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앙굿따라 니까야

넷의 모음 - 19. 바라문 품(brāhmaṇa-vagga. AN4.181-190)

실론섬 2014. 7. 4. 07:57

제19장 바라문 품 brāhmaṇa-vagga (AN 4.181-190)

 

yodhājīvasuttaṃ (AN 4.181-무사 경)

181. “비구들이여, 네 가지 요소를 갖춘 무사는 왕을 위한 자격이 있고, 왕에게 쓰일만 하고, 왕의 수족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어떤 네 가지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무사는 장소에(경우에) 능숙하고, 멀리 쏘고, 정확하게 꿰뚫고, 큰 무더기를 부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네 가지 요소를 갖춘 무사는 왕을 위한 자격이 있고, 왕에게 쓰일만 하고, 왕의 수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네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공양을 올려 마땅하며, 시중들어 마땅하며, 보시하여 마땅하며, 합장드려 마땅하며, 세상에 다시없는 복전이다. 어떤 네 가지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장소에(경우에) 능숙하고, 멀리 쏘고, 정확하게 꿰뚫고,큰 무더기를 부순다.

 

*즉 어느 장소에 섰을 때 실수하지 않고 바로 맞힐 수 있을지 무사는 그 장소에 대해 능숙하다는 뜻이다.(AA.iii.160)

 

그러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장소에 능숙한가?

계를 갖추고, 빠띠목카(계목)을 갖추어 머문다. 계목의 단속으로 단속하고, 행동의 영역을 갖추어 작은 허물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보면서 머문다. 받아들인 뒤 학습계목들 위에서 닦는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장소에 능숙하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멀리 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그것이 어떠한 물질적 요소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부의, 혹은 거칠거나 미세한, 혹은 열등하거나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모든 물질적 요소를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본다. ··· 어떠한 감수작용이건 ··· 어떠한 지각작용(인식)이건 ··· 어떠한 형성작용이건 ··· 어떠한 의식작용(식별)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부의, 혹은 거칠거나 미세한, 혹은 열등하거나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모든 의식작용을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바른 지혜에 의해 있는 그대로 본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멀리 쏜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정확하게 꿰뚫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정확하게 꿰뚫는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큰 무더기를 부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큰 무명의 무더기를 부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큰 무더기를 부순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공양을 올려 마땅하며, 시중들어 마땅하며, 보시하여 마땅하며, 합장드려 마땅하며, 세상에 다시없는 복전이다.”

 

pāṭibhogasuttaṃ (AN 4.182-후원자 경)

182. "비구들이여, 네 가지 법에는 사문이거나 바라문이거나 신이거나 마라거나 범천이거나 세상의 어떤 존재로든 아무런 후원자가 없다(누구도 도와주지 못한다). 어떤 네 가지인가?

 

‘늙기 마련인 법을 늙지 말라.’는 것은 사문이거나 바라문이거나 신이거나 마라거나 범천이거나 세상의 어떤 존재로든 아무런 후원자가 없다.
‘병들기 마련인 법을 병들지 말라.’는 것은 사문이거나 바라문이거나 신이거나 마라거나 범천이거나 세상의 어떤 존재로든 아무런 후원자가 없다.
‘죽기 마련인 법을 죽지 말라.’는 것은 사문이거나 바라문이거나 신이거나 마라거나 범천이거나 세상의 어떤 존재로든 아무런 후원자가 없다.
‘이전에 내가 지은 오염원이고 미래에 태어나고 늙고 죽어야 하는 존재로 다시 이끌고 두렵고 과보가 괴로움인 악한 업들에 대해 그 과보가 생기지 말라.’는 것은 사문이거나 바라문이거나 신이거나 마라거나 범천이거나 세상의 어떤 존재로든 아무런 후원자가 없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법에는 사문이거나 바라문이거나 신이거나 마라거나 범천이거나 세상의 어떤 존재로든 아무런 후원자가 없다.”

 
sutasuttam (AN 4.183-들음 경) 
183.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웰루와나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마가다의 대신인 왓사까라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마가다의 대신인 왓사까라 바라문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저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누구든지 ‘나는 이렇게 보았다.’라고 본 것을 말하는 자에게는 잘못은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는 이렇게 들었다.’라고 들은 것을 말하는 자에게도 잘못은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라고 생각한 것을 말하는 자에게도 잘못은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는 이렇게 알았다.’라고 안 것을 말하는 자에게도 잘못은 없습니다.’라고.”
“바라문이여, 나는 ‘본 것은 모두 말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본 것은 모두 말하지 않아야 한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들은 것은 모두 말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들은 것을 모두 말하지 않아야 한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생각한 것은 모두 말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생각한 것은 모두 말하지 않아야 한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안 것은 모두 말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안 것은 모두 말하지 않아야 한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본 것을 말하여 그에게 선하지 않은 법이 증장하고 선한 법이 줄어든다면 그러한 본 것은 말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말합니다.

바라문이여, 그러나 본 것을 말하여 그에게 선하지 않은 법이 줄어들고 선한 법이 증가한다면 그러한 본 것은 말해야 한다고 나는 말합니다.
바라문이여, 들은 것을 말하여 그에게 선하지 않은 법이 증장하고 선한 법이 줄어든다면 그러한 본 것은 말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말합니다.
바라문이여, 그러나 들은 것을 말하여 그에게 선하지 않는 법이 줄어들고 선한 법이 증가한다면 그러한 본 것은 말해야 한다고 나는 말합니다.
바라문이여, 생각한 것을 말하여 그에게 선하지 않은 법이 증장하고 선한 법이 줄어든다면 그러한 본 것은 말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말합니다.
바라문이여, 그러나 생각한 것을 말하여그에게 선하지 않은 법이 줄어들고 선한 법이 증가한다면 그러한 본 것은 말해야 한다고 나는 말합니다.
바라문이여, 안 것을 말하여 그에게 선하지 않은 법이 증장하고 선한 법이 줄어든다면 그러한 안 것은 말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말합니다.
바라문이여, 안 것을 말하여 선하지 않은 법이 줄어들고 선한 법이 증가한다면 그러한 안 것은 말해야 한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러자 마가다의 대신인 왓사까라 바라문은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서 돌아갔다.

 

abhayasuttaṃ (AN 4.184-두려움 없음 경)

184. 그때 자눗소니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자눗소니 바라문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자눗소니 바라문(Janussoni brahmana)은 꼬살라의 유명한 바라문 마을이었던 잇차낭깔라(Icchanankala)라는 곳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초기경에는 여러 곳에서 세존과 함께 나눈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세존께 큰 믿음을 가진 재가신도였다. 주석서에 의하면 자눗소니는 그의 부모가 지어준 개인 이름이 아니라 꼬살라 왕이 지은 궁중제관의 서열을 나타내는 작위명이라고 한다.(MA.i.109)


“고따마 존자시여, 저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서 공포심을 가지지 않는 죽어야 하는 존재는 없다.’라고.”

“바라문이여,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는 죽어야 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라문이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지 않는 죽어야 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라문이여, 어떤 죽어야 하는 존재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대해 공포심을 가집니까?
여기, 바라문이여, 어떤 사람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바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애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갈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열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갈애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가 어떤 심한 병에 걸립니다. 어떤 심한 병에 걸린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랑하는 감각적 쾌락들이 나를 버릴 것이다. 나도 사랑하는 감각적 쾌락들을 버릴 것이다.’라고.

그는 슬퍼하고 힘들어 하고 비탄에 빠지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고 당황합니다. 이것이, 바라문이여,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는 죽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다시,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몸에 대한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바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애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갈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열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갈애애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가 어떤 심한 병에 걸립니다. 어떤 심한 병에 걸린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랑하는 몸이 나를 버릴 것이다. 나도 사랑하는 몸을 버릴 것이다.’라고.

그는 슬퍼하고 힘들어 하고 비탄에 빠지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당황합니다. 이것도, 바라문이여,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대해서 공포심을 가지는 죽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다시,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유익(有益)을 만들지 못했고, 선(善)을 만들지 못했고, 두려움으로부터의 피난처를 만들지 못했고, 악을 행하고, 잔인하고,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가 어떤 심한 병에 걸립니다. 어떤 심한 병에 걸린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나는 유익(有益)을 만들지 못했고, 선(善)을 만들지 못했고, 두려움으로부터의 피난처를 만들지 못했고, 악을 행하고, 잔인하고, 죄악을 저질렀다. 유익(有益)을 만들지 못했고, 선(善)을 만들지 못했고, 두려움으로부터의 피난처를 만들지 못했고, 악을 행하고, 잔인하고, 죄악을 저지른 자들이 가는 곳으로 나는 죽은 뒤에 간다.’라고. 

그는 슬퍼하고 힘들어하고 비탄에 빠지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당황합니다. 이것도, 바라문이여,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는 죽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다시,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불확실해 하고, 의심하고, 정법에 대한 결론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가 어떤 심한 병에 걸립니다. 어떤 심한 병에 걸린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나는 불확실해 하고, 의심하고, 정법에 대한 결론을 얻지 못했다.’라고.  

그는 슬퍼하고 힘들어하고 비탄에 빠지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고 당황합니다. 이것도, 바라문이여,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는 죽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바라문이여,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는 이런 네 가지 죽어야 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라문이여, 어떤 죽어야 하는 존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지 않습니까?
여기, 바라문이여, 어떤 사람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이 없고, 바램에서 벗어나고, 애정에서 벗어나고, 갈증에서 벗어나고, 열기에서 벗어나고, 갈애에서 벗어났습니다. 그가 어떤 심한 병에 걸립니다. 어떤 심한 병에 걸린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감각적 쾌락들이 나를 버릴 것이다. 나도 사랑하는 감각적 쾌락들을 버릴 것이다.’라고. 

그는 슬퍼하지 않고 힘들어하지 않고 비탄에 빠지지 않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지 않고 당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라문이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지 않는 죽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다시,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몸에 대한 탐욕이 없고, 바램에서 벗어나고, 애정에서 벗어나고, 갈증에서 벗어나고, 열기에서 벗어나고, 갈애에서 벗어났습니다. 그가 어떤 심한 병에 걸립니다. 어떤 심한 병에 걸린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몸이 나를 버릴 것이다. 나도 사랑하는 몸을 버릴 것이다.’라고.

그는 슬퍼하지 않고 힘들어하지 않고 비탄에 빠지지 않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지 않고 당황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바라문이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지 않는 죽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다시,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악을 행하지 않고, 난폭하지 않고, 죄악을 저지르지 않고, 유익(有益)을 만들었고, 선(善)을 만들었고, 두려움으로부터의 피난처를 만들었습니다. 그가 어떤 심한 병에 걸립니다. 어떤 심한 병에 걸린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나는 악을 행하지 않고, 난폭하지 않고, 죄악을 저지르지 않고, 유익(有益)을 만들었고, 선(善)을 만들었고 두려움으로부터의 피난처를 만들었다. 악을 행하지 않고, 난폭하지 않고, 죄악을 저지르지 않고, 유익(有益)을 만들었고, 선(善)을 만들었고, 두려움으로부터의 피난처를 만든 자들이 가는 곳으로 나는 죽은 뒤에 간다.’라고.
그는 슬퍼하지 않고 힘들어하지 않고 비탄에 빠지지 않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지 않고 당황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바라문이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지 않는 죽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다시,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불확실해 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정법에 대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가 어떤 심한 병에 걸립니다. 어떤 심한 병에 걸린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나는 불확실해 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정법에 대한 결론을 얻었다.’라고.

그는 슬퍼하지 않고 힘들어하지 않고 비탄에 빠지지 않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지 않고 당황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바라문이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지 않는 죽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바라문이여, 이런 네 가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지 않는 죽어야 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불가사의 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리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하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brāhmaṇasaccasuttaṃ (AN 4.185-바라문의 진실 경)

185.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독수리봉 산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아주 잘 알려진 많은 유행승들이 십삐니까 강변에 있는 유행승들의 사원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은 안나바라, 와라다라, 사꿀루다이 유행승과 아주 잘 알려진 다른 많은 유행승들이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저녁무렵 낮 동안의 홀로 머묾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삽삐니까 강변에 있는 유행승들이 사원으로 가셨다.

 

그때 함께 모인 그 외도 유행승들은 이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바라문의 진실이 있다. 이와 같이 바라문의 진실이 있다.’라고.

그때 세존께서는 그 유행승들에게로 다가가셨다. 가서는 준비된 자리에 앉으셨다. 앉아서 세존께서는 그 유행승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유행승들이여, 무슨 이야기를 위해 지금 여기에 함께 모였습니까? 그대들 간에 끝내지 못한 이야기는 무엇입니까?”라고.

“여기, 고따마 존자시여, 함께 모인 우리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바라문의 진실이 있다. 이와 같이 바라문의 진실이 있다.’라고.”

 

"유행승들이여, 내가 스스로 깨달아 안 뒤에 실현하고 선언한 네 가지 바라문의 진실이 있습니다. 어떤 넷입니까?
여기, 유행승들이여, 바라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생명들은 해침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는 바라문은 진실을 말했습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그는 그것에 의해서 사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바라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고, 남들과 동등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더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거기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생명들을 동정하고 연민하기 위해서 실천합니다(닦습니다).

 

여기, 유행승들이여, 바라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감각적 쾌락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는 바라문은 진실을 말했습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그는 그것에 의해서 사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바라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고, 남들과 동등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더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거기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감각적 쾌락들을 염오하고 사라지고 소멸을 위해 실천합니다.

 

다시, 유행승들이여, 바라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존재는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는 바라문은 진실을 말했습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그는 그것에 의해서 사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바라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고, 남들과 동등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더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거기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존재들을 염오하고 사라지고 소멸을 위해 실천합니다.

 

다시, 유행승들이여, 바라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어떤 것에도 나는 없다. 어디에도 어떤 목적으로도 어떤 것으로도 나의 것은 없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는 바라문은 진실을 말했습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그는 그것에 의해서 사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바라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고, 남들과 동등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더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거기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무소유의 실천을 실천합니다.

이것이, 유행승들이여, 내가 스스로 깨달아 안 뒤에 실현하고 선언한 네 가지 바라문의 진실입니다."

 

ummaggasuttaṃ (AN 4.186-향상의 길 경)

186. 그 무렵 어떤 비구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그 비구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무엇이 세상을 이끌고, 무엇이 세상을 휩씁니까? 생겨난 무엇이 지배합니까?”라고.
“훌륭하고 훌륭하다, 비구여! 그대에게 상서로운 향상의 길이고, 상서로운 계발이고, 유익한 질문이다. 
비구여, 그대는 ‘무엇이 세상을 이끌고, 무엇이 세상을 휩씁니까? 생겨난 무엇이 지배합니까?’라고 물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여, 마음이 세상을 이끌고, 마음이 세상을 휩쓸고, 생겨난 마음의 지배를 받는다.”

 

“잘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그 비구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에 세존에게 질문을 이어갔다.
“세존이시여, ‘많이 배우고 법(경장)을 호지한 자, 많이 배우고 법을 호지한 자’라고 불립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많이 배우고 법을 호지한 자입니까?" 

“훌륭하고 훌륭하다, 비구여! 비구여, 그대에게 상서러운 향상의 길이고, 상서러운 계발이고, 유익한 질문이다. 비구여, 그대는 ‘세존이시여, ‘많이 배우고 법(경장)을 호지한 자, 많이 배우고 법을 호지한 자’라고 불립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많이 배우고 법을 호지한 자입니까?’라고 물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여, 나는 많은 법을 설하였다. 그것은 경(經), 응송(應頌), 상세한 설명[記別, 授記], 게송(偈頌), 감흥어(感興語), 여시어(如是語), 본생담(本生譚), 미증유법(未曾有法), 문답[方等]이다. 비구여, 비록 네 구절로 된 게송[사구게.四句偈]이라도 그 의미를 알고 법을 안 뒤에 열반으로 이끄는 법을 닦으면 많이 배우고 법(경장)을 호지한 자라고 부르기에 충분하다.” 


“잘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그 비구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세존에게 질문을 이어갔다.
“세존이시여, ‘위대한 지혜를 가진 잘 배운 자,위대한 지혜를 가진 잘 배운 자’라고 불립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위대한 지혜를 잘 배운 자입니까?”

“훌륭하고 훌륭하다, 비구여! 비구여, 그대에게 상서러운 향상의 길이고, 상서러운 계발이고, 유익한 질문이다. 비구여, 그대는 ‘위대한 지혜를 가진 잘 배운 자, 위대한 지혜를 가진 잘 배운 자’라고 불립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위대한 지혜를 가진 잘 배운 자입니까?’라고 물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기, 비구여, 비구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베우고, 지혜로써 의미를 꿰뚫어 본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배우고, 지혜로써 의미를 꿰뚫어 본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배우고, 지혜로써 의미를 꿰뚫어 본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배우고, 지혜로써 그 의미를 꿰뚫어 본다. 이렇게, 비구여, 위대한 지혜를 가진 잘 배운 자이다.”

 

“잘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그 비구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세존에게 질문을 이어갔다.
“세존이시여, ‘넓은 지혜를 가진 현명한 자, 넓은 지혜를 가진 현명한 자’라고 불립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넓은 지혜를 가진 현명한 자입니까?”

“훌륭하고 훌륭하다, 비구여! 비구여, 그대에게 상서러운 향상의 길이고, 상서러운 계발이고, 유익한 질문이다. 비구여, 그대는 세존이시여, ‘넓은 지혜를 가진 현명한 자, 넓은 지혜를 가진 현명한 자’라고 불립니다. 어떻게 넓은 지혜를 가진 현명한 자입니까?’라고 물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기, 비구여, 넓은 지혜를 가진 현명한 자는 자신을 해치는 의도도 하지 않고, 남을 해치는 듸도도 하지 않고, 둘 모두를 해치는 의도도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과 둘 모두의 이익과 세상의 이익을 의도한다. 이렇게, 비구여, 넓은 지혜를 가진 현명한 자이다.”

 

vassakārasuttam (AN 4.187-왓사까라 경)  
187.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웰루와나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마가다의 대신인 왓사까라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마가다의 대신인 왓사까라 바라문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 거룩하지 못한 사람을 ‘이 사람은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알게 됩니까?”

“바라문이여,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 거룩하지 못한 사람을 ‘이 사람은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안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불가능한 일입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 거룩한 사람을 ‘이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다.’라고 알게 됩니까?”
“바라문이여,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 거룩한 사람을 ‘이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다.’라고 안다는 것도 있을 수 없고 불가능한 일입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거룩한 사람은 거룩한 사람을 ‘이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다.’라고 알게 됩니까?”

“바라문이여, 거룩한 사람이 거룩한 사람을 ‘이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다.’라고 아는 것은 가능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거룩한 사람은 거룩하지 못한 사람을 ‘이 사람은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알게 됩니까?”
“바라문이여, 거룩한 사람이 거룩하지 못한 사람을 ‘이 사람은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아는 것은 가능합니다.”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참으로 놀랍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고따마 존자께서는 참으로 이런 훌륭한 가르침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라문이여,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 거룩하지 못한 사람을 ’이 사람은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안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라문이여,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 거룩한 사람을 ‘이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다.’라고 안다는 것도 있을 수 없고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라문이여, 거룩한 사람이 거룩한 사람을 ‘이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다.’라고 아는 것은 가능합니다.

바라문이여, 거룩한 사람은 거룩하지 못한 사람을 ‘이 사람은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아는 것은 가능합니다.‘라고.

고따마 존자시여, 한번은 또데야 바라문의 회중에 남을 비난하는 말이 퍼졌습니다.

‘엘레야 왕은 참으로 바보이다. 그는 사문 라마뿟따에게 청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고 사문 라마뿟따에게 존경을 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고 합장하고 공경하는 등 최상의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야마까, 목갈라, 욱가 나인다끼, 간답바, 악기웻사와 같은 엘레야 왕의 측근들도 참으로 바보들이다. 그들도 사문 라마뿟따에게 청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들도 사문 라마뿟따에게 존경을 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고 합장하고 공경하는 등 최상의 경의를 표한다.’라고.
그러나, 바라문이여, 또데야 바라문은 자신의 회중에 앉아서 이런 방법으로 그의 회중을 진정시켰습니다.

‘존자들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현명한 엘레야 왕은 현자들이 해야 할 일과 특별한 주의를 가지고 해야 할 일과 특별한 주의를 가지고 해야 할 말에 대해 그 이익을 깊이 따져보는 자들보다 더 깊이 그 이익을 따져보는 자인가?’라고.
그러자 그의 회중이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존자여, 그러합니다. 현명한 엘레야 왕은 현자들이 해야 할 일과 특별한 주의를 가지고 해야 할 말에 특별한 주의를 가지고 해야 할 일과 해야 할 말에 대해 그 이익을 따져보는 자들보다 더 깊이 그 이익을 따져보는 자입니다. 존자여, 사문 라마뿟따는 현명한 엘레야 왕보다 더 현명하고 현자들이 해야 할 일과 특별한 주의를 가지고 해야 할 일과 해야 할 말과 특별한 주의를 가지고 해야 할 말에 대해 그 이익을깊이 따져보는 자들보다 더 깊이 그 이익을 따져보는 자입니다. 그래서 엘레야 왕은 사문 라마뿟따에게 청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고 사문 라마뿟따에게 존경을 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고 합장하고 공경하는 등 최상의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존자들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야마까, 목갈라, 욱가, 나인다끼, 간답바, 악기웻사와 같은 엘레야 왕의 현명한 측근들은 해야 할 일과 특별한 주의를 가지고 해야 할 일과 해야 할 말과 특별한 주의를 가지고 해야 할 말에 대해 그 이익을 따져보는 자들보다 더 깊이 그 이익을 따져보는 자들인가?'
‘존자여, 그러합니다. 야마까, 목갈라, 욱가, 나인다끼, 간답바, 악기웻사와 같은 엘레야 왕의 현명한 측근들은 해야 할 일과 특별한 주의를 가지고 해야 할 일과 해야 할 말과 특별한 주의를 가지고 해야 할 말에 대해 그 이익을 깊이 따져보는 자들보다 더 깊이 그 이익을 따져보는 자들입니다. 존자여, 사문 라마뿟따는 엘레야 왕의 현명한 측근들보다 더 현명하고 해야 할 일과 특별한 주의를 가지고 해야 할 일과 해야 할 말과 특별한 주의를 가지고 해야 할 말에 대해 그 이익을 깊이 따져보는 자들보다 더 깊이 그 이익을 따져보는 자입니다. 그래서 야마까, 목갈라, 욱가, 나인다끼, 간답바, 악기웻사와 같은 엘리야 왕의 측근들도 사문 라마뿟따에게 청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고 사문 라마뿟따에게 존경을 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고 합장하고 공경하는 등 최상의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또데야 바라문은 이와 같이 그의 회중을 진정시켰습니다.”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참으로 놀랍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고따마 존자께서는 참으로 이런 훌륭한 가르침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라문이여,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 거룩하지 못한 사람을 ’이 사람은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안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라문이여,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 거룩한 사람을 ‘이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다.’라고 안다는 것도 있을 수 없고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라문이여, 거룩한 사람이 거룩한 사람을 ‘이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다.’라고 아는 것은 가능합니다.
바라문이여, 거룩한 사람은 거룩하지 못한 사람을 ‘이 사람은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아는 것은 가능합니다.‘라고.
세존이시여, 이제 저희는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저는 바쁘고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바라문이여, 지금이 적당한 시간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자 마가다의 대신 왓사까라 바라문은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갔다.

 
upakasuttam (AN4.188-우빠까 경)  
188.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독수리봉 산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우빠까 만디까뿟따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우빠까 만디까뿟따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주석서에 의하면 우빠까 만디까뿟따(Upaka Mandikaputta) 혹은 만디까의 아들 우빠까는 데와닷따의 추종자였다고 한다. 그는 세존이 자신을 비난 하는지 보기 위해서 세존께 왔다고 하기도 하고, 데와닷따가 지옥에 떨어졌다는 소문을 듣고 세존을 비난하기 위해서 세존께 왔다고 하기도 한다.(AA.iii.166)

 

“고따마 존자시여, 저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누구든지 남을 비난하면 남을 비난할 땐 모든 곳에서 선한 법을 일으킬 수 없고, 선한 법을 일으키지 못할 때 그는 비난받고 책망 받는다.’라고.”

“우빠까여, 만일 누구든지 남을 비난하면 남을 비난할 땐 모든 곳에서 선한 법을 일으킬 수 없고, 선한 법을 일으키지 못할 때 그는 비난받고 책망 받는다고 한다면 그대야말로 남을 비난하고 있고, 남을 비난하는 그대는 선한 법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선한 법을 일으키지 못할 때 그대도 비난받고 책망 받습니다.”

“세존이시여, 마치 물 위로 솟아오르는 물고기를 큰 그물로 낚아채는 것 같이 세존께서는 위로 고개를 내민 저를 세존의 큰 말씀의 그물로 낚아채 버렸습니다.”
“우빠까여, ‘이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나는 공언하였습니다. 그렇게 공언할 때 셀 수 없이 많은 단어와 셀 수 없이 많은 문장과 셀 수 없이 많은 여래의 설법으로 ‘이러한 이유로 이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공언하였습니다.

우빠까여, ‘이 선하지 않은 것은 버려야 한다.’라고 나는 공언하였습니다. 그렇게 공언할 때 셀 수 없이 많은 단어와 셀 수 없이 많은 문장과 셀 수 없이 많은 여래의 설법으로 ‘이러한 이유로 이 선하지 않은 것은 버려야 한다.’라고 공언하였습니다.
우빠까여, ‘이것은 선한 것이다.’라고 나는 공언하였습니다. 그렇게 공언할 때 셀 수 없이 많은 단어와 셀 수 없이 많은 문장과 셀 수 없이 많은 여래의 설법으로 ‘이러한 이유로 이것은 선한 것이다.’라고 공언하였습니다.

우빠까여, ‘이 선한 것은 닦아야 한다.’라고 나는 공언하였습니다. 그렇게 공언할 때 셀 수 없는 단어와 셀 수 없는 문장과 셀 수 없는 여래의 설법으로 ‘이러한 이유로 이 선한 것은 닦아야 한다.’라고 공언하였습니다.”

그러자 우빠까 만디까뿟따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공경의 의미로 오른쪽으로 돌아 그곳을 떠난 뒤에 마가다의 왕 아자따삿뚜 웨데히뿟따에게 갔다. 가서는 세존과 더불어 있었던 대화를 모두 마가다의 왕 아자따삿뚜 웨데히뿟따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마가다의 왕 아자따삿뚜 웨데히뿟따는 화가 나고 마음이 언짢아서 우빠까 만디까뿟따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이 무뢰하기 그지없는 소금장수 아들놈이 참으로 수다스럽고 뻔뻔하여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 대든 듯하구나. 저쪽으로 꺼져버리라. 참으로 재수 없구나. 우빠까여, 너는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도 말라.”

 

sacchikaraṇīyasuttaṃ (AN 4.189-실현해야 하는 것 경)

189. “비구들이여, 네 가지 실현해야 할 법이 있다. 어떤 넷인가?

비구들이여, 몸으로 실현해야 하는 법이 있다. 비구들이여, 마음 챙김으로 실현해야 하는 법이 있다. 비구들이여, 눈으로 실현해야 하는 법이 있다. 비구들이여, 지혜로 실현해야 하는 법이 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몸으로 실현해야 하는 법인가? 

비구들이여, 여덟 가지 해탈[팔해탈.八解脫]이 몸으로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마음 챙김으로 실현해야 하는 법인가? 

비구들이여, 이전의 존재 상태(전생의 거주처)가 마음 챙김으로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눈으로 실현해야 하는 법인가? 

비구들이여, 중생들의 죽고 다시 태어남이 눈으로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지혜로 실현해야 하는 법인가? 

비구들이여, 번뇌들의 소멸이 지혜로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실현해야 할 법이 있다.”

 

uposathasuttaṃ (AN 4.190-포살(布薩) 경)

190.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동쪽 숲에 있는 미가라마따 강당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포살일에 비구 승가에 둘러싸여서 앉아 계셨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침묵하고 또 침묵하는 비구 승가를 바라보면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청정하고 닦음에 마음이 확고한 이 비구 승가, 이 모임은 잡담을 하지 않고, 잡담에서 벗어났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 승가, 이 모임은 세상에서 만나기 어렵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승가, 이 모임은 공양을 올려 마땅하고, 시중들어 마땅하고, 보시하여 마땅하고, 합장드려 마땅하며, 이 세상에 다시 없는 복전이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 승가, 이 모임은 작은 보시에는 큰 결실이 있고, 큰 보시에는 더 큰 결실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 승가, 이 모임을 만나기 위해서는 도시락을 어깨에 메고 여러 요자나의 거리라도 갈만하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 승가에는 신의 경지를 성취하여 머무는 비구들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승가에는 범천의 경지를 성취하여 머무는 비구들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 승가에는 흔들리지 않는 경지를 성취하여 머무는 비구들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 승가에는 성스러운 경지를(성자의 경지를) 성취하여 머무는 비구들이 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신의 경지를 성취한 비구가 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라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문다.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신의 경지를 성취한 비구가 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범천의 경지를 성취한 비구가 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자애를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문다.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 없고 헤치고자 함이 없는, 자애를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문다. ··· 연민을 수반하는 ··· 기뻐함을 수반하는 ··· 평정을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문다.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 없고 헤치고자 함이 없는, 평정을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문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범천의 경지를 성취한 비구가 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흔들리지 않는 경지를 성취한 비구가 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문다.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 머문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흔들리지 않는 경지를 성취한 비구가 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성스러운 경지를 성취한 비구가 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경지를 성취한 비구가 된다.”

 


제19장 바라문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