(옮겨가며) 윤회하였다. 어떤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계(戒)를 깨닫지 못하고 완전히 알지 못해서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이 오랜 시간을 유전하며 윤회하였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삼매[定]를 깨닫지 못하고 완전히 알지 못해서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이 오랜 시간을 유전하며 윤회하였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지혜[慧]를 깨닫지 못하고 완전히 알지 못해서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이 오랜 시간을 유전하며 윤회하였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해탈을 깨닫지 못하고 완전히 알지 못해서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이 오랜 시간을 유전하며 윤회하였다.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이 성스러운 계를 깨닫고 완전히 알았다. 성스러운 삼매를 깨닫고 완전히 알았다. 성스러운 지혜를 깨닫고 완전히 알았다. 성스러운 해탈을 깨닫고 완전히 알았다. 존재에 대한 갈애는 잘라졌고, 존재에 묶어두는 사슬은 부수어졌으며, 다시 태어남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선서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뒤 다시 게송으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계와 삼매와 지혜와 위없는 해탈 

영광스러운 고따마는 이 법들을 깨달았다.

 

괴로움의 끝을 실현하고, 눈을 가졌고, 완전히 꺼진 스승인 세존는

이렇게 완전한 지혜로 알고서 비구들을 위해 법을 가르쳤다.”라고.

 

papatitasuttaṃ (AN 4.2-쓰러진 자 경)

2. “비구들이여, 네 가지 법을 갖추지 못한 자는 '이 법과 율에서 쓰러진 자'라고 불린다. 어떤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계를 갖추지 못한 자는 '이 법과 율에서 쓰러진 자'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삼매를 갖추지 못한 자는 '이 법과 율에서 쓰러진 자'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지혜를 갖추지 못한 자는 '이 법과 율에서 쓰러진 자'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해탈을 갖추지 못한 자는 '이 법과 율에서 쓰러진 자'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이런한 네 가지 법을 갖추지 못한 자는 '이 법과 율에서 쓰러진 자'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법을 갖춘 자는 '이 법과 율에서 쓰러지지 않은 자'라고 불린다. 어떤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계를 갖춘 자는 '이 법과 율에서 쓰러지지 않은 자'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삼매를 갖춘 자는 '이 법과 율에서 쓰러지지 않은 자'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지혜를 갖춘 자는 '이 법과 율에서 쓰러지지 않은 자'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해탈을 갖춘 자는 '이 법과 율에서 쓰러지지 않은 자'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법을 갖춘 자는 '이 법과 율에서 쓰러지지 않은 자'라고 불린다.”

 

"죽은 자들, 쓰러진 자들, 탐욕 때문에 다시 오는 자들(윤회)은 쓰러진다.

해야 할 바를 다 해 마쳤고 즐거워해야 할 것을 즐거워하였으며, 행복에 의해 행복이 따라왔다."

 

paṭhamakhatasuttaṃ (AN 4.3-파 엎음 경1)

3. “비구들이여, 네 가지 법을 갖춘 어리석고 배우지 못한 고결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파서 엎어버리고 파멸시킨다. 그는 비난받아 마땅하고, 현자들의 비난을 받으며 많은 악덕(惡德)을 쌓는다. 어떤 네 가지인가?

잘 알지도 못하고 충분히 관찰(조사)하지도 않은 채 칭송할 만하지 않은 사람을 칭송한다. 

잘 알지도 못하고 충분히 관찰하지도 않은 채 칭송할 만한 사람을 칭송하지 않는다. 

잘 알지도 못하고 충분히 관찰하지도 않은 채 믿을 만하지 않은 곳에 믿음을 분명히 한다

잘 알지도 못하고 충분히 관찰하지도 않은 채 믿을 만한 곳에 믿음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법을 가진 어리석고 배우지 못한 고결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파서 엎어버리고 파멸시킨다. 그는 비난받아 마땅하고, 현자들의 비난을 받으며 많은 악덕을 쌓는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법을 갖춘 현명하고 잘 배운 고결한 사람은 자신을 파서 엎지 않고 파멸시키지 않는다. 그는 비난받을 일이 없고, 현자들의 비난을 받지 않으며 공덕을 쌓는다. 어떤 네 가지인가?

잘 알기도 하고 충분히 관찰하여서 칭송할 만하지 않은 사람을 칭송하지 않는다. 

잘 알기도 하고 충분히 관찰하여서 칭송할 만한 사람을 칭송한다. 

잘 알기도 하고 충분히 관찰하여서 믿을 만한 곳에 믿음을 분명히 않다. 

잘 알기도 하고 충분히 관찰하여서 믿을 만하지 않은 곳에 믿음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법을 갖춘 현명하고 잘 배운 고결한 사람은 자신을 파서 엎지 않고 파멸시키지 않는다. 그는 비난받을 일이 없고, 현자들의 비난을 받지 않으며 많은 공덕을 쌓는다.”

 

"비난해야 할 사람을 칭찬하거나 칭찬해야 할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은

입으로 죄를 쌓는다. 그 죄 때문에 행복을 얻지 못한다.

 

주사위(도박)에서 모든 재산을 잃고 자신도 잃은 최악의 패는 작은 것이다.

선서(善逝)에 대해 적대감을 가진다면 이것은 더 큰 최악의 패다.

 

10만과 36니랍부다 지옥과 다섯의 압부다 지옥!

성자를 비난하는 자는 말과 마음으로 악을 디향한 탓에 그 지옥에 떨어진다."

 

*'최악의 패'로 옮긴 원어는 kali 인데 인도 전통 도박의 네 가지 패 가운데 가장 나쁜 패를 일컫는다. 인도의 전통적인 도박은 주사위를 던져서 나오는 패를 가지고 승부를 겨룬다고 한다. 패에는 네 가지가 있다. 가장 좋은 패는 끄르따(krta)라고 하며, 그 다음은 뜨레따(treta), 그 다음은 드와빠라(dvapara), 가장 나쁜 패는 깔리(kali)라고 한다. 그래서 인도 문헌 전반에서 깔리는 '사악함, 불운, 죄착'등의 의미로 쓰인다.

*"상윳따 니까야 복주석서"는 '압부다(abbuda)'와 '니랍부다(nirabbuda)'를 이렇게 설명한다. '참깨가 가득 든 어떤 항아리에서 백 년에 한 개씩 참깨를 꺼내어서 그 참깨가 모두 없어지는 기간은 압부다의 기간에 미치치 못한다. 이렇게 설명이 되는 압부다에 20배를 한 것이 니랍부다이다. 이러한 니랍부다로 10만 니랍부다라는 뜻이다.(SAT.i.212) 그리고 니랍부다는 이러한 기간 동안 고통을 받는 지옥의 이름으로도 쓰인다.

 

dutiyakhatasuttaṃ (AN 4.4-파 엎음 경2)

4. “비구들이여, 네 가지에 대해 삿되게 실천하는 어리석고 배우지 못한 고결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파서 엎어버리고 파멸시킨다. 그는 비난받아 마땅하고, 지자들의 비난을 받으며 많은 악덕을 쌓는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어머니에 대해 삿되게 실천하는 어리석고 배우지 못하고 고결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파서 엎어버리고 파멸시킨다. 그는 비난받아 마땅하고, 지자들의 비난을 받으며 많은 악덕을 쌓는다. 비구들이여, 아버지에 대해 삿되게 실천하는 ··· 비구들이여, 여래에 대해 삿되게 실천하는 ··· 비구들이여, 여래의 제자에 대해 삿되게 실천하는 어리석고 배우지 못하고 고결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파서 엎어버리고 파멸시킨다. 그는 비난받아 마땅하고, 지자들의 비난을 받으며 많은 악덕을 쌓는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에 대해 삿되게 실천하는 어리석고 배우지 못한 고결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파서 엎어버리고 파멸시킨다. 그는 비난받아 마땅하고, 지자들의 비난을 받으며 많은 악덕을 쌓는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에 대해 바르게 실천하는 현명하고 잘 배운 고결한 사람은 자신을 파서 엎지 않고 파멸시키지 않는다. 그는 비난받을 일이 없고, 지자들의 비난을 받지 않으며 많은 공덕을 쌓는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어머니에 대해 바르게 실천하는 현명하고 잘 배운 고결한 사람은 자신을 파서 엎지 않고 파멸시키지 않는다. 그는 비난받을 일이 없고, 지자들의 비난을 받지 않으며 공덕을 쌓는다. 비구들이여, 아버지에 대해 바르게 실천하는 ··· 비구들이여, 여래에 대해 바르게 실천하는 ··· 비구들이여, 여래의 제자에 대해 바르게 실천하는 현명하고 잘 배운 고결한 사람은 자신을 파서 엎지 않고 파멸시키지 않는다. 그는 비난받을 일이 없고, 지자들의 비난을 받지 않으며 많은 공덕을 쌓는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바른 실천을 하는 현명하고 잘 배운 고결한 사람은 자신을 파서 엎지 않고 파멸시키지 않는다. 그는 비난받을 일이 없고, 지자들의 비난을 받지 않으며 많은 공덕을 쌓는다.”

 

“어머니, 아버지, 여래∙정등각, 그의 제자에 대해 삿되게 실천하는

그런 사람은 많은 악덕을 쌓는다.

부모에게 비법을 행하는 것과 관련해서

여기서는 현자들이 그를 비난하고, 죽은 뒤에는 불행한 곳에 간다.

 

어머니, 아버지, 여래∙정등각, 그의 제자에게 바르게 실천하는

그런 사람은 많은 공덕을 쌓는다.

부모님에 대해 법을 실천하는 것과 관련해서

여기서는 현자들이 그를 칭송하고, 죽은 뒤에는 천상에서 기뻐한다.”

 

anusotasuttaṃ (AN 4.5-흐름을 따름 경)

5. “비구들이여,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이런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어떤 네 가지인가?  

흐름을 따라가는 사람, 흐름을 거스르는 사람, 확고하게 서 있는 사람, 흐름을 건너 저 언덕에 가서 땅에 서 있는 바라문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누가 흐름을 따르는 사람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고, 악한 업을 짓는다. 

이런 사람이, 비구들이여, 흐름을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불린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누가 흐름을 거스르는 사람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악한 업을 짓지 않는다. 고통과 고뇌가 함께하는 눈물젖은 얼굴을 하고서도 완전하고 청정한 범행을 닦는다. 

이런 사람이, 비구들이여, 흐름을 거스르는 사람이라고 불린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누가 확고하게 서 있는 사람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오하분결.五下分結)가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에 (정거천에) 화생하고, 거기서 완전히 열반하니, 그 세계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존재(불환자.不還者)이다.

이런 사람이, 비구들이여, 확고하게 서 있는 사람이라고 불린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누가 흐름을 건너 저 언덕에 가서 땅에 서 있는 바라문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문다. 이런 사람이, 비구들이여, 흐름을 건너 저 언덕에 가서 맨 땅에 서있는 바라문이라고 불린다."

 

“감각적 쾌락에 대해 제어되지 않은 사람은 누구든지

여기에서 탐욕을 여의지 못한 자,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자 하는 자이다.

갈애에 얽매인자, 흐름을 따라가는 사람인

그들은 거듭거듭 태어남과 늙음을 겪는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마음 챙김을 확립하고

감각적 쾌락과 악을 행하지 않는 현명한 사람은

괴로움을 겪더라도 감각적 쾌락을 버린다.

그 사람을 흐름을 거스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참으로 다섯 가지 오염원을 버렸기 때문에

충족된 유학(有學)이고, 퇴보하지 않는 상태이다.

굳건한 마음을 얻었고, 감각기능들이 안정되어 삼매를 닦는다.

참으로 그는 서 있는 사람이라고 불린다.

 

어떤 사람에게 넘어선 것과 넘어서지 않은 법들은 함께한 뒤에

흩어지고 사라져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참으로 범행을 완성한 자

세상의 끝에 도달한 자, 피안으로 간 자라고 불린다."

 

appassutasuttaṃ (AN 4.6-적게 배운 자 경)

6. “비구들이여, 세상에 존재하는 이런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어떤 네 가지인가?  

적게 배웠고 배움에 의해 성취하지 못하는 자, 적게 배웠고 배움에 의해 성취한 자, 많이 배웠고 배움에 의해 성취하지 못하는 자, 많이 배웠고 배움에 의해 성취한 자이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적게 배웠고 배움에 의해 성취하지 못한 자가 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경(經), 응송(應頌), 상세한 설명[記別, 授記], 게송(偈頌), 감흥어(感興語), 여시어(如是語), 본생담(本生譚), 미증유법(未曾有法), 문답[方等]을 적게 배운다. 그는 그 적게 배운 것의 의미를 알고 법을 안 뒤에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실천하지(닦지) 않는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적게 배웠고 배움에 의해 성취하지 못한 자가 된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적게 배웠고 배움에 의해 성취한 자가 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경 응송(應頌), 상세한 설명[記別, 授記], 게송(偈頌), 감흥어(感興語), 여시어(如是語), 본생담(本生譚), 미증유법(未曾有法), 문답을 적게 배운다. 그는 그 적게 배운 것의 의미를 알고 법을 안 뒤에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실천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적게 배웠고 배움에 의해 성취한 자가 된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많이 배웠고 배움에 의해 성취하지 못한 자가 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경(), 응송(應頌), 상세한 설명[記別, 授記], 게송(偈頌), 감흥어(感興語), 여시어(如是語), 본생담(本生譚), 미증유법(未曾有法), 문답을 많이 배운다. 그는 많이 배운 것의 의미를 알고 법을 안 뒤에 가르침을 일치하는 법을 실천하지 않는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많이 배웠고 배움에 의해 성취하지 못한 자가 된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많이 배웠고 배움에 의해 성취한 자가 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경(), 응송(應頌), 상세한 설명[記別, 授記], 게송(偈頌), 감흥어(感興語), 여시어(如是語), 본생담(本生譚), 미증유법(未曾有法), 문답을 많이 배운다. 그는 많이 배운 것의 의미를 알고 법을 안 뒤에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실천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많이 배웠고 배움에 의해 성취한 자가 된다."

 

“적게 배운 자가 계에 확고하지도 않으면

계와 배움의 양면에서 사람들은 그를 비난한다.

 

비록 적게 배웠지만, 계에 확고하면

계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칭찬한다. 그에게 배움은 성취된다.

 

많이 배웠지만, 계에 확고하지 않으면

계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비난한다. 그에게 배움은 성취되지 않는다.

 

많이 배운 자가 계에도 확고하면

계와 배움의 양면에서 사람들은 그를 칭찬한다.

 

많이 배우고, 법을 지니고, 지혜를 갖춘 세존의 제자

잠부 강의 금으로 만든 금화 같은 그를 누가 비난할 수 있는가?

신들도 그를 칭찬하고, 범천도 칭찬한다.”

 

sobhanasuttaṃ (AN 4.7-빛남 경)

7. “비구들이여, 성취되고, 훈련되고, 자신감을 가지고, 많이 배우고, 법을 명심하고,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실천하는 이런 네 사람이 승가를 빛나게 한다. 어떤 네 사람인가?

비구들이여, 성취되고, 훈련되고, 자신감을 가지고, 많이 배우고, 법을 명심하고,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실천하는(닦는) 비구가 승가를 빛나게 한다. 비구들이여, 성취되고, 훈련되고, 자신감을 가지고, 많이 배우고, 법을 명심하고,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실천하는 비구니가 승가를 빛나게 한다. 비구들이여, 성취되고, 훈련되고, 자신감을 가지고, 많이 배우고, 법을 명심하고,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실천하는 청신사가 승가를 빛나게 한다. 비구들이여, 성취되고, 훈련되고, 자신감을 가지고, 많이 배우고, 법을 명심하고,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실천하는 청신녀가 승가를 빛나게 한다. 비구들이여, 성취되고, 훈련되고, 자신감을 가지고, 많이 배우고, 법을 명심하고,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실천하는 이런 네 사람이 승가를 빛나게 한다.”

 

“성취되고, 훈련되고, 자신감을 가지고, 많이 배우고, 법을 명심하고,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실천하는 사람, 이런 그가 승가를 빛나게 하는 사람이라고 불린다.

 

계를 갖춘 비구, 많이 배운 비구니, 믿음이 있는 청신사, 믿음이 있는 청신녀 - 이들이 승가를 빛나게 한다. 참으로 이들에 의해 승가가 빛난다.

 

vesārajjasuttaṃ (AN 4.8-확신(무외) 경)

8. “비구들이여, 여래에게 이런 네 가지 힘[四無畏. 사무외. 네가지 두려움이 없음)이 있다. 이러한 힘을 갖춘 여래는 최상의 지위를 얻었고 대중에서 사자후를 토하고 브라흐마의 바퀴[梵輪]를 굴린다. 어떤 네 가지인가?

 

‘그대가 비록 바르게 깨달은 자[正等覺]라 자처하지만 이런 법들은 철저하게 깨닫지 못했다.’라고 이 세상에서 적절한 이유를 가지고 나를 질책할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신이나 마라나 범천의 어떤 움직임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세상에서 법을 가지고 나를 질책하려 한다면, 비구들이여, 나는 내게서 이런 말을 들을 어떤 움직임도 찾아 볼 수 없다. 비구들이여, 나는 내게서 이런 움직임을 찾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안온(安穩)을 얻고 힘을 얻어 머문다.  

 

‘그대가 번뇌를 멸한 자라고 자처하지만 이런 번뇌는 완전히 멸하지 못했다.’라고 이 세상에서 적절한 이유를 가지고 나를 질책할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신이나 마라나 범천의 어떤 움직임도 찾아볼 수 없다. 비구들이여, 나는 내게서 이런 움직임을 찾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안온(安穩)얻고 힘을 얻어 머문다.

 

'그대가 장애가 된다고 설한 법들을 수용하더라도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라고 이 세상에서 적절한 이유를 가지고 나를 질책할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신이나 마라나 범천의 어떤 움직임도 찾아볼 수 없다. 비구들이여, 나는 내게서 이런 움직임을 찾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안온(安穩)을 얻고 힘을 얻어 머문다.

 

‘그대가 어떤 사람을 위해서 법을 설하고 그 사람이 그대로 실천하더라도 그것은 괴로움의 파괴로 인도하지 못한다.’라고 이 세상에서 적절한 이유를 가지고 나를 질책할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신이나 마라나 범천의 어떤 움직임도 찾아볼 수 없다. 비구들이여, 나는 내게서 이런 움직임을 찾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안은(安隱)을 얻고 힘을 얻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의 네 가지 힘[四無畏]이다. 이러한 힘을 구족하여 여래는 최상의 지위를 얻었고 대중에서 사자후를 토하고 브라흐마의 바퀴[梵輪]을 굴린다.”

 

“누구든지 이런 교리에 의지하는 여러 사람 그리고 의지하는 사문∙바라문

힘이 있고 교리를 넘어선 여래에게 오면 그런 교리들은 힘없이 무너진다.

 

모든 존재에 대한 연민으로 법륜을 온전하게 굴리는 사람

이렇게 신과 인간 가운데 으뜸이고, 존재를 넘어선 그를 증생들은 공경한다.”

 

taṇhuppādasuttaṃ (AN 4.9-갈애(愛)의 생김 경)

9.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갈애가 일어날 때 어디에서 일어나는지에 따라 이런 네 가지 갈애의 일어남이 있다. 어떤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갈애가 일어날 때 의복을 원인으로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갈애가 일어날 때 탁발음식을 원인으로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갈애가 일어날 때 거처를 원인으로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갈애가 일어날 때 이렇게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원인으로 일어난다.

 

“갈애를 동반하는 사람은 오랜 세월 윤회한다.

이 세상의 존재거나 다른 종류로 전개되는 윤회를 건너지 못한다.

 

이렇게 갈애가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위험을 알아서

비구는 갈애가 없는 자, 붙잡지 않는 자, 마음챙김을 가진 자로서 유행해야 한다."

 

yogasuttaṃ (AN 4.10-속박 경)

10. “비구들이여, 네 가지 속박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감각적 쾌락의 속박, 존재의 속박, 견해의 속박, 무명의 속박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감각적 쾌락의 속박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감각적 쾌락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잘못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한다. 감각적 쾌락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는 그에게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 감각적 쾌락을 즐거워함,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 감각적 쾌락에 대한 열중,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증, 감각적 쾌락에 대한 열기, 감각적 쾌락에 대한 얽매임,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가 함께 잠재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속박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감각적 쾌락의 속박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존재의 속박이 있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존재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한다. 존재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는 그에게 존재에 대한 탐욕, 존재에 대한 즐거워함, 존재에 대한 갈망, 존재에 대한 열중, 존재에 대한 갈증, 존재에 대한 열기, 존재에 대한 얽매임, 존재에 대한 갈애가 함께 잠재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존재의 속박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감각적 쾌락의 속박이 있고 존재의 속박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견해의 속박이 있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견해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견해의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한다. 견해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는 그에게 견해들에 대한 탐욕, 견해에 대한 즐거워함, 견해에 대한 갈망, 견해에 대한 열중, 견해에 대한 갈증, 견해에 대한 열기, 견해에 대한 얽매임, 견해에 대한 갈애가 함께 잠재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견해의 속박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감각적 쾌락의 속박이 있고 존재의 속박이 있고 견해의 속박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무명의 속박이 있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한다.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는 그에게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들에 대한 무명과 무지가 함께 잠재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무명의 속박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감각적 쾌락의 속박, 존재의 속박, 견해의 속박, 무명의 속박이 있고, 오염원이고 미래에 태어나고 늙고 죽어야 하는 존재로 다시 이끌고 두렵고 과보가 괴로움인 악한 불선법들에 의해 묶인 자가 있다. 다시 태어남[再生]을 가져오고 두렵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있게 하는 악한 선하지 않은 법들에 묶인 자가 있다. 그래서 유가안온(瑜伽安穩)을 얻지 못한 자라고 불린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네 가지 속박이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끊음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감각적 쾌락의 속박을 끊음, 존재의 속박을 끊음, 견해의 속박을 끊음, 무명의 속박을 끊음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감각적 쾌락의 속박을 끊음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감각적 쾌락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감각적 쾌락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아는 그에게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 감각적 쾌락에 대한 즐거워함,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 감각적 쾌락에 대한 열중,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증, 감각적 쾌락에 대한 열기, 감각적 쾌락에 대한 얽매임,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가 잠재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감각적 쾌락의 속박을 끊음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감각적 쾌락의 속박을 끊음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존재의 속박을 끊음이 있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존재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존재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아는 그에게 존재들에 대한 탐욕, 존재에 대한 즐거워함, 존재에 대한 갈망, 존재에 대한 열중, 존재에 대한 갈증, 존재에 대한 열기, 존재에 대한 얽매임, 존재에 대한 갈애가 잠재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존재의 속박을 끊음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감각적 쾌락을 끊음이 있고, 존재들의 속박을 끊음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견해의 속박을 끊음이 있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견해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견해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아는 그에게 견해들에 대한 탐욕, 견해에 대한 즐거워함, 견해에 대한 갈망, 견해에 대한 열중, 견해에 대한 갈증, 견해에 대한 열기, 견해에 대한 얽매임, 견해에 대한 갈애가 잠재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견해의 속박을 끊음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감각적 쾌락의 속박을 끊음이 있고, 존재들의 속박을 끊음이 있고, 견해들의 속박을 끊음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무명의 속박을 끊음이 있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아는 그에게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들에 대한 무명과 무지가 잠재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무명의 속박을 끊음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감각적 쾌락의 속박을 끊음, 존재들의 속박을 끊음, 견해들의 속박을 끊음, 무명의 속박을 끊음이 있고, 오염원이고 미래에 태어나고 늙고 죽어야 하는 존재로 다시 이끌고 두렵고 과보가 괴로움인 악한 불선법들로부터 끊어진 자가 있다. 그래서 유가안온(瑜伽安穩)을 얻은 자라고 불린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네 가지 속박을 끊음이다."

 

“감각적 쾌락의 속박에 묶이고, 존재의 속박에 의해 양쪽으로 묶이고

견해의 속박에 묶이고, 무명을 따르는 중생들은

윤회로 나아가니, 태어남과 죽음으로 이끌리는 자들이다.

 

감각적 쾌락과 존재의 속박을 모든 면에서 철저히 알고

견해의 속박을 뿌리 뽑은 뒤에 무명을 사라지게 한

모든 속박이 끊어진 그들이 참으로 속박을 극복한 성자이다.

 

 

 

제1장 반다가마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