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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의 모음 - 18. 의도 품(Sañcetaniya-vagga. AN4.171-180)

실론섬 2014. 7. 3. 01:40

제18장 의도 품 Sañcetaniya-vagga (AN4,171-180)

 

cetanāsuttaṃ (AN 4.171-의도 경)

171. “비구들이여, 몸이 있을 때 안으로 몸의 의도(신행.身行)가 원인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말이 있을 때 안으로 말의 의도가 원인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마음이 있을 때 안으로 마음의 의도가 원인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혹은 스스로 그 몸의 의도적 행위를 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안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혹은 남들이 그 몸의 의도적 행위를 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안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혹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알아차리면서) 그 몸의 의도적 행위를 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안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혹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으면서(알아차리지 못하면서) 그 몸의 의도적 행위를 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안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유익한 것(kusala)을 유익한 것이라고 해로운 것을 해로운 것이라고 유익한 과보를 유익한 과보라고 해로운 과보를 해로운 과보라고 알면서 몸으로 의도적 행위를 짓는 것을 말한다.(AA.iii.145)
*주석서는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짓는 업의 예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남자 아이나 여자 아이가 부모님들이 하는 대로 해야지 하면서 탑에 예배를 하고 꽃을 공양하고 비구 승가를 공경한다. 그들은 이것이 유익한 것이라고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유익한 것이다. 남자 아이나 여자 아이가 손으로 부모를 때리고 비구들에게 손을 치켜들고 막대기를 들고 욕을 하는 것은 알든 모르든 해로운 업이라고 알아야 한다.'(Ibid)

 

비구들이여, 혹은 스스로 그 말의 의도적 행위를 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안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혹은 남들이 그 말의 의도적 행위를 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안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혹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그 말의 의도적 행위를 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안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혹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으면서 그 말의 의도적 행위를 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안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혹은 스스로 그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안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혹은 남들이 그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안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혹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그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안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혹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으면서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안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이 법들에 대해 무명이 따라간다(이러한 법들은 무명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함으로부터 그것을 조건으로 안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나는 몸이 없게 된다. 그것을 조건으로 안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나는 말이 없게 된다. 그것을 조건으로 안으로 즐거움움과 괴로움이 일어나는 마음(의.意)이 없게 된다. 그것을 조건으로 안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나는 터전이 없게 된다. 그것을 조건으로 안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나는 기반이 없게 된다. 그것을 조건으로 안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나는 이유가 없게 된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자기존재의 얻음이 있다. 

비구들이여, 남의 의도가 아니라 자기의 의도가 들어가는 자기존재의 얻음이 있다. 

비구들이여, 자기의 의도가 아니라 남의 의도가 들어가는 자기존재의 얻음이 있다. 

비구들이여, 자기의 의도도 남의 의도도 들어가는 자기존재의 얻음이 있다. 

비구들이여, 자기의 의도도 남의 의도도 들어가지 않는 자기존재의 얻음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네 가지 자기존재의 얻음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사리뿟따 존자가 세존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에 의해서 간략하게 설해진 이 말씀의 의미를 이렇게 상세하게 압니다. ‘거기서, 세존이시여, 남의 의도가 아니라 자기의 의도가 들어가는 자기존재를 얻는 그 중생들에게 그 몸 때문에 자기의 의도가 원인인 죽음이 있습니다. 거기서, 세존이시여, 자기의 의도가 아니라 남의 의도가 들어가는 자기존재를 얻는 그 중생들에게 그 몸 때문에 남의 의도가 원인인 죽음이 있습니다. 거기서, 세존이시여, 자기의 의도도 남의 의도도 들어가는 자기존재를 얻는 그 중생들에게 그 몸 때문에 자기의 의도도 남의 의도도 원인인 죽음이 있습니다. 거기서, 세존이시여, 자기의 의도도 남의 의도도 들어가지 않는 자기존재의 얻음에 의한 신들은 무엇이라고 보아야 합니까?”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성취한 신들이 그것에 의한다고 보아야 한다.”

 

*유희로 타락하기 쉬운 욕계의 신은 자신의 의도에 의해 죽고, 마음이 타락하기 쉬운 사대왕천의 신은 남의 의도에 의해 죽고, 인간은 자신의 의도와 남의 의도에 의해 죽는다.(AA.iii.147-148)

 

“세존이시여, 어떤 원인, 어떤 조건 때문에 여기 어떤 중생들은 여기로 오는 자여서 그 몸의 죽음으로부터 돌아옵니까? 세존이시여, 어떤 원인, 어떤 조건 때문에 여기 어떤 중생들은 여기로 오지 않는 자여서 그 몸의 죽음으로부터 돌아오지 않습니까?”

“여기, 사리뿟따여, 어떤 사람에게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오하분결.五下分結)가 버려지지 않았다. 그는 지금여기에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그것을 즐기고, 그것을 원하고, 그것에 의해 행복해한다. 거기에 서고, 거기로 기울고, 거기에 많이 머물고, 떨어지지 않고 죽으면 비상비비상처를 성취한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거기로부터 죽은 그는 여기로 오는 자여서 돌아온다.
여기, 사리뿟따여, 어떤 사람에게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가 버려졌다. 그가 지금여기에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그것을 즐기고, 그것을 원하고, 그것에 의해 행복해한다. 거기에 서고, 거기로 기울고, 거기에 많이 머물고, 떨어지지 않고 죽으면 비상비비상처를 성취한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거기로부터 죽은 그는 여기로 오지 않는 자여서 돌아오지 않는다.
사리뿟따여, 이런 원인, 이런 조건 때문에 여기 어떤 중생들은 여기로 오는 자여서 그 몸의 죽음으로부터 돌아온다. 또한, 사리뿟따여, 이런 원인, 이런 조건 때문에 여기 어떤 중생들은 여기로 오지 않는 자여서 그 몸의 죽음으로부터 돌아오지 않는다.”

 

 vibhattisuttaṃ (AN 4.172-분석 경)

172. 거기에서 사리뿟따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대답했다. "사리뿟따 존자이시여" 라고. 사리뿟따 존자는 이와 같이 말하였다. 

 

“도반들이여, 나는 구족계를 받은 뒤 보름 만에 제한된 표현으로부터 의미의 무애해[의무애해.義無碍解]를 실현하였습니다. 나는 그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하고 가르치고 밝히고 공언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의심과 혼란이 있는 자는 나에게 질문하십시오. 나는 상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얻어야 하는 법들에 대해서 아주 능숙하신 스승께서 면전에 계십니다. 

 

도반들이여, 나는 구족계를 받은 뒤 보름 만에 제한된 표현으로부터 법의 무애해[법무애해.法無碍解]를 실현하였습니다. 나는 그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하고 가르치고 밝히고 공언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의심과 혼란이 있는 자는 나에게 질문하십시오. 나는 상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얻어야 하는 법들에 대해서 아주 능숙하신 스승께서 면전에 계십니다. 


도반들이여, 나는 구족계를 받은 뒤 보름만에 제한된 표현으로부터 언어의 무애해[사무애해.辭無碍解]를 실현하였습니다. 
나는 그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하고 가르치고 밝히고 공언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의심과 혼란이 있는 자는 나에게 질문하십시오. 나는 상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얻어야 하는 법들에 대해서 아주 능숙하신 스승께서 면전에 계십니다. 


도반들이여, 나는 구족계를 받은 뒤 보름만에 제한된 표현으로부터 이해의 무애해[변무애해.辯無碍解]를 실현하였습니다. 나는 그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하고 가르치고 밝히고 공언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의심과 혼란이 있는 자는 나에게 질문하십시오. 나는 상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얻어야 하는 법들에 대해서 아주 능숙하신 스승께서 면전에 계십니다.”

 

*'네 가지 무애해(patisambhida)'는 1.뜻에 대한 무애해, 2.법에 대한 무애해, 3.언어에 대한 무애해, 4. 이해에 대한 무애해이다. 
결과에 대한 지혜를 '뜻에 대한 무애해'라고 하고, 원인에 대한 지혜를 '법에 대한 무애해'라 한다. 뜻과 법에 대해서 정확한 언어를 구사함에 대한 지혜를 '언어에 대한 무애해'라 하고, 앞의 지혜들을 대상으로 한 지혜 혹은 앞의 세 가지 지혜에 대해 각각의 대상, 역할 등으로 상세하게 아는 것을 '이해에 대한 무애해'라 한다.(XIV.21-26)

 

mahākoṭṭhikasuttaṃ (AN 4.173-마하꼿티까 경)

173. 그 무렵 마하꼿티따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 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마하꼿티따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다.

 

*마하꼿티따 존자(ayasma Mahakotthita)는 세존께서 무애해(parisambhida)를 얻은 비구들 가운데 최상이라고 칭찬하신 분이다. 그는 사왓티의 부유한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세 가지 베다에 통달했다고 하며 세존의 설법을 듣고 출가하여 곧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AA.i.286)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육촉처.六觸處)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고 나면 다른 어떤 것이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도반이여.”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고 나면 다른 어떤 것이 없습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도반이여.”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고 나면 다른 어떤 것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도반이여.”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고 나면 다른 어떤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도반이여.”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고 나면 다른 어떤 것이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물었을 때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도반이여.’라고 말했습니다.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고 나면 다른 어떤 것이 없습니까?라고 이렇게 물었을 때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도반이여'라고 말했습니다.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고 나면 다른 어떤 것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까?라고 이렇게 물었을 때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도반이여.'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고 나면 다른 어떤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까?’라고 이렇게 물었을 때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도반이여.’라고 말했스니다. 도반이여, 그렇다면 어떻게 이 말의 의미를 보아야 합니까?”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고 나면 다른 어떤 것이 있습니까?’라는 이 말은 희론을 넘어선 것을 희론하는 것입니다(분별하고 집착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하고 집착하는 하는 것입니다.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고 나면 다른 어떤 것이 없습니까?’라는 이 말은 희론을 넘어선 것을 희론하는 것입니다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고 나면 다른 어떤 것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까?’라는 이 말은 희론을 넘어선 것을 희론하는 것입니다.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고 나면 다른 어떤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까?’라는 이 말은 희론을 넘어선 것을 희론하는 것입니다.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의 떠남이 있는 만큼 희론의 떠남이 있습니다. 희론의 떠남이 있는 만큼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의 떠남이 있습니다(여섯 가지 감각 장소가 있는 한 분별과 집착이 있고, 분별과 집착이 있는 한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있는 것입니다). 
도반이여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짐으로부터 희론의 소멸이 있고, 희론의 가라앉음이 있습니다(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할 때 분별과 집착이 소멸하고 분별과 집착이 가라앉습니다).”

 

ānandasuttaṃ (AN 4.174-아난다 경)

174. 아난다 존자는 마하꼿티따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마하꼿티따 존자와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 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마하꼿티따 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다.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육촉처.六觸處)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고 나면 다른 어떤 것이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도반이여.”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고 나면 다른 어떤 것이 없습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도반이여.”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고 나면 다른 어떤 것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도반이여.”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고 나면 다른 어떤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도반이여.”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고 나면 다른 어떤 것이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물었을 때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도반이여.’라고 말했습니다.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고 나면 다른 어떤 것이 없습니까?라고 이렇게 물었을 때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도반이여'라고 말했습니다.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고 나면 다른 어떤 것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까?라고 이렇게 물었을 때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도반이여.'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고 나면 다른 어떤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까?’라고 이렇게 물었을 때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도반이여.’라고 말했스니다. 도반이여, 그렇다면 어떻게 이 말의 의미를 보아야 합니까?”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고 나면 다른 어떤 것이 있습니까?’라는 이 말은 희론을 넘어선 것을 희론하는 것입니다(분별하고 집착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하고 집착하는 하는 것입니다.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고 나면 다른 어떤 것이 없습니까?’라는 이 말은 희론을 넘어선 것을 희론하는 것입니다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고 나면 다른 어떤 것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까?’라는 이 말은 희론을 넘어선 것을 희론하는 것입니다.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고 나면 다른 어떤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까?’라는 이 말은 희론을 넘어선 것을 희론하는 것입니다.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의 떠남이 있는 만큼 희론의 떠남이 있습니다. 희론의 떠남이 있는 만큼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의 떠남이 있습니다(여섯 가지 감각 장소가 있는 한 분별과 집착이 있고, 분별과 집착이 있는 한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있는 것입니다). 
도반이여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짐으로부터 희론의 소멸이 있고, 희론의 가라앉음이 있습니다(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할 때 분별과 집착이 소멸하고 분별과 집착이 가라앉습니다).”


upavāṇasuttam (AN 4.175-우빠와나 경)
175. 그 무렵 우빠와나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갔다. 가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우빠와나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다.

 

*우빠와나 존자(ayasma Upavana)는 사왓티의 부유한 바라문 출신이라고 한다. 세존께서 사왓티의 젯따 숲에 머무실 때 세존의 위엄에 감동하여 출가하였다고 한다.(ThagA.i.308) 그는 아난다 존자 이전에 세존의 시자로 있었다.

 

“도반 사리뿟따여, 명지(明知)로 윤회의 괴로움을 종식시킵니까?”

“도반 우빠와나여,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 사리뿟다여, 그러면 실천으로 윤회의 괴로움을 종식시킵니까?”

“도반 우빠와나여,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그러면 명지와 실천으로 윤회의 괴로움을 종식시킵니까?”

“도반 우빠와나여,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그러면 명지와 실천 이외의 다른 것으로 윤회의 괴로움을 종식시킵니까?”

“도반 우빠와나여,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영지로 윤회의 괴로움을 종식시킵니까?’라고 물으면 그대는 ‘도반 우빠와나여,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도반 사리뿟다여, 그러면 실천으로 윤회의 괴로움을 종식시킵니까?'라고 물으면 그대는 '도반 우빠와나여,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대다합니다. '도반 사리뿟다여, 그러면 명지와 실천으로 윤회의 괴로움을 종식시킵니까?'라고 물으면 그대는 '도반 우빠와나여,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도반 사리뿟다여, 그러면 명지와 실천 이외의 다른 것으로 윤회의 괴로움을 종식시킵니까?’라고 물으면 그대는 모두 ‘도반 우빠와나여,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윤회의 괴로움을 종식시킵니까?”
“‘도반 우빠와나여, 만일 명지로 윤회의 괴로움을 종식시킨다고 한다면 그는 아직 집착이 남아 있는 채로 윤회의 괴로움을 종식시키는 것이 됩니다. 
도반 우빠와나여, 만일 실천으로 윤회의 괴로움을 종식시킨다고 한다면 그는 아직 집착이 남아 있는 채로 윤회의 괴로움을 종식시키는 것이 됩니다.

도반 우빠와나여, 만일 명지와 실천으로 윤회의 괴로움을 종식시킨다고 한다면 그는 아직 집착이 남아 있는 채로 윤회의 괴로움을 종식시키는 것이 됩니다. 
도반 우빠와나여, 만일 명지와 실천 이외의 다른 것으로 윤회의 괴로움을 종식시킨다면 그것은 범부가 윤회의 괴로움을 종식시키는 것이 됩니다. 
도반 우빠와나여, 범부는 명지와 실천이 없고 실천을 구족하지 못하여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합니다. 오직 실천을 구족한 자만이 있는 그대로 알고 봅니다. 있는 그대로 알고 볼 때 그는 윤회의 괴로움을 종식시키는 것입니다.”

 

āyācanasuttaṃ (AN 4.176-기원 경)

176. “비구들이여, 바르게 기원하는 믿음을 가진 비구는 이렇게 기원해야 한다. 

‘나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같은 사람이 되리라.’라고.

비구들이여,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나의 비구 제자 가운데 저울이고 표준(본받음)이다.

 

비구들이여, 바르게 기원하는 믿음을 가진 비구니는 이렇게 기원해야 한다. 

‘나는 케마 비구니와 웁빨라완나 비구니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라고.

비구들이여, 케마 비구니와 웁빨라완나는 나의 비구니 제자 가운데 저울이고 표준이다.


비구들이여, 바르게 기원하는 믿음을 가진 청신사는 이렇게 기원해야 한다. 

‘나는 찟따 장자와 핫타까 알라와까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라고. 

비구들이여, 찟따 장자와 핫타까 알라와까는 나의 청신사 제자 가운데 저울이고 표준이다.


비구들이여, 바르게 기원하는 믿음을 가진 청신녀는 이렇게 기원해야 한다.

‘나는 쿳줏따라와 웰루깐따끼 마을의 난다마따(난다의 어머니) 같은 사람이 되리라.’라고. 

비구들이여, 쿳줏따라와 난다의 어머니 웰루깐따끼야는 나의 청신녀 제자 가운데 저울이고 표준이다.”

 

rāhulasuttaṃ (AN 4.177-라훌라 경)

177. 그 무렵 라훌라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라훌라 존자에게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라훌라여, 안의 땅의 요소와 밖의 땅의 요소는 단지 땅의 요소이다. 이것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이것을 있는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본 뒤에 땅의 요소에 대해 염오하고, 땅의 요소에 대해 마음이 탐욕에서 벗어 나도록 해야 한다.

 

*'안에 있는 것(ajjhattika)'은 머리털 등의 20가지 부분에서 딱딱한 특징을 가진 땅의 요소이다. '밖에 있는 것(bahira)'은 감각기능들이 없는 바위와 산 등의 딱딱한 특징을 가진 땅의 요소이다. 나머지 요소들도 이런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AA.iii.152)

 

라훌라여, 안의 물의 요소와 밖의 물의 요소는 단지 물의 요소이다. 그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이것을 있는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본 뒤에 물의 요소에 대해 염오하고, 물의 요소에 대해 마음이 탐욕에서 벗어 나도록 해야 한다.


라훌라여, 안의 불의 요소와 밖의 불의 요소는 단지 불의 요소이다. 그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이것을 있는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본 뒤에 불의 요소에 대해 염오하고, 불의 요소에 대해 마음이 탐욕에서 벗어 나도록 해야 한다.


라훌라여, 안의 바람의 요소와 밖의 바람의 요소는 단지 바람의 요소이다. 그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이것을 있는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본 뒤에 바람의 요소에 대해 염오하고, 바람의 요소에 대해 마음이 탐욕에서 벗어 나도록 해야 한다.

 

라훌라여, 비구가 이러한 네 가지 요소들[四大]에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바르게 관찰하면, 이것이, 라훌라여, ‘비구는 갈애를 잘랐고, 족쇄를 풀었고, 바르게 자만의 관통을 통해 괴로움을 끝냈다.’라고 불린다.”

 

jambālīsuttaṃ (AN 4.178-마을 입구에 있는 연못 경)

178. “비구들이여,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떤 평화로운 마음의 해탈[心解脫.심해탈]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자기 존재[有身, 五蘊]의 소멸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가 자기 존재의 소멸에 주의를 기울이는 그에게 자기 존재의 소멸에 대해 마음은 소멸에 들어가지 못하고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확립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렇게는 그 비구에게 자기 존재의 소멸이 기대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끈끈한 액체가 묻은 손으로 나뭇가지를 잡을 것이다. 그에게 그 손은 거기에 달라붙을 것이고 붙잡힐 것이고 묶일 것이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떤 평화로운 마음의 해탈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자기 존재[有身]의 소멸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가 자기 존재의 소멸에 주의를 기울이는 그에게 자기 존재의 소멸에 대해 마음은 소멸에 들어가지 못하고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확립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지 않는다. 이렇게는 그 비구에게 자기 존재의 소멸이 기대되지 않는다.

 

*'평화로운 마음의 해탈(santa cetovimutti)'이란 여덟 가지 증득 가운데서 어느 하나의 증득이다.(AA.iii.153) 여덟 가지 증득이란 4선-4처(색계 4선과 무색계 4선)를 말하며 사마타를 닦아서 도달하는 경지이다.
*'자기 존재의 소멸(sakkaya-nirodha)'이란 삼계윤회라 불리는 자기 존재의 소멸이란 말이며 열반을 뜻한다.(Ibid)
*'들어 가지 못한다'라는 것은 자기 존재의 소멸 즉 오온의 소멸, 열반이라는 그 대상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이다.(AA.iii.153)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어떤 평화로운 마음의 해탈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자기 존재[有身]의 소멸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가 자기 존재의 소멸에 주의를 기울이는 그에게 자기 존재의 소멸에 대해 마음은 소멸에 들어가고 믿음을 가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비구들이여, 이렇게는 그 비구에게 자기 존재의 소멸이 기대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깨끗한 손으로 나뭇가지를 잡을 것이다. 그의 손은 거기에 달라붙지 않을 것이고, 붙잡히지 않을 것이고, 묶이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어떤 평화로운 마음의 해탈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자기 존재[有身]의 소멸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가 자기 존재의 소멸에 주의를 기울이는 그에게 자기 존재의 소멸에 대해 마음은 소멸에 들어가고 믿음을 가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비구들이여, 이렇게는 그 비구에게 자기 존재의 소멸이 기대된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어떤 평화로운 마음의 해탈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무명의 부숨에 주의를 기울인다. 무명의 부숨에 주의를 기울이는 그에게 무명의 부숨에 대해 마음은 부숨에 들어가지 못하고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확립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렇게는 그 비구에게 무명의 부숨이 기대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마을 입구에 오래된 연못이 있다. 사람들이 그곳으로 물이 흘러 들어오는 통로는 막아버리고 흘러 나가는 곳은 열어 놓을 것이다. 그리고 비도 제때 내리지 않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는 마을 입구에 있는 그 연못에게 제방의 부수짐이 기대되지 않는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떤 평화로운 마음의 해탈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무명의 부숨에 주의를 기울인다. 무명의 부숨에 주의를 기울이는 그에게 무명의 부숨에 대해 마음은 부숨에 들어가지 못하고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확립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렇게는 그 비구에게 무명의 부숨이 기대되지 않는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어떤 평화로운 마음의 해탈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무명의 부숨에 주의를 기울인다. 무명의 부숨에 주의를 기울이는 그에게 무명의 부숨에 대해 마음은 부숨에 들어가고 믿음을 가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비구들이여, 이렇게는 그 비구에게 무명의 부숨이 기대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마을 입구에 오래 된 연못이 있다. 사람들이 그곳으로 물이 흘러들어오는 통로는 열어놓고 흘러나가는 곳은 막을 것이다. 그리고 비도 제때 내릴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는 마을 입구에 있는 그 연못에게 제방의 부서짐이 기대된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떤 평화로운 마음의 해탈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무명의 부숨에 주의를 기울인다. 무명의 부숨에 주의를 기울이는 그에게 무명의 부숨에 대해 마음은 부숨에 들어가고 믿음을 가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비구들이여, 이렇게는 그 비구에게 무명의 부숨이 기대된다."

 

nibbānasuttaṃ (AN 4.179-열반 경) 

179. 그 무렵 아난다 존자가 사리뿟따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다.

 

“도반 사리뿟따여, 어떤 원인, 어떤 조건 때문에 여기 어떤 중생들은 지금·여기에서 완전한 열반을 증득하지 못합니까?”라고.

“여기, 도반 아난다여, 중생들은 ‘이것이 퇴보로 이끄는 인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이것이 정체로 이끄는 인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이것이 수승함으로 이끄는 인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이것이 꿰뚫음으로 이끄는 인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합니다. 도반 아난다여, 이런 원인, 이런 조건 때문에 여기 어떤 중생들은 지금·여기에서 완전한 열반을 증득하지 못합니다." 

 

*"청정도론"은 이 네 가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퇴보에 빠진 삼매가 있고, 정체에 빠진 삼매가 있고, 수승함에 동참하는 삼매가 있고, 꿰뚫음에 동참하는 삼매가 있다. 이 가운데서 각각의 선(禪)과 반대되는 것이 일어나서 퇴보에 빠진 것과, 그것에 적절한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정체에 빠진 것과, 위의 수승한 상태에 도달하여 수승함에 동참하는 것과, 역겨움이 함께한 인식과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서 꿰뚫음에 동참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말씀하셨다. '초선을 얻은 사람에게 감각적 쾌락이 함께한 인식과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날 때 그의 지혜는 퇴보에 빠진다. 그 禪에 적절한 마음챙김이 확립될 때, 그의 지혜는 정체에 빠진다. 일으킨 생각과 함께하지 않은 인식과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날 때 그의 지혜는 수승함에 동참한다. 역겨움이 함께하고 열반이라 불리는 탐욕의 소멸로 기우는 인식과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날 때 그의 지혜는 꿰뚫음에 동참한다.'(Vbn.3.30)라고. 

 

“도반 사리뿟따여, 어떤 원인, 어떤 조건 때문에 여기 어떤 중생들은 지금·여기에서 완전한 열반을 증득합니까?”

“여기, 도반 아난다여, 중생들은 ‘이것이 퇴보로 이끄는 인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이것이 정체로 이끄는 인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이것이 수승함으로 이끄는 인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이것이 꿰뚫음으로 이끄는 인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도반 아난다여, 이런 원인, 이런 조건 때문에 여기 어떤 중생들은 지금·여기에서 완전한 열반을 증득합니다.”

 
mahāpadesasuttam (AN 4.180-큰 기준 경)  
180. 한 때에 세존께서는 보가나가라에서 아난타 탑묘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큰 기준을 설하겠다. 그것을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이제 설하리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을 받들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네 가지 큰 기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말하기를 ‘도반들이여, 나는 이것을 세존의 면전에서 듣고 세존의 면전에서 받아 지녔습니다. 이것은 법이고 이것은 율이고 이것은 스승의 교법입니다.’라고 하면, 일단 그런 비구의 말을 인정하지도 말고 공박하지도 말아야 한다. 인정하지도 공박하지도 않은 

채로 그 단어와 문장들을 주의 깊게 들어서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의 말을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 보아 만일 경에 적합하지 않고 율과 맞지 않는다면 여기서 ‘이것은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 비구가 잘못 파악한 것입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해서 이것은 물리쳐야 한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말하기를 ‘도반들이여, 나는 이것을 세존의 면전에서 듣고 세존의 면전에서 받아 지녔습니다. 이것은 법이고 이것은 율이고 이것은 스승의 교법입니다.’라고 하면, 일단 그런 비구의 말을 인정하지도 말고 공박하지도 말아야 한다. 인정하지도 공박하지도 않은 채로 그 단어와 문장들을 주의 깊게 들어서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의 말을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 보아서 만일 경에 적합하고 율에 맞는다면 ‘이것은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의 말씀입니다. 이 비구가 바르게 파악한 것입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첫 번째 큰 기준이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말하기를 ‘도반들이여, 이러이러한 곳에 장로들과 유명한 스승이 계시는 승가가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그 승가의 면전에서 듣고 승가의 면전에서 받아 지녔습니다. 이것은 법이고 이것은 율이고 이것은 스승의 교법입니다.’라고 하면, 일단 그런 비구의 말을 인정하지도 말고 공박하지도 말아야 한다. 인정하지도 공박하지도 않은 채로 그 단어와 문장들을 주의 깊게 들어서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의 말을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 보아 만일 경에 적합하지 않고 율과 맞지 않는다면 여기서 ‘이것은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가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 비구가 잘못 파악한 것입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해서 이것은 물리쳐야 한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말하기를 ‘도반들이여, 이러이러한 곳에 장로들과 유명한 스승이 계시는 승가가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그 승가의 면전에 듣고 승가의 면전에서 받아 지녔습니다. 이것은 법이고 이것은 율이고 이것은 교법입니다.’라고 하면, 일단 그런 비구의 말을 인정하지도 말고 공박하지도 말아야 한다. 인정하지도 공박하지도 않은 채로 그 단어와 문장들을 주의 깊게 들어서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의 말을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 보아서 만일 경에 적합하고 율과 맞는다면 여기서‘이것은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의 말씀입니다. 이 비구가 바르게 파악한 것입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두 번째 큰 기준이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말하기를 ‘도반들이여, 이러이러한 곳에 많이 배우고 전승된 가르침에 능통하고 법(경장)을 호지하고 율[장]을 호지하고 논모(論母, 마띠까)를 호지한 많은 장로 비구들이 계십니다. 나는 이것을 그 장로들의 면전에서 듣고 장로들의 면전에서 받아 지녔습니다. 이것은 법이고 이것은 율이고 이것은 스승의 교법입니다.’라고 하면, 일단 그런 비구의 말을 인정하지도 말고 공박하지도 말아야 한다. 인정하지도 공박하지도 않은 채로 그 단어와 문장들을 주의 깊게 들어서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의 말을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 보아 만일 경에 적합하지 않고 율과 맞지 않는다면 여기서 ‘이것은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 비구가 잘못 파악한 것입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해서 이것은 물리쳐야 한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말하기를 ‘도반들이여, 이러이러한 곳에 많이 배우고 전승된 가르침에 능통하고 법(경장)을 호지하고 율[장]을 호지하고 논모(論母, 마띠까)를 호지한 많은 장로 비구들이 계십니다. 나는 이것을 그 장로들의 면전에서 듣고 장로들의 면전에서 받아 지녔습니다. 이것은 법이고 이것은 율이고 이것은 스승의 교법입니다.’라고 하면, [일단] 그런 비구의 말을 인정하지도 말고 공박하지도 말아야 한다. 인정하지도 
공박하지도 않은 채로 그 단어와 문장들을 주의 깊게 들어서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의 말을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 보아서 만일 경에 적합하고 율과 맞는다면 여기서 ‘이것은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의 말씀입니다. 이 비구가 바르게 파악한 것입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 번째 큰 기준이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말하기를 ‘도반들이여, 이러이러한 거처에 많이 배우고 전승된 가르침에 능통하고 법(경장)을 호지하고 율[장]을 호지하고 논모(論母, 마띠까)를 호지한 한 분의 장로 비구가 계십니다. 나는 이것을 그 장로의 면전에서 듣고 장로의 면전에서 받아 지녔습니다. 이것은 법이고 이것은 율이고 이것은 스승의 교법입니다.’라고 하면, 일단 그런 비구의 말을 인정하지도 말고 공박하지도 말아야 한다. 인정하지도 공박하지도 않은 채로 그 단어와 문장들을 주의 깊게 들어서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그의 말을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 보아, 만일 경에 적합하지 않고 율과 맞지 않는다면 여기서 ‘이것은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 비구가 잘못 파악한 것입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해서 이것은 물리쳐야 한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말하기를 ‘도반들이여, 이러이러한 곳에 많이 배우고 전승된 가르침에 능통하고 법(경장)을 호지하고 율[장]을 호지하고 논모(論母, 마띠까)를 호지한 한 분의 장로 비구가 계십니다. 나는 이것을 그 장로의 면전에서 듣고 장도의 면전에서 받아 지녔습니다. 이것은 법이고 이것은 율이고 이것은 스승의 교법입니다.’라고 하면, [일단] 그런 비구의 말을 인정하지도 말고 공박하지도 말아야 한다. 인정하지도 공박하지도 않은 채로 그 단어와 문장들을 주의 깊게 들어서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의 말을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 보아서 만일 경에 적합하고 율과 맞는다면 여기서 ‘이것은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의 말씀입니다. 이 비구가 바르게 파악한 것입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네 번째 큰 기준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네 가지 큰 기준이다.”

 


제18장 의도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