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장 대품에는 붓다의 10대 제자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존자가 불교로 개종하게 된 이야기가 있다.
두 사람은 그 당시 육사외도중의 하나였던 산자야 벨랏티풋따(Sanjaya bela ipputta)의 제자였다. 산자야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서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과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 판단 중지를 주장하는 형이상학적 회의론(懷疑論)을 주장하며 사리뿟다와 목갈라나등을 포함한 250여명의 제자들을 거느릴 정도로 세력이 상당하였다. 산자야의 제자였으며 절친한 친구사이었던 사리뿟타와 목갈라나는 서로 "처음으로 불사(不死)의 경지를 경험하거나 깨치면 알리자"라고 굳게 약속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사리뿟타는 붓다의 제자중의 한 사람이 마을에서 탁발을 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끌렸다. 그는 다섯 비구중의 한 사람인 앗사지 존자였는데 그 모습의 아름다움과 청정함, 단정함과 위엄에 놀라고 깊은 인상을 받은 사리뿟타는 저 수행승이야말로 존경할 만한 출가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리뿟타는 앗사지 존자가 탁발을 끝내기를 기다려 말을 걸었다.
[당신은 누구 밑에서 출가를 하고, 누구를 스승으로 받들고 있습니까?]
[나는 샤카족에서 출가한 수행승인 세존을 우러러 출가를 했으며, 세존을 스승으로 모시고 세존의 가르침을 받들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어떤 법을 설하십니까?]
[나는 출가한지 얼마 안되고 배움이 부족하여 그 법을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괜챦습니다. 나는 다만 가르침의 본질을 알고자 하니까요.]
앗사지는 다음과 같이 붓다의 가르침을 전해주었다.
[제법(諸法)은 인(因)에서 생긴다. 여래는 그 인(因)을 설하신다. 그리고 그것들의(제법)의 멸(滅)도 설하신다. 위대한 수행승(붓다)은 이같이 설하신다.]
이 말을 듣자 사리뿟타는 청정한 진리에 눈떳다. "무릇 모든 생겨난 존재는 다 멸해 갈 존재이구나"하고. 그래서는 사리뿟타는 앗사지 존자에게 말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가르침입니다. 당신들은 모두 근심없는 경지에 도달하셨군요. 그것은 오랜 기간을 통해 애쓴다 해도 쉽게 얻어질 경지가 아닙니다.]
사리뿟타는 목갈라나를 찾아가 앗사지 존자와의 대화를 전해주었다. 목갈라나도 사리뿟타와 마찬가지로 청정한 진리에 눈을 떳다. 기쁨에 넘친 두 사람은 스승이었던 산자야를 떠나 세존을 만나러 갔다. 산자야가 거느리고 있던 250여명의 제자들도 모두다 두 사람을 따라갔다. 산자야는 분한 나머지 입으로 피를 토했다.
세존께서는 두 사람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그 두 사람이 붓다의 제자중 쌍벽(雙璧)이 될 것임을 예언했다. 두 사람은 세존을 친견하고 출가를 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을 따라서 마가다국의 많은 양가 자제들이 출가를 하였다.
이상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제법(諸法)은 인(因)에서 생기고 멸한다." 라는 진리와 이러한 붓다의 가르침은 앗사지 존자의 행동거지를 청정하고 위엄있게 하여 그것이 사리뿟타와 목갈라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붓다의 제자가 되게끔 작용을 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이 인(因)에서 생겼고 그것이 멸(滅)한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우리들의 주위에서 여러 가지 사물들이 생겨났다가 멸하여 가는 것을 보고 있다. 그것들은 우리와 관계가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간에 우리들의 눈앞을 지나쳐 간다. 그 속에서 우리들은 자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을 만났을 때 비로소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하여 생겨났는지를 묻는다. 그러나 그 발생원인에 대하여는 이렇게 관심을 가지면서도 그것이 언젠가는 소멸할 것임을 생각하지 않는다. 생겨난 것은 반드시 없어질 때가 오며 또 생겨나는 것은 원인이 있었듯이 이윽고 원인이 있어서 소멸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만다.
일체는 생겨나고 소멸한다. 그리고 생(生)에는 인(因)이 있고, 멸(滅)에도 인(因)이 있다. 이러한 상식적이요 당연하기 짝이 없는 진리를 불교는 되풀이해 주장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연기법과 연결되어 일체의 인과관계(因果關係)를 복잡한 상의관계(相依關係)로 확대된다. 그리고 우리들이 조금만 진실되게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기만 해도 일상적 세계속에 깃들어 있는 인(因)과 연(緣)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진리위에 우리의 생존이 있고, 하나하나의 행위가 있고, 존재가 있음을 뼈저리게 느낌으로써 비로소 불교의 진리에 한발더 나아가게 된다.
붓다께서 네란자라 강가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은 것은 연기(緣起.paticcasamuppada)이다.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있다. 이것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없다.이것이 멸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멸한다..." 이 진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한마디로 한다면 "조건에 의한 발생"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일체의 것은 어느 하나도 자체 안에 자기발생의 원인을 지니고 있는 것은 없으며, 누구(이를테면 절대자, 조물주)에 의해 창조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가 절대자나 신을 부정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생멸(生滅)을 연기법으로 관찰하기 때문이다.
흔히 불자라는 사람들이 남 탓만 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인드라망처럼 상호 얽혀있는 인(因)과 연(緣)의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을 성찰하고 되돌아보질 않고 연기의 가르침을 애써 무시하고 비불교적인 발언이나 주장을 서슴없이 하곤한다. 하지만 불교는 인과(因果)이다. 붓다께서 45년동안 중생들에게 일러주신 것도 바로 인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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