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실천 품 Paṭipadā-vagga (AN4.161-170)
saṃkhittasuttaṃ (AN 4.161-간략하게 경)
161.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실천(닦음)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네 가지 실천이다."
vitthārasuttaṃ (AN 4.162-상세하게 경)
162.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실천(닦음)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자는 타고난(선천적으로) 예민한 탐욕이 있어서 탐욕에서 생긴 괴로움과 고뇌(苦惱)를 계속적으로 경험한다. 타고난 예민한 성냄을 가지고 있어서 성냄에서 생긴 괴로움과 고뇌를 계속적으로 경험한다. 타고난 예민한 어리석음이 있어서 어리석음에서 생긴 괴로움과 고뇌를 계속적으로 경험한다.
그에게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기능(근)이 약하게 나타난다. 믿음의 기능, 정진의 기능, 마음챙김의 기능, 삼매의 기능, 지혜의 기능. 그는 이런 다섯 가지 기능이 약하기 때문에 번뇌들의 부서짐을 위한 느린 뒤따름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롭고 완전한 지혜도 느린 실천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자는 타고난(선천적으로) 예민한 탐욕이 있어서 탐욕에서 생긴 괴로움과 고뇌(苦惱)를 계속적으로 경험한다. 타고난 예민한 성냄을 가지고 있어서 성냄에서 생긴 괴로움과 고뇌를 계속적으로 경험한다. 타고난 예민한 어리석음이 있어서 어리석음에서 생긴 괴로움과 고뇌를 계속적으로 경험한다.
그에게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기능이 강하게 나타난다. 믿음의 기능, 정진의 기능, 마음챙김의 기능, 삼매의 기능, 지혜의 기능. 그는 이렇게 다섯 가지 기능이 강하기 때문에 번뇌들의 부숨이 빠르게 뒤따라 성취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자는 타고난 예민한 탐욕이 없어서 탐욕에서 생긴 괴로움과 고뇌를 계속적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타고난 예민한 성냄이 없어서 성냄에서 생긴 괴로움과 고뇌를 계속적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타고난 예민한 어리석음이 없어서 어리석음에서 생긴 괴로움과 고뇌를 계속적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그에게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기능이 약하게 나타난다. 믿음의 기능, 정진의 기능, 마음챙김의 기능, 삼매의 기능, 지혜의 기능. 그는 이렇게 다섯 가지 기능이 약하기 때문에 번뇌들의 부숨이 느리게 뒤따라 성취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자는 타고난 예민한 탐욕이 없어서 탐욕에서 생긴 괴로움과 고뇌를 계속적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타고난 예민한 성냄이 없어서 성냄에서 생긴 괴로움과 고뇌를 계속적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타고난 예민한 어리석음이 없어서 어리석음에서 생긴 괴로움과 고뇌를 계속적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그에게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기능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는 이렇게 다섯 가지 기능이 강하기 때문에 번뇌들의 부숨이 빠르게 뒤따라 성취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이라고 불린다."
*다섯 가지 기능(오근.五根)은 37보리분법에 포함되며 초기불교에서 설하는 수행의 중요한 지침이 된다. '청정도론'에는 이러한 다섯 가지 기능을 조화롭게 유지할 것을 강조하는데(Vis.IV.45-49) 그 가운데 한 부분을 인용한다.
'여기서 특별히 믿음과 지혜의 균등함, 삼매와 정진의 균등함을 권한다. 믿음이 강하고 지혜가 약한 자는 미신이 되고, 근거없이 믿는다. 지혜가 강하고 믿음이 약한자는 교활한 쪽으로 치우친다. 약으로 인해 생긴 병처럼 치료하기가 어렵다. 두 가지 모두 균등함을 통해서 믿을만한 것을 믿는다. 삼매는 게으름으로 치우치기 때문에 삼매가 강하고 정진이 약한 자는 게으름에 의해 압도된다. 정진은 들뜸으로 치우치기 때문에 정진이 강하고 삼매가 약한 자는 들뜸에 의해 압도된다. 삼매가 정진과 함께 짝이 될 때 게으름에 빠지지 않는다. 정진이 삼매와 함께 짝이 될 때 들뜸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둘 모두 균등해야 한다. 마음챙김은 모든 곳에서 강하게 요구된다. 마음챙김은 마음이 들뜨으로 치우치는 믿음과 정진과 지혜로 인해 들뜸에 빠지는 것을 보호하고, 게으름으로 치우치는 삼매로 인해 게으름에 빠지는 것을 보호한다.(Vis.IV.48-49)
asubhasuttaṃ (AN 4.163-부정(不淨) 경)
163.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실천(닦음)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부정(不淨)을 이어 보는(관찰하는) 자로서 몸에 머문다. 음식들을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이고, 모든 세상에 대해 기쁨이 없다는 인식을 가진 자이고, 모든 형성된 것들에서 무상을 이어 보는 자이고, 또한 죽음의 인식이 안으로 잘 확립되어 있다.
그는 믿음의 힘, 뉘우칠줄 아는 힘, 부끄러운 줄 아는 힘, 정진의 힘, 지혜의 힘인 다섯 가지 유학(有學)의 힘을 의지하여 머문다. 그러나 그에게는 믿음의 근과 정진의 근과 마음 챙김의 근과 삼매의 근과 지혜의 근인 다섯 가지 근[五根]이 약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그의 다섯 가지 기능이 약하기 때문에 번뇌들의 부숨이 느리게 뒤따라 성취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부정(不淨)을 이어 보는(관찰하는) 자로서 몸에 머문다. 음식들을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이고, 모든 세상에 대해 기쁨이 없다는 인식을 가진 자이고, 모든 형성된 것들에서 무상을 이어 보는 자이고, 또한 죽음의 인식이 안으로 잘 확립되어 있다.
그는 믿음의 힘, 뉘우칠줄 아는 힘, 부끄러운 줄 아는 힘, 정진의 힘, 지혜의 힘인 다섯 가지 유학의 힘을 의지하여 머문다. 그러나 그에게는 믿음의 근과 정진의 근과 마음 챙김의 근과 삼매의 근과 지혜의 근인 다섯 가지 근[五根]이 아주 강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그의 다섯 가지 근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번뇌들의 부숨이 빠르게 뒤따라 성취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제3선(三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러나 그에게는 믿음의 근과 정진의 근과 마음 챙김의 근과 삼매의 근과 지혜의 근인 다섯 가지 근[五根]이 약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그의 다섯 가지 기능이 약하기 때문에 번뇌들의 부숨이 느리게 뒤따라 성취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 제2선(二禪)을 ··· 제3선(三禪)을 ··· 제4선(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에게는 믿음의 근과 정진의 근과 마음 챙김의 근과 삼매의 근과 지혜의 기능인 다섯 가지 근[五根]이 아주 강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그의 다섯 가지 근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번뇌들의 부숨이 빠르게 뒤따라 성취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이라고 불린다."
paṭhamakhamasuttaṃ (AN 4.164-견딤 경1)
164.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네 가지 실천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견디지 못함의 실천, 견딤의 실천, 길들임의 실천, 평평함(고요함)의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견디지 못함의 실천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자는 모욕을 모욕으로 되갚고, 분노를 분노로 되갚고, 다툼을 다툼으로 되갚는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견디지 못함의 실천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견딤의 실천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자는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되갚지 않고, 분노를 분노로 되갚지 않고, 다툼을 다툼으로 되갚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견딤의 실천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길들임의 실천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눈으로 형색을 보면서 그 표상을 붙잡지 않으며, 또 뒤따르는 부분상을 붙잡지도 않는다. 만약 그의 눈의 근이 보호되지 않은 채 머무르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은(탐욕과 고뇌) 삿되고 선하지 않은 형상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눈의 근을 제어하기 위해 닦고 익히며, 눈의 근을 길들이기 위해 닦고 익히며, 눈의 근을 고요하게 하기 위해 닦고 익힌다. ···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 코로 냄새를 맡으면서 ··· 혀로 맛을 보면서 ··· 몸으로 감촉을 느끼면서 ···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음으로 법을 인식(지각)하면서 그 표상을 붙잡지 않으며, 또 뒤따르는 부분상을 붙잡지도 않는다. 만약 그의 마음의 근이 보호되지 않은 채 머무르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은(탐욕과 고뇌)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의 근을 제어하기 위해 닦고 익히며, 마음의 근을 길들이기 위해 닦고 익히며, 마음의 근을 고요하게 하기 위해 닦고 익힌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길들임의 실천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평평함의 실천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끊어 버리고 없앤다. 성냄에 대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끊어 버리고 없앤다. 해코지에 대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끊어 버리고 없앤다.
계속적으로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일어나면 그것을 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끊어 버리고 없앤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평평함의 실천이라고 불린다."
dutiyakhamasuttaṃ (AN 4.165-견딤 경2)
165.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네 가지 실천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견디지 못함의 실천, 견딤의 실천, 길들임의 실천, 평평함(고요함)의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견디지 못함의 실천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자는 추위와 더위와 배고픔과 목마름과, 날파리와 모기와 바람과 뙤약볕과 파충류에 닿음과 불쾌하고 언짢은 말들을 견디지 못하고, 몸에 생겨난 괴롭고 날카롭고 예리하고 고통스럽고 마음에 들지 않고 생명을 위협하는 갖가지 느낌들을 극복하지 못하는 부류가 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견디지 못함의 실천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견딤의 실천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자는 추위와 더위와 배고픔과 목마름과, 날파리와 모기와 바람과 뙤약볕과 파충류에 닿음과, 불쾌하고 언짢은 말들을 견디고, 몸에 생겨난 괴롭고 날카롭고 예리하고 고통스럽고 마음에 들지 않고 생명을 위협하는 갖가지 느낌들을 극복하는 부류가 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견딤의 실천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길들임의 실천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눈으로 형상을 보면서 그 표상을 붙잡지 않으며, 또 뒤따르는 부분상을 붙잡지도 않는다. 만약 그의 눈의 근이 보호되지 않은 채 머무르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은(탐욕과 고뇌) 삿되고 선하지 않은 형상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눈의 근을 제어하기 위해 닦고 익히며, 눈의 근을 길들이기 위해 닦고 익히며, 눈의 근을 고요하게 하기 위해 닦고 익힌다. ···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 코로 냄새를 맡으면서 ··· 혀로 맛을 보면서 ··· 몸으로 감촉을 느끼면서 ···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음으로 법을 지각하면서 그 표상[相]을 붙잡지 않으며, 또 뒤따르는 부분상[受]을 붙잡지도 않는다. 만약 그의 마음의 근이 보호되지 않은 채 머무르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은(탐욕과 고뇌)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의 근을 제어하기 위해 닦고 익히며, 마음의 근을 길들이기 위해 닦고 익히며, 마음의 근을 고요하게 하기 위해 닦고 익힌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길들임의 실천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평평함의 실천이란 어떤 것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끊어 버리고 없앤다. 성냄에 대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끊어 버리고 없앤다. 해코지에 대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끊어 버리고 없앤다. 계속해서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일어나면 그것을 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끊어 버리고 없앤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평평함의 실천이라고 불린다."
ubhayasuttaṃ (AN 4.166-양쪽 모두 경)
166.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네 가지 실천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이 가운데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 실천은 양쪽 모두 저열하다고 일컬어진다. 즉 실천이 괴로운 이것도 저열하다고 일컬어지고, 실천이 느린 이것도 저열하다고 일컬어진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실천은 양쪽 모두 저열하다고 일컬어진다.
비구들이여, 이 가운데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 실천은 괴롭기 때문에 저열하다고 일컬어진다.
비구들이여, 이 가운데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 실천은 느리기 때문에 저열하다고 일컬어진다.
비구들이여, 이 가운데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 실천은 양쪽 모두 뛰어나다고 일컬어진다. 즉 실천이 즐거운 이것도 뛰어나다고 일컬어지고, 실천이 빠른 이것도 뛰어나다고 일컬어진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실천은 양쪽 모두 뛰어나다고 일컬어진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네 가지 실천이 있다.”
mahāmoggallānasuttaṃ (AN 4.167-목갈라나 경)
167. 그 무렵 사리뿟따 존자는 마하목갈라나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마하목갈라나 존자와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나누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사리뿟따 존자는 마하목갈라나 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다.
“도반 목갈라나여, 이와 같은 네 가지 실천이 있습니다. 무엇이 넷입니까?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입니다. 도반이여, 이와 같은 네 가지 실천 중에 그대는 어떤 실천을 가져서 집착없이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했습까?”
“도반 사리뿟따여, 이와 같은 네 가지 실천이 있습니다. 무엇이 넷 입니까?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입니다. 도반이여, 이와 같은 네 가지 실천 중에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이 있습니다. 나는 이 실천을 가져서 집착없이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했습니다."
sāriputtasuttaṃ (AN 4.168-사리뿟따 경)
168. 그 무렵 마하목갈라나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나누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마하목갈라나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다.
“도반 사리뿟따여, 이와 같은 네 가지 실천이 있습니다. 무엇이 넷 입니까?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입니다. 도반이여, 이와 같은 네 가지 실천 중에 그대는 어떤 실천을 가져서 집착없이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했습니까?"
“도반 목갈라나여, 이와 같은 네 가지 실천이 있습니다. 무엇이 넷 입니까?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 괴롭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느린 실천,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입니다. 도반이여여, 이와 같은 네 가지 실천 중에 즐겁고 완전한 지혜가 빠른 실천이 있습니다. 나는 이 실천을 가져서 집착없이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했습니다.”
sasaṅkhārasuttaṃ (AN 4.169-행(行)을 통해 경)
169.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런 네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어떤 넷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지금·여기에서 행(行)을 통해 완전히 열반에 드는 자이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몸이 무너지고 난 뒤 행을 통해 완전히 열반에 드는 자이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지금·여기에서 행없이 완전히 열반에 드는 자이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몸이 무너지고 난 뒤 행없이 완전히 열반에 드는 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지금·여기에서 행(行)을 통해 완전히 열반에 드는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부정(不淨)을 이어보는(관찰하는) 자로서 몸에 머문다. 음식들을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이고, 온 세상에 대해 기쁨이 없다는 인식을 가지 자이고, 모든 형성된 것들에서 무상을 이어보는 자이고, 또한 죽음의 인식이 안으로 잘 확립되어 있다. 그는 믿음의 힘, 뉘우칠줄 아는 힘, 부끄러워할 줄 아는 힘, 정진의 힘, 지혜의 힘인 다섯 가지 유학의 힘을 의지하여 머문다. 그에게 믿음의 근과 정진의 근과 마음 챙김의 근과 삼매의 근과 지혜의 근인 다섯 가지 근[五根]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는 이런 다섯 가지 근(기능)이 강하기 때문에 지금·여기에서 행(行)을 통해 완전히 열반에 든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사람은 지금·여기에서 행(行)을 통해 완전히 열반에 드는 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몸이 무너지고 난 뒤 행(行)을 통해 완전히 열반에 드는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부정(不淨)을 이어보는(관찰하는) 자로서 몸에 머문다. 음식들을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이고, 온 세상에 대해 기쁨이 없다는 인식을 가지 자이고, 모든 형성된 것들에서 무상을 이어보는 자이고, 또한 죽음의 인식이 안으로 잘 확립되어 있다. 그는 믿음의 힘, 뉘우칠줄 아는 힘, 부끄러워할 줄 아는 힘, 정진의 힘, 지혜의 힘인 다섯 가지 유학의 힘을 의지하여 머문다. 그에게 믿음의 근과 정진의 근과 마음 챙김의 근과 삼매의 근과 지혜의 근인 다섯 가지 근[五根]이 약하게 나타난다. 그는 이런 다섯 가지 근이 약하기 때문에 몸이 무너지고 난 뒤 행을 통해 완전히 열반에 든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사람은 행을 통해 완전히 열반에 드는 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지금·여기에서 행(行) 없이 완전히 열반에 드는 자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제3선(三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믿음의 힘, 뉘우칠줄 아는 힘, 부끄러워할 줄 아는 힘, 정진의 힘, 지혜의 힘인 이런 다섯 가지 유학의 힘을 의지하여 머문다. 그에게 믿음의 근과 정진의 근과 마음 챙김의 근과 삼매의 근과 지혜의 근인 다섯 가지 근[五根]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는 이렇게 다섯 가지 근이 강하기 때문에 지금·여기에서 행(行) 없이 완전히 열반에 든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사람은 지금·여기에서 행(行) 없이 완전히 열반에 드는 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몸이 무너지고 난 뒤 행(行) 없이 완전히 열반에 드는 자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제3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을 지닌 제4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믿음의 힘, 뉘우칠줄 아는 힘, 부끄러워할 줄 아는 힘, 정진의 힘, 지혜의 힘인 이런 다섯 가지 유학의 힘을 의지하여 머문다. 그에게 믿음의 근과 정진의 근과 마음 챙김의 근과 삼매의 근과 지혜의 근인 다섯 가지 근이 약하게 나타난다. 그는 이렇게 다섯 가지 근이 약하기 때문에 몸이 무너지고 난 뒤 행(行) 없이 완전히 열반에 든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사람은 몸이 무너지고 난 뒤 행(行) 없이 완전히 열반에 드는 자이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런 네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yuganaddhasuttaṃ (AN 4.170-쌍 경)
170.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아난자 존자께서 꼬삼비의 고시따 숲에 머물렀다. 거기에서 아난다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도반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대답했다. “아난다 존자이시여" 라고. 아난다 존자는 이와 같이 말하였다.
“도반들이여, 어떤 비구든 비구니이든 나의 면전에서 아라한의 경지를 얻었노라 말하는 이들은 모두다 네 가지 길에 의해서거나 혹은 이들 중 어느 하나에 의해서입니다. 무엇이 넷인가요?
도반들이여, 여기 비구는 사마타를 선행한 후, 위빠사나를 닦습니다.
그가 사마타를 선행한 후 위빠사나를 닦을 때 길이 생깁니다.
그는 그 길을 익히고, 닦고, 많이 행합니다.
그와 같이 그 길을 익히고, 닦고, 많이 행할 때, 여러 족쇄(얽매임)들이 끊어지고 잠재성향들이 소멸됩니다.
*첫 번째로 근접삼매나 본삼매를 일으킨다. 이것은 사마타이다. 그는 삼매와 이러한 삼매와 함께 하는 법에 대해서 무상등으로 관찰한다. 이것은 위빠싸나이다.
*첫 번째 흐름에 나아가는 길이 생긴다는 말이다. 예류도이다.
*염오를 따라 관찰하는 것을 통해서 거듭한다. 해탈하기를 원함에 의해서 거듭 닦는다. 숙고함을 따라 관찰함을 통해서 많이 학습한다.
*유신견. 의심. 잘못된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악처로 인도하는 감각적 쾌락. 악의, 이 다섯 가지 법들은 예류도의 지혜로 버리고, 나머지 거친 감각적 쾌락과 악의는 일래도에서, 미세한 감각적 쾌락과 적의는 불환도에서, 색계에 대한 욕망등 다섯 가지는 아라한도의 지혜로 버린다.
*사견/의심의 잠재적 성향은 첫번째 길에서 버려지고, 감각적 쾌락/적의의 잠재적 성향은 세 번째 길에서, 자만/존재/무명의 잠재적 성향은 네 번째 지혜로 버린다.
다시 도반들이여, 다시 다른 비구가 있어 위빠사나를 선행한 후, 사마타를 닦습니다.
그와 같이 위빠사나를 선행한 후 사마타를 닦을 때, 길이 생깁니다.
그는 그 길을 익히고, 닦고, 많이 행합니다.
그와 같이 그 길을 익히고, 닦고, 많이 행할 때 여러 족쇄들이 끊어지고 잠재적 성향들이 소멸됩니다.
다시 도반들이여, 다시 다른 비구가 있어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습니다.
그와 같이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을 때 길이 생깁니다.
그는 그 길을 익히고, 닦고, 많이 행합니다.
그와 같이 그 길을 익히고, 닦고, 많이 행할 때 여러 족쇄들이 끊어지고, 잠재성향들이 소멸됩니다.
*함께 닦는다(yuganaddham bhaveti)라고 하였다. 그러나 증득에 든 마음으로 형성된 것들을 명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증득에 든 만큼 형성된 것들을 명상하고, 형성된 것들을 명상한 만큼 다시 증득에 든다는 말이다.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초선을 증득한다. 거기서 출정한 뒤 형성된 것들을 명상한다. 형성된 것들을 명상한 뒤 제2선 증득에 든다. 거기서 출정한 뒤 다시 형성된 것들을 명상한다 ... 비상비비상처의 증득에 든다. 거기서 출정한 뒤 다시 형성된 것들을 명상한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을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는다고 한다"(AA.iii.143)
따라서 표상이라는 개념에 집중된 사마타와 법의 찰나성(무상)등을 통찰하는 위빠사나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위빠사나 즉 법의 무상무아고를 통찰하는 것은 이처럼 반드시 사마타에서 출정한 뒤에야 가능하다는 것이 상좌부 불교의 전통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다시 다른 비구가 있어 법에 의한 고양됨을 취하는 마음을 지닙니다.
그러나 그는 그때 그 마음이 내부적으로 멈추거나 가라앉아 한 곳에 고정되어 삼매에 들어 갑니다.
그와 같이 길이 생깁니다. 그는 그 길을 익히고, 닦고, 많이 행합니다.
그와 같이 그 길을 익히고, 닦고, 많이 행할 때 여러 족쇄들이 끊어지고 잠재적 성향들이 소멸됩니다,
*'법에 의한 고양됨을 취하는 마음(dhamm-uddhaccaviggahita)'이란 열 가지 위빠사나의 경계(dasa-vipassana-upakkilesa)라 불리는 들뜸에 의해서 붙들렸다는 의미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이 문장에 대해 무애해도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법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어난 들뜸에 의해서 마음이 고양되게 되는가? 그가 상카라들을 무상이라고 마음을 기울일 때 ①광명이 일어난다. 광명이 법이라고 생각하고 광명으로 전향한다. 그것으로 인한 산만함이 들뜸이다. 그 들뜸에 마음이 붙들려 그들이 일어남을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일어남을 괴로움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일어남을 괴로움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일어남을 무아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상이라고 마음을 기울일 때 ②지혜가 일어난다 ... ③희열이 일어난다 ... ④경안이 일어난다 ... ⑤행복이 일어난다 ... ⑥결심이 일어난다 ... ⑦분발이 일어난다 ... ⑧확립이 일어난다 ... ⑨평온이 일어난다 ... ⑩욕구가 일어난다. 욕구가 법이라고 생각하고 욕구로 전향한다. 그것으로 인한 산만함이 들뜸이다. 그 드뜸에 마음이 붙들려 그들이 일어남을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일어남을 괴로움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일어남을 무아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든 비구니든 나의 면전에서 아라한의 경지를 얻었노라 말하는 이들은 모두 이와 같은 네 가지 길에 의해서이거나 혹은 이들 중 어느 하나에 의해서입니다.”
*사마타를 먼저 닦아야 하는가? 아니면 위빠싸나를 먼저 닦아야 하는가? 아니면 둘 다를 동시에 닦아야 하는가? 라는 의문에 대해서 본 경은 명쾌하게 대답을 주고 있다. 즉 사마타를 먼저 닦을 수도 있고, 위빠싸나를 먼저 닦을 수도 있고, 사마타와 위빠싸나를 함께 닦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각 개인의 문제일 뿐 어느 것을 먼저 닦아야 하는가는 정해진 순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마타와 위빠싸나를 쌍으로 닦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라는 의문에 대해서는 경에서는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주석서에는 그런 경우를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쌍으로 닦는다는 이 말씀에 대해 사마타 즉 본삼매에 든 상태에서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위빠싸나를 동시에 닦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주석서의 설명을 잘 살펴보면 좋겠다. 사마타와 위빠싸나는 그 대상이 완전히 다르다. 사마타는 표상이라는 개념이 그 대상이고, 위빠싸나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이 그 대상이다. 그러므로 한 순간에 서로 다른 대상을 가진 사마타와 위빠싸나는 결코 함께 일어날 수 없다.
제17장 실천 품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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