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앙굿따라 니까야

넷의 모음 - 13. 두려움 품(Bhaya-vagga. AN4.121-130)

실론섬 2014. 6. 28. 19:07

제13장 두려움 품 Bhaya-vagga(AN4.121-130)

 

attānuvādasuttaṃ (AN 4.121-자책(自責) 경)

121.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두려움이 있다. 어떤 네 가지인가?

자책(自責)에 대한 두려움, 남의 책망에 대한 두려움, 형벌에 대한 두려움, 악처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자책에 대한 두려움은 무엇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이렇게 숙고한다. 

‘만약 내가 몸으로 나쁜 행위를 하고, 말로 나쁜 행위를 하고, 마음으로 나쁜 행위를 한다면 어떻게 계(율)에 의해서 내가 나를 질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자책에 대한 두려움으로 두려워진 그는 몸의 나쁜 행위를 버린 뒤에 몸의 좋은 행위를 닦고, 말의 나쁜 행위를 버린 뒤에 말의 좋은 행위를 닦고, 마음의 나쁜 행위를 버린 뒤에 마음의 좋은 행위를 닦고, 자신의 청정함을 보호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자책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불린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남의 책망에 대한 두려움은 무엇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이렇게 숙고한다. 

‘만약 내가 몸으로 나쁜 행위를 하고, 말로 나쁜 행위를 하고, 마음으로 나쁜 행위를 한다면 어떻게 계에 의해서 남이 나를 질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갸?'라고. 

남의 책망에 대한 두려움으로 두려워진 그는 몸의 나쁜 행위를 버린 뒤에 몸의 좋은 행위를 닦고, 말의 나쁜 행위를 버린 뒤에 말의 좋은 행위를 닦고, 마음의 나쁜 행위를 버린 뒤에 마음의 좋은 행위를 닦고, 자신의 청정함을 보호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남의 책망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불린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형벌에 대한 두려움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왕들이 범죄를 저지른 도둑을 붙잡은 뒤 여러 가지 형벌을 가하는 것을 본다. 즉 채찍으로 때리기도 하고, 몽둥이로 때리기도 하고, 둘로 갈라진 반토막의 막대기로 때리기도 하고, 손을 자르기도 하고, 발을 자르기도 하고, 손발을 다 자르기도 하고, 귀를 자르기도 하고, 코를 자르기도 하고, 귀와 코를 다 자르기도 한다. 식초 그릇에 넣는 고문을 하기도 하고, 소라의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은 고문을 하기도 하고, 아수라의 입을 만드는 고문을 하기도 하고, 온 몸에 불을 붙이는 고문을 하기도 하고, 손에 불을 붙이는 고문을 하기도 하고, 침대를 만드는 풀로 감싸 가죽끈으로 묶는 고문을 하기도 하고, 나무껍질로 된 옷을 입히는 고문을 하기도 하고, 영양처럼 만드는 고문을 하기도 하고, 갈고리로 꿰어 걸어 놓는 고문을 하기도 하고, 칼로 온몸을 동전 크기만큼 자르는 고문을 하기도 하고, 상처에 소금을 바르는 고문을 하기도 하고 가죽끈으로 때리며 장애물을 통과시키는 고문을 하기도 하고, 작은 의자 위에 짚더미로 둘러싸는 고문을 하기도 하고, 뜨거운 기름을 뿌리기도 하고, 개가 물도록 놓아두기도 하고, 살아있는 것을 창으로 겁주기도 하고, 칼로 머리를 자르기도 한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이런 악한 행위들을 원인으로 범죄를 저지른 도둑을 붙잡은 뒤 여러 가지 형벌을 가한다. 즉 채찍으로 때리기도 하고, ··· 칼로 머리를 자르기도 한다. 만약 나도 그런 악한 행위를 한다면 왕들은 나도 붙잡은 뒤 여러 가지 형벌을 가할 것이다. 즉 채찍으로 때리기도 하고, 몽둥이로 때리기도 하고, 둘로 갈라진 반토막의 막대기로 때리기도 하고, 손을 자르기도 하고, 발을 자르기도 하고, 손발을 다 자르기도 하고, 귀를 자르기도 하고, 코를 자르기도 하고, 귀와 코를 다 자르기도 할 것이다. 식초 그릇에 넣는 고문을 하기도 하고, 소라의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은 고문을 하기도 하고, 아수라의 입을 만드는 고문을 하기도 하고, 온 몸에 불을 붙이는 고문을 하기도 하고, 손에 불을 붙이는 고문을 하기도 하고, 침대를 만드는 풀로 감싸 가죽끈으로 묶는 고문을 하기도 하고, 나무껍질로 된 옷을 입히는 고문을 하기도 하고, 영양처럼 만드는 고문을 하기도 하고, 갈고리로 꿰어 걸어 놓는 고문을 하기도 하고, 칼로 온몸을 동전 크기만큼 자르는 고문을 하기도 하고, 상처에 소금을 바르는 고문을 하기도 하고 가죽끈으로 때리며 장애물을 통과시키는 고문을 하기도 하고, 작은 의자 위에 짚더미로 둘러싸는 고문을 하기도 하고, 뜨거운 기름을 뿌리기도 하고, 개가 물도록 놓아두기도 하고, 살아있는 것을 창으로 겁주기도 하고, 칼로 머리를 자르기도 할 것이다.'라고.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두려워진 그 약탈자는 남들의 것을 빼앗지 않는다. 몸의 나쁜 행위를 버린 뒤에 몸의 좋은 행위를 닦고, 말의 나쁜 행위를 버린 뒤에 말의 좋은 행위를 닦고, 마음의 나쁜 행위를 버린 뒤에 마음의 좋은 행위를 닦고, 자신의 청정함을 보호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불린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악처에 대한 두려움은 무엇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이렇게 숙고한다. 

‘몸의 나쁜 행위의 악한 과보는 다시 태어남을 이끌고, 말의 나쁜 행위의 악한 과보는 다시 태어남을 이끌고, 마음의 나쁜 행위의 악한 과보는 다시 태어남을 이끈다. 만약 내가 몸으로 나쁜 행위를 하고, 말로 나쁜 행위를 하고, 마음으로 나쁜 행위를 한다면 어떻게 내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나지 않겠는가?’라고.

악처에 대한 두려움으로 두려워진 그는 몸의 나쁜 행위를 버린 뒤에 몸의 좋은 행위를 닦고, 말의 나쁜 행위를 버린 뒤에 말의 좋은 행위를 닦고, 마음의 나쁜 행위를 버린 뒤에 마음의 좋은 행위를 닦고, 자신의 청정함을 보호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악처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두려움이 있다.”

 

ūmibhayasuttaṃ (AN 4.122-파도 경)

122. “비구들이여, 물에 들어가는 사람이 의심해야 하는 이런  네 가지 두려움이 있다. 어떤 넷인가?

파도의 두려움, 악어의 두려움, 소용돌이의 두려움, 상어의 두려움이다. 

비구들이여, 물에 들어가는 사람이 의심해야 하는 이런 네 가지 두려움이 있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여기 이 법과 율에서 집으로부터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어떤 좋은 가문의 아들이 의심해야 하는 네 가지 두려움이 있다. 어떤 넷인가? 

파도의 두려움, 악어의 두려움, 소용돌이의 두려움, 상어의 두려움이다.

 

*좋은 가문의 아들'은 kula-putta를 직역한 것이다. 주석서는 두 가지 좋은 가문의 아들이 있다. 태생이 좋은 가문의 아들(jati-kula-putta)과 스승의 가문의 아들(acara-kula-putta)이다.(MA.i.111)라고 주석하면서 대부분의 문맥에서 스승의 가문의 아들로 해석하고 있다. 물론 스승의 가문의 아들이란 세존의 가문의 아들 즉 세존의 아들이란 뜻이며 출가한 비구들을 지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국에서는 선남자(善男子)로 옮겼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파도의 두려움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믿음이 있는 좋은 가문의 아들이 ‘나는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에 떨어진다. 괴로움에 떨어지고, 괴로움에 시달린다. 이 전체 괴로움 무더기의 끝맺음이 알려지게 된다면!'이라고 생각하여 집으로부터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그러면 그런 출가자를 동료 수행자들이 훈계하고 가르친다. 

‘그대는 앞으로 볼 때는 이와 같이 해야 하고, 뒤로 돌아볼 때는 이와 같이 해야 하고, 구부릴 때는 이와 같이 해야 하고, 펼 때는 이와 같이 해야 하고, 가사와 발우와 의복을 지닐 때는 이와 같이  해야 합니다.’라고.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예전에 재가자였을 때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훈계하고 가르쳤다. 그런데 생각건대 아들쯤 되어 보이고 손자쯤 되어 보이는 이들이 우리를 훈계하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화가 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그는 닦음을 포기하고 낮은 삶으로 돌아간다. 이것을, 비구들이여, 파도의 두려움이 두려워 닦음을 포기하고 낮은 삶으로 돌아간 비구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파도에 대한 두려움이란 것은 분노와 절망을 두고 한 말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파도의 두려움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악어의 두려움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믿음이 있는 좋은 가문의 아들이 ‘나는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에 떨어진다. 괴로움에 떨어지고, 괴로움에 시달린다. 이 전체 괴로움 무더기의 끝맺음이 알려지게 된다면!'이라고 생각하여 집으로부터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그러면 그런 출가자를 동료 수행자들이 훈계하고 가르친다.  

‘그대는 이것은 씹어도 되고, 그대는 이것은 씹지 않아야 하고, 그대는 이것은 먹어도 되고, 그대는 이것은 먹지 않아야 하고, 그대는 이것은 맛 보아도 되고, 그대는 이것은 맛보지 않아야 하고, 그대는 이것은 마셔도 되고, 이것은 마시지 않아야 합니다. 그대가 씹어도 되는 적당한 것이고, 그대가 씹지 않아야 하는 적당하지 않은 것이고, 그대가 먹어도 되는 적당한 것이고, 그대가 먹지 않아야 하는 적당하지 않은 것이고, 그대가 맛보아도 되는 적당한 것이고, 그대가 맛보지 않아야 하는 적당하지 않은 것이고, 그대가 마셔도 되는 적당한 것이고, 그대가 마시지 않아야 하는 적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적당한 때에 그대는 씹어도 되고, 적당하지 않은 때에 그대는 씹지 않아야 하고, 적당한 때에 그대는 먹어도 되고, 적당하지 않은 때에 그대는 먹지 않아야 하고, 적당한 때에 그대는 맛보아도 되고, 적당하지 않은 때에 그대는 맛보지 않아야 하고, 적당한 때에 그대는 마셔도 되고, 적당하지 않은 때에 그대는 마시지 않아야 합니다.'라고.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예전에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씹고, 원하지 않는 것은 씹지 않는 재가자였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먹고, 원하지 않는 것은 먹지 않는 재가자였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맛보고, 원하지 않는 것은 맛보지 않는 재가였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마시고, 원하지 않는 것은 마시지 않는 재가자였다. 우리는 적당한 것도 씹었고, 적당하지 않은 것도 씹었다. 우리는 적당한 것도 먹었고, 적당하지 않은 것도 먹었다. 우리는 적당한 것도 맛보았고, 적당하지 않은 것도 맛보았다. 우리는 적당한 것도 마셨고, 적당하지 않은 것도 마셨다. 우리는 적당한 때에도 씹었고, 적당하지 않은 때에도 씹었다. 우리는 적당한 때에도 먹었고, 적당하지 않은 때에도 먹었다. 우리는 적당한 때에도 맛보았고, 적당하지 않은 때에도 맛보았다. 우리는 적당한 때에도 마셨고, 적당하지 않은 때에도 마셨다. 믿음 있는 장자들이 낮의 적당하지 않은 때에 우리에게 공양하는 맛있는 딱딱한 음식과 부드러운 음식을, 생각건대, 나의 입을 차단하는구나.'라고.

화가 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그는 닦음을 포기하고 낮은 삶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악어의 두려움이 두려워 닦음을 포기하고 낮은 삶으로 되돌아간 비구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악어의 두려움이라는 것은 음식에 대한 욕심을 두고 한 말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악어의 두려움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소용돌이의 두려움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믿음이 있는 좋은 가문의 아들이 ‘나는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에 떨어진다. 괴로움에 떨어지고, 괴로움에 시달린다. 이 전체 괴로움 무더기의 끝맺음이 알려지게 된다면!'이라고 생각하여 집으로부터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이렇게 출가한 그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몸을 보호하지 않고, 말을 보호하지 않고, 마음을 보호하지 않고, 마음챙김을 확립하지 않고, 감각기능들을 단속하지 않은 채 마을이나 성읍으로 탁발을 하러 들어간다. 그는 거기서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쾌락을 갖추고 완비하여 즐기고 있는 것을 본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예전에 재가자였을 때 우리는 다섯 가닥의 감각적 쾌락을 갖추고 완비하여 즐겼다. 나의 가문에는 재물이 있다. 재물을 즐기고 공덕을 짓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 나는 닦음을 포기하고 낮은 삶으로 돌아가서 재물을 즐기고 공덕을 지어야겠다.'라고. 그는 닦음을 포기하고 낮은 삶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소용돌이의 두려움이 두려워 닦음을 포기하고 낮은 삶으로 돌아간 비구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소용돌이의 두려움이라는 것은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들에 묶인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소용돌이의 두려움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상어의 두려움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믿음이 있는 좋은 가문의 아들이 ‘나는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에 떨어진다. 괴로움에 떨어지고, 괴로움에 시달린다. 이 전체 괴로움 무더기의 끝맺음이 알려지게 된다면!'이라고 생각하여 집으로부터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이렇게 출가한 그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몸을 보호하지 않고, 말을 보호하지 않고, 마음을 보호하지 않고, 마음챙김을 확립하지 않고, 감각기능들을 단속하지 않은 채 마을이나 성읍으로 탁발을 하러 들어간다. 그는 거기서 옷을 제대로 입지 않았거나 제대로 감싸지 않은 여인을 본다.  그에게 옷을 제대로 입지 않았거나 제대로 몸을 감싸지 않은 여인을 본 뒤에 탐욕이 마음을 더럽힌다. 그는 탐욕이 더럽힌 마음 때문에 닦음을 포기하고 낮은 삶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상어의 두려움이 두려워 닦음을 포기하고 낮은 삶으로 돌아간 비구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상어의 두려움이라는 것은 여인을 두고 한 말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상어의 두려움이라고 불린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여기 이 법과 율에서 집으로부터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어떤 좋은 가문의 아들이 의심해야 하는 네 가지 두려움이다.”

 

paṭhamanānākaraṇasuttaṃ (AN 4.123-다름 경1)
123. “비구들이여, 세상에 존재하는 이런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어떤 네 가지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그것을 즐기고, 그것을 열망하고, 그것에 따르는 행복을 경험한다. 거기에서 흔들리지 않고 거기에 기울고 거기에 많이 머물고 퇴보하지 않는 그는, 죽으면, 범신천(梵神天)의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범신천의 신들의 수명의 기준은 일 겁이다. 거기서 범부는 수명의 기준만큼 머문 뒤에, 그 신들의 기준이 모두 지나면 지옥으로도 가고 축생의 모태로도 가고 아귀계로도 간다. 그러나 여래의 제자는 거기서 수명의 기준만큼 머문 뒤에, 그 신들의 수명의 기준이 모두 지나면 그 존재에서 오직 완전히 반열반한다. 비구들이여, 베우지 못한 범부와 비교할 때, 갈 곳과 태어남에 대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에게 이런 차이가 있고 이런 특별함이 있고 이런 다름이 있다.

 

*'범신천'은 Brahmakayika 를 직역한 것이다. "디가니까야 주석서"는 범중천(Brahma-parisajja)와 범보천(Brahma-purohita)과 대범천(Mahabrahma)이라고 설명하고 있다.(DA.ii.510) 이 셋은 색계초선천을 구성하고 있는 세상이다. 본문에서도 나타나듯이 색계천상은 삼매를 닦아서 나는 천상이다. 그 가운데 초선을 닦아서 태어나는 곳이 바로 색계 초선천이다. 초선을 약하게 닦아서는 범중천에 태어나고 중간 정도로 닦아서는 범보천에 태어나고 강하게 닦아서는 대범천에 태어난다고 한다. 이러한 색계초선천을 통틀어서 초기경전은 범신천이라 부르고 있다.

*유학인 성스러운 제자는 재생연결을 할 때에 낮은 곳으로는 화현하지 않고 그 색계 존재에서 다시 두 번째, 세 번째의 다른 범천의 세상에서 반열하지만 범부는 다시 지옥등으로 가게 된다. 이것이 차이점이라는 뜻이다.(AA.iii.124)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그것을 즐기고, 그것을 열망하고, 그것에 따르는 행복을 경험한다. 거기에서 흔들리지 않고 거기에 기울고 거기에 많이 머물고 퇴보하지 않는 그는, 죽으면, 광음천(光音天)의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광음천의 신들의 수명의 기준은 이 겁이다. 거기서 범부는 수명의 기준만큼 머문 뒤에, 그 신들의 기준이 모두 지나면 지옥으로도 가고 축생의 모태로도 가고 아귀계로도 간다. 그러나 여래의 제자는 거기서 수명의 기준만큼 머문 뒤에, 그 신들의 수명의 기준이 모두 지나면 그 존재에서 오직 완전히 반열반한다. 비구들이여, 베우지 못한 범부와 비교할 때, 갈 곳과 태어남에 대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에게 이런 차이가 있고 이런 특별함이 있고 이런 다름이 있다.

 

*'광음천'은 색계 2선천의 세 번째 천상이다. 제2선을 닦아서 태어나는 2선천에는 소광천(Parittabha)과 무량광천(Appamanabha)과 광음천(Abhassara)이 있는데 여기서는 이 가운데서 제일 높은 광음천을 대표로 들고 있다. 여기서 원어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제2선천의 욧점은 광명(abha)이다. 제2선의 욧점이 희열과 행복이듯이 여기서 광명은 희열과 자비의 빛을 말한다. 임종시에 2선에 든 정도에 따라서 광명의 크기도 달라지는 것이다. 주석서에서는 '햇불의 빛처럼 이들의 몸으로부터 광명이 계속해서 떨치고 나와 떨어지는 것처럼 나온다고 해서 광음천이라 한다.(DA.ii.509)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제3선(三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그것을 즐기고, 그것을 열망하고, 그것에 따르는 행복을 경험한다. 거기에서 흔들리지 않고 거기에 기울고 거기에 많이 머물고 퇴보하지 않는 그는, 죽으면, 변정천(遍淨天)의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광음천의 신들의 수명의 기준은 사 겁이다. 거기서 범부는 수명의 기준만큼 머문 뒤에, 그 신들의 기준이 모두 지나면 지옥으로도 가고 축생의 모태로도 가고 아귀계로도 간다. 그러나 여래의 제자는 거기서 수명의 기준만큼 머문 뒤에, 그 신들의 수명의 기준이 모두 지나면 그 존재에서 오직 완전히 반열반한다. 비구들이여, 베우지 못한 범부와 비교할 때, 갈 곳과 태어남에 대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에게 이런 차이가 있고 이런 특별함이 있고 이런 다름이 있다.

 

*'변정천은 Subhakinha를 직역한 것이다. 3선천은 소정천(Parittasubha)과 무량정천(Appamanasubha)과 변정천(Subhakinha)인데 여기서는 이 가운데 제일 높은 변정천을 대표로 들고 있다. 3선천의 키워드는 subha(깨끗함)이다. 변정천을 뜻하는 Subhakinha 의 kinha는 본래는 검은색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굳음, 덩어리'를 뜻한다. 광명이 덩어리져서 오직 광명 뿐인 그런 경지이다. 그래서 주석서는 '깨끗함이 뿔려지고 흩뿌려졌다. 깨끗한 몸의 밝은 빛깔로 하나로 뭉쳐졌다'는 뜻이다.(DA.ii.509)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그것을 즐기고, 그것을 열망하고, 그것에 따르는 행복을 경험한다. 거기에서 흔들리지 않고 거기에 기울고 거기에 많이 머물고 퇴보하지 않는 그는, 죽으면, 광과천(廣果天)의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광음천의 신들의 수명의 기준은 오백 겁이다. 거기서 범부는 수명의 기준만큼 머문 뒤에, 그 신들의 기준이 모두 지나면 지옥으로도 가고 축생의 모태로도 가고 아귀계로도 간다. 그러나 여래의 제자는 거기서 수명의 기준만큼 머문 뒤에, 그 신들의 수명의 기준이 모두 지나면 그 존재에서 오직 완전히 반열반한다. 비구들이여, 베우지 못한 범부와 비교할 때, 갈 곳과 태어남에 대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에게 이런 차이가 있고 이런 특별함이 있고 이런 다름이 있다.

비구들이여, 세상에 존재하는 이런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광과천'은 Vehapphala를 직역한 것이다. 광과천은 색계 4선천의 첫 번째 천상인데 이 천상은 다른 천상보다 그 과보가 수승하기 때문에 광과천이라 부른다고 한다. 4선천은 광과천과 무상유정천(Asanna-satta)과 정거천(Suddha-vasa)이다. 4선에 들어서 태어난 이 천상의 경지는 다른 천상에 비하면 그 과보가 엄청나게 크다는 뜻이다. 

 

dutiyanānākaraṇasuttaṃ (AN 4.124-다름 경2)

124. “비구들이여,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네 부류의 이런 사람들이 있다. 어떤 넷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거기서 물질에 속하고, 느낌에 속하고, 인식에 속하고, 형성들에 속하고, 의식에 속한 법들을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병이고 종기고 화살이고 재난이고 결점이고 남이고 견고하지 않은 것이고 공이고 무아라고 관찰한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정거천(淨居天)의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이 정거천에 태어나는 것은 범부들과는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 제3선(三禪)을 ··· 제4선(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거기서 물질에 속하고, 느낌에 속하고, 인식에 속하고, 형성들에 속하고, 의식에 속한 법들을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병이고 종기고 화살이고 재난이고 결점이고 남이고 견고하지 않은 것이고 공이고 무아라고 관찰한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정거천(淨居天)의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이 정거천에 태어나는 것은 범부들과는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세상에 존재하는 네 부류의 이런 사람들이 있다.”

 

paṭhamamettāsuttaṃ (AN 4.125-자애 경1)

125.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런 네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무엇이 넷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자애[慈]를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문다.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 없고 해치고자 함이 없는, 자애를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문다. 그는 그것을 즐기고, 그것을 열망하고, 그것에 따르는 행복을 경험한다. 거기에서 흔들리지 않고 거기에 기울고 거기에 많이 머물고 퇴보하지 않는 그는, 죽으면, 범신천(梵神天)의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범신천의 신들의 수명의 기준은 일 겁이다. 거기서 범부는 수명의 기준만큼 머문 뒤에, 그 신들의 기준이 모두 지나면 지옥으로도 가고 축생의 모태로도 가고 아귀계로도 간다. 그러나 여래의 제자는 거기서 수명의 기준만큼 머문 뒤에, 그 신들의 수명의 기준이 모두 지나면 그 존재에서 오직 완전히 반열반한다. 비구들이여, 베우지 못한 범부와 비교 할 때, 갈 곳과 태어남에 대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에게 이런 차이가 있고 이런 특별함이 있고 이런 다름이 있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연민[悲]을 수반하는 마음을 ··· 기뻐함[喜]을 수반하는 마음을 ··· 평정[捨]을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문다.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 없고 해치고자 함이 없는, 평정을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문다. 그는 그것을 즐기고, 그것을 열망하고, 그것에 따르는 행복을 경험한다. 거기에서 흔들리지 않고 거기에 기울고 거기에 많이 머물고 퇴보하지 않는 그는, 죽으면, 광과천(廣果天)의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광음천의 신들의 수명의 기준은 오백 겁이다. 거기서 범부는 수명의 기준만큼 머문 뒤에, 그 신들의 기준이 모두 지나면 지옥으로도 가고 축생의 모태로도 가고 아귀계로도 간다. 그러나 여래의 제자는 거기서 수명의 기준만큼 머문 뒤에, 그 신들의 수명의 기준이 모두 지나면 그 존재에서 오직 완전히 반열반한다. 비구들이여, 베우지 못한 범부와 비교할 때, 갈 곳과 태어남에 대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에게 이런 차이가 있고 이런 특별함이 있고 이런 다름이 있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런 네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dutiyamettāsuttaṃ (AN 4.126-자애 경2)

126.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런 네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애[慈]을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문다.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 없고 해치고자 함이 없는, 자애를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문다. 그는 거기서 물질에 속하고, 느낌에 속하고, 인식에 속하고, 형성들에 속하고, 의식에 속한 법들을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병이고 종기고 화살이고 재난이고 결점이고 남이고 견고하지 않은 것이고 공이고 무아라고 관찰한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정거천(淨居天)의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이 정거천에 태어나는 것은 범부들과는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연민[悲]을 수반하는 마음을 ··· 기뻐함[喜]을 수반하는 마음을 ··· 평정[捨]을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문다.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 없고 해치고자 함이 없는, 평정을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문다. 그는 거기서 물질에 속하고, 느낌에 속하고, 인식에 속하고, 형성들에 속하고, 의식에 속한 법들을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병이고 종기고 화살이고 재난이고 결점이고 남이고 견고하지 않은 것이고 공이고 무아라고 관찰한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정거천(淨居天)의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이 정거천에 태어나는 것은 범부들과는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런 네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paṭhamatathāgatācchariyasuttaṃ (AN 4.127-여래의 놀라움 경1)

127. “비구들이여, 여래∙아라한∙정등각이 출현할 때에 네 가지 경이롭고 놀라운 법들이 출현한다. 어떤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보살이 도솔천에서 몸을 버리고 알아차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어머니의 태에 들어올 때, 하늘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범천이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의 인간세계, 하늘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신들의 신통을 능가하는 무량하고 고귀한 빛이 나타났다. 세상들 사이에 있는 깜깜하고, 빛이 전혀 비치지 않는, 끝이 없는 어두운 공간에도, 큰 신통력과 큰 위력을 가진 달과 태양의 빛조차 미치지 못하는 이곳에도 신들의 신통을 능가하고 무량하고 고귀한 빛이 나타났다. 거기에 태어난 중생들도 그 빛에 의해서 서로를 알았다. ‘존자들이여, 참으로 여기에 태어난 다른 중생들도 있습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여래∙아라한∙정등각이 출현할 때에 이런 첫 번째 경이롭고 놀라운 법이 출현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보살이 알아차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어머니의 태에서 나올 때, 하늘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범천이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의 인간세계, 하늘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신들의 신통을 능가하는 무량하고 고귀한 빛이 나타났다. 세상들 사이에 있는 깜깜하고, 빛이 전혀 비치지 않는, 끝이 없는 어두운 공간에도, 큰 신통력과 큰 위력을 가진 달과 태양의 빛조차 미치지 못하는 이곳에도 신들의 신통을 능가하고 무량하고 고귀한 빛이 나타났다. 거기에 태어난 중생들도 그 빛에 의해서 서로를 알았다. ‘존자들이여, 참으로 여기에 태어난 다른 중생들도 있습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여래∙아라한∙정등각이 출현할 때에 이런 두 번째 경이롭고 놀라운 법이 출현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래가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깨달을 때, 하늘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범천이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의 인간세계, 하늘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신들의 신통을 능가하는 무량하고 고귀한 빛이 나타났다. 세상들 사이에 있는 깜깜하고, 빛이 전혀 비치지 않는, 끝이 없는 어두운 공간에도, 큰 신통력과 큰 위력을 가진 달과 태양의 빛조차 미치지 못하는 이곳에도 신들의 신통을 능가하고 무량하고 고귀한 빛이 나타났다. 거기에 태어난 중생들도 그 빛에 의해서 서로를 알았다. ‘존자들이여, 참으로 여기에 태어난 다른 중생들도 있습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여래∙아라한∙정등각이 출현할 때에 이런 세 번째 경이롭고 놀라운 법이 출현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래가 위없는 법의 바퀴[법륜]를 굴릴 때,  하늘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범천이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의 인간세계, 하늘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신들의 신통을 능가하는 무량하고 고귀한 빛이 나타났다. 세상들 사이에 있는 깜깜하고, 빛이 전혀 비치지 않는, 끝이 없는 어두운 공간에도, 큰 신통력과 큰 위력을 가진 달과 태양의 빛조차 미치지 못하는 이곳에도 신들의 신통을 능가하고 무량하고 고귀한 빛이 나타났다. 거기에 태어난 중생들도 그 빛에 의해서 서로를 알았다. ‘존자들이여, 참으로 여기에 태어난 다른 중생들도 있습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여래∙아라한∙정등각이 출현할 때에 이런 세 번째 경이롭고 놀라운 법이 출현한다.   

비구들이여, 여래∙아라한∙정등각이 출현할 때에 이런 네 가지 경이롭고 놀라운 법들이 출현한다.”

 

dutiyatathāgatācchariyasuttaṃ (AN 4.128-여래의 놀라움 경2)

128. “비구들이여, 여래∙아라한∙정등각이 출현할 때에 네 가지 경이롭고 놀라운 법들이 출현한다. 어떤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을 좋아하고 감각적 쾌락에 물들어 있고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여래가 감각적 쾌락이 없는 법을 설하면 듣고자 하고 귀를 기울이며 알기 위해서 마음을 확립시킨다. 비구들이여, 여래∙아라한∙정등각이 출현할 때에 이런 첫 번째 경이롭고 놀라운 법이 출현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사람들은 자만을 좋아하고 자만에 물들어 있고 자만에 탐닉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여래가 자만을 길들이는 법을 설하면 듣고자 하고 귀를 기울이며 알기 위해서 마음을 확립시킨다. 비구들이여, 여래∙아라한∙정등각이 출현할 때에 이런 두 번째 경이롭고 놀라운 법이 출현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사람들은 고요하지 않음을 좋아하고 고요하지 않음에 물들어 있고 고요하지 않음에 탐닉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여래가 고요함으로 인도하는 법을 설하면 듣고자 하고 귀를 기울이며 알기 위해 마음을 확립시킨다. 비구들이여, 여래∙아라한∙정등각이 출현할 때에 이런 세 번째 경이롭고 놀라운 법이 출현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사람들은 무명에 빠져있고 눈이 멀어 있고 가리개에 씌어 있다. 그러나 여래가 무명을 길들이는 법을 설하면 듣고자 하고 귀를 기울이며 알기 위해 마음을 확립시킨다. 비구들이여, 여래∙아라한∙정등각이 출현할 때에 이런 네 번째 경이롭고 놀라운 법이 출현한다.

비구들이여, 여래∙아라한∙정등각이 출현할 때에 이런 네 가지 경이롭고 놀라운 법이 출현한다.”

 

abbhutadhammasuttam (AN 4.129-놀라운 법 경) 

129. “비구들이여, 아난다에게는 네 가지 경이롭고 놀라운 법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 회중이 아난다를 보기 위해서 다가가면 그를 보는 것으로 그들은 기뻐한다. 만일 거기서 아난다가 법을 설하면 가르침으로 그들은 기뻐한다. 만일 아난다가 침묵하고 있으면 비구 회중은 기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니 회중이 아난다를 보기 위해서 다가가면 그를 보는 것으로 그들은 기뻐한다. 만일 거기서 아난다가 법을 설하면 가르침으로 그들은 기뻐한다. 만일 아난다가 침묵하고 있으면 비구니 회중은 기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만일 청신사 회중이 아난다를 보기 위해서 다가가면 그를 보는 것으로 그들은 기뻐한다. 만일 거기서 아난다가 법을 설하면 가르침으로 그들은 기뻐한다. 만일 아난다가 침묵하고 있으면 청신사 회중은 기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만일 청신녀 회중이 아난다를 보기 위해서 다가가면 그를 보는 것으로 그들은 기뻐한다. 만일 거기서 아난다가 법을 설하면 가르침으로 그들은 기뻐한다. 만일 아난다가 침묵하고 있으면 청신녀 회중은 기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아난다에게는 이러한 네 가지 경이롭고 놀라운 법이 있다.”

 

cakkavattiacchariyasuttam (AN 4.130-전륜성왕이 가진 놀라움 경)

130. “비구들이여, 전륜성왕에게는 네 가지 경이롭고 놀라운 법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만일 끄샤뜨리야 회중이 전륜성왕을 보기 위해서 다가가면 그를 보는 것으로 그들은 기뻐한다. 만일 거기서 아난다가 법을 설하면 그들은 기뻐한다. 만일 전륜성왕이 침묵하고 있으면 끄샤뜨리야 회중은 기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만일 바라문 회중이 전륜성왕을 보기 위해서 다가가면 그를 보는 것으로 그들은 기뻐한다. 만일 거기서 전륜성왕이 법을 설하면 그들은 기뻐한다. 만일 전륜성왕이 침묵하고 있으면 바라문 회중은 기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만일 장자의 회중이 전륜성왕을 보기 위해서 다가가면 그를 보는 것으로 그들은 기뻐한다. 만일 거기서 전륜성왕이 법을 설하면 그들은 기뻐한다. 만일 전륜성왕이 침묵하고 있으면 장자 회중은 기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만일 사문 회중이 전륜성왕을 보기 위해서 다가가면 그를 보는 것으로 그들은 기뻐한다. 만일 거기서 전륜성왕이 법을 설하면 그들은 기뻐한다. 만일 전륜성왕이 침묵하고 있으면 사문 회중은 기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전륜성왕에게는 이러한 네 가지 경이롭고 놀라운 법이 있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아난다에게는 네 가지 경이롭고 놀라운 법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 회중이 아난다를 보기 위해서 다가가면 그를 보는 것으로 그들은 기뻐한다. 만일 거기서 아난다가 법을 설하면 가르침으로 그들은 기뻐한다. 만일 아난다가 침묵하고 있으면 비구 회중은 기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니 회중이 아난다를 보기 위해서 다가가면 그를 보는 것으로 그들은 기뻐한다. 만일 거기서 아난다가 법을 설하면 가르침으로 그들은 기뻐한다. 만일 아난다가 침묵하고 있으면 비구니 회중은 기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만일 청신사 회중이 아난다를 보기 위해서 다가가면 그를 보는 것으로 그들은 기뻐한다. 만일 거기서 아난다가 법을 설하면 가르침으로 그들은 기뻐한다. 만일 아난다가 침묵하고 있으면 청신사 회중은 기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만일 청신녀 회중이 아난다를 보기 위해서 다가가면 그를 보는 것으로 그들은 기뻐한다. 만일 거기서 아난다가 법을 설하면 가르침으로 그들은 기뻐한다. 만일 아난다가 침묵하고 있으면 청신녀 회중은 기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아난다에게는 이러한 네 가지 경이롭고 놀라운 법이 있다.”

 

 

제13장 두려움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