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기능 품 Indriya-vagga (AN 4.151-160)
indriyasuttam (AN 4.151-근 경)
151.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근[根]이 있다. 어떤 네 가지인가?
믿음의 근, 정진의 근, 마음 챙김의 근, 삼매의 근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근이 있다.”
saddhābalasuttam (AN 4.152-믿음의 힘 경)
152.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힘[力]이 있다. 어떤 네 가지인가?
믿음의 힘, 정진의 힘, 마음 챙김의 힘, 삼매의 힘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힘이 있다.”
*이것을 힘(bala)이라 하는 이유는 이들이 이와 반대되는 것들에 의해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고, 이들과 함께하는 법들을 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석서는 '불신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에서 믿음의 힘이라 한다. 나머지에도 이 방법이 적용된다.'(Ibid)라고 설명하고 있다.
paññābalasuttaṃ (AN 4.153-지혜의 힘 경)
153.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힘이 있다. 어떤 네 가지인가?
지혜의 힘, 정진의 힘, 결점 없음의 힘(비난받을 일이 없음의 힘), 따르게 함의 힘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힘이 있다.”
satibalasuttaṃ (AN 4.154-마음챙김의 힘 경)
154.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힘이 있다. 어떤 네 가지인가?
마음챙김의 힘, 삼매의 힘, 결점 없음의 힘, 따르게 함의 힘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힘이 있다.”
paṭisaṅkhānabalasuttaṃ (AN 4.155-숙고의 힘 경)
155.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힘이 있다. 어떤 네 가지인가?
숙고의 힘, 닦음과 익힘의 힘, 결점 없음의 힘, 따르게 함의 힘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힘이 있다.”
kappasuttam (AN 4.156-겁 경)
156. “비구들이여, 네 가지 헤아릴 수 없는 겁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겁이 수축할 때[壞劫.무너짐] 몇 해라거나 몇 백 년이라거나 몇 천 년이라거나 몇 십만 년이라고 쉽게 헤아릴 수가 없다.
비구들이여, 겁이 수축하여 머물 때[壞住劫] 몇 해라거나 몇 백 년이라거나 몇 천 년이라거나 몇 십만 년이라고 쉽게 헤아릴 수가 없다.
비구들이여, 겁이 팽창할 때[成劫.생성됨] 몇 해라거나 몇 백 년이라거나 몇 천 년이라거나 몇 십만 년이라고 쉽게 헤아릴 수가 없다.
비구들이여, 겁이 팽창하여 머물 때[成住劫] 몇 해라거나 몇 백 년이라거나 몇 천 년이라거나 몇 십만 년이라고 쉽게 헤아릴 수가 없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네 가지 헤아릴 수 없는 겁이 있다.”
rogasuttam (AN 4.157-병 경)
157. “비구들이여, 두 가지 병이 있다. 무엇이 둘인가
몸의 병과 마음의 병이다.
비구들이여, 중생들은 몸의 병에 관한 한 일 년 동안은 건강하게 지내기도 하고 2년 동안 건강하게 지내기도 하고 3년, 4년, 5년, 10년, 20년, 30년, 40년, 50년 동안 건강하게 지내기도 하고 백 년 동안 건강하게 지내기도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이 세상에서 마음의 병에 관한 한 잠시라도 건강하게 지내는 중생들은 번뇌 다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참으로 만나기 어렵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출가자의 병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큰 욕심을 가져 혼란스럽고 이런저런 의복, 음식, 거처, 병구완을 위한 약품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
그는 큰 욕심을 가져 혼란스럽고 이런저런 의복, 음식, 거처, 병구완을 위한 약품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남들로부터 멸시를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이득과 존경과 명성을 얻기 위해서 삿된 바램을 가진다.
그는 남들로부터 멸시를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이득과 존경과 명성을 얻기 위해 분발하고 애쓰고 힘쓴다.
그는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신도 집을 방문하고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앉고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법을 설하고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대소변을 본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출가자의 네 가지 병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마땅히 이와 같이 닦고 익혀야 한다.
‘우리는 큰 욕심을 가져 산만하고 이런저런 의복, 음식, 거처, 병구완을 위한 약품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자가 되지 않으리라.
우리는 큰 욕심을 가져 산만하고 이런저런 의복, 음식, 거처, 병구완을 위한 약품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남들로부터 멸시를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이득과 존경과 명성을 얻기 위해 삿된 바램을 가지지 않으리라.
우리는 남들로부터 멸시를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이득과 존경과 명성을 위해 분발하고 애쓰고 힘쓰지 않으리라.
우리는 추위와 더위와 배고픔과 목마름과 날파리와 모기와 바람과 뙤약볕과 파충류에 닿음과 불쾌하고 언짢은 말들을 견뎌낼 것이고, 몸에 생겨난 괴롭고 날카롭고 거칠고 쓰라리고 마음에 들지 않고 생명을 위협하는 갖가지 느낌들을 감내할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참으로 그대들은 이와 같이 닦고 익혀야 한다.”
parihānisuttaṃ (AN 4.158-쇠퇴 경)
158. 거기에서 사리뿟따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도반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대답했다. “사리뿟따 존자이시여”라고. 사리뿟따 존자는 이와 같이 말하였다.
도반들이여, 비구든 비구니든 누구든지 자신의 안에서 네 가지 법들을 관찰하는 자들은 여기서 ‘나는 선법(善法)들로부터 쇠퇴한다. 세존으로부터 이것은 쇠퇴라고 말해졌다.’라는 결론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넷입니까?
탐욕이 증장힘, 성냄이 증장함, 어리석음이 증장함, 경우와 경우 아님의 심오함에 대한 혜안(慧眼)을 얻지 못함입니다.
도반들이여, 비구든 비구니든 누구든지 자신의 안에서 이런 네 가지 법들을 관찰하는 자들은 여기서 ‘나는 선법(善法)들로부터 쇠퇴한다. 세존으로부터 이것은 쇠퇴라고 말해졌다.’라는 결론을 가져야 합니다.
도반들이여, 비구든 비구니든 누구든지 자신의 안에서 네 가지 법들을 관찰하는 자들은 여기서 ‘나는 선법(善法)들로부터 쇠퇴하지 않는다. 세존으로부터 이것은 쇠퇴가 아니라고 말해졌다.’라는 결론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넷입니까?
탐욕이 줄어듬, 성냄이 줄어듬, 어리석음이 줄어듬, 경우와 경우 아님의 심오함에 대한 혜안을 얻음입니다.
도반들이여, 비구든 비구니든 누구든지 자신의 안에서 이런 네 가지 법들을 관찰하는 자들은 여기서 ‘나는 선법(善法)들로부터 쇠퇴한다. 세존으로부터 이것은 쇠퇴라고 말해졌다.’라는 결론을 가져야 합니다."
bhikkhunīsuttaṃ (AN 4.159-비구니 경)
159.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아난다 존자가 꼬삼비에서 고시따 승원에 머물고 있었다. 그 무렵 어떤 비구니가 어떤 사람을 불러서 말했다.
“여보시오, 이리 오시오. 그대는 아난다 존자에게 가시오. 가서는 ‘존자시여, 중병에 걸려 아프고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이런 이름의 비구니가 아난다 존자의 발에 이마를 대고 존경을 표합니다.’라고 내 이름으로 아난다 존자의 발에 이마를 대고 존경을 표하시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하시오. '존자이시여, 아난다 존자는 연민을 일으키시어 비구니의 거처로 그 비구니를 방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그 사람은 그 비구니에게 대답한 뒤 아난다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아난자 존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사람은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존자시여, 중병에 걸려 아프고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이런 이름의 비구니가 아난다 존자의 발에 이마를 대고 존경을 표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존자시여, 아난다 존자는 연민을 일으키시어 비구니의 거처로 그 비구니를 방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아난다 존자는 침묵으로 허락하였다.
아난다 존자는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비구니의 거처로 그 비구니에게 갔다. 그 비구니는 멀리서 오고 있는 아난다 존자를 보았다. 보고는 겉 이불로 머리를 덮고 거짓으로 아픈척하며 침상에 누웠다. 그때 아난다 존자가 그 비구니에게 왔다. 와서는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앉은 뒤에 아난다 존자는 그 비구니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자매여, 이 몸은 음식에서 생긴 것입니다. 음식을 수단으로(의지하여) 음식은 버려져야 합니다.
자매여, 이 몸은 갈애에서 생긴 것입니다. 갈애를 수단으로 갈애는 버려져야 합니다.
자매여, 이 몸은 자만에서 생긴 것입니다. 자만을 수단으로 자만은 버려져야 합니다.
자매여, 이 몸은 성행위에서 생긴 것입니다. 성행위에 대해서 다리[橋]의 파괴가 세존에 의해서 말해졌습니다.
*'음식을 수단으로 음식을 버린다(aharam nissaya aharam pajahati)'라는 것은 현재의 먹는 음식을 의지하여 이것을 지혜롭게 수용하면서 이전의 업이라 불리는 음식을 버린다는 말이다. 그리고 현재의 먹는 음식에 대해 갈구하는 갈애도 역시 버려야 한다.(AA.iii.136)
*'이와 같이 일어난 현재의 갈애를 수단으로 윤회의 뿌리가 되는 이전의 갈애를 버린다. 그러면 현재의 갈애는 유익한 것인가 해로운 것인가? 해로운 것이다.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인가 아닌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이다. 재생연결을 가져오는 것인가 아닌가? 가져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재에 받들어 행해야 하는 갈애를 갈구하는 것도 버려야 한다.(AA.iii.136)
*'이와 같이 일어난 받들어 행해야 하는 자만(mana)을 수단으로 윤회의 뿌리가 되는 이전의 자만을 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현재의 자만도 위의 갈애의 경우와 같이 해로운 것이지만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이고, 재생연결을 가져오지 않으며, 이러한 자만에 대한 갈구도 버려야 한다.(AA.iii.136-137)
*'다리의 파괴'는 setu ghata를 직역한 것이다. 주석서는 '발자국(혹은 발)을 부수고 조건을 부수는 것'(AA.iii.137)으로 설명하고 있다.
'자매여, 이 몸은 음식에서 생긴 것입니다. 음식을 수단으로 음식은 버려져야 합니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말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연(緣)하여 말했습니까? 여기, 자매여, 비구는 이치에 맞는 고찰을 통해 음식을 먹습니다.
'맛을 즐기기 위함도 아니요, 배부르게 먹기 위함도 아니요, 몸을 살찌우기 위함도 아니요, 보기 좋게 가꾸고자함도 아니니, 다만 이 몸을 유지하여 청정범행을 돕기 위함이다. 바른 관찰로써 배고픔의 오래된 느낌만 제거하고 배부름의 새로운 느낌은 일으키지 않는다. 이와 같은 모든 문제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져 계속 평온하게 머물며 닦고 익히기 위해 이 공양을 받는다.’라고.
그는 나중에 음식을 수단으로 음식을 버립니다.
'자매여, 이 몸은 음식에서 생긴 것입니다. 음식을 수단으로 음식은 버려져야 합니다.’라고 이렇게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한 것입니다.
'자매여, 이 몸은 갈애에서 생긴 것입니다. 갈애를 수단으로 갈애는 버려져야 합니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말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했습니까? 여기, 자매여, 비구는 듣습니다.
‘이런 이름의 비구가 번뇌들의 부서짐으로부터 번뇌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문다.’라고.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언제 나도 번뇌들의 부서짐으로부터 번뇌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인가?’라고.
그는 나중에 갈애를 수단으로 갈애를 버립니다.
‘자매여, 이 몸은 갈애에서 생긴 것입니다. 갈애를 수단으로 갈애는 버려져야 합니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한 것입니다.
'자매여, 이 몸은 자만에서 생긴 것입니다. 자만을 수단으로 자만는 버려져야 합니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말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했습니까?
여기, 자매여, 비구는 듣습니다.
‘이런 이름의 비구가 번뇌들의 부서짐으로부터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문다.’라고.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그 존자는 번뇌들의 부서짐으로부터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안 될 것인가?’라고.
그는 나중에 자만을 수단으로 자만을 버립니다.
자매여, 이 몸은 자만에서 생긴 것입니다. 자만을 수단으로 자만은 버려져야 합니다.’라고 이렇게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한 것입니다.
'자매여, 이 몸은 성행위에서 생긴 것입니다. 성행위에 대해서 다리의 파괴가 세존에 의해서 말해졌습니다.'"
그러자 그 비구니는 침상에서 일어나서 윗 가사를 한쪽 어깨가 드러나게 입고 아난다 존자의 발에 이마를 대고 엎드려서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존자시여, 무지와 어리석음과 능숙하지 못함 때문에 제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런 저에게 아난다 존자께서는 미래에 다시 이와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고 제 자신을 단속할 수 있도록 제 잘못에 대한 참회를 받아 주십시오.”라고.
"자매여, 참으로 무지와 어리석음과 능숙하지 못함 때문에 그대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자매여, 그대가 잘못을 잘못으로부터 본 뒤에 법답게 바로잡았기 때문에 그대를 우리는 받아들입니다. 자매여, 이 성스러운 율에서 잘못을 잘못으로부터 본 뒤에 법답게 바로잡고 미래에 단속하는 자는 향상합니다.”
*아난다 장로가 이러한 네 가지를 설명하였을 때 비구니는 장로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욕탐이 사라졌다. 비구니는 장로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잘못을 드러내었고 장로는 그것을 받아 들였다.(AA.iii.137)
sugatavinayasuttaṃ (AN 4.160-선서의 율 경)
160. “비구들이여, 선서(善逝)와 선서의 율은 많은 사람의 이익과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연민하기 위하여, 신과 인간의 번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에 존재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선서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아라한[araham]이시며, 모든 법을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분(samma sambuddho)이시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vijjacaranasampanna)이시며, 열반으로 잘 가신 분(sugato)이시며, 중생들의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lokavidu)이시며, 위 없으신 분(anuttaro)이시며, 어리석은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purisadhammasarathi)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satthadevamanusam)이시며, 깨달은 분(buddho)이시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세존)(bahgava)인 여래가 세상에 출현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선서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선서의 율인가?
그는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고 의미와 표현이 일치하는 가르침을 설하고, 완전히 원만하고 청정한 거룩한 삶을 드러낸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선서의 율이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선서(善逝)와 선서의 율은 많은 사람의 이익과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연민하기 위하여, 신과 인간의 번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에 존재한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법은 정법을 혼란하게 하고 사라지게 한다. 어떤 네 가지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들은 단어와 문장들이 잘못 구성된 경들을 철저히 배운다. 단어와 문장이 잘못 구성되면 의미도 이해하기 어렵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정법을 혼란하게 하고 사라지게 하는 첫 번째 법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훈계하기 어렵다(가르치기 어려운). 그들은 훈계하기 어려운 성품들을 지니고 있고 인욕하지 못하고 가르침을 바르게 붙잡지 않는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정법을 혼란하게 하고 사라지게 하는 두 번째 법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많이 배웠고, 가르침을 계승하고, 법을 호지하고, 율을 호지하고, 논모(論母, 마띠까)를 호지하는 그 비구들은 진지하게 경을 남에게 가르치지 않는다. 그들이 죽은 뒤에 경들은 뿌리가 잘리어 귀의처가 되지 못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정법을 혼란하게 하고 사라지게 하는 세 번째 법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장로 비구들은 풍족하게 살고, 해이하다. 들어갈 때는 앞서고, 여읨에서는 짐을 내려놓는다. 얻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해,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 그들의 뒷사람들도 견해를 뒤따른다. 그들도 풍족하게 살고, 해이하다. 들어갈 때는 앞서고, 여읨에서는 짐을 내려놓는다. 얻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해,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정법을 혼란하게 하고 사라지게 하는 네 번째 법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정법을 혼란하게 하고 사라지게 하는 네 가지 법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법은 정법을 흔들리지 않게 하고 혼란하지 않게 하고 사라지지 않게 한다. 어떤 네 가지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들은 단어와 문장들이 바르게 구성된 경들을 철저히 배운다. 단어와 문장들이 바르게 구성되면 의미도 이해하기 쉽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정법을 흔들리지 않게 하고 혼란하지 않게 하고 사라지지 않게 하는 첫 번째 법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훈계하기 쉽다(가르치기 쉬운). 그들은 훈계하기 쉬운 성품들을 지니고 있고 인욕하고 이어지는 가르침을 바르게 붙잡는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정법을 흔들리지 않게 하고 혼란하지 않게 하고 사라지지 않게 하는 두 번째 법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들은 많이 배웠고, 가르침을 계승하고, 법을 호지하고, 율을 호지하고, 논모(論母, 마띠까)를 호지하는 그 비구들은 진지하게 경을 남에게 가르친다. 그들이 죽은 뒤에도 경들은 경들은 뿌리가 잘리지 않아 귀의처가 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정법을 흔들리지 않게 하고 혼란하지 않게 하고 사라지지 않게 하는 세 번째 법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장로 비구들은 풍족하게 살지 않고, 해이하지 않다. 들어갈 때는 짐을 내려 놓고, 여읨에서는 앞서간다(그들은 향상에 앞장서고 홀로 머물며 정진하는 것을 버리지 않는다). 얻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해,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그들의 뒷사람들도 견해를 뒤따른다. 그들도 풍족하게 살지 않고, 해이하지 않다. 들어갈 때는 짐을 내려 놓고, 여읨에서는 앞서간다. 얻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해,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정법을 흔들리지 않게 하고 혼란하지 않게 하고 사라지지 않게 하는 네 번째 법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정법을 흔들리지 않게 하고 혼란하지 않게 하고 사라지지 않게 하는 네 가지 법이다.”
제16장 기능 품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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